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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2/16 11:47:15
Name   PoeticWolf
Subject   화해에 관한 추상적인 힌트
‘성격이 안 맞아서’라는 이혼 사유는, 어디서 들은 바에 의하면, 사실 ‘서로 화해하는 법이 달라서’와 대부분 일맥상통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자라가면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배울 기회나 방법은 꽤나 많은데,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공통의 화를 푸는 법 - 즉, 화해하는 법 - 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책이나 말은 그것보다는 적은 것도 같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나온 ‘미안합니다.’가 그쪽 방면에선 가장 큰 가르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화해하는 법을 혼자서 터득해갑니다. 어제 Q&A 게시판에도 이런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질문이 하나 떴었죠. 화난 아내에게 어떻게 사과를 하면 되느냐는 ‘귀여운호랑이’님의 귀여운 질문에 ‘위에만 입고 만세삼창’과 같은 원초적인 사과법이 나오는가 하면 ‘버릇이 되니 강하게 나가라’는 의외의 대답을 해주신 PGR 최고의 유부남 살림꾼 선데이그후 님의 허세 짙은 노하우도 등장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말마다 마스크 쓰고 화장실 닦으시는 분의 아이디가 선데이그후라니, 좀 슬프기도 하네요.) 또한 그 게시글에 켈로그김님의 친구처럼 슬며시 묻어가기 질문을 하신 분도 계셨던 걸로 보아, 화해법에 대한 목마름은 쉬이 해갈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노하우를 익히든 결국 화해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멋대로 이름을 붙이자면 침묵형과 접근형이죠. 어떤 일이 벌어져 서로 화가 나거나 섭섭한 감정을 느낄 때 상대와 떨어져 스스로 화를 식히면서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스타일이 침묵형(혹은 회피형)이고, 그 반대로 상대와 계속 대화를 해서 합의점을 찾고, ‘자, 이러면 됐지? 화해하자’라고 화해를 공식화하는 스타일을 접근형(혹은 합의형)입니다. 전 제가 침묵형이고 제 아내가 접근형이라 남자 여자가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침묵하는 여자분과 접근하는 남자분도 꽤 되더군요.

그렇더라도 ‘화해’라는 주제 아래서 침묵형과 접근형의 장단점을 따지는 건 무의미합니다. 화해란 건 위에도 잠깐 말했지만 ‘공동의 화’를 푸는 것이고, 침묵형이니 접근형이니 하는 건 개인이 자기 화를 담당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침묵형과 접근형의 다양한 조합을 고민하는 것이 더 맞죠. 물론 침묵형보다는 접근형이 아무래도 ‘공동의 화’를 풀 가능성이 더 높긴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침묵형+접근형, 침묵형+침묵형, 접근형+접근형만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침묵형+침묵형은 화해하기가 상당히 까다롭기도 하고 굉장히 쉽기도 합니다. 불화의 발단이 된 사안의 경중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서로가 서로를 피하게 되다보니 화해의 기회가 줄어듭니다. ‘아, 됐어! 그만 둬!’라고 냅다 소리치고 기다렸다는 듯이 어두운 골목 끝 PC방으로 뛰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 울면서 일기를 쓰거나 동성 친구들과 대화로그를 만드는 아내는(혹은 그 반대) 당연히 다시 만날 때까지 화해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침묵형 인간들은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화를 풀 줄 알기 때문에, 각자의 시간이 끝나고 나서 서로를 대면했을 때 저절로 화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냐 내가 잘못했어. 으헝헝.’이런 광경은 가볍게 스킵할 때도 많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한쪽이 밥을 준비하고, 다른 한쪽이 설거지를 하고 같이 조용히 빨래 개고, 좋아하는 TV 드라마 붙어서 보고 있게 됩니다. 다만, 각자 화가 풀리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미묘한 타이밍 차이가 사건을 크게 키울 수 있게 되고, 서로 이해한답시고 서로의 마음을 ‘짐작’만 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또 다른 오해의 여지를 남기는 화해라는 점에서 건강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파생되는 서로의 개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싸움을 일부러 거는 경우도 생깁니다.

