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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19 11:45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대마도주가 선조에게 조총을 준 것은 1591년이겠지요? 1391년이면 조선건국 전이니 말입니다. :)
08/09/19 11:45
역사에 관심이 많은 저에겐 어떤글보다 반갑고 재밌네요. 보통 추게로를 안누르는 편입니다만, 이글만큼은 추게로를 누르게 되네요.
좋은글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08/09/19 12:10
중간에 말씀하신 3열 교대발사전술은 '테르시오(tercio)'라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스페인 보병군단에 의해 실전화되었고, 스페인의 명장 알레산드로 파르네스가 이 전술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사실 스페인의 진정한 힘은 파르네스의 육군이었습니다. 아르마다니 뭐니 하지만 해군은 허접이었죠).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즐겨 사용했고, 다케다군과 격돌한 나가시노 전투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08/09/19 12:21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점이 있는데 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염초란것이 필요한데 염초를 대량생산하는 제조비법을 세계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이순신 장군이라고 들은거 같습니다. 요 부분이 임진왜란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 싶어요~.
08/09/19 12:31
나는 고발한다님// 단순한 3열 교대 일제사격 아닌가요? 제가 아는 테르시오는 장창병과 총병의 혼합배치하여 총병이 쏜 다음 장창병이 돌격하는 전술인데요. 쏘고 뒤로 돌아가서 장전하고 다시 나와서 쏘는 것은 카운터마치라고 한다는군요.
08/09/19 13:38
happyend님//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조금만 덧붙이자면, 당시 동북아의 상황을 살피면 조선은 그럴 법 했습니다. 일본은 내란과 더불어 신식 무기의 필요가 급증했고 좋은 기회도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설명하신 조총의 입수 배경이요. 중국 역시 토이기(土耳其: 오스만투르크 제국)를 중심으로 한 유럽 대륙의 치열한 전쟁에 영향을 받아 수석식(부싯돌로 격발하는 방식: 비나 외부환경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격발 속도도 빨랐습니다.) 조총을 들여오게 되지요. 그러면서 화기를 계속 발전시켜 나갑니다. 당시 동북아 시대의 세력은 묘하게 균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재면서 당분간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믿을 만큼 평화스러웠죠. 조선은 조총의 개발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오군영이나 삼군의 전법은 활을 중심으로 하여 재편되기까지 하죠. 안일한 안전의식이 무기의 발전과 국력의 증진의 기회를 동시에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임진왜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으로 조총의 기술을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격변을 읽지 못하는 붓은 국력의 쇠퇴를 가져올 뿐.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08/09/19 13:47
삼단격(三段撃ち:さんだんうち)을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나가시노 전투에서 실제 사용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시 되는 부분도 있는 모양입니다.
08/09/19 13:49
opscv 님//여기서 말하는 화약은 '흑색화약'으로 유황,목탄 즉 숯,그리고 염초(초석)을 배합하여 만들어냅니다.유황은 일본에 많고 구하기도 쉬우며 숯이야 말할것도 없지만 이 염초가 문제였습니다.염초는 자연상태로 존재하지 않고,오로지 화학적 방법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가령,산소와 수소를 아무리 오랫동안 같이 두어도 물이 되지 않잖습니까?그래서 물리변화와는 달리 화학적 변화는 지극히 어려운 까닭에 화약의 비법은 오랫동안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고요.최무선도 결국은 알아내지 못하고,배웠으니까요. 이순신은 염초의 대량생산법을 개발한 것은 아니고,그 휘하의 군관이었던 이봉수가 대량생산했습니다만,그것은 최해산의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어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다만 화학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빠른시간내에 만들어낸 일만은 높이 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수많은 전투에 쓰인 화약을 감당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봉수의 공로입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대량생산체계를 갖춘 것은 인조시대인 1635년으로 군관 성근이 실험을 통해 알아낸 것을 당시 병조 판서인 이서가 <신전차취염초방>에 기록한 뒤 부터라고 합니다. 덧붙여,<천지현황>총통의 이름은 세종임금시대 만들어진 것입니다.그러니 명종대에 새롭게 개발한 무기는 아니고,다만 판옥선에 탑재한 것을 강조하다보니,글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듯하고요.... 이글은 그냥,한국사가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추길 바라고 공부하는 사람의 가벼운 산문일 뿐이니,가볍게 읽어주시고요,책으로 출판할 계획은 없으나,저작권을 침해받는 것은 절대로 아니될줄로 압니다. 여러분들의 좋은 지식을 보태주셔서 감사합니다.쉽게 쓰다보니,오타도 많으나...일일이 수정 못하는 점도 양해바랍니다.^^
08/09/19 13:50
나가시노 전투에 사용되었다는 그 전술은 육군사관학교 교수님(당연히,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는)의 논문에서 본 것이라...기약없이 병원신세중인 노트북을 되찾아오면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에궁....
