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3/02/01 13:05:02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베아트리체 이론


"지나서 생각하면 안 좋은 기억은 다 사라지고 남는 건 좋았던 거랑 잘 못 해준 것밖에 없거든. 지금도 소식은 듣고 싶은데..."

간만에 듣는 말, 하지만 잊을만 하면 하던 말이다. 대학교 오기 전부터 사귀었다가 새내기 때 깨졌다는 여자 얘기. 기억이야 당연히 난다. 한 번 올라온 적도 있었고 어느 날 잔뜩 붙어 있던 사진을 다 뗐던 것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뭐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가 바뀌는거야 어디서나 있는 일이긴 하지.

답지 않게 도란도란 얘기하는데 내 기억이랑 비교해보면 역시 뭔가 다르다. 누가 서울 올라오랬나 (...) 지가 찬 거였고 다른 여자 사귀었을 때 복수로 싸이의 사진이 다 털리자 분노했던 것도 기억나는구만.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그 때 왜 헤어졌을까, 왜 서울 올라왔을까로 바뀌었다.

이럴 때 나오는 말 베아트리체, 첫사랑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어디서 시작된 말인진 몰라도 이 인간도 알고 있는 걸 보면 나만 아는 개똥철학은 아닌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자이자 추억 보정을 통해 이상향으로 기억에 남게 되는 여자. 당연히 짝사랑이든 헤어진 여자든 지금과는 연관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온전히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일테니. 이 말의 시초가 됐을 단테 역시 그녀랑 맺어졌으면 평생 그리워하긴 했을까 싶다. 그의 아내가 그런 말 했다던 거 같은데... 아무튼 과를 초토화시켰던 카사노바도 이런 여자는 있나보다.

그 남자랑 사귀는 여자에게는 최대의 적일 게다. 사람마다 다른가보다.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커플이 있는가 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거나 자기 역시 첫사랑에 대한 추억으로 맞받아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아마 내년 내지 내후년쯤 결혼할 거 같은 이 인간의 여친도 알긴 알 거다. 장난으로야 일러줘야지 그러지만 말해봐야 이 인간이 몇 대 맞는 거 말고 문제는 없을 거다.

뭔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여자 사귈 때마다 그 얘기를 하고 시작하는 인간도 있다. 내 참 -_-; 진짜 뭔 자신감인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름 옛날 생각도 나고 하면서 듣고 있는데 뜬금없는 말을 한다.

"그러니까 니도 빨리 xx이 잊으라고!"

허?

나 요새 댁한데 걔 말한적 없거든??

---------------------------------------------------------------

딱히 신경 써서 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닿기엔 너무 멀어진 지가 오랜데 뭐 어쩌라는 건지. 그 사이에 몇 명을 더 좋아했고, 한 명과는 그래도 연애라는 걸 해서 솔로부대의 계급을 줄일 수 있었다. 얘기를 해도 최근에 좋아한 애를 하지 졸업도 하고 내려간 애를 왜 했겠는가? 그런데 말을 들어보면 그게 또 아닌가 보다. 어쩌라고, 난 기억 안 나는걸.

뭐 남은 기억이 없진 않다. 근데 좋은 기억이 있어야 얼마나 되겠는가. 만취한 상태에서도 나 부른다고 하니까 화장실 가서 술 깨고 왔다던가 그런 거? 사리분별은 참 잘 하는 애였지. 그리고 또 뭐? 생일잔치하러 가는 길에 딱 마주쳤던 거? 그러니까 왜 우리집 근처에서 그런 걸 하냐고. 덕분에 도움 된 적은 있었다. 카드 통장 다 잃어버린 상황에서 무통장 무카드 출금하는데 비밀번호를 걔 생일로 해 놨었으니까. 절대 잊을 수 없었거든 -_-;

+) 따로 비밀번호가 필요합니다.

몇 달도 안 돼 끝난 짝사랑이었다. 참 신속했지.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좋은 친구로 남자고 다짐했는데 그게 말이 되는 일이던가. 그 때는 나는 될 거라 생각했었지만 사이는 멀어져갈 뿐. 내가 친한 사람은 다 걔랑 친한 사람이었고 덕분에 소식을 참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좋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이었다. 안 좋은 소식 들어도 내가 손을 쓸 수가 없는데 이게 좋을 리가 있나. 집이 멀지도 않았는데, 아프다는데 약도 못 사다주는 상황이었구만. 걔 의사도 안 들어보고 나한테 약 챙겨주라고 한 애는 대체 뭔 생각을 한 건지...

뭐 그래도 군대 갈 때쯤엔 좀 사이가 나아졌었다. 거리가 멀어지니 서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던 거겠지. 가끔 통화하고, 휴가 나오면 일 년에 한 번 정도 만나고, 그러다가 소식이 끊어지고... 제대할 때쯤에 들은 소식은 꽤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더 이상 마주칠 일 없을 거라는 거에 안도하기도 했다. 다만 졸업식 날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걔가 언제 졸업한다는 정보가 없었으니까. 마주치면 안 됐으니까.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안심하고 있을 때 다시 마주칠 건 대체 뭐였는지. 그것도 같은 수업에서.

