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명탐정 코난 극장판 시리즈 몇 개를 다운받았다.
진득하니 재미나게 보려는 마음에 맥주 몇캔과 마른 안주까지 준비해놓고
기온도 창문을 섬세하게 열어 적절온도를 유지했다.
모니터 각도와 스피커 세팅을 끝내고 즐겁게 재생버튼을 눌렀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일요일에 이렇게 누가보면 좀 '쫌 그르타~'라고 할 것 같이 스물 중반에 접어드는 젊은 남자가 이런 놀음을 하는게 '쫌 그럴'수도 있다. 사실 이런 준비를 한 이유는 참 간단했는데, 중학교시절 명탐정 코난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 후반쯤 나오는 '애니메이션'에서 가능한 커다란 스릴있는 씬들과 좋은 ost때문이었다. 란이 예쁜건 기본으로 깔아두자. 아무튼, 그 때는 진짜 그게 기가막히게 재밌었다. 14살, 15살때에 만화란 정말 가능할 것 만 같은 일들을 미리 그려놓은 도화지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얼마 전에는 만화방에서 무협지 열권여를 빌렸다. 중학교 졸업식을 앞둔 겨울방학에 할 일 없이 누워서 과자를 씹으며 무협지를 정신 없이 봤던 기억이 너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 때 보다 책은 작아지고, 가격은 조금 오른 듯 했지만 그래도 그 때 보다 조금 더 나은 수입을 갖고 있기에 그 정도야~ 라는 마음으로 까만 비닐 봉투 가득히 책을 담아온 것이다. 과자를 조심스레 뜯어펼쳐두고 배게를 가슴팍 아래에 받쳐두고 엎드려서 책을 펼쳤다.
최근 친구들과는 술자리를 갖지 않는다. 나이가 스물 중반에 접어들다 보니, 술을 마시자니 내일이 두렵고, 즐겁게 마시자니 내년이 두려운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정말 무서울 게 없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술 잔을 앞에 두고 무서운 이야기 밖에 못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한숨과 걱정, 불안과 허세가 뒤섞여서 안주대신 가득 테이블에 올라오는 술자리란 누구나 지치나 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건전한 금주패밀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안부를 물으며 묻는 화제중에 그나마 실 없는 화제라고는 여자와 관련된 이야기지만, 아뿔싸. 우린 아무도 여자가 없으니 그마저도 어찌 할 도리가 없다. 결국 건실해 보이지만 지치는 삶과 미래, 직장과 학교, 준비와 불안, 국가와 정치 같은 이야기들을 나누고나면, 피로감은 두배가 된다. 그 피로감을 패기로 덮으려 하기엔 다들 조금 이래저래 몇 년간 보고 들은게 많은가 보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기도 전에, 나는 5초 앞으로 버튼을 연타하고 있었다. 코난은 마치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것 처럼 각진 모습으로 5초씩 타임머신을 탔다. 란이 나오는 씬만 조금 멈추며, 저런 여자친구 있으면 좋겠다..싶은 마음에 한 모금 더 홀짝인다. 한쪽 턱을 괸 채 오른쪽을 계속 누르다보니 30분도 안되서 한 편을 다 보게 되었다. 푹 하고 한숨이 나왔다. 어릴땐 그렇게 재밌고 흥미진진했는데. 왠지 유일한 휴일을 망친 것 같아 기분이 밍밍했다. 이 편이 무지 재미 없는 편인가봐! 라고 생각해서 다음편, 그 다음편을 계속 보았지만 30분동안 보던게 20분 15분으로 줄어들 뿐이었다.
무협지의 주인공은 인생고비 오욕칠정을 다 느끼며 사는 놈이었다. 무슨 이리도 다사다난한지. 그런데 어떻게 2~30페이지 정도 지나니 애가 열심히 하여 성공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거 참 성격도 모나서는 때리고 부수고 죽이고 복수하고 잘난 듯 콧대를 드높인다. 그럼 또 주제도 모르는 악역이 어찌 해보려고 여자도 괴롭혀보고 애도 납치해보고 과거도 캐보고 약점도 파보고 그러지만, 아 이놈 난놈이다. 어쨌거나 나쁜놈한테 칼침박고 웃는 놈은 난놈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 흥미진진하고 재밌었던 이야기는 10권중 2권도 채 보지 않고 날 벌러덩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보게 만들었다. 휴, 이게 뭐야 대체..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보니 나지막히 나온 말이었다.
