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8/05 08:07:17
Name 글곰
Subject [일반] (삼국지) 이릉 전투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이릉 전투 (1) : https://www.pgr21.com/?b=8&n=82020
  이릉 전투 (2) : https://www.pgr21.com/?b=8&n=82031
  이릉 전투 (3) : https://www.pgr21.com/?b=8&n=82061
  이릉 전투 (4) : https://www.pgr21.com/?b=8&n=82086


  이제 이릉 전투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대해 쓰기에 앞서서, 잠시 이런저런 사실들을 한 번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유비 일생일대의 대패를 적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잠시 쉬어가는 셈 치죠 뭐. 그리고 몇몇 분들께서 댓글로 의견 주신 것에 대한 답변도 겸해서요.

  쓰기 전에 잠시 나무위키의 이릉대전 항목을 찾아봤는데 신기하게도 요 며칠 사이에 엄청난 수정이 진행되고 있네요. 특히 제가 언급하려는 부분에 대해서요. 하지만 저와는 관계없습니다. 저는 나무위키를 수정하는 방법을 몰라요.

  각설하고,


[ 1) 이릉대전 때 양군의 병력 상황은?]

  우선 오나라의 병력에 대해서는 딱히 다른 의견들이 없습니다. 5만 명이에요. 오서 육손전을 보면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주연, 반장, 송겸, 한당, 서성, 선우단, 손환 등에게 5만 명을 지휘해서 적을 막도록 했다고 합니다. 남군태수 제갈근이 통솔하고 있던 병력이나 무릉의 번주를 토벌하러 간 반준의 병력 등은 이릉 전투와 직접 연관이 없으니 제외합니다.  

  한편 유비의 병력은 이설이 꽤 많습니다. 우선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따로 명기되어 있지 않아요.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비가 처음에 자귀를 점령했을 때 병력이 4만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조비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한중에 주둔한 병력, 반란 진압과 치안을 위해 익주 각지에 흩어져 있었을 병력, 강주에서 조운이 통솔하며 후방을 맡았을 병력 등을 감안한다면 저는 자치통감의 숫자가 맞을 거라 봅니다. 유비가 그 이상의 병력을 끌어내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였을 거예요. 유비의 공격에 대해 손권이 동원한 병력이 5만 명이라는 사실을 보면, 또 유비가 전쟁 내내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는 걸 감안하면 유비의 병력이 그보다 많았을 거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다 무릉만이들을 회유하여 지원받은 병력을 더해야 합니다. 이들은 말하자면 금은과 비단을 대가로 지원받은 용병에 가까운데요. 그 수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어서 순전히 추측의 영역에 있습니다만, 저는 많아 봤자 만 명을 넘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비록 당시 형남 일대에 퍼져 있었던 이민족의 수가 많다고는 하나 모두가 유비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전부가 유비를 도운 것도 아닐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추측하는 유비의 전체 병력은 4만 5천에서 5만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유비의 병력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건 다른 기록들 때문입니다.

  위서 문제기에 배주로 인용된 위서라는 책을 보면 계해일에 손권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유비가 별도로(支黨) 군사 사만 명과 말 이삼천 필을 이끌고 자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이게 유비가 처음에 무와 자귀를 거쳐 이릉으로 나온 221년 가을쯤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병력은 곧 유비의 당시 총 병력을 가리킨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시점이 222년 봄에 유비가 자귀에서 산을 넘어 이도로 진격했을 때로 보는 견해도 있고, 또 유비가 따로 이끈 병사만 사만에 달하며 그 외에 다른 병사들이 더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유비의 병력이 그렇게까지 많을 수 없다고 보거니와, 또 해당 기록은 손권이 조비에게 올린 보고서인 셈인데 앞뒤 정황상 그가 유비의 병력을 과장할 이유는 많지만 축소할 이유는 없다는 점도 있습니다. 위서 유엽전에 배주로 인용된 부자라는 책을 보면 손권이 유비를 격파하고 무려 그 병사 8만 명을 죽였다고 하지만, 같은 이유로 저는 이 기록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의 결론은 양군의 병력이 비슷했거나 혹은 손권이 미세하게 많았다, 입니다.