그래도 다행이었다. 시간이 지났고 거리도 멀어졌을 때, 서로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좋은 친구로 남는 것, 그렇게 우리는 친구로 헤어졌다.

지금도 가끔 통화를 한다. 무슨 얘기를 하든 암묵의 룰이 있다. 참 많은 일이 있었고 참 재밌거나 씁쓸한 추억이었지만 우리 둘만의 얘기는 하지 않는 것. 어차피 그 때 다른 얘기도 참 많이 했었기에 대화에 부족함은 없다. 글 쓰고 싶어했던 사람이 많았던 국문과, 역시 글을 쓰고 싶어했던 둘, 지금도 언젠가 책을 내고 싶다고, 책 내면 서로 사인해서 교환하자고 했던 얘기들... 이런 얘기들이랑 참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그 때를 얘기하는데 화제가 부족할 리가 있을까. 걔 스토킹했던 공공의 적도 있고 -_-;

그 정도다. 그리워하기는 무슨. 꿈을 꿔도 다른 애 꿈을 더 많이 꿨고, 지금 와서는 결혼하긴 좀 그런 애였다는 생각도 드는구만 -_-;

뭐 그래도 요새 계속 생각나는 일은 있다. 일이라기보단 그냥 문자 하나였지.

소설 창작 학회에서 처음 냈던 소설, 지금 보면 자다가 하이킥 정도가 아니라 108계단 40단 콤보가 나올 글이었지. 근데 이걸 또 누가 걔한테 갖다준 모양이었다. 용의자는 있지만 본인은 기억 안 난댄다. 그걸 보고 그런 말을 했었다. 자기를 감동시켜줄 글을 써 보라고. 그건 자기에게 감동을 주지 못 했다고.

잡담하다가 나온 건지 진지한 얘기 하다가 나온 건지는 기억이 안 난다. 딱 그 부분만 기억나니까.

사실 이게 생각나는 것도 웃기긴 하다. 딱히 지금이랑 접점은 없었고 그냥 소설 하나 보고 나온 말이었으니까. 드라마라면 남주가 이 말을 듣고 열심히 연습해서 정말 감동을 선사했을 거다. 아니 그런 노력이라도 했겠지. 국문과에서 글 빼면 뭐가 남을까?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으로 위장해서 차였던 여자에게 글로 친해진 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들켰고 -_-;) 심심하면 여자에게 시를 바치는 놈도 있었다. ... 세 명에게 한꺼번에.

근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 말 듣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그 이후로 오히려 글이랑 멀어졌다. 사실 내가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었잖아. 고딩 때야 주변에 글 쓰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지 국문과에서 내가 글 쓴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었다. 어휘력은 딸렸고, 표현은 너무나도 무미건조했다. 진짜 부산 남자라서 그런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야 원래 못 썼고, 소설은 멀어져도 너무 멀어졌다. 요새는 나름 쓰는데 딱히 발전하진 않는 것 같고. 아마 감동은 앞으로도 못 줄 것 같다. 어차피 기억 못 하니 다행이지만.

뭐 그래도 재미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다보면 약속대로 책 한권 보내줄 수도 있겠지. 언제가 될 지 몰라도 그럴 시간 정도는 남아있지 않을까.

그 정도다. 옛 추억, 오래된 친구. 지금도 가끔 연락하는 과 동기. 이제 남은 접점은 글 정도. 그걸로 족하다. 둘만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났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가끔 연락하면서 그 시절을 추억하면 되는 거니까.

비가 오는 날에 센치해지는 거야 뭐 다들 그러는 거 아닌가.

내일은 좀 신나게 마셔야겠다. 부산에 비 오려나.