어릴때는 참 재밌는게 많았다. 테레비에 나오는 만화영화도 만화책에 등장하는 깡패도 모래투성이 축구장에서의 축구도. 아랫배가 살살 간지러워질 만큼 무서웠지만 방과후 뒤뜰에서 주먹다짐을 하던 일도, 그러다 선생님에게 걸려 무릎꿇던 일도, 아침에 학교가기가 싫어서 동네 오락실을 갔다가 두시간만에 잡혀서 질질 끌려간 일도. 수업중 책상서랍에 슬쩍 넣어두고 목 근육이 땡기다 못해 결릴만큼 아픈 자세로 열심히 한줄 한줄 읽던 무협지도. 가사도 못알아듣는 로큰롤의 괴성도. 어쩌구저쩌구의 철학따위를 몇 페이지 읽어보고 아는 체 하던 일도. 참 다 재미난 일이었다.
난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별 일 아니라 생각했다. 그저 조금 더 많이 본 것이고, 더 많이 깍여나가는 것이고, 조금 더 피곤해지는 것 뿐이라고. 나이를 먹고 머리가 나빠진다거나 열정이 없어진다거나 하는건 핑계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근데, 가끔 이렇게 슬퍼질 때가 찾아온다. 어느 날 문득 사소한 것에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고, 그 때 그 어린시절 즐겁고 행복했던 일들을 그때보다 더 완벽한 자세로 즐겨보아도 전혀 즐겁지가 않은 날이 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나는 지난 나이와 함께 두고 오는 것일까?
지금 즐거운 일들이 있다. 지금 행복한 일들이 있다. 그렇지만 종류는 다르지만 과거에 너무 재밌고 즐거웠던 일들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게 별로 없다. 점점 지금 즐겁고 행복한 일들은 찾기가 어려워지기만 하고, 이제는 행복하나를 잡기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도 어슴푸레 깨닫게 된다. 때로는 그렇게 지쳐가는 어른이 된 나에게 작은 위로라도 해주려 어릴 적 추억을 되새겨가며 다시 한번 그 때로 돌아가려고 발버둥 쳐 보지만, 잃어버린 낭만은 돌아오지 않았다. 화면 속 코난은 여전히 초등학생 친구들을 데리고 예쁜 란 누나에게 콧소리를 내며 아양을 떨고, 무협지 주인공은 여전히 칼 한자루로 수십명을 베며 죄책감도 느낄 줄 모르는데다 주변에 절세미인만 한가득 두르고 사는데 내가 잃어버린 낭만은 어디에 떨어져 있기에 그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 지고는 하는 것이다. 지친 어른이 된 내가 주저앉아 있으면 나도모르게 나타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은 노란 병아리 색에 왼쪽가슴엔 체육복 이라는 마킹이 된 어린이가 되고 싶어지는 것이다. 딱지치기도, 뽑기도, 떡꼬치도, 철봉도, 학종이 따먹기도, 심지어 폐품버리기나 아침 빗자루질도 웃으며 지낼 수 있었던 그 때가 너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야한 것도 실컷보고 술도 실컷 마시고 엄마아빠가 간섭도 하지 않을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는데. 나는 뭐든지 다 어른만큼 알고있다고. 어른은 별거 없다고. 그렇게 금방금방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매일이 너무 지겹다며 기지개만 폈었는데. 난 내 10대가 후회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고 다녔는데.
