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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9/03/07 15:56:33 |
Name |
한니발 |
Subject |
(09)So1 <3> |
운영자주: 초 장문이었던 본문이 얼마전 있었던 서버 이전 이후로 맨 뒤가 잘려버렸습니다. 사과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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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상대와의 만남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때는 분명히 여러모로 자신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팀의 운명을 건 단 한 번의 결투.
직전에 그는 가까스로 상대의 중견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팀의 대장으로서, 그가 바로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상대에게 남은 것 역시 대장 한 사람 뿐, 이제는 대장과 대장의 대결이었다.
단 한 번의 결투에서 모든 것이 결정날 것이다.
거기서 적은 모습을 드러냈다.
백전연마(百戰硏磨)의 트릭스터 -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적들을 기만(欺瞞)하고 또 기만해온 왕좌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전야(前夜)
박지호와 이병민의 마지막 일전 - 테란의 첫 패주이기도 했던 그 값진 승리 이래 박지호는 모든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프로리그의 P.O.S.는 더블 헤더를 치르는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박지호만은 한 번도 출전하지 않았다.
프로게이머 박지호는 처음으로 우승권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다섯 번에 달하는 결승 경험을 가진 베테랑 임요환. 당시의 815는 테란맵으로 굳어지는 분위기였고, 네오 포르테에서 임요환의 성적은 4승 1패, 게다가 R-POINT는 제국령(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로열로드를 눈앞에 두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박지호도 박지호지만 프로게임팀으로서 어려운 시절을 지내온 P.O.S.다. 박지호에게 있어서 프로게이머로서 첫 영광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도 간절했을 것이다.
박지호는 모든 기력을 온전히 So1에 부을 기회를 얻었다.
임요환의 연습은 19일, 그러니까 21일 준결승을 이틀 남기고 시작되었다. T1의 프로리그 시스템은 설령 임요환이라고 할지라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 임요환은 19일 프로리그까지는 프로리그 연습에 매진한 후에야 준결승 경기를 연습할 시간을 할당받았다.
그러나 박지호가 임요환에게 연습 시간으로 앞섰듯 임요환이 박지호에 비하여 절대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연습 상대의 문제였다. P.O.S.가 갖춘 테란은 염보성과 강구열이었는데 그나마 염보성은 당시 재학 중이었으므로 방과 후에나 연습이 가능했다. 박지호는 아마추어 테란을 초빙하는 등의 수까지 동원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반면 선수진이 풍부한 T1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정성태, 권오혁과 같은 연습생들은 물론이며, 오리온 이래의 오랜 팀 동료인 박용욱과 김성제는 자신들 역시 듀얼 토너먼트를 비롯한 개인전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임요환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또 하나 눈여겨 볼만한 것은 참모전(參謀戰)이었다. 당시 최고의 코치로 평가받았던 것은 두 사람인데, 바로 T1의 서형석 코치와 P.O.S.의 박용운 코치였다. 이 두 사람이 각각 임요환, 박지호와 함께하면서 4강전을 치르게 되었으니, 사실상 최고의 참모를 가리는 게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있어서도 팀의 방침이 한쪽에 페널티를 부여했다. 철저한 프로리그 중심의 운영을 하는 T1의 특징 상, 서형석 코치는 임요환에게 보다 안정적인 운영을 주문했다. 임요환에게도 자신에게도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오히려 전략을 들고 나오는 것은 박지호일지도 모른다 - 본래 P.O.S에 몸담고 있었던 서형석 코치였기에, 그들 팀의 색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반면 박용운 코치는 두문불출하는 박지호와 함께 철저하게 So1 준결승에 집중하여 박지호의 칼날을 한계까지 가다듬었다. 전략의 대명사가 가지고 나올 혹시 모를 기습의 칼을 대비하여 파헤치고 또 파헤쳤다. 박용운 또한 한 번은 프로게이머의 꿈을 꾸었었다. 그러한 그가, 세대의 끝에 등장한 이래 아직까지 전장에 홀로 남아 왕좌에 도전하는 임요환을 어떤 마음으로 상대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야는 한껏 달아올랐다. 양측이 갖춘 조건은 호각이었으며 많은 변수가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맵과 기세, 그리고 지금까지 준결승에서 보여온 임요환의 강한 면모를 들어 임요환의 강세를 점쳤다.
