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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17 18:54:22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18-19세기 일본의 방구석 키신저들

일본 역사에서 어떻게보면 참 흥미롭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이미 1700년부터 일찍이 소위 말하는 "방구석 키신저"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관료도 아닌 일개 논객에 불과한 이들이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각종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부국강병의 패도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편 중국형 화이질서가 중화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보잘것 없는 오랑캐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마땅히 중화를 배워야 한다는 사고에 바탕을 두었다면 일본의 중화사상은 '만국병립적 세계관'에 기반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니시카와 죠켄(1648-1724)화이통상고(1695), 증보화이통상고(1708)에서 오대주(五大州)라는 지리개념은 이미 상식화되어 있었고, 전세계를 중화, 외국(조선, 류큐, 대만, 통킹) 그리고 外夷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국가는 모두 129개국에 달했고, 중화세계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일부분으로 다뤄지고 있었으며 게다가 일본 또한 세계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아라이 하쿠세키, 테라지마 료안, 다카하시 카케야스 등의 논문과 지도에서도 세계는 넓고 다양한 국가들이 병존하는 곳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즉, 18세기초 일본인의 세계인식은 이미 지구규모로 확대되었고 이때 집대성된 해외지리정보는 18세기를 거쳐 널리 공유되었다는 것이죠. 


이는 중국을 상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줄뿐만 아니라 일본 또한 상대화하는 데에 기능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도 세계 국가 중 일국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인식 야마자키 안사이 문하생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릇 하늘은 땅을 감싸고 땅은 하늘을 받들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각각 그 지역의 풍속이 미치는 곳은 각자 나름의 천하이니 존비귀천 같은 것은 없다." 나아가 그는 중국을 이적으로 여겨서도 안되며 타국을 호칭할 때도 단지 이국(異國)이라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18세기말 서양세력이(특히 러시아) 점점 일본에 가까워지자 일부 일본의 지식인들은 패닉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박훈 교수님의 말마따나 [전국적] 세계관에 눈을 뜨게 됩니다. 


아이자와 야스시는 1825년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중국(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킴)과 만청(청나라) 외에 스스로 지존을 자칭하는 나라는 무굴, 페르시아, 투르크, 신성로마제국, 러시아이다. 이들이 전 세계에 나란히 7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중에서도 특히 러시아를 두려워했으며 러시아가 일본은 물론 세계정복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당시 러시아는 공세적으로 동방에 진출하고 있었고 알래스카와 캄차카 반도까지 진출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더욱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이 당시 일본은 이미 러시아라는 유럽의 국가가 점점 동진하면서 일본 코앞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청나라가 아직 강성하여 러시아가 직접 치기에는 어려우니 일본에 가까운 캄차카, 쿠릴열도, 홋카이도에 진출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러시아가 일본을 정복한 다음, 일본인을 앞세워 청의 동남해안을 침략케 하고 만주를 공격하여 청을 복속시키고자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청이 굴복하면 무굴제국, 페르시아, 오스만 투르크도 멸망할 것이라 보았습니다. 


이에 더해서 그는 궁극적으로 세계가 언젠가 한 나라에 의해 무력통일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양은 세계를 모두 들어 한 종교로 귀속하게 하려고 한다. 러시아는 세계를 석권하여 이를 모두 복속하지 않고서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하시모토 사나이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의 정세는 결국에는 5대주가 동맹국이 될 것이며 맹주를 세워야 세계의 전쟁이 멈추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맹주는 영국과 러시아 중에 될 것입니다."


당대인으로서는 꽤 정확한 국제적 안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 첨예해지지 않았던 영국과 러시아 간의 세계적 대립을 예측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러한 위기의식은 쉽게 일본에 의한 세계제패라는 구상으로 전환될 수 있었습니다.


막부의 한 관료는 미국과의 개항조약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습니다. "후일 세계를 통일할 기초로 삼을 생각을 하여 널리 만국에 항해하고 무역을 하며 그들의 장점을 취하여 우리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국력을 기르고 무비를 든든히 하면, 점점 전 세계가 일본의 성덕에 복종하는 형세가 될 것이다. ... 마침내는 세계만방의 대맹주로 떠받을어지고 만국이 아국의 정교를 받들며 아국의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망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상기 관념이 어떻게 뒤틀려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이러한 위기감 속에 촉발된 것이 웅비론, 즉 해외로 적극적으로 팽창하여 일본의 세력을 길러야 한다는 발상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구적인 저작을 남긴 사람은 사토 노부히로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일찍이 <서양열국사략>을 저술하여 서양문명의 뿌리가 되는 유대 로마 역사와 서양 주요 국가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1823년 자신의 저서 <혼동비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황대어국(皇大御國)은 대지 중에 최초로 생긴 나라이고 세계만국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잘 운영하면 전세계를 모두 속방으로 삼고 만국의 군민을 모두 신속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만국의 창생을 안도한느 것은 처음부터 황국 지배자들의 중요한 임무임을 알 수 있다."


"황국이 타국을 개척하는 데는 반드시 먼저 지나국을 병탄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먼저 지나국을 취할 방략을 자세히 서술할 것이다...(중략)...타국을 경략하는 법은 약하고 취하기 쉬운 곳부터 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금 세계만국 중에 황국이 공격하여 취하기 쉬운 지역은 지나국의 만주보다 쉬운 곳은 없다."


