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te |
2008/08/31 16:14:27 |
Name |
happyend |
Subject |
(08)소소한 답사이야기)잊혀진 신화를 찾아 익산으로 |
1.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5년 전 쯤 백제 무왕의 발자취를 따라 전라북도 익산에 도착했을 때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첫 번째 목적지가 무왕이 태어난 마룡지였는데, 그 흔한 간판하나 없어서 (네비게이션도 없던 때라) 지도에서 어림잡은 지역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더랬죠.
‘설마, 백제 임금 중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무왕의 전설적인 유적지인데....’
이런 저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30여분을 헛바퀴돌고 있었지요.
떠나기전에 모은 자료에 의하면, 마룡지를 찾는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들 뿐이라더군요.이게 좀 불길하기는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에게 백제는 정신적 고향이며 종교적 메카입니다. 일본의 유교와 불교는 백제를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이니까요.
남해안을 가로질러 서해안의 군산을 거쳐 금강을 따라 부여까지 올라가는 이 뱃길은 승려와 지식인들의 순례의 길이었고,이길을 다녀와야 일본에서 행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임진왜란때에도 백제쪽 문화재나 사찰은 건드리지 않았겠습니까.
백제에 대한 일본의 끊임없는 관심이 당연하듯이 익산지역의 백제 무왕에 대한 애정도 당연한 것이라 여긴 저로선 매우 큰 낭패를 본 셈이지요. 더군다나 바로 10리 앞에 백제 무왕이 창건한 미륵사지를 복원하는 거대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무왕이 새롭게 만들려던 왕궁터라거나 무왕과 선화공주 부부의 무덤따위를 안내하는 친절한 표지판을 쉽게 본 뒤였으니까요.
한참을 그렇게 오금산을 바라보며 차를 몰며 1500년 시간의 덫에 빠져버린 듯 했습니다.
“마룡지가 어딘지 아세요?”
“마룡지요?처음 들어보는데...”
부딪는 사람들과 이런 질문을 수없이 주고받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물어봐선 안되겠다는 것을 말이죠. 저는 차를 다시 돌려 마지막으로 물어본 주유소로 향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근처 연못은 어디있나요?”
“연못이요?그거라면 바로 저기 있습니다.”
주유소 직원은 마침내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역시나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대로 ‘오금산 아래 백보앞’쯤이었습니다. 묻혀진 보물을 만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당장 일러준 곳으로 차를 몰아들어갔습니다.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그때가 5월 초순. 논엔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대놨던터라 어느곳이 마룡지인지 도무지 분간을 못하겠더군요.
다행히 마룡지의 이름과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참숯 찜질방을 운영하시는 분이었지요.그는 오랫동안 익산시에 하다못해 팻말이라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요청을 해왔으나 답을 듣지 못하였다며 혀를 찼습니다.
그분의 친절한 안내에 비해 길은 친절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갈지 않아 그루터기가 무성한 논을 가로지르고,물을 댄 논둑을 건너 목적지에 다가갔습니다.
잊혀진 왕국의 서러움이 가슴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왔습니다.
2.
서동요로 유명한 백제 무왕은 그 출생부터가 극적입니다.
백제는 그 시작부터 씨족연맹체의 형식으로 탄생했습니다. 고구려내 부여계 유민들이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만든 작은 소국인 ‘백제국’은 우수한 철기문명과 시끄러웠던 북방의 전쟁터속에서 단련된 군대를 가지고 주변의 소국들을 아울러갔습니다만 그 모든 과정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습니다.정복보다는 연맹.... ( 백제는 삼국 중,가장 많은 씨족연맹체=귀족연맹국가였습니다.부여계의 부여씨-왕족-와 고구려계의 해씨-왕비족- 외에 마한지역의 여러 씨족장들이 속속들이 귀족으로 편입 ‘대성8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삼국 중 유일하게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탄생설화가 없습니다.이름도 말그대로 ‘온화한 임금’이었고요.
온조왕도 누리지 못한 이 탄생설화를 가진 백제 유일의 임금. 그가 무왕입니다.