==============================

다 쓰고보니 제목과 괴리가 좀 크군요. 그러려니... -_-a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감모여재
13/02/01 13:08
수정 아이콘
아.. 조용필님의 슬픈 베아트리체도 좋은데요. 제목과 딱 어울릴듯!
눈시BBbr
13/02/01 13:09
수정 아이콘
딱 어울리는데... 가사가 너무 셌어요 ㅠ
감모여재
13/02/01 13:12
수정 아이콘
그 가사 정도가 딱 베아트리체에 어울리는 감성인것 같기도 하지 않나요? 저는 참 좋아하는데..
눈시BBbr
13/02/01 13:16
수정 아이콘
베아트리체에 대한 게 조금 다른 거죠. ^^; 사랑하고 같이 살았던 여인이고 이건 추억속으로 남기는 여인 그렇게요. 오래전 그날에 나오는 것처럼요. 이런 거야 갖다붙이기 나름이지만;
가사에서는 죽음으로 갈라진 거니까요
Backdraft
13/02/01 13:33
수정 아이콘
단테가 잘못했군요
눈시BBbr
13/02/01 18:09
수정 아이콘
왜그래여~
사직동소뿡이
13/02/01 13:46
수정 아이콘
부산에 비 옵니다~
눈시BBbr
13/02/01 18:09
수정 아이콘
내일 저녁도 오기를 ㅠ
근데 비 맞긴 또 싫네요; 어라 나 비 맞는 거 좋아하는데;
박준모
13/02/01 13:52
수정 아이콘
비가와서 그런가요. 말캉말캉한 글들이 올라오니, 예전 사랑, 지금 호감가는 사람등 맬랑콜리하게 다가오네요.
눈시BBbr
13/02/01 18:09
수정 아이콘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니까요 @_@
13/02/01 15:30
수정 아이콘
베아트리체라면.... 괭이 갈매기 울적에가 따오르는....
눈시BBbr
13/02/01 18:09
수정 아이콘
이러지 마시지 마시지...
Paranoid Android
13/02/01 16:06
수정 아이콘
올...크...감동적이야 결혼하죠
사직동소뿡이
13/02/01 16:13
수정 아이콘
역시 마성의 눈시님...
알리스타
13/02/01 17:18
수정 아이콘
눈시님 너무 바람둥이인 것 같아요. 대체 남자가 몇 명인가요?
눈시BBbr
13/02/01 18:13
수정 아이콘
모두 루머입니다 -_-! 저는 모르는 얘기예요 ^)^
눈시BBbr
13/02/01 18:09
수정 아이콘
질게 봤어요 ^_^
Paranoid Android
13/02/01 19:44
수정 아이콘
양성애자입니다
이제그만받아주시죠.
대신 세컨입니다.
알킬칼켈콜
13/02/01 19:18
수정 아이콘
초등학교때부터 꾸준히 취미로 글을 쓰면서 느끼는건데 시나 소설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고...그 이유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의 문제라고 느낍니다. 수준이야 고만고만해도 하루에 시를 세편씩 썼는데 20살 이후로 한 편도 안 써봤네요.
눈시BBbr
13/02/02 01:57
수정 아이콘
음.... 그런 문제이려나요
그럼 더 서글퍼지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287 [일반] 7800X3D 46.5 딜 떴습니다 토스페이 [37] SAS Tony Parker 6106 24/04/16 6106 1
101285 [일반] 마룬 5(Maroon 5) - Sunday Morning 불러보았습니다! [6] Neuromancer3402 24/04/16 3402 1
101284 [일반] 남들 다가는 일본, 남들 안가는 목적으로 가다. (츠이키 기지 방문)(스압) [46] 한국화약주식회사8250 24/04/16 8250 46
101281 [일반] 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31] Kaestro7533 24/04/15 7533 8
101280 [일반] 이제 독일에서는 14세 이후 자신의 성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303] 라이언 덕후19964 24/04/15 19964 2
101278 [일반] 전기차 1년 타고 난 후 누적 전비 [55] VictoryFood12730 24/04/14 12730 8
101277 [일반]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세계사 리뷰'를 빙자한 잡담. [38] 14년째도피중8887 24/04/14 8887 8
101276 [일반] 이란 이스라엘 공격 시작이 되었습니다.. [54] 키토15951 24/04/14 15951 3
101275 [일반] <쿵푸팬더4> - 만족스럽지만, 뻥튀기. [8] aDayInTheLife6929 24/04/14 6929 2
101274 [일반] [팝송] 리암 갤러거,존 스콰이어 새 앨범 "Liam Gallagher & John Squire" 김치찌개3344 24/04/14 3344 0
101273 [일반] 위대해지지 못해서 불행한 한국인 [24] 고무닦이7924 24/04/13 7924 8
101272 [일반] [강스포] 눈물을 마시는 새 고이(考異) - 카시다 암각문 채우기 meson3257 24/04/13 3257 4
101270 [일반] 사회경제적비용 : 음주 > 비만 > 흡연 [44] VictoryFood7910 24/04/12 7910 4
101268 [일반] 북한에서 욕먹는 보여주기식 선전 [49] 隱患10344 24/04/12 10344 3
101267 [일반] 웹툰 추천 이계 검왕 생존기입니다. [43] 바이바이배드맨8141 24/04/12 8141 4
101266 [일반] 원인 불명의 고양이 신경·근육병증 다수 발생...동물보호자 관심 및 주의 필요 [62] Pikachu12347 24/04/12 12347 3
101265 [일반] [강스포] 눈물을 마시는 새 고이(考異) - 암각문을 고친 여행자는 누구인가 (2) [11] meson3797 24/04/11 3797 4
101264 [일반] [강스포] 눈물을 마시는 새 고이(考異) - 암각문을 고친 여행자는 누구인가 (1) [4] meson5824 24/04/11 5824 3
101263 [일반] 이제는 한반도 통일을 아예 포기해버린듯한 북한 [109] 보리야밥먹자16183 24/04/11 16183 4
101262 [일반] 창작과 시샘.(잡담) [4] aDayInTheLife4092 24/04/10 4092 1
101261 [일반] 읽을 신문과 기사를 정하는 기준 [10] 오후2시4334 24/04/10 4334 8
101260 [일반] 자동차 전용도로에 승객 내려준 택시기사 징역형 [46] VictoryFood8195 24/04/10 8195 5
101258 [일반]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7) [5] 계층방정6147 24/04/10 6147 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