08/09/19 14:05
재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막연히 '조선 왕조'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서 세종대왕의 '자주성'부분은 립서비스로 생각됩니다 늘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08/09/19 14:48
임란전 축성과정에서는 글의 재미를 위해 약간 과장이 들어 있는 듯 합니다. 사실 조총 두자루 때문이라기 보다는 대마도를 통해서 꾸준히 일본이 침략한다는 첩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남부지방에 축성을 지시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200년 평화는 길었고 일본군이 그리 강대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죠. 힘든 부역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일이고 당시 전쟁은 역사속에서나 나오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제법 진지구축이 이루어 졌고 그 덕에 여러 전투들, 특히 1차 진주성의 승리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08/09/19 19:03
흠. 글쎄요.
서양사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대포라면 모를까 개인용 소총이 전쟁에 영향을 많이 줄 정도로 쓰인 것은 거의 18세기 되어서 아닌가요? 대포를 공성전에서 쓰게 되면서 효과를 톡톡히 봤던 전투는 콘스탄티노플 공략전이었구요. 그에 맞추어 변화된 성벽의 효과를 보여줬던 것은 로도스도 공략전이었구요. 해전에서 기존 갤리선끼리의 싸움에서 포격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은 갤리아스(대항2에서 베네치안 갈래아스라고 나오죠?)라는 배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레판토 해전이죠. 다 임진왜란과 비슷한 시기지만 이때까지도 총보다는 활을 사용했습니다. (총은 장거리 무기라기 보다는 근접전 무기였죠.) 심지어 영국해군과 스페인 해군이 싸웠던 전투에서도 바다위의 대포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아는 상식. 영국 해군의 대포 사정거리가 스페인 해군보다 길어서..영국이 승리했다지만, 실제로는 워낙 쓸데없이 규모만 컸던 스페인 함대가 바다에서 제대로 전투 한번 치뤄보지 못하고 영국 해군의 화공과 어설픈 보급으로 공동묘지가 되었던 것 뿐이었죠. (이건 디씨 해전갤에서 본 내용임..) 그 시절까지만 해도 장거리 포격전으로 상대방을 이긴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재수좋게 저쪽 배 화약고에 불이 붙지 않는 한. 임진왜란때도 이순신장군님의 대포로 일본 해군을 뽀작낸게 아니라 상대를 함정으로 몰아넣어서 승리한 경우구요. 당시 왜군이 사용한 그 전술이 조총을 순전히 상대방을 겁주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시대 당시 사격 전술이란 사람들끼리 여러줄로 겹겹이 모여서 대충 조준한 후 한번에 여러발을 쏘는 한마디로 탄막을 형성해서 맞으면 다행 안맞으면 말고.. (이게 그 '보링머신-총신에 길을 내서 탄도가 회전하도록 만드는' 나오기 전의 총기 사용 전술이었습니다.)였기 때문에.. 한 줄씩 쏘고 나머지 두 줄은 재장전하고 있는 전술로는 탄막이 어설프게 형성될 수밖에 없기때문에 상대 밀집 대형에 피해를 주기 힘들겠죠. 그래서 위의 A_Terran님 말씀이 맞습니다. 카운터 마치는 근세기에 나온 전술이죠. 그 전에는 우선 근접한 후 창병끼리 붙기 전에 3열로 서있는 총기부대가 상대방에 한 방 쏜 후에는 더이상 할 일이 없었죠. 활이 총기에 비해 단점은 적어도 그 시대에서는 '기술'이 필요하다 뿐이었습니다. 총기는 아무나 쉽게 사용할 수 있지만, 활로 멀리있는 무언가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훈련이 필요했거든요. 그나마 공성전에서는 확실히 화약을 사용한 전술이 많이 개발되긴 하였습니다만, 야전이나 해전에서는 역사를 바꿀 정도의 이펙트를 보여주진 못했었죠. 아무튼 르네상스 시대의 개인 화기는 장거리 무기로는 활이나 석궁보다 못하였습니다. 근접전 무기였죠.