마침내 21일.
박지호는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충만한 자신감으로 4강에 임했다.
다 자신있어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
- 孫子, 「손자병법」
첫 번째 전장은 815였다.
So1 815라고 하면, 종족간 밸런스를 제1 목표로 삼는 맵 제작 풍조에서 독립(815)하여, 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게임 양상을 이끌어내겠다는 OMAP의 역작이다. 일부 유닛만 통과할 수 있는 좁은 입구 - 지금껏 시도된 바 없는 초유의 요소가 가미된 신맵. 그리고 바로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이 맵에서 임요환의 강세를 점치는 이유였다.
임요환은 자타가 공인하는 신맵의 강자다. 아무런 답도 없는 제로에서 시작할 때 그 독창성, 창조자로서의 재능이 최대로 발현한다. 따지고 보면 그 등장부터가 그랬지 않은가. 프로토스의 리버드랍을 테란에 응용한다는 대담무쌍한 발상이 그의 패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박지호는, 또한 프로토스는, 이 815에서의 답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 답을 낸 송병구는 불의의 일격으로 전장에서 물러났지만 신 3대의 손에서 핀 수많은 센세이션과 발견들은 프로토스의 계율처럼 공유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박지호는 7시 지역에 빠른 스타팅 멀티를 가져가면서 게임을 시작했다.
그 어떤 기략, 그 어떤 암기로 찌르고 들어올지라도 산처럼 버티고 서서 막아낼 각오로.
과거 팀리그, T1과 PLUS의 대장전.
임요환과 박지호의 첫 승부.
이 게임은 임요환식 기만전술의 가장 화려한 성공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루나의 언덕 입구를 빈틈없이 틀어막고 있는 박지호의 드라군들. 갈라진 중앙을 가로지르는 단 한 대의 탱크, 단 한 대의 SCV.
그 한 대의 탱크가 박지호의 드라군을 통, 치고는 물러난다. 탱크의 뒤를 덮은 것은 전장의 안개. 박지호는 그 안개 속에서 건설 중인 조이기 라인의 허상이라도 본 듯 드라군 전부대를 움직여 달아나는 한 대의 탱크를 뒤쫓고, 임요환은 그 틈을 타 세 기의 벌쳐를 난입시켜 혁혁한 전공을 올린다. 이후 임요환은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열여섯 개에 달하는 팩토리를 건설하고, 단 두 개의 머신샵만을 단 채 늑대 같은 벌쳐 무리로 박지호를 제압한다.
이 게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벌쳐 난입 장면에서 카메라는 박지호를 비추고, 박지호는 당황한 듯 무심코 혀를 내밀기까지 한다. 관람석에서는 소리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임요환이 완전히 지배한 게임. 게다가 자신이 허둥대며 보인 추태. 박지호 정도 되는 선수가, 얼마나 오랫동안 명예 회복의 기회를 노려왔을까.
노회한 왕의 교묘한 책략을 무너뜨릴 기회를, 얼마나 노려왔을까.
틀림없이 임요환보다 월등히 많은 연습시간을 할당받았고, 날빌으로 앞서 압도해버리는 길도 있었을 터. 그렇지만 박지호는 임요환이 걸어올 그 어떠한 형태의 일합(一合)도 받아주겠다는 듯, 그 무엇이라도 ‘다 자신 있는’ 태세로 맞섰다.
임요환은 사양 없이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의 첫 한 수는 역시나 등 뒤를 노리는 암기. 임요환은 재빠르게 세 개의 스타포트를 건설하고, 대규모의 레이쓰를 몰아 박지호의 일곱 시를 급습해버린다. 박지호에게는 레이쓰를 볼 옵저버가 없었다. 패기만만한 박지호의 임전태세를 비웃기라도 하듯 일곱 시 프로토스 기지는 순식간에 궤멸 위기로 몰린다. 일곱 시에는 스타게이트와 플릭 비콘을 비롯한 차후의 거점도 위치한 상황. 임요환이 던진 커다란 승부수 앞에, 박지호는 다시 궁지로 몰리는 듯 했다.