  

[ 2) 칠백 리에 걸친 유비 진영의 정체는?]

  유비의 진영은 자귀에서 이릉을 거쳐 이도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나 길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위서 문제기를 보면 목책으로 진영을 칠백 리를 이었다고(樹柵連營七百餘里) 하지요. 조비는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듣고는 유비가 군사 부리는 법을 모른다고 비웃으며 손권의 승리를 예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유비의 진영을 무슨 트럼프 장벽처럼 길이가 칠백 리에 달하는 거대한 방벽 같은 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칠백 리면 이백팔십 킬로미터입니다. 진영은 고사하고 병사들이 일 미터 간격으로 일렬로 늘어서기만 해도 무려 28만명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부산에서 광주까지 이어지는 목책을 세우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령 그런 걸 세운다 해도 대체 어디에 써먹는단 말입니까?

  그러니 당시 유비의 진영은 선이 아니라 점으로 인식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지키기 좋은 요충지마다 일정 규모의 진영을 구축하고, 그런 진영 수십 개가 곳곳에 점처럼 배치되어 있는 거죠. 개중 더욱 중요한 곳은 문제기의 기록대로 목책을 튼튼히 쳐서 서로 연결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렇게 한 후, 어느 한 곳이 공격을 받으면 인근의 다른 진영에서 지원을 하는 식으로 대응했겠지요. 요충지란 대부분 고지대였기에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좋았으니까요.

  그리고 수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죄다 칠백 리에 걸쳐 분산 배치한 것도 아닐 겁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각개격파의 희생양이 될 테니까요. 고대의 전쟁이란 대체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가져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결판나기 일쑤였습니다. 대규모 회전을 통해서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집중된 병력을 한꺼번에 공격할 폭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병력의 집중이 무척이나 중요했습니다. 결국 유비의 주된 병력은 유비가 이끌고 산을 넘어 효정에 주둔한 바로 그 본대 병력이었겠지요. 다만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일부 병력을 분산하여 배치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이게 유비로서는 최선은 아닐지언정 차선책은 되었을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도로 진격하면서 보급로가 엿가락 늘어나듯 늘어나 버렸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기 위해 유비는 최대한 노력했고 그 노력은 분명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육손이 불을 지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지형에 의지한 방어전은 그야말로 유비의 주특기였습니다. 한중에서 유비는 요충지를 차지하고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조조의 공격을 끈덕지게 막아냈죠. 그래서 유비가 여러 곳에 진영을 구축하고 보급로를 지켜낸 것도 그러한 능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 3) 조비는 대체 뭘 한 건가?]

  유비가 손권을 공격하고, 다급해진 손권이 조비에게 먼저 허리를 굽혀 칭신해 오자 조비는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손권을 오왕에 책봉하고 구석을 내리는 등 엄청나게 후대했지요. 아버지 조조조차 꺾지 못했던 손권입니다. 그런 자가 먼저 항복해 왔으니 이 얼마나 체면이 서는 일입니까. 더군다나 황위를 찬탈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남들에게 새로운 황제의 권위를 보여줄 기회가 너무나도 절실했던 조비입니다. 그래서 손권에 대한 대우가 지나치다는 유엽의 간언조차 뿌리치고 손권을 오왕에 임명합니다. 또 유비와 손권이 싸울 때 오를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도 거부하지요.

  그러나 조비가 무작정 손권을 믿은 건 아닙니다. 그는 손권의 후계자인 손등을 조정에 입조시키라고 합니다. 인질로 잡겠다는 거죠. 손권은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로 일관하며 아들을 보내겠노라 답변합니다. 그리고 답변만 했습니다. 온갖 핑계를 대어 가며 시간을 끌었죠.

  또 조비는 여러 가지 영예를 내리면서도 막상 손권이 무엇보다도 간절했을 직접적인 군사적 도움은 일절 주지 않았습니다. 이걸 보면 결국 조비는 손권의 항복을 반기면서도 내심 반신반의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손권은 처음부터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려 했을 뿐, 정말로 조비의 신하가 되려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죠.