08/09/19 19:03
펠쨩~(염통)님//^^언제나 흥미로운 댓글 감사하고요,
제가 현재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임진왜란과 관련된 글들은 5년전에 읽어 기억도 잘 나지 않아,날짜와 명칭은 부정확합니다만.... 임진왜란에 대해 조선에서 낌새를 알아챈 것은 왜관이 텅텅 빈 뒤부터라고 합니다.그제서야 이일과 신립을 축으로 하는 전시체제에 돌입했고,각지방의 무기고를 점검했습니다.물론,그결과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는 안봐도 비됴입니다만... 이순신의 경우는 그 점검단이 떠난 바로 직후인 2월 19일에 각 포구와 진영을 순시 다시 한번 점검합니다.장계에 잘 되었다고 보고서가 올라간 사도포구는 그 보고서가 허위란 것을 알고 징계를 내리기도 하였고,전시체제에 들어갔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순신의 경우일 뿐이었고,대부분은 축성과정에서 지방 토착 양반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목민관'이란 상소문에 목이 간당거리기도 했습니다. 김시민의 경우...개인적으로 가장 연민이 가는 인물이라...다음에 다룰까 생각중이었습니다.기회가 된다면(이번 여름에 진주성을 다녀왔고요....) 그러므로,제글은 다소 과장은 있으나 '왜곡'은 아닐 것입니다. Zakk Wylde 님//네.... (이글의 목적은 그냥,역사를 즐기자...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그러나,출처는....혹시 모르니 밝혀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08/09/19 20:29
소총은 16세기때부터 활용되기 시작해 17세기엔 이미 대세를 잡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화력이 매력적이었죠. 조준사거리는 짧지만 일단 사거리 안에 들어온 적에겐 확실한 데미지를 가할 수 있으니까요. 중세 기사들로 대표되는 기병돌격이 무너진 것도 저 소총의 등장입니다. 최대한도로 발달된 활로도 반복되는 기병돌격에 맞서 확실한 데미지를 가하진 못했습니다. 그만큼 기병돌격을 버텨줄 보병대가 강해야 했죠. 대표적 케이스가 스위스 용병대지만, 근성의 스위스 용병대도 수십차레의 기사돌격에 무너진 적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소총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었죠. 사거리 자체는 짧지만 일단 사거리 안에 들어온 기병은 확실하게 쓰러집니다. 이게 반복되는 랜스차징때마다 누적되면 결국 보병보다 기병이 먼저 무너집니다. 그 결과 기병은 돌격해 적진을 충격효과로 무너뜨리는 창기병에서 총을 들고 카라콜 전술로 적을 살상하는 킬링효과 중심인 총기병으로 전환됩니다. 총병의 살상효과가 궁병보다 사거리 면에서 밀림에도 불구하고 두배 정도 됐죠, 아마. 17세기 유럽의 보병전술이라면 스페인에서 유래한 테르치오와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오렌지공 모리스가 개발한 선형진인데, 테르치오의 경우,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26열의 총병대가 존재하며, 카운터마치 전술 역시 이미 쓰고 있었습니다. 연속사격을 위해서 필요한 최적열수는 15열인데 26열이나 갖춘 이유는 속도 때문이었죠. 15열로 배치될 경우 총병들은 분당 30m 속력이 한계였지만 창병들은 분당60m 전진이 가능했고, 이 속도에 맞추기 위해 화력 효율 감소를 감수하면서 26열을 유지했습니다. 원거리에서는 총병이 창병 좌우와 앞에 배치되어 사격전을 펼치고, 근접전시에는 창병 안으로 들어가거나 주위를 돌면서 각자 사격을 하는 식이었죠. 테르치오, 특히 스페인 테르치오는 무적전설을 150여년간 유지합니다. 