그러나 박지호도 이미 그 시절의 어설픈 ‘꼬라박’은 아니었다.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커세어들을 생산한 뒤 커세어 자신들끼리 공격하게 한다. 커세어의 스플래쉬를 이용한 궁여지책에 가까운 대책이었건만 지나치게 날을 세운 암검인 탓일까. 레이쓰들은 그대로 스러지고, 임요환은 골리앗 드랍 체제로 방향을 튼다.
진흙탕 싸움이 뒤를 이었다.
임요환은 대규모의 드랍쉽에 골리앗을 태워 맵을 누빔으로써, 영웅을 패퇴시켰던 그 고속의 연쇄 테러를 재현하려 했다. 레이쓰 덕분에 초반의 분위기는 임요환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박지호는 차근차근 캐리어를 모으고 템플러와 질럿을 생산했다. 그러면서도 맵 전체로 뻗어 나아갔다. 6시로, 5시로, 마침내 임요환이 7시를 밀어냈을 때도 이미 박지호에게는 충분한 자원이 있었다. 또한 캐리어가 있었다.
드랍되는 골리앗을 스톰과 질럿으로 방어하면서 캐리어는 집요하게 공격을 전담했다. 테란의 자원줄을 한바탕 물어뜯은 뒤에는 골리앗의 추격을 피해 안전하게 물러났다. 들이댈 때는 들이대고, 물러날 때는 물러날 줄 아는 세련됨 또한 이 So1이 키워낸 프로토스의 신성(新星) 지휘관이 갖추게 된 미덕이었다.
그렇다면 그에 대비되는 집요함이야말로 임요환의 미덕일지도 모른다. 임요환은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박지호의 기지를 쫓으며 부수고 또 부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T1의 3대 박용욱이 주창한 815의 도망자 프로토스, 그에 의하면 그 임요환의 집요함이야말로 승부는 물론 임요환의 멘탈리티마저 깎아내려갈 것이었다.
- 이미 승부가 기운 경기 후반.
임요환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뉴클리어 사일로를 건설한다. 그를 이용하여 승리할 최후의 가능성을 노렸던 걸까. 아니면 패배를 예감하고, 첫 경기에서 기염만은 박지호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마지막 발악을 하려고 했던 걸까.
어쨌거나 박지호는 사일로의 커맨드조차 부숴버리고 질럿과 템플러, 캐리어를 몰아 임요환의 앞마당으로 승리의 행군을 감행했다.
임요환은 마지막 남은 세 기의 드랍쉽을 몰고 이를 방어하러 달려왔다.
이에, 셔틀에서 내린 몇 기의 하이템플러가 손을 들었고, 드랍쉽에서 내린 골리앗들의 머리 위로 스톰을 찍어 내렸다.
골리앗들은 스톰을 온전히 뒤집어쓰면서도 캐리어를 쫓았다.
그 처절한 발버둥을 코앞에 두고, 질럿들은 움직이지도 않은 채 가만히 서서 그 장면을 응시했다.
다섯 기.
네 기.
세 기
두 기…….
…….
결국 그조차도 닿지 못했다.
스피릿 프로토스 박지호의 손에, 노왕(老王)의 기략은 산산이 조각났다.
멈추지 말고 달려!
「공격, 아니면 맹공격.」
- C. 요한센, 「롬멜 :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
1경기에서 임요환이 무너지자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압도적이었던 임요환 우세의 예측은 임요환이 815를 잡는다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한 번의 패배도 없이 4강까지 질주했으며, 그 첫 전장은 신맵. 미지(未知)야 말로 그 임요환에게 있어서는 가호(加護)! 그런데 박지호가 그것을 무너뜨렸다. 황제 임요환이 빼든 레이쓰 급습의 기략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받아내었다. 임요환의 기략, 그 예리한 비검을 자신의 육중한 장창으로 완전히 분쇄했다.
뿐만 아니라 박지호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기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경기를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했다.
2경기는 포르테.