대성8족 귀족들의 원로원인 ‘정사암회의’가 왕권을 뒤흔들기 시작한 것은 아차산아래에서 개로왕이 전사한 뒤 공주로 도읍을 옮긴 뒤부터였습니다.
임금들은 귀족들의 암살대상이었고,그때마다 실권을 쥐는 귀족들에 의해 백제는 좌지우지 되었습니다.성왕이 도읍을 사비로 옮기며 새롭게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지만, 그의 죽음으로 좌절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죽음을 가져온 관산성전투의 지휘자였던 성왕의 아들 태자창(위덕왕)은 왕위에 올랐으나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습니다. 패배의 책임은 무거웠고,아버지의 죽음은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꿨는지라 금동대향로를 만들었고,서산마애불은 아버지 성왕의 미소를 새겨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위덕왕이 죽은 뒤, 당연히 왕위를 이어야 할 아좌태자는 당시 일본에서 급히 귀국을 서둘렀지만 실종되어버립니다. 결국 왕위에 오른 것은 위덕왕의 동생인 혜왕.그러나 실권자는 혜왕의 아들인 효순태자(법왕)이었습니다.
법왕은 이름 그대로,법치주의자(법가)였습니다.그의 꿈은 귀족들의 손에서 백제를 구해내는 것이었고,그를 위해 왕실의 힘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대성8족을 비롯한 귀족들에 의해 무법천지로 떨어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약한 아좌태자보다는 자신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겠지요.아좌태자는 아시다시피 예술가였으니까요.
혜왕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법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599년입니다.
이때 백제왕실의 미래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옛 마한의 귀족들이었습니다.
이 귀족들에겐 대성8족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지요.그것이 바로 ‘벽골제’와 ‘금’입니다.이 두가지를 가진 마한 귀족들의 돈 줄은 ‘김제’에 있었지요.이름그대로 벽골제와 금을 가진 땅! 벽골은 ‘볏골’즉 벼의 고을에서 나온 이름이고요.
(지난 5월에 이 벽골제를 다녀왔는데, 전국은 AI의 공포에 떨 때 였습니다.그런마당에 그 근거지인 김제에 갔으니 참 썰렁한 여행이 아닐 수 없었지요. 게다가 비까지 왔으니.... 그래도,조정래 문학관도 가까이 있어서 조용한 여행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곳이었습니다. 언덕위에 올라 1500여년을 흘렀을 강물-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을 바라보는 색다른 기분도 느껴보시고요,가까이 있는 정읍한우마을에서 고기도 드시고^^)
벽골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팽창정책에 의해 한성에서 공주로 다시 사비로 쪼그라들던 백제의 새로운 희망이었습니다.물을 다스리기 위해 대부분의 나라에서 하늘에 빌던 시절,백제인(익산의 마한인)들은 그것을 과학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하긴, 과학도 18세기 과학혁명이전까지는 ‘합리적인 신학’에 불과했지만 말입니다.
김제평야에서 쏟아져나오는 두 개의 보물을 손아귀에 쥔 귀족들의 근거지는 익산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익산까지 군산-김제를 잇는 만경강이 흘러들어왔다고 하니까요.
익산의 마한귀족들은 자신들의 꿈을 이뤄줄 새로운 인물을 찾았습니다.그가 바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부여 장(무왕),서동이었습니다.
서동은 어머니가 궁녀시절 위덕왕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위덕왕의 힘이 얼마나 없는지 자신의 아들인 부여 장도 돌볼 처지자 못되었다고 생각했다면,그것이말로 커다란(!)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위덕왕은 아좌태자의 그릇을 알고 있었기에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부여 장을 보호하기 위한 비밀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었으니까요.
동생 혜왕과 조카 법왕이 왕위를 노리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귀족들의 등살도 잘 아는 그로선 부여장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궁궐에서 멀리 내쫓는 선택을 합니다.
