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성격상 호칭을 생략하고, 경어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손발이 좀 오그라들 수 있는데 역시 양해 부탁드립니다. -_-;; 제가 응원하는 선수의 우승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용감하게 안 어울리는 찬양글을 써보았습니다.)
1.
내가 처음으로 스타 방송을 본 것은 홍진호 대 서지훈의 올림푸스 결승이다.
그 전설적인 결승전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홍진호를 응원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저그 유저니까.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그게 그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리라곤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하지만, 어쨌든 누가 우승하든 무조건 5경기까지 가 달라고 생각할 만큼 경기는 흥미진진했다. 홍진호의 저글링과 럴커의 이합집산하는 공격 동선 자체가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그를 이렇게 플레이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물론 마린과 메딕의 무시무시한 화력이 더욱 인상적이었고, 그것이 승부를 가르긴 했지만, 나에게 E-Sports는 그렇게 다가왔다. 화면 속에서 저 소년들이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이, 과연 내가 알던 그 스타크래프트인가? 개발자조차 예상할 수 없었을 만큼 게임을 아예 다른 그 무엇으로 승화시켜 버리는 게이머들의 열정. 나는 그 열정에 반해버렸다.
결국 경기는 3:2로 홍진호가 패해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 경기를 시작으로 나는 스타리그 방송을 '보기' 시작했다.
2.
다들 알다시피 홍진호는 최고의 매너와 실력을 자랑하면서도, 불운과 겹치면서 끝내 공식 리그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다. (솔직히 나는 이미 - 이벤트전으로 격하된 대회에서 - 우승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반드시 다시 우승하리라 믿는다.) 코엑스에서 직접 관전했던 TG 삼보배 결승전 3차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치며 1%의 확률에서 99%의 확률까지 따라갔지만, 결국 최후의 1%가 모자라 GG를 칠 수밖에 없었던 그 경기.
임요환, 이윤열, 서지훈, 한동욱, 최연성... 당시 홍진호를 꺾어낸 테란들의 이름이다. 홍진호는 마치 최고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넘어야 하는 산, 하지만 반드시 넘게 되는 그런 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진호는 저그의 압도적인 최강자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당시 저그들 중에서 홍진호처럼 플레이하는 선수는 그 누구도 없었다. 우승한다면 홍진호 외의 다른 이름을 떠올릴 수 없는 그런 상황.
그 상황에서 박성준이 등장했다.
3.
나는 MBC게임, 박성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잊을 수 없게 만든 경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차재욱과의 경기. 박성준은 본진 플레이를 통해 앞마당 하나 먹지 않고 저글링과 럴커의 컨트롤만으로 가로 방향의 차재욱을 제압해낸다.
...나는 그 당시 홍진호만큼 테란을 상대하는 저그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테란을 잘 잡는 저그들은 물론 홍진호 외에도 있었지만 그들은 방어를 통해 테란을 말려죽이는 스타일이지, 공격적으로 나서 먼저 테란을 부숴버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저런 공격적인 스타일,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이것이다.
"파뱃과 마린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글링."
적어도 내가 알기로 그 컨트롤은 오랜 시간 동안 홍진호 외의 어떤 저그 유저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박성준만은 예외였다. 그 경기에서, 박성준은 자신의 스타일을 확실히 보여준다. 테란을 되려 압살하는 저그의 스타일.
그것이 홍진호 외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듀얼에서 바로 그 스타일, 본진 럴커 저글링으로 임요환을 꺾은 박성준은 스타리그에 진출한다.
16강에 3명, 8강에 1명만 남은 저그.
하지만 박성준은 8강에서 서지훈을, 4강에서 최연성을, 결승에서 박정석을 꺾고 그렇게도 바라던 저그의 우승을 일궈낸다.
4강에서 최연성을 꺾는 순간, 박성준은 당시 홍진호와 함께 '유이'하게 절대적으로 응원하는 게이머가 되었고,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4.