여기서도 임요환은 패배를 기록한 바 없다. 대 프로토스 3전 3승, 이번 시즌 임요환의 비상에 있어서는 순풍(順風)이 되어주었던 또 하나의 전장.
그런데 임요환은, 바람을 타기를 거부하고 다시금 방패를 들고 몸을 웅크렸다.
임요환이다. 당시에도 이미 데뷔 7년. 게임의 흐름, 다전의 흐름을 그보다 잘 느낄 수 있는 선수가 있었을까. 박지호의 치솟는 기세에 정면으로 맞붙으면 위험할 것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본래 전투를 즐기는 박지호가, 창칼의 부딪침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기세를 올릴 것을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임요환은 방패 뒤로 숨어 호흡을 가다듬었다. 입구를 막은 상태의 원팩토리 더블을 선택한 것이다. 이번에는 일체의 기략을 배제한 채 그가 FD라는 보도를 통해 쌓아올린 최연성식(式) 대 프로토스 기본기를 전개할 생각이었을까. 이에 박지호는 몇 번 막힌 입구를 두드려 보다가 잠자코 물러난 채 멀티를 따라간다.
임요환의 오판이었다.
박지호의 치솟는 기세를 읽어낸 것까지는 정확했다. 그러나 그 대응이 안일했다. 박지호의 질주는 방패 정도로 막아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임요환에게 있어서 순풍인 이 전장은 박지호에게 있어서는 역풍이다. 그러나 박지호는 역풍을 안고 그대로 내달려, 임요환의 방패를 짓밟고 뛰어올랐다.
벌쳐와 탱크를 통해 정면에 성벽을 쌓아올린 임요환을 비웃기라도 하듯, 속도 업그레이드를 끝마친 쾌속의 셔틀이 임요환의 기지로 파고들었다.
본진과 앞마당을 오가며 사방에서 작렬하는 스캐럽의 굉음.
미끼 이상의 역할을 해내는 질럿과 드라군 특공대의 맹습.
방패의 뒤에서 유린당했음에도 FD의 매뉴얼대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서도 세 번째 멀티로 기어 나오는 임요환을 사방에서 덮치는 드라군과 질럿, 템플러. 이것이야말로, 신생 박지호의 프로토스 스피릿이었다. 지금껏 짓눌린 프로토스의 한(恨)을 토해내는 듯한 한 방이었다.
게다가 다음 경기 R.O.V -.
이번 4강 1주차, 박지호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점쳐진 전장. 박지호의 질주가 멈출 기미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은 주훈 감독이 걸어 나왔다.
2 : 0의 상황. 다음 맵은 가장 불리한 전장.
이미 비장의 카드는 밑천을 드러냈고 패배에 대한 변명거리는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다. 4강까지 왔으면 충분히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감독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준비한대로 최선을 다하여 후회 없는 게임을 하라는 것 정도일까.
그런데 주훈 감독은 임요환에게 준비한 모든 것을 버리라고 주문했다.
7년에 걸쳐 그를 전장에 남게 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상을 노릴 수 있게 만든, 완연한 어둠 속에서 승리를 쫓는 후각.
그것만을 믿으라고 주문했다.
제 3경기 R.O.V.
주훈 감독의 말대로 임요환은 결코 준비되었을 리 없는 카드를 빼들었다. 거대한 스테이지의 바로 아래. 두 번째 층계에 두 개의 전진배럭을 건설한다.
- 그리고 박지호, 프로브 정찰로 간단히 그것을 파악한다.
다른 선수라면 할 리가 없다. 어쩌면 마지막 4강 경기가 될 지도 모르는 운명의 경기에서 극초반 이토록 거대한 도박수를 던질 리가 없다.
그러나 임요환이라면, 하지 않을 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이런 자리에서 게임을 하고 싶다면 이겨나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겨나가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고 여길 것을 안다. 수많은 선수들의 마지막 게임을 보아온 그가, 모를 리도 없고 하지 않을 리도 없다.
- 그래서 박지호는 프로브 정찰로 간단히 그것을 파악한다.
박지호는 임요환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읽어냈다.