치가 떨리는 방어력으로 측면 기병돌격이든, 고지 위에서의 연속사격이든, 심지어는 네배 이상의 적의 포위공격마저도 버텨내는 괴력을 보였죠. 선형진은 이 테르치오를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전술로, 테르치오와 비교한다면, 선형진은 총병의 화력효율을 최대로 발휘하게끔 조직된 전술이란 게 특징입니다. 당대 최정예군이었던 네덜란드 군에 맞춰서 개발된 전술로, 숙달된 네덜란드군 총병들의 연속사격을 위해서는 10열이 필요했는데(이는 총기차이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스페인군은 화력이 강한 대신 연사속도가 느린 중 머스킷, 네덜란드군은 균형을 맞춘 표준 머스킷이니까.)이에 맞춰 총병을 10열로 배치하고, 2000명 단위인 테르치오 연대 대신 800~1000명 단위의 소규모 연대와 이 연대 넷을 합친 여단을 만들죠. 한개 연대는 총병 두개대대(10열)와 창병 두개대대로 편성되어 있고요. 자유로운 사격을 선택한 테르치오와는 달리 엄격한 화력통제를 통한 일제사격을 선택합니다. 카운터마치와 일제사격의 조합은 특히 한 횡렬식 물러나면서 사격할때 극대화됩니다. 창병 속도에 총병 속도를 맞추기 위해 화력 효율을 포기한 테르치오와는 달리 화력 효율을 위해 총병 속도에 창병 속도를 맞춰 분당 30m 전진이 가능했던 전술입니다.
08/09/19 21:03
저도 조총에 대해서는 별로라고 생각했다가
역사 스페셜에서 의외로 나무토막을 말 그대로 아작내버리는 화력에 깜짝 놀랐죠 일본 박물관에 남아있는 주먹만한 관통 흔적이 있는 갑옷이라던지 활과 뇌가 여러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 조총의 화력도 실제 전장에서는 상당히 공포스러웠을꺼 같더군요 문제는 평지에서 싸우려고 깝쳣다는거 포는 확실히 조선이 앞서있었는데 그걸 이용하지 않은게 참...
08/09/20 02:06
일본사 전공하시는 분들이나 혹은 일본학자들 가운데에는 오다노부나가가 3단철포로 '화망'을 구축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시거나 정설로 받아들이시는 분들이 많은데,
반대로 서양전쟁사 쪽 분들은 약간 코웃음 치는 분위기죠. 네덜란드의 마우리츠공에 의해 제안되고 노르웨이의 구스타프 아돌프가 백년전쟁에서 카톨릭리그군을 격파한 선형진에서나 라인배틀에 의한 화망구축의 개념이 유럽에 정착되었는데, 이게 1620년대거든요. 일본애들이 주장하는 노부나가의 3단철포 화망구축설은 당연히 임진왜란 전이니 유럽의 그것보다 40년전이죠. 포르투칼로부터 총포를 들여온 일본이 유럽보다 40년먼저 선진적인 철포 전술을 개발했다는 이야기이니, 어느쪽이 좀 더 설득력이 있는지는 판단하시기 나름입니다. 조총이 당시 강력했던 물건임에는 확실합니다만, 갑옷에 대한 관통력이 뛰어나다는 점과 활이나 석궁보다 훈련기간이 덜 필요하다는 점외에는, 활보다 크게 뛰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연사력이나 살상력, 기후에의 적응도, 보급문제(화약/총알 보급)등에서는 활이 더 유용한 무기였으니까요. 신립장군의 기마대를 무찌르는데 조총이 큰역할 을 했을거라는데에는 크게 의심하지는 않습니다만, 전체적으로 공성전이나 전면전에서 위력을 발휘한건 조총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대규모의 조총부대를 보유한 일본군대는 노부나가군을 제외하고는 많지 않았고, 왜란당시의 기록에도 조총수의 비율은 10%정도라고 하더군요. 왜란 일본 육군의 주력은 긴창이나 큰칼을 쓰는 근접전 부대였다고 합니다. 일본 전체가 조총이 주력이 된 시기는 17세기가 되어서야 찾아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화약전쟁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는 될 수 있지만, 약간은 과장 (^^)이 끼어있긴 하죠. ^^ 좋은글에 감히 덧칠해서 죄송합니다만, 재밌게 잘읽었다는 감사의 말 또한 드리고 싶습니다.