이 부여 장을 돌봐 준 사람이 바로 지명법사입니다. 그는 위덕왕의 국사였지요.말하자면 측근 중의 측근이고,정책브레인이며 위덕왕의 밀명으로 부여 장의 킹메이커였던 것입니다. 그는 서동의 왕자수업을 비밀리에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여 장(서동)은 정략적으로 익산의 귀족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이것을 설화라는 은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동이 다섯 개의 금을 찾았다는 마룡지 뒷산은 이때부터 오금산으로 불렸습니다. 지명대사는 이금을 선화공주를 데려오는 조건으로 진평왕에게 보냈다고 하는데,이것은 아마 익산의 귀족들이 서동이 왕이 될 재목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을 통과한 이야기의 은유일 것으로 보입니다.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인지 아닌지는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저는 개인적으로 진평왕의 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3.
서기 600년,익산 마한귀족들의 경제적 뒷받침에 힘입어 서동은 쿠테타에 성공합니다. 법왕은 귀족들에게 너무 많은 미움을 받았기에 은밀히 진행된 서동의 쿠테타 계획에 그들이 가담해버렸던 것입니다. 귀족들로서는 호랑이를 내쫓기 위해 사자를 불러들인 셈이지만 말입니다.
무왕은 이름 그대로 다시 백제의 부흥을 이끌어냅니다. 그가 남긴 자취들을 보면 그의 꿈과 힘을 짐작하게 합니다.그의 정원인 궁남지는 과학을 신봉하였던 합리주의자 익산귀족들과 결합한 무왕의 스케일을 보여주며, 미륵사의 규모는 입이 벌어질 지경입니다.특히 그 거대한 석탑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기중기’는 정약용보다 1000년이상을 앞선 것이며, 가람의 배치는 완벽한 수학,그대로입니다.
무왕은 아예 도읍을 익산으로 옮길 생각을 하였습니다.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전 세상을 떠났고,뒤를 이은 그의 아들 의자왕은 개척자라기보다는 전통귀족의 우아함을 더 숭배하는 보수주의자였습니다.그는 부여의 귀족들의 세련된 모습에 열등감을 갖는 신흥부자마냥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익산천도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채 부여로의 유턴을 감행합니다.
무왕은 강력한 나라를 만들면서 단 한가지 만들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시스템입니다.관리등용시스템이 없었던 것이지요.가장 합리적인 시스템인 유교가 백제엔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귀족의 힘이 그만큼 컸던 탓도 있었겠지요. 귀족의 힘을 이끌어내는 데 설득이나 카리스마 어느쪽 기술도 갖지 못한 의자왕은 결국 자식을 많이 낳아 관직을 채우는 지극히 코메디적인 방식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받을 때 귀족들은 모두 콧방귀를 뀌며 두문불출했습니다. 후에 백제부흥군의 활동이 그토록 열정적이었던 것은 백제왕조의 몰락만을 바랐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여줍니다.
이렇게 백제 무왕의 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꿈이 태어난 마룡지도 잊혀졌고요. 그를 왕위에 올려준 김제의 금은 일제 강점기동안 모조리 빼앗겨버렸습니다.
4.
백제 무왕의 꿈은 꺾였지만, 그 꿈을 꾼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300년 쯤 지나서 같은 설화를 가진 인물이 태어났으니까요. 그가 바로 ‘견훤’입니다. 견훤이 패배했을 때 그때는 이미 고대사는 끝이났습니다.더이상 신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1500여년이 흐른 지금, 역사도 신화도 모두 잊혀져버렸습니다. 아무도 마룡지를 찾지 않고, 드라마 한컷이라도 촬영한 소나무에도 붙는 그 흔한 푯말하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냥, 연못일 뿐...
실크로드길에 있는 어느 동굴불교사원에는 간절하게 기원한 상인의 기도가 적혀있었습니다.
'대대로 번영하기를...'
그러나 그 상인의 마을은 모래폭풍에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그 상인의 기도도 상인의 삶도 모래폭풍속에 묻혀져버렸지만,그래도 우리는 압니다. 그 기도는 영원하다는 것을.신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신화는 영원하듯이....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9-05 16:20)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