임요환은 황급히 배럭을 취소하고, 박지호는 임요환의 기지로 질럿을 들이밀었다. 임요환의 SCV가 힘없이 달려나왔다.
박지호의 눈에는, 이미 그의 첫 결승과, 프로게이머로서 마악 첫 훈장을 달려고 하는 그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오신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었다고, 박지호는 훗날 회고했다.
……그리고 그 때, 임요환은 무엇을 보았을까.
왕들의 성역(聖域)
「 그는 여러 번 죽었고,
여러 번 다시 일어섰다.
위대한 인간은 자부심 속에서
살인적인 사람들을 마주하고
숨결을 억누르는 것에 조롱의 눈길을 던진다.」
- W.B. 예이츠, 「죽음」
0.
임진록.
그들의 결투가 고유명사가 될 만큼, 홍진호와 임요환은 희대의 라이벌이라고 불렸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상대전적 25 : 26.
50여 번의 싸움을 치러냈으며, 결승에서 맞붙은 것만 세 번. 한 사람은 수많은 우승을 차지하며 초대의 군림자로 불렸지만, 다른 한 사람은 우승을 눈앞에 두고 쓴 잔을 몇 번이고 들이켜야만 했다.
- 모든 영광을 손에 넣은 남자와, 모든 영광 앞에서 고배를 마신 남자.
그렇게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음에도.
1.
저그의 모든 것은 작은 라바에서 시작된다. 모든 유닛을 깨워내는 라바야말로 단 하나의 시작점, 그렇기에 저그는 매 순간 순간 선택을 강요받는다.
드론 혹은 그 외의 것.
이 단순한 양자택일에서 모든 저그가 갈려나온 것이다.
그 선택에서 홍진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로지 맹공, 맹공, 맹공. 그는 모든 전투에 있어서 일말의 여력(餘力)도 남기지 않으며, 내일의 부(富)를 바라기 보다는 오늘의 전승(戰勝)을 바란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상대를 강제적으로 전장으로 끌어내어, 용서 없이 시종일관 몰아치고또 몰아쳐 결코 주도권을 놓치는 법이 없는 전술.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무모하다.
막히기 시작하는 순간, 바람은 차츰 잦아들 수밖에 없다. 홍진호의 바람은 후일을 기약하는 법이 없다. 그의 폭풍은 다름 아니라 내일을 담보로 몰아친다. 공격이 성공하면 승리, 실패하면 패배로의 직결이라는, 너무나도 위험한 전쟁이다.
2.
최근에 소위 ‘날빌’이라고 불리는 그 모든 것들은, 흔히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승리로의 일회용 수단으로 평가받는다. 만들기도 어려울뿐더러, 성공하면 쉽게 승리를 가져가는 대신에 실패하면 결과는 매우 어렵게 이어진다. 그렇기에 이것들은 ‘변칙’이다.
그러나 임요환에 한해서는 그것들 모두가 ‘정석’이었다.
종족불문.
전장불문.
시일불문.
누가 상대라도,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마찬가지였다.
터뜨리는 한 발 한 발이 모두 허를 찌르는 영격.
동시에 그 한 발 한 발이 모두 터무니없는 위험을 동반하는 양날의 검.
혹자는 그가 너무나도 쉽게 승리를 가져가려 한다고 비판했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지나치게 가벼운 게임을 한다고 평가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정점에서 군림하며, 손에 넣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사람이기에 게임의 승패는 그에게 별다른 의미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영광의 정점을 달리던 그 순간부터 단 한 사람의 1.5세대가 된 오늘까지 계속해서 그 위험들을 건너왔다. 그에게는 한 순간의 권태도 한 순간의 퇴락도 없었다.
그 무모한 행군의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그가 이길 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3.
일군의 지휘관이 전방에 서는 것은 기본적인 금기(禁忌)다.
지휘관의 역할은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지, 병사들과 총칼을 섞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은 후방에서 전장을 살피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족하고 넘친다. 지휘관이 몸을 사리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승리를 위해 위험과 변수를 피하는 안정성의 추구는,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임요환과 홍진호는 틀림없이 지휘관으로서는 실격이다.