반대로 접근형+접근형은 피터지게 싸웁니다. 이런 분들 대부분 굉장히 논리적이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한쪽이 지거나 물러서지 않습니다. 달구어진 PGR 게시글 같습니다. 논리로 누군가를 설득하는 거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실 겁니다. 비둘기 싸우는 거 보신 적 있나요? 한쪽이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싸웁니다. 한쪽이 도망가도 끝까지 쫓아가 부리로 쪼고, 땅바닥에 나뒹굴면 그 위에 밟고 서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쫍니다. 접근형끼리 만나면 한쪽 편의 정신이 바닥에 나뒹굴어야 겨우 끝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게 대단히 나쁘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결혼 전 연인 사이에서는 이런 경우 간단히 헤어지면 끝나겠지만 결혼을 한 사람에게 이혼은 쉽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즉, 어차피 서로가 서로에게 정해진 상황이고 사랑해서 결혼했다면 ‘이기고 지는’ 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결혼의 굴레 안에서 이루어지는 격렬한 대화의 목적은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이며, 서로를 이해하겠다고 하는 건데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데 성공하거나 죽은 정신 위에서 개가를 부르고 기뻐할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죠. 사실 신혼 초반 피터지게 싸우는 부부가 신속하게 가정의 평화를 찾고, 그 평화를 오래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신혼 때 많이 싸워라’라고 조언합니다.

변수가 많기로는 접근형과 침묵형이 만났을 때만한 경우가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비둘기처럼 달려들고 다른 한쪽은 나무늘보처럼 어기적 도망갑니다. 비둘기 입장에서는 ‘아니, 내가 이렇게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다가가 주는데, 콧방귀도 안 뀌어?’하면서 기분이 더 나빠지고, 나무늘보 입장에서는 ‘나에게.... 화를 식히고....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으면서.... 혼자.... 할 말만.... 다하다니.... 존중이란... 게... 없구만....’이러면서 폭력의 희생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싸우고 깔끔하게 서로 떨어지든가, 더 맞붙어 합의점을 찾으면 될 문제가, 쫓고 쫓기는 관계가 되면서 더 늘어지고 마음은 더 상합니다. 상황이 시간에 따라 악화되면서 비둘기가 빽 소리를 지르거나 인신 공격 발언을 실수로 내뱉게 되면 참던 나무늘보가 갑자기 생전 처음보는 괴물로 변할 때가 있고, 그러면 비둘기는 ‘아,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나 속았구나.’라며 그제서야 자기 홀로 있을 곳을 찾습니다. 쫓기던 자가 쫓고, 쫓던 자가 숨습니다. 이런 감정들과 나쁜 말들을 주고 받다보면 의도하지 않은 말들과 행동을 하게 되고, 그 안에서 많은 것이 곪기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악화죠, 악화. 접근형과 침묵형의 콤보는 사실 극적으로 화해하고 나서 ‘우리는 (이렇게 안 맞는데) 정말 사랑해서 만났나봐.’라는 자위 말고는 얻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화해법이 달라서 하는 이혼이란 결국 침묵형끼리 만났는데 그 침묵 시간이 굉장히 길어지거나, 접근형끼리 만났는데 도저희 합의점이 찾아지지 않거나, 침묵형과 접근형이 만났는데 서로가 서로를 잡을 수 없을 때 나타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화해를 해야 할까요. 먼저 자기가 무슨 유형인지 알아야 합니다. 침묵형이라면 제일 먼저 화를 빨리 삭히는 법을 익혀야겠죠. 그래야 상대로부터 떨어진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따갑게 느껴지는 상대의 레이저가 사실은 그다지 공포스러운 것이라거나 생명에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배우자가 당신을 해하고 싶어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빈번하지 않습니다. 접근형의 경우는 입보다 귀를 더 크게 벌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화해를 위한 합의점을 더 빠르고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의외로 상대 논리에 따라가 준다고 세상이 뒤바뀌거나 종말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의 유형을 파악하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침묵형이라고 침묵형만 골라 사귀어야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 심각한 사안이 아니라면 침묵형인 척, 접근형인 척 얼마든지 가장할 수 있고, 사실 결혼 전에는 싸움에 대처하는 자기의 본색을 스스로도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10년 연애 했어도 결혼하니 내가 모르는 모습이 있다,는 말 많이 들어보셨겠죠?