"만주인은 조급하며 지모가 부족하고, 지나인은 나약비겁하여 겁이 많다. 조금만 놀랄 일이 있어도 꼭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구원하려고 할 것이다. 많은 인원이 자꾸 동원되면 인력은 피폐해지고 재용은 고갈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물며 지나의 왕도인 북경에서 만주해안까지 황복하려면 사막이 있고 산과 계곡은 매우 험난함에랴. 그런데 황국이 만주를 정벌하는 길은 겨우 160~170리의 해상이므로 순풍에 돛을 달면 하룻밤에 그 해안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는 그냥 꿈소리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자세하게 자신의 구상을 적습니다. 


군사편성과 침략루트를 자세하게 늘어놓는데 


먼저 1진은 아오모리, 제2진은 센다이에서 출발하여 흑룡강에서 서남쪽의 강들로 군선을 진입시키거나 또는 직접 상륙하여 현지인들에게 곡류와 술을 배풀어 민심을 달랜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제3진, 제4진은 자나자와에서 출발하여 조선 동쪽인 만주, 연해주의 강들로 진출하여 아오모리, 센다이 군과 합류하고 거기서 흑룡강의 섬들을 소유로 한 후에 서서히 길림성을 공략한다고 적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제5진,제6진을 이용하여 조선을 북쪽에서 공격하고 제7진을 이용해서 조선을 남쪽에서 공격해서 협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8진은 대만을 취하고 제9진은 강남지역을 공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정복의 명분은 야만족 오랑캐 만주족을 멸하고 명황실의 복원으로 할 수 있고 명황실의 자손을 제후로 봉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 자신은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계획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일까요? 놀랍게도 그렇게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버러지같은 만주 오랑캐도 지나를 취한 바 있다. 하물며 황국의 병사와 대포를 갖고서 그 뒤를 잇지 못하겠는가. 십수년 사이에 지나전국을 통일할 것은 논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과대망상을 합리화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친 계획에 반해 다른 동시대인 하시모토 사나이는 좀 더 합리적인(?)을 대안을 내놓습니다. 그는 일본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하에 일본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만주, 조선을 병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이루기 어려우니 영국이나 러시아 중 하나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발언이 있고 나서 100년 후 훗날 영일동맹이 체결되고 조선과 만주가 병합된 것을 보면 소름끼칠 정도입니다. 


과장된 위기의식, 그리고 동아시아 이웃에 대한 과장된 자존감 그리고 동시에 서양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과장된 자기능력 인식의 복합이 일본의 부국강병을 추동하는 근원이 아니었나 싶은데


한편으로는 일본이 개국하기도 훨씬 전에 아주 제한된 정보만으로도 세계를 시야에 넣고 사고하는 마인드가 재미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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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달린뱀
20/12/17 19:18
수정 아이콘
1825년 시점에서 7웅에 무굴이랑 페르시아 있는건 신기하긴 하네요.
무굴은 영국 직접 통치 30년 전이라 아직 명목상으론 남아있긴 했고 페르시아도 뭐 내리막길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는 있었으니.
Birdwall
20/12/17 21:11
수정 아이콘
국력도 국력이지만 스스로 황제(혹은 그 비슷한 것)을 자칭하는 나라들을 꼽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나주꿀
20/12/17 19:27
수정 아이콘
(수정됨) 몇년 전에 /일제시대 조선 농민의 위엄/ 뭐 이런 짤방으로 나돌던 이야기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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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경남 함양의 한 조선인은 [일본인이 삼국동맹에 따라 독일측에 참전하기로 한 이상 조선인 남자도 결국 징모되어 전선으로 내보낼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일본이 전쟁으로 약해지는 날이야말로 우리 조선민족이 일고를 요하는 기회다.]"라는 얘기를 하다가 검거되었으며, 1943년 4월 함경남도 홍원에 거주하는 37세의 강동모는 ["일본이 시베리아에 전 군을 출병하게 되면 태평양 방면은 손이 딸리게 되고 또 미국은 군수공업이 발달하여 매월 수천대의 비행기를 제작하고 있으므로 아무리 일본이 철벽같은 방어를 펴도 수만 대의 적비행기가 일거에 내습하면 일본은 모두 패배하게 되니, 그때야말로 우리 조선동포가 봉기해야 할 호기"]라는 얘기를 하다가 검거 되었다.

출처 : 변은진. (2011). 유언비어를 통해 본 일제말 조선민중의 위기담론. 아시아문화연구, 22, 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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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걸 보면 인터넷도 없고 라디오도 엄청나게 비쌋던 시대에 세계 정세를 논한 방구석 제갈량, 방구석 키신저들은 대체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산건지,
주변 사람들은 그런 방구석 키신저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집니다. 크크크
20/12/17 19:39
수정 아이콘
근대 일본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일종의 전국시대의 세계화 같다는 생각이 많이듭니다.

각 나라는 각 번과 대응하고 서로의 각축을 벌여 세카이를 통일한다 흐흐.

쓰고보니 웃기군요.
패트와매트
20/12/17 20:16
수정 아이콘
당시기준으로 객관화된 편인 세계인식과 국뽕 가득한 정복론이 한끝차이라는게 재미있네요
사딸라
20/12/17 20:42
수정 아이콘
여기서 조선은 그냥 먹어야 할 땅 1에 지나지 않는군요.

우리 의도가 어떻든 간에 저 자식들에겐 반도가 열도를 덮칠지도 모른단 공포를 계속 주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 좀 착하게 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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