박성준 때문에 즐거웠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내가 바라고 또 바라던 저그의 우승을 달성해준 게이머. 그러나 박성준의 약진은 홍진호의 쇠퇴와 그 시기를 같이 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이머, 홍진호가 이렇게 부진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박성준이 주는 즐거움도 컸지만, 홍진호가 주는 안타까움도 그 못지 않았다. 생방송으로 지켜보지 못했던 3연속 벙커링의 4강, 나는 내 홈페이지에 남긴 친구의 글로 인해 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차라리 보지 못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한동안 스타리그를 보지 못했다. 최연성이 박성준을 결승에서 3:0으로 제압했다는 소식 등을 전해들었을 뿐. 박성준이 최연성을 한번 꺾어냈지만, 결승전에서 패배함으로써 박성준은 '훼손'당했고, 자신의 별명인 본좌의 칭호도 역사 속에는 최연성의 이름으로 남게 된다. 저그의 시대는 잠시뿐, 결국 스타크래프트는 캠페인조차도 테란이 승리하는 스토리 아니던가.
그러던 내가 다시 스타를 보게 된 건, 우연히 PGR에서 클릭한 마재윤이란 게이머의 경기 결과 때문이었다. 마재윤과 최연성의 경기 결과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본 한 게이머, 심지어 저그 게이머가, '그 최연성'을 3:0으로, 그것도 두 번씩이나 제압한 것.
그리고 마재윤의 경기를 본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박성준을 보았을 때와는 또다른 충격. 박성준은 홍진호를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다는 충격이었다면 마재윤은 완전히 새로운 충격이었다.
어떻게 저그가 테란을 상대로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지?
5.
마재윤 이후로, 나는 다시 스타리그를 보게 되었다. 변형태와 진영수라는 당대 저그전 최강자들을 연거푸 꺾어낸 마재윤은, 결국 이윤열마저 무릎 꿇리면서 최강자, 흔히 말하는 본좌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그 일주일간의 기쁨, 마치 내가 본좌가 된 것 같은 그 기쁨. 그러나 3월 3일, 정말 내 인생 오랜만에 '이건 꿈일 거야'라고 믿고 싶었던 그 경기 이후 마재윤도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하향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또다른 한 명의 저그 게이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홍진호 - 박성준 - 마재윤. 내가 진심으로 응원해온, 그리고 지금껏 응원하고 있는 네 명의 게이머들 중 세 명이다. 그러나 이 세 명의 게이머들 중, 그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게이머는 하나도 없었다. 홍진호의 경우 올림푸스 스타리그 당시에도 이미 일가를 이룬 저그의 최강자였고, 박성준은 처음 우승하는 순간을 지켜보았으나 그 이후의 여정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마재윤의 경우는, 이미 최연성을 두 차례나 꺾고 본좌의 자리에 거의 다가섰을 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니까. 최강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본 것은 아니다.
그렇다. 이 글을 쓴 이유는 그 네 명 중 나머지 한 명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이다. 응원하는 네 명의 게이머 중에서, 그 미약했던 시작부터 최강자로 등극하는 영광의 순간까지 모두 지켜본 게이머는, 단 한 명 뿐이다.
6.
이제동.
처음 이제동을 본 것은 듀얼토너먼트에서 마재윤과의 저그전. (박성준을 처음 본 것도 홍진호와의 듀얼토너먼트였는데, 참 공교롭다. -_-;) 당시에는 이제동이라는 이름 자체를 처음 들어보았다. 다만 리플을 통해, 저그전을 잘하는 저그 정도로만 인식했을 뿐이다. (그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저그전을 잘한다는데, 마재윤이 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했을 뿐, 마재윤이 이제동을 꺾고 스타리그에 진출한 이후 나는 이제동을 잊고 있었다.
그 후 이제동을 다시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우연히 보게 된 프로리그의 경기였다. 당시 프로리그에서 맹위를 떨치던 염보성과의 경기, 이제동은 거의 염보성이 뭐 하나 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야말로 완벽하게 염보성을 꺾어버린다. 게임이 끝난 후 염보성을 비추던 카메라에서, 염보성의 표정에 어린 쓴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표정은 분명히 "뭐가 이렇게 잘하지?"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경기에서 이제동의 플레이엔 그동안 저그의 최강자들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런 충격은 솔직히 없었다. 박성준의 플레이를 보았을 때나, 마재윤의 플레이를 보았을 때의,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싶은 그런 신선한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플레이는 극도로 잘 다듬어지고 훈련된 완전무결한 어떤 것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 놀라웠다.