군대의 주인임에도 병사들의 최선봉에 서서 한 줄기 군세를 끌고 전장의 한 가운데로 파고든다.
쏟아지는 흉탄과 칼날을 털끝의 차이로 피해나가며 사방을 메운 적병의 파도를 헤친다.
수백의 위험이 엄습해오더라도 단 한 번, 단 한 치의 칼끝이 적장의 목에 닿을 것을 의심치 않고 달려 나간다.
4.
- 모든 영광을 손에 넣은 남자와, 모든 영광 앞에서 고배를 마신 남자.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 닮았다.
두 사람 모두 다른 그 누구보다 많은 위험을 무릅쓰며, 두 사람 모두 다른 그 누구보다도 앞서서 달려간다.
두 사람 모두 필기로서 전장의 한 가운데로 달려 나간다. 그들은 각자의 군대 가장 선두에 서서 전장의 정중앙에서 가장 먼저 격돌한다. 싸우기도 전에 상대가 그곳에 있을 것임을 서로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웃으며 함께 낡아온 칼날을 맞대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자신 있는 전쟁의 방식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들을 수많은 저그와 테란들의 정점에 군림하게 만들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들, 왕들의 싸움이었으므로.
우리는 그러므로 그들을,「하늘의 왕(天王)」이라고 불렀다.
5.
언제 어디서 맞붙더라도, 양군의 최전방이 맞붙는 중앙. 격전의 한 가운데. 그곳만이 두 명의 천왕이 승부를 겨룰 단 하나의 콜로세움. 만용(蠻勇), 무모(無謀), 불합리(不合理), 그리고 왕좌의 긍지로 점철된 왕들의 성역(聖域).
박지호는 그곳에 발을 내딛었다.
그는 기략 - 기만전술의 모든 것을 읽었고, FD로 다져진 최연성 흉내의 한계도 읽어냈다.
그로써 그는 임요환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왕의 싸움을 벌여 황제를, 천왕을 굴복시키려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가장 무모하지만 가장 자신다운 싸움을 벌이는 전장.
꼬라박에서 스피릿 프로토스로. 일개 검투사에서 일군의 사령관으로 성숙한 박지호라도 결코 서툴게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장소.
박지호는 오로지 자신감으로 왕들의 성역에 올라서려 했다.
임요환은 잠시 손을 멈춘다.
이미 박정석과의 일전에서 그는 옛 방식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갔었다.
그렇지만, 몇 년이 시간이 지나고, 몇 번이고 새로이 검을 고쳐 쥐었음에도,
SlayerS_BoxeR - 오랜 전란이 키워낸 그 무명(武名)에는, 다른 세 사람의 왕들과 벌였던 싸움의 나날들이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SlayerS_'BoxeR'
「구름과 안개에 가릴지언정 제국의 태양은 지지 않는다.」
커맨드 센터를 방패로, SCV를 창으로, 시즈 탱크가 불을 뿜었다.
스피릿 - 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탱크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던 박지호의 드라군 6기는 그대로 녹아내렸다. 임요환은 ‘후각’에 따라,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단번에 탱크들을 걷고 벌쳐들을 내몰아 박지호의 기지 코앞에 라인을 건설했다.
아직까지도 이 박지호의 무모한 돌격은 이해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룡점정의 순간에 다시 ‘꼬라박’ 기질이 튀어나왔던 것일까.
어쨌거나 그 한 번의 무모한 판단.
메가웹 스테이션의 인파와 해설진, 옵저버, 그 경기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 가운데, 단 한 명 - 어쩌면 두 명 - 만이 의심하지 않았던 가능성이 마침내 그 한 번으로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첫 번째의 무모한 공격이 불러일으킨 손해. 그러나 박지호는 이미 이 R.O.V.에서의 승부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가장 박지호다운 스타일, 끊임없이 파고드는 질럿과 드라군, 박지호식 스피릿이 그에게 결승으로의 활로를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지호는 곧바로 프로브를 동반한 드라군 위주의 병력을 몰아 앞마당 앞의 탱크라인을 무너뜨렸다. 병력이 증원되지 않은 네 기의 탱크는 순식간에 스러져나갔다. 임요환은 서플라이 바리케이트를 건설하며 방어를 공고히 했다.
