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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3/12/21 09:14:24 |
Name |
Bar Sur |
Subject |
[잡담] 훼손되지 않는 나. 카테고리 속의 나. |
벌써 맑은 1급수처럼 좋은 글들이 높은 수원으로부터 흘러들어오고 있네요. 제 글은 그에 비하면 급이 떨어지거나 불순물을 많이 머금은 개천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pgr 생활을 돌아봤을 때, 그리 많지 않은 분들이 이 물을 접하겠지만 그 분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휴학을 하고 집에서 생활반경이 줄어들면서 수염을 깍지 않고 생활하는 날이 늘어났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제 자신이 수염과 잘 어울리는 사람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염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 거울을 보면서 뜻모를 만족감을 누리며 사소한 행복감에 젖습니다. 이를테면 내게 있어서 수염이란 "용기의 표상"과도 같은 겁니다. 설사 암시와도 같은 것일지라도 인간에게 있어서 "표층" "껍질"이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수염이 있는 나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자신을 관철시킨다,>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어떤 타인에게도 훼손당할 수가 없는 부분인 것이죠.
그건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최근에 '솔로부대'라는 말이 이름높지만 저는 자신이 솔로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웃기고 있네, 라든가 거짓말하지마 라는 소리는 이미 수없이 들었지만 그건 한 마디로 괜한 참견입니다. 저는 독신주의자도 아니고(얼마전까지는 그랬지만) 지나친 로멘티스트도 아닙니다만 현재는 자신이 솔로라는 것에 아무 위화감도 느끼지 않으며 거기에서 사사로운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솔로의 멋스러움이라는 것. 외로움으로서 서글픔을 느끼는 면모가 하루에 3할이라면, 혼자일 때 외로움을 느끼고 곧바로 그 공백에서부터 첫 걸음을 시작해서 곳곳의 숨겨진 즐거움을 다시금 발견해 내는 생활에서 오는 멋스러움이 7할쯤 되는 것 같습니다. 연인과 공유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놓는 사색에서 오는 즐거움. 혼자서 쇼핑을 하면서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자신의 취향을 취하는 고집스러움. 아직 제대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자신의 볼모지를 찾아내는 여행.
<솔로인 나는 좀 더 나 자신을 아끼고 경시했던 부분을 발견하고 새롭게 개발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옷을 입듯이, 생각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온 몸을 스치고 부드럽게 나선을 그리며 작은 용기, 행복으로 발화합니다.
"솔로는 처량하지 않니? 뭐든지 짝이 맞아야 되는 거야. 크리스마스 쓸쓸해서 뭐하냐?"
"수염, 그거, 지저분하기만하고 뭐하려 기르냐? 다른 사람들이 보고 욕해. 빨리 깎아 버려."
중요한 점은 나 자신은 이런 부분들에 있어서는 결코 타인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나 자신의 행복과 멋스러움이란 타인의 "행복의 잣대"로는 쉽게 재어지지 않는 것이며 하나의 뭉뚱그려진 사회 속의 행복이라는 다수의견에 의해 평가절하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오히려 짓밟히지 않는 작은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타인에게 훼손되지 않을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 입장의 이야기를 해보죠.
내 안에는 아주 견고하고 모양새가 뚜렷한 틀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의 경우엔 세모, 네모, 또 어떤이는 별표, 공룡의 형상, 꽃의 형상.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생각이 나 자신의 내부 깊숙히에서 그 원형 자체로 평가를 받고 그 가치 그대로를 사랑받기란 힘든 일입니다.
타인의 생각이 나 자신의 틀을 통과하면서 서로 간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충돌하고 깨어져 나가거나 마모되어 그 원형과 가치를 일정부분 상실한채 자신의 내부에 융화되기 때문입니다. 이 틀이라는 것은, 선천적으로 부여되기도 하지만 사회내부의 생활에 따라 공장의 제조품처럼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규격지어지기도 합니다.
어느 사이엔가 틀 자체를 변행하고 서로간에 유사성을 가지게된 우리는 그 틀을 어떤 부분에 걸리거나 충돌하는 타인을 쉽사리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 존재 자체가 자신의 틀을 억지로 통과하려고 하면 그것이 자신을 훼손하려한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남을 상처입힌다기 보다는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적대감이 발동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틀안에서 자신의 정원에서 뛰어놀던 흙발채로 남의 이해를 짓밟으려는 경우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저 자신만의 틀로 상대의 틀을 위협하려는 행위일 뿐이며 그 때는 진정한 적대감으로 상대하게 되는 걸지도 모릅니다.(저는 요 며칠 pgr에서 이런 경우를 보아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큰 가치가 없으며 그에 따른 훈계 역시도 크게 중심을 관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카테고리>란, 힘을 가지게된 표층 가운데 일부일 뿐이며 결코 그 자체로 표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보편" "일반" "다수"라는 개념 가운데 파묻혀서 스스로가 "유형"이 아닌 "표준"이라고 쉽사리 생각해 버리는 건지도 모릅니다. 교복은 학생을 구분하는 카테고리이며 어떤 학생도 그 카테고리 안으로만 포용하려는 경향성을 가집니다. 어느 사이엔가 그것은 개인을 훼손하게 되는 적의 힘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거의"는 "거의"일 뿐 "전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걸 우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무언가 모든 카테고리를 붕괴하며 모두의 인정과 이해 속에서 살아 숨쉴 수 있는 해답은 저로서도 내놓을 수 없겠네요. 하지만 첫 걸음은 분명 무언가에 "사로잡하지 않을 것", 그리고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에? 무엇을? 이라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 그리고 행위입니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는 있을지언정 일보후퇴를 위한 일보후퇴는 슬퍼보일 뿐이겠죠.
남을 훼손한 적은 없는가. 나의 틀은 반드시 올바른가? 지금 상대는 나를 훼손하려 하는가? 상상력을 발휘해야합니다. 자신의 틀에 얽매인 상상이 아니라, 나와 타인의 틀을 넘나들고 "거의"를 넘어서는,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의 상상력 말입니다. 사로잡히지 않고,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많은 것들을 상상할 수 있으며.......... 아주 조금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타인과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ps. 이 글에 사용된 개념 가운데 대부분은 저의 오리지널이므로 읽으시면서 이해가 가시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결코 당신을 훼손하는 것들은 아니니, 편하게 읽으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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