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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1/09/05 22:15:32 |
Name |
헥스밤 |
Subject |
후배가 결혼하다. |
궂은 날씨에 손님도 없고 출근도 귀찮았던 여름의 끝자락에, 동아리 후배에게 문자가 왔다. 다음 달에 결혼을 한단다. 잠깐 기분이 묘해졌다. 사랑, 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나이를 지나, 단골 술집이 없어지는 사건을 겪는 나이를 지나, 일상을 벗어나는 일들도 결국 일상 안에 있다는 깨달음을 느끼게 되는 나이를 지나, 결국 후배가 결혼하는 나이까지 왔다. 괜히 유난스럽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후배라고 해 봐야, 재수를 한 후배니 뭐 나이는 같을텐데. 아니, 빠른 생일이라고 했었나. 뭐, 잘 기억나지 않아요.
동아리의 전통에 따라 동아리 친구들과 모여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단다. 나야 가게에 매여있는 몸이니 저녁 먹으러 나가진 못하겠고, 청첩장은 적당히 내 동기에게 주렴. 아니면 뭐 저녁 먹고 애들하고 잠깐 가게 들르든가. 하고 답장했다. 이십대의 끝자락에 위태하게 걸쳐있는, 이제 결혼도 하는 녀석에게 애들이라니. 멋적은 일이다.
그렇게 며칠 전, 오랜만에 애들을 만났다. 한 명의 동기녀석과, 한 분의 누님과, 다섯 명의 애들을.
가게로 들어오는 녀석들을 보며 푸핫 웃음이 났다. 뭐야. 십년 전이랑 변한 게 없잖아. 엄청나게 명랑하던 후배 김양은 여전히 명랑했다. 너랑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아.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였구나. 요즘 뭐하고 지내니? 백조요. 아. 여전히 고시공부 중이신가. 오빠 저 한달전에 라식해서 술 못마시니까 무알콜 만들어줘요, 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여기 무알콜같은거 없으니까 걍 도수 낮은거 마셔. 한달이나 되었는데 뭔 상관이람'이라고 대답했다. 십여년 전에 고스로리 패션을 자랑하던 다른 김양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내일 모래 서른인 고스로리라. 그나저나 파워 다이어트에 성공했군. 나는 다이어트 그런거 포기했는데. 독한년. 언론고시 준비한다고? 힘내라. 그나저나 다이어트 건은 정말로 부럽군. 괜찮은 애들 보이면 동아리에 납치해야지, 하는 야심을 가지고 되도 않게 과반 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내 눈에 든 불쌍한 박양은 원한 대로 교사가 되었다. 나름 SES의 유진을 닮은 깔끔한 미인상이었는데, 여전하군. 남고 국어선생이라고? 인기 좋겠네. 일은 할만해? 라는 내 질문에 그녀는 대학 시절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전혀' 라고 깔끔하게 대답했다. 짜증만 늘고, 애들은 말을 듣지 않고. 몇 달 전엔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허어라, 예쁘고 성격좋은 고등학교 교사인 애인을 차는 멍청이도 다 있구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권양. 권양 역시 박양처럼, 나의 '동아리 납치 프로젝트'에 희생된 녀석이었다. 과반학생회 후배였고, 어쩌다 보니 과 후배가 되기도 했고, 생각해보니 사는 동네도 비슷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몇번 집 앞에 있는 공원을 걷다가 마주친 적이 있었지. 수업도 몇 개 같이 들었겠구나. 아쉽게도 그닥 친하지는 못했다.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다가, 한때 내가 그녀의 친구와 좋지 않은 염문이 나기도 했으니까. 집 방향이 같은 덕에 동아리 회식이 끝나고 같이 몇 번 택시를 탄 적이 있었지. 언젠가의 택시 안에서 그녀는 내게 그녀의 친구와 관련된 내 연애사와 관련하여 '왜 그랬어요?'라고 물었던 적도 있는 것 같다. 뭐라고 대답했더라. 뭐라 대답할 말이 있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어쩌다 보니 당시 후배들이 전부 여자였던 덕에, 내가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그녀들은 졸업하고 취직 준비를 하고 해서 참 만난 적이 적었다. 몇 번 정도 있었겠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모두에겐 모두의 삶이 있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으로도 인생은 지나치게 바쁘니까. 잠깐 모두의 삶이 서로의 삶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는 즐거웠나. 그렇게 묻는다면 뭐라 대답할 말이 있을까. 즐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동아리가 즐겁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지금은? 글쎄. 뭐. 다들 잘 사는 것 같고 변한 건 하나도 없고 다들 너무 예쁘고 귀여운데 게다가 나는 괜찮은 술을 만들 줄 아는 바텐더이니 즐거워야지. 그때도 즐거웠고 지금도 즐거운 것 같고. 그때도 나는 이랬고 지금도 이러고. 자네들도 변한 건 없는데. 근데 무엇이 문제이길래 인생은 이 모양일까.
그래도 그렇게라도 이렇게 만나게 되니 모두들 반갑네. 한 달 코앞에 온 결혼 준비는 뭐 잘 되고 있겠지. 언젠가는 오늘 모인 사람 중 다른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될 거고, 그때 또 한번 볼 수 있겠구나. 모두들 그때까지 잘 살아있기를. 아니 뭐 당장 한달 후 결혼식날 볼 수도 있겠구나. 다들 피곤하고 바빠도 그 날은 즐거울 수 있겠지. 푸후. 잘 버티자.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9-0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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