  어부지리(漁父之利)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새와 조개가 서로 싸우다 둘 다 힘이 빠지자, 결국 지나가던 어부만 둘을 한꺼번에 잡아서 이득을 보았다는 이야기죠. 아마도 조비 역시 그런 어부지리를 노렸던 게 아닐까요. 하지만 그러려면 좀 더 일찍 움직여야 했습니다. 굳이 한쪽이 승리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어요. 유엽의 의견에 따라 처음부터 손권을 치는 게 좋았겠죠. 하지만 조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관망하기만 했죠.

  결과적으로 조비의 결정은 최악의 결과로 돌아옵니다. 이릉대전이 손권의 승리로 끝나자마자 손권은 다시 불손한 태도로 돌아갑니다. 격분한 조비는 서너 달 만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손권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조비는 손권을 이기지 못했지요. 손권의 세력은 공고해졌습니다. 그를 오왕에 책봉함으로써 위세가 높아지는 데 일조한 사람이 바로 조비 본인이었고요.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비는 아마도 속이 꽤나 쓰렸을 겁니다.




  이제 본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섹시다리털
19/08/05 08:23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글 기다립니다.
세인트루이스
19/08/05 08:38
수정 아이콘
부루마블로 세계 수도를 외웠고, 위닝으로 유럽 도시들을 배웠고, 삼국지로 중국 도시를 배웠네요.
19/08/05 08:40
수정 아이콘
조비는 이런저런 기록을 보면 (권력 쟁탈전 제외) 그다지 유능하다고 보기 힘든 군주였는데, 사마의 드라마에서는 엄청 멋진 친구로 나오더군요.
아마데
19/08/05 08:54
수정 아이콘
항상 조비가 왜 손가락만 빨고 있었는지가 궁금했는데

만약은 없다지만 저기서 조비가 손권을 쳤으면 오는 버티기 힘들었겠죠?
19/08/05 09:33
수정 아이콘
1) 촉오대전의 승패를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촉한 내부의 전쟁에 대한 반대 의견을 보면, 적어도 승리할 가망이 큰 전쟁으로 예상하지는 않았던 듯 합니다.
700리 진영에 대한 조비의 평가를 보면, 이미 촉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결론은, 유비가 혼자 빡쳐서 패배할 전쟁에 국력을 대폭 소모한 셈이 되는데...



2)촉오대전의 승패 예상은 이릉대전 이전까진 엄대엄, 적어도 3:7 이상으로 벌어지진 않았다?

이러면 적어도 촉한 입장에서는 전쟁을 일으킨게 100% 불합리한 결정은 아니었던게 됩니다.
덧붙여, 조위가 이릉대전 발발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도 설명이 되고요. 손오가 이길 것이 확실시되면 유엽의 말처럼 오를 치는게 맞지만, 촉한이 이긴다고 가정하면 되려 3국지가 조위 vs 촉한의 2국지가 될 수 있겠죠. 손오에 비해 촉한은 조위를 무너뜨리겠다는 의지가 강한 국가이니 이것은 조위의 입방에서 부담스러운 전개가 될 것 같네요.