어른이 되고 싶다던 소원은 몇 번 떠올리기도 전에 금새 이뤄졌다. 그 즈음에서 부터였나보다. 조금씩 어린 나와 멀어지기 시작한게. 놀이도, 게임도, 만화도 어릴 때 처럼 푹 빠질 수 없게 된 것이. 내가 그런 것들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내 어린 추억들을 꾸며준 것들이 손바닥에서 흘러나갈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환히 웃으며 칭찬했다. 철이 들었구나. 사람들은 칭찬했다. 듬직하구나. 사람들은 칭찬했다. 걱정이 없겠구나. 그럴 때마다 조금 으쓱해지고는 했었다. 그런데 그런 으쓱함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어른이라는 것을 채 알아보기도 전에 많은 것들은 이미 날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었고, 나는 그런 것들이 새롭고 즐겁기만 할 거란 기대를 했다. 바보같이. 세상은 두 뿔 달린 요괴같은 것인줄도 모르고.
나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나도 남들처럼 자연스레 내일 할 일을 걱정하고, 모레 할 일을 걱정했다. 다음달, 내년의 내가 두려웠고, 남 앞에 당당하기 위한 치열함이 지쳤다. 불과 몇 년 전까지 그런 것들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당당하게 '모든게 내 선택'이라며 목을 뻣뻣히 세우고 휘적휘적 다니던 세상이, 어른이 되겠다는 소원을 이루자마자 뿔 달린 요괴처럼 무서워 지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게된 야동도, 돈만 있으면 진탕 부어마실 술도, 어릴 때 좋아하던 여자애와는 다른 여인의 향기도, 어른이 되어서 가진 많은 자유도 어느 순간 부터는 마냥 웃게 해 주지 않는 것이다. 난 나야! 라고 외치던 휴대폰 광고가 기억났다. 뻥쟁이들. 나는 세상에 너무 흔했다.
그 때 부터, 철 든 나는 사람들이 말해주던 그런 칭찬이 좋지만은 않게 되었다. 밝은 웃음과 으쓱이는 어깨 대신, 씁쓸한 웃음과 숙여진 고개를 대신했다. 무모함 대신 얻은 신중함이, 활기참 대신 얻은 침착함이, 저돌적인 것 대신 얻은 재고 따지기가 날 좀 어른스럽게 보이게 하였지만 내게 어른은 더 이상 두근거리는 소원도 아니었고, 희망찬 현실의 자유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협지에서 언제나 한 칼에 스러지고는 하는 등장인물 A같은 사람이 두 뿔 을 달고 입에서 불을 뿜는 무서운 괴물과 싸워야 하는, 두 다리가 떨리는 것을 억지로 버티고 서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었다는 칭찬은 어느새 두려움이 되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잃어버린 것이 있다. 그리 많지도 않은 나이에, 아니 어리디 어린 나이에 벌써 잃어가는 것이 있다. 낭만. 낭만. 낭만에 대하여. 상상을 믿었던 순수에 대하여. 만화를 보며 무협지를 읽으며 진짜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손톱만큼이나 품으며 웃을 수 있었던 멍청함에 대하여. 그렇게 바보같이 하루에도 수십가지씩 떠오르던 꿈들에 대하여. 지칠 줄 모르고 동네방네 싸돌아 다녀도 마냥 하늘이 푸르던 날들에 대하여. 시간을 원화 라는 몇 천원의 단위 대신 시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나에 대하여. 그렇게 상상하고 순수히 믿으며, 떠오르는 꿈들을 떠들고, 바보같은 짓을 하면서도, 내일이 무섭지 않았던 시절에 대하여.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내가 잃어버리고 만 낭만에 대하여.
간절히 다시 품고싶은 낭만에 대하여..
잃어 버린 것에 대하여..
잃어 버린 것에 대하여...
나이먹음이 싫어지는걸 겨우 어렴풋이 느끼게 한
잃어 버린 낭만에 대하여..
다시 찾고 싶은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Choi baek ho) & 이적 (Lee jeok) - 낭만에 대하여 (110603, HD Live)
궂은비 내리는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웬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가슴이 잃어버린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웬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가슴에 다시 못올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0-26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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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명탐정 코난 극장판 시리즈 몇 개를 다운받았다.
방금 돌아와서 진득하니 재미나게 보려는 마음에 맥주 몇캔과 마른 안주까지 준비해놓고
기온도 창문을 섬세하게 열어 적절온도를 유지했다.
코난을 보기 전에 습관처럼 들른 P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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