스타게이트의 건설을 보류한 대가는 순수 게이트웨이 병력의 포화 - 스피릿의 토대.
그 기세에 눌린 것일까. 임요환은 그의 대 프로토스전의 진가인 타이밍 러쉬 대신에 아홉 시 미네랄 지역에 두 번째 멀티를 가져간다.
그로써 아홉 시 지역이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다. 박지호는 드라군과 셔틀 질럿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아홉 시에 공습을 감행했다. 언덕에 걸쳐 내려오는 프로토스 병력에 대해 불과 서너 기의 탱크는 누가 봐도 백척간두의 상황이었고, 박지호는 그 안일한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그 위태로운 방어라인은 두 번 모두 한끝의 차이로 박지호의 맹공을 막아냈다.
그럼에도 박지호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스피릿의 완성을 위한 마지막 퍼즐조각, 아비터 트리뷰널을 건설했다. 아비터가 등장하고 스피릿이 완성되면 이병민이 그랬듯 임요환의 기갑부대 역시 스테이지 위에서 꺾어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비터 트리뷰널을 확인한 순간, 임요환은 미뤄두었던 세 번째의 검을 빼들었다.
그의 기략은 적의 등 뒤를 노리는 비검.
FD는 그를 가리는 방패.
그리고 그의 세 번째 무장은, 한끝의 빈틈, 단 한순간을 내찌르는 예리한 레이피어(rapier)였다.
박지호는 잘 참아냈다. 임요환의 탱크가 네 번째의 넥서스를 포격할 때까지는.
그러나 임요환이 탱크를 걷고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 순간 그 참을성은 한계에 달했다. 아비터의 합류를 불과 20여 초 남기고, 스테이지의 위에 서 있는 기갑군단에게 달려들었다.
박지호에게는 갈림길이 있었고, 그는 스피릿 프로토스의 우화(羽化)를 통하여 프로토스의 신성(新星) 사령관이 되는 길을 선택했었다. 그러나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결승으로의 활로를 코앞에 둔 채 그는 참을성의 부족함을 드러내며 옛 방식으로 돌아가 버렸다.
스피릿도, 꼬라박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
미완의 스피릿.
4경기 R-Point.
So1에서 한 번도 임요환을 배신하지 않았던 그의 영지(領地).
박지호는 1, 2경기의 흐름을 돌려놓으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흐름을 재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임요환의 기략을 무너뜨리고, 그로써 웅크린 임요환을 리버로 뒤흔들어 두 경기를 연속으로 따냈던 그 승리의 흐름을 다시 떠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3경기, 기략을 간파당하고도 임요환은 박지호의 한조각 빈틈을 내찔렀다. 박지호는 그 변화를 알아챘어야 했다. 임요환의 FD에 대하여 박지호의 리버는 제 역할을 다했다. SCV를 몰아대며, 열 기 가까이를 잡아냈다.
그러나 임요환은 아직 R.O.V.의 레이피어를 집어넣지 않았다. 무모함을 외치는 해설진을 뒤로하고, 설마 저 병력으로 진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박지호와 관객들의 예상을 뒤로하고, 임요환은 리버가 물러남과 때를 같이하여 한 번을 찔렀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제국령에서의 임요환의 타이밍은 이미 사리(事理)를 넘고 있었다.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스코어일 뿐, 1경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황제 is not give up.
라이드 오브 발키리즈. 끝난 승부와 다름없었던 스테이지에서 임요환이 승리한 뒤 등장한, 스케치북에 휘갈긴 어설픈 문법의 치어풀.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잊혀졌던 제국의 기(旗)로서, 휘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그 때야말로, 잠들었던 가을의 전설이 깨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의 귀환
「……그들이 내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전설’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들은 그 전설의 Boxer가 맞느냐 라는 얘기를 가장 많이 했다.」
- 임요환, 「나만큼 미쳐봐」
5경기를 앞두고 엄재경 해설은 스타크래프트 판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9-17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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