금슬 좋기로 서울 시내 둘째가라면 서러운 저희 부부, 어제 오랜만에 싸웠습니다. 아내가 자기의 서운한 마음을 조목조목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냥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이 끝나고 ‘어.’라고만 했습니다. 아내는 대답에 성의가 없다고 화를 내고, 전 화를 낸다고 또 화를 냈습니다. 아내는 냉장고에서 와인을 찾고, 저는 LOL을 켰습니다. 각자 방으로 갔다가 잠시 후 아내가 다시 나오고, 저는 와인 때문에 눈에서 총명이 사라지고 있는 아내를 보고 농담을 걸었습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무슨 농담이냐며 아내는 다시 방으로 화를 내고 들어가고, 저는 네이버 뉴스를 켰습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조목조목 말하는 것이 ‘내 마음은 이렇다, 널 이해하고 싶은데, 너 마음은 어떻냐?’라고 질문을 하는 것이었죠. 이 사안에 대해 화해를 하고 싶고, 앞으로 더 싸우기 싫으니 합의점을 지금 찾자, 라는 제스처였습니다. 당연히 이야기가 끝나고 아내는 제 입장의 이야기를 바랐죠. 하지만 저는 일단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혼자 생각을 하면서 이해할 시간이 필요한데, 아내 말 듣느라 상황 이해가 전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생각대로 흘러가고, 아내 말은 아내 말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내 말이 멈췄을 때 ‘어.’라고밖에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로서는 화해의 제스처를 제가 뿌리친 것이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고, 저는 저대로 제 생각에 빠져 들은 이야기가 없으니 할 말이 없었지요.

아내가 방에 들어가고 혼자가 되어서야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아, 아내가 이래서 화가 났을 수도 있겠구나,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 흥분된 마음이 가라 앉습니다. 그동안 방에 혼자 있던 아내는 자기가 접근했는데도 뿌리치고 지금 방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남편이란 작자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이것 밖에 되지 않는 존재인가, 자존심이 더 상합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은 비참해집니다. 안 되겠어서 다시 나왔더니 놈이 상황 파악 못하고 농을 던집니다. 얄미워서 면상을 날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갈을 하고 들어갑니다. 남편은 아직도 마루에서 컴질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농담을 했는데도 화로 맞받아친 아내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렇게 감정은 돌고 돕니다.

즐겁지 못한 일을 예로 든 건, 침묵형과 접근형이 거치는 생각의 과정을 묘사하기 위함이었고, 저희는 유야무야 화해 비슷한 걸 하기는 했습니다. 화해의 실마리는 저런 생각의 과정을 싸우는 와중에 파악하는 데서부터 나오는 듯 합니다. 싸울 때는 저런 상대의 생각과 기분을 희한하게 깨닫지 못하거든요. 화해의 기술은 자기의 유형을 적당히 중간 정도로 바꾸려는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가 아무리 잘나고 옳아도 상대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고 하잖아요. 내 유형이 어느 쪽에 치우쳤는지 파악하고, 반대 성향을 조금 익혀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러려면 더 싸워봐야겠네요.

세 줄 요약은(아, 이런 거 해보고 싶었어요.)
1. 결혼했으면 끝.
2. 연애 중이라해도 특별한 해결책은 없음.
3. 싸움의 기술은 다름 아닌 매듭짓기.

전 이만 '올빼미'님 추천대로 만세삼창하러...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2-2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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