누구라도 이렇게 할 수 있지만, 누구도 이렇게 할 수 없다.
그것이 이제동의 플레이의 키워드였다.
7.
이제동은 단순한 잘하는 저그 신인에서 더 나아가,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프로리그의 활약에 그치지 않고 점차 개인리그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Ever 스타리그 결승에 결국 진출하게 된다.
송병구와의 결승전. 당시 이제동의 우세를 점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송병구에 비해 이제동의 이름값은 훨씬 떨어지기도 했고, 이제동의 유일한 약점이 프로토스전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검증된 적이 없는 프로토스전이었다.
결승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제동은 이렇게 말한다.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연습했습니다."
나는 이 방송을 집에서 생방송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TG삼보배 결승전 때 코엑스에 가서 홍진호의 패배를 본 이후 나는 다시는 경기장에 가서 스타를 보지 않는다. -_-;) 5전제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1경기를 무난하게 진 이제동은 2경기도 수세에 몰려 패배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방,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뮤탈과 스커지가 송병구의 본진을 급습하고, 신들린 듯한 컨트롤을 통해 그 뮤탈은 결국 그대로 경기를 끝내버린다. 그 2경기의 패배는 송병구의 멘탈을 크게 흔들었던지, 이제동은 기세를 이어 3, 4경기마저 잡아버리고 최초의 스타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그것이 내가 본 이제동의 첫 스타리그 우승이었다. 패승승승.
그 이후의 이제동의 행보 역시 그러했다. 첫 경기는 내주는 경우가 많아도, 두 번째 경기부터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무시무시한 플레이를 보여준다. 마치 첫 경기의 패배에 대단히 화가 난 것처럼. 그리고 '패승승승' 이라는 스코어는, 이제동 스코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나는 그제서야, 단순히 아주 잘 한다는 표현으로 이제동을 말하기엔 모자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나 감탄하는 그 연습량, 그리고 누구에게도 지고는 못 살 것만 같은 그 눈빛. 화면 저 편의 상대편 선수까지 씹어먹을 듯한, 폭군이라는 닉네임이 그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그 눈빛.
이제동은 단순히 아주 잘 하는 선수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누구보다도 강한 선수였다.
토요일에 MSL을 우승하기까지, 이제동은 총 다섯 번의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쌓아올렸다. 그 대부분의 경기들이 한번 이상의 패배를 내주고도, 오히려 더욱 경기력을 끌어올려 상대를 쓰러뜨린 경기들이다. 그리고 이제동은 여전히 자신의 업적을 갱신하기 위해 진행중이다.
8.
홍진호 - 박성준 - 마재윤 - 이제동. 내가 좋아해왔고, 가장 응원하는 네 명의 스타크래프트 선수.
저 네 명 중에서 그래도 더 끌리는 선수를 뽑으라면, 나는 이제 홍진호와 이제동을 꼽는다.
홍진호를 내가 좋아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가 저그의 최강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팬들을 대하는 태도, 경기에 임하는 자세, 다른 선수들에게 보여주는 행동,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탄생하는 홍진호라는 한 '인간'의 매력. 그 매력에 반했기 때문이다. (게이 인증 아님...)
이제동을 좋아하게 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동의 인터뷰에서는 결코 상대방을 낮추거나 무시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가 없다. (김창희 선수는 예외로 하자.. -_-;) 진정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그 유명하지만 이제동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 그는 정말로 그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고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준다.
이제동과 마재윤. 거의 바로 다음 세대를 이은 두 최강자는 지극히 다른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마재윤의 오만으로 느껴질 만큼의 카리스마와 달리, 이제동은 겸손했다. 마재윤과 같은 캐릭터 역시 좋아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을 낮출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런 사람은 더욱 노력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은 세상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힘이다.
누구보다도 잘 하지만 누구보다도 겸손하다.
지금은 그 강력한 게임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공손하고 예의 바른 청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을 뿐이다.
9.
누구라도 이렇게 할 수 있지만, 누구도 이렇게 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누구보다도 강하다.
누구보다도 잘 하지만 누구보다도 겸손하다.
그게 누구라고?
이제동이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12 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