결국 조비는 손오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요?
19/08/05 09:38
수정 아이콘
손오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해도, 칭신을 하고도 공격을 당했다하면 도로 촉한에 붙는 선택을 할 수 있고요.
이 때는, 형주를 회복해 기세등등한 촉한 + 영역은 줄어들지만 강동에서의 영향력은 확고한 손오를 맞아, 다시 2:1 전쟁 구도로 돌아가게 되겠죠.
저항공성기
19/08/05 09:34
수정 아이콘
개인적인 생각에 촉한 입장에서 이릉대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현실에서 일어난 대패가 아니라 위와 촉한이 양면으로 공격하여 손씨 세력이 소멸하는 거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조비의 이 선택은 이해하기 힘든 실책이었죠.
랜슬롯
19/08/05 10:14
수정 아이콘
저 이릉대전이 한중공방전 ㅡ 형주공방전 ㅡ 이릉대전 순서로 일어난걸로 아는데, 형주 공방전 ㅡ 관우, 조조 죽음 ㅡ 이릉대전 이런식으로 일어난걸로 알고 있어서, 자세한건 글곰님이 적어주시겠지만 제가 알기론 이릉대전 전에 조조는 위나라의 여론을 진압하는데 집중하고 있어서 크게 다른곳에 신경을 쓸수가 없었던걸로 압니다. 그렇기때문에 조운이 선주 (유비)에게 오나라를 칠게 아니라 조조가 없어져서 흔들리는 위나라를 쳐야한다고 했던거구요.
저항공성기
19/08/05 10:23
수정 아이콘
그렇다고 보기엔 222년 8월에 이릉대전이 종결되고 조비가 조휴는 동구로, 서황 등은 강릉으로, 조인은 유수로 진격하라고 명령하여 조비의 남정이 시작된 것이 222년 9월입니다. 이렇게까지 시차가 안 난다는 건 거의 이릉대전이 종결되자마자 공격했다는 얘기가 되며 이릉대전 도중에 충분히 남정을 할 역량이 있었다는 의미로 봐야한다고 봅니다. 게다가 이릉대전을 포함한 이 때의 촉한와 손오의 전쟁은 1~2달 이어진 전투가 아니라 221년 7월부터 이어져 1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이며 이 시기동안 조비가 남정을 할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랜슬롯
19/08/05 11:09
수정 아이콘
이제까지 조조의 죽음의 영향때문에 남정을 못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아니라고 봐야하는 것같기도 하네요. 손제리의 정치력이 엄청나서 굴종할것처럼 보여서 때를 놓쳤는지도 모르겠네요.
Love&Hate
19/08/05 11:30
수정 아이콘
조비가 한건 그냥 평범한 이적제적이죠.
복권세력이 밖에서 이미 세력화 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오를 이용해서 복권세력을 무마시킬 기회로 삼은거죠.
조비는 선양을 처음 성공시킨 인물인데 이전의 선양인 자지의 난이나 왕망의 난 모두 복권파에 의해 실패했었던 것도 사실이고
조비가 복권세력의 큰 도전없이 무사히 꿀꺽한것도 사실이라.
저항공성기
19/08/05 12:48
수정 아이콘
대체로 이런 정무적인 판단이 원인이었던 걸로 많이 보는 거 같습니다. 그 결과 삼국통일은 반세기 이상 지연되었고 민중들은 그만큼 더 고통받았으며 통일 제국은 허약해졌고... 그렇지요. 조비의 삽질로 어그러진 게 참 많다 싶습니다. 뭐 이로 인한 중원의 혼란 덕분에 고구려가 성장한 거지만요.
Love&Hate
19/08/05 13:24
수정 아이콘
조비의 삽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조비는 선양받고 복권파에게 타격입힌걸로 충분히 할일 한거란 이야기한거에요.
처음으로 선양을 성공시킨 남자인데요,
그리고 그게 아니었다면 통일이 앞당겨졌을거란것도 모를일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19/08/05 13:30
수정 아이콘
6코인 육손 프라우드무어가 카드하나를 계속 만지작대고 있는 상황...
강미나
19/08/05 13:41
수정 아이콘
손권이 스스로 낮춰서 칭신까지 했는데 칠 명분이 없죠. 심지어 자기 아버지 대에 했던 것처럼 [한]에 칭신한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직접 칭신한 것이니
아버지 대에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셈이었으니까요. 역사는 게임이 아니잖습니까.
서현12
19/08/05 16:54
수정 아이콘
(수정됨) 앞서서 별도로 진군한 4만명에 대한 얘기를 했었습니다만 위서 문제기 위서 별도로(支黨) 4만명 주석은 문제기 222년 정월 경오일 바로 다음에 붙고 있습니다. 위서에는 계해일로 써있는데 날짜계산을 하니 2월달로 나온것이고 마침 유비가 자귀에서 효정으로 진군한 것도 222년 2월달이니 아귀가 들어 맞는다는 거죠. 만약 221년 가을의 일이었다면 (221년) 가을 8월 손권이 사자를 파견하여 표장(表章)을 상주하고 아울러 우금(于禁) 등을 보내어 돌아오게 했다쯤에 붙는게 시간순서대로 기록을 배열하는 삼국지의 필법에 따라 현실적이라 생각합니다.