08/09/20 07:29
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비격진천뢰...맹꽁이서당이었나 윤승운님의 작품에 나온 적이 있는데 최초의 시한폭탄이었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나네요.
08/09/20 11:14
율리우스 카이사르님// 전 오히려 전국시대때 3단 철포로 화망을 구축했을지도 모를것이다라고 생각은합니다. 다만, 그게 정말 전황을 뒤집을 만큼 혹은 전술적으로 효용성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일본사에 나오는 오다노부나가식전술을 보면 공세때 3단철포술을 주된 전략으로 썼다고 나옵니다만, 제가 아는 지식으로 3단철포 혹은 4단철포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앞에 방어벽을 세우고 뒤에 철포를 격자로 배치시켜 적을 요격하는 전술인걸로 아는데, 실제 이런식으로 공격전에서 병참을 구축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일이고, 이런식으로 인원을 배치시킬려면 넓다란 평야에서로 적을 대치된 상태에서 먼저 자리를 잡아야 되고, 만약 적이 기마위주라면 (일본의 기마병은 몽고의 기마병과는 달라서 말타고 싸우는곳까지 가서 내려서 싸우는 -_-!!) 오히려 선수를 빼앗길 가능성이 높아, 도저히 대규모로 썼을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소규모의 (100 혹은 200개의 조총) 병력으로 적의 기선을 제압할때 썼을 가능성은 높고, 이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 나오는 환상적인 철포대는 저도 없었을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또하나 일본의 철포대는 일본성곽의 간격으로 인해 (높고 넓은) 방어전에는 괜찮은 효과를 발휘했을것으로 보이지만, 임란때 조선의 성을 점거하고 지킬때 철포의 효과는 일본성과는 다른 조선의 성의 구조때문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수비병이 성위에서 지키는 공간은 일본성에 비하면 좁아서) 전혀 유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3단철포는 존재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술, 전략적 가치는 미비하고, 오다 노부나가도 이점을 이해하고 기선 제압의 용도로 썼지 대부분은 보병과 창병의 탁월한 운용이라고 봅니다 (아 외교술도 뛰어났죠~~)
08/09/24 16:44
Eternity님// 스웨덴 국왕 맞습니다. 구스타프 아돌프가 선형진을 더욱 가다듬고 발전시켜서 장창병과 총기, 대포의 조합으로 진정한 의미로서의 테르시오를 격파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11/09/11 20:36
삼단철포는 이순신이 철쇄 그러니까 쇠사슬로 왜선을 뒤집었다는 애기에 버금가는 낭설 아니던가요?.
그 근원을 보자면 오제 호안의 신장기인데 신장기라는 것은 에도시대의 군기물로써 사료적 가치는 거의 없는 논픽션 소설 정도의 물건이라 신용도는 없다고 봐도 좋은 서적입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저격한 오케하자마 기습설(.....)등을 비릇한 오다 노부나가 떡밥들의 진원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당시 민중의 입맛에 딱 인터라 널리 퍼진데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 정부 차원에서 마치 사실인냥 교과서등에 기록해서 전 일본을 떡밥에 몰아넣은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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