또 선주전, 황권전에 보면 유비가 황권이 진북장군으로 북쪽에 있던 여러제군들을 감독하게 하고 자신은 강남으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으로보아 이릉북쪽에 있는 병력들이 유비본대 4만외에 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황권 휘하 항복한 장수들이 318명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적은수는 아니었을 거고요.
19/08/05 17:20
수정 아이콘
정사는 잘모르지만 연의에서는 70만인가 75만인가로 쳐즐어간걸로 알았는데 뻥튀기가 어마무시하네요
밀리어
19/08/05 17:47
수정 아이콘
이릉대전은 주변인의 의견을 수용하지않은 육손과 유비가 각각 웃고 울은건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이 육손은 훗날 후계자관련문제로 손권과 대립과정에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역사책을 읽어본 결과 나이가 들어 황제들 판단이 흐려지는건 다 똑같은데 유비도 손권도 그흐름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50에도 늦진 않았지요. 손권은 후계자를 빨리알아보고 넘겨주어야 했다고 봅니다. 유비는.. 성격상 황제감은 아닌거같고요.
외쳐22
24/01/03 18:18
수정 아이콘
와 예전에 쓰신 글인데 이번에 보게됐습니다.
궁금했던게 해소되는 정말 정성 가득한 좋은 글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2230 [정치] 문재인대통령의 남북경제협력를 비웃는 그 시선들을 바라보며 [254] 피터피터17625 19/08/15 17625 27
82226 [일반] 안... 안전띠 어디 있습니까. [17] chilling8440 19/08/14 8440 6
82224 [일반] 바둑을 공부하는 한가지 방법 [21] 성상우12588 19/08/14 12588 5
82221 [일반] 게임 금단 증상이 이런걸까 [13] SG원넓이5575 19/08/14 5575 12
82217 [일반] '겸손해지는 건 쉽지 않다. 대단히 어렵다.' [74] 결국이것인가10035 19/08/14 10035 3
82216 [일반] 홍콩의 최근의 법령 변경 (시도)에 대한 외부의 영향 [6] 밀물썰물6540 19/08/14 6540 2
82214 [일반] 남자 녀석들의 '욱하는 성미' [9] 결국이것인가7657 19/08/14 7657 0
82210 [정치] [반일 종족주의] 책으로 상당히 시끄럽네요. [69] 렌야12562 19/08/13 12562 10
82208 [일반] 브라질에서 유럽축구는 비싼 취미? 브라질 축구중계 시청 비용. [9] Brasileiro8456 19/08/13 8456 17
82205 [일반] 야구(Baseball)에 대하여 [11] 성상우5376 19/08/13 5376 1
82200 [일반] (정보 공유)임신부 의료비 본인부담금감면 [21] 착한아이8619 19/08/13 8619 9
82195 [일반] 고유정의 첫 공판이 열렸습니다. [38] 아유8604 19/08/12 8604 3
82192 [일반] DHC, 한국콜마 관련해서 난리군요 [59] Jun91113188 19/08/12 13188 14
82191 [일반] 아파트 단지 내 주차문제로 인한 스트레스 [56] 사업드래군12537 19/08/12 12537 6
82190 [일반]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번 2022 수능 개편안의 문제점 [27] 아유6080 19/08/12 6080 1
82189 [정치] 출산률과 눈높이 [35] LunaseA11219 19/08/12 11219 2
82186 [일반] [류현진은 역사상 최고의 ERA+ 시즌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97] cheme13853 19/08/12 13853 35
82183 [정치] 인도, 카슈미르의 자치권 박탈 [38] 크레토스10425 19/08/12 10425 17
82177 [일반] 배워서 남주네) 엑셀과 vba를 이용해 공정관리 시트 구현하기 - 2-1 [9] 산양7229 19/08/11 7229 14
82174 [정치]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를 둘러싼 서울시와 행정안전부의 2라운드 [54] 아유8249 19/08/10 8249 3
82172 [일반] 퇴직금 적립금 중 3%를 국민연금으로 전환하자는 안이 나왔습니다 [58] 홍승식12826 19/08/10 12826 3
82171 [일반] 박사과정 1년차 생존기 [58] Finding Joe12917 19/08/10 12917 42
82170 [일반] 한국(KOREA)형 게임모델 [30] 성상우7415 19/08/10 7415 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