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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3/12/14 12:53:08
Name   아랑
Subject   [잡담] four o' clock
안녕하세요, Lunnette입니다. pgr에서의 첫 글이네요.
저는 10월 12일에 가입했기 때문에..(그전까진 눈팅족이었는데, 10월 12일에 어떤 글을 보고 너무너무 코멘트가 달고 싶어서 가입을 해 버렸습니다...^^; 아마도 secret garden의 windancer라는 곡이 그 글의 본문 내용 중 있어서였을 거에요. 제가 secret garden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12월 12일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마침 12월 11일에 시험이 끝났고 12일에 소논문 제출까지 끝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pgr에 첫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네요.(물론 엊그제와 어제 막혀버린 pgr을 보며 눈물짓긴 했지만..ㅡㅜ)

앗.. 이야기가 너무 많이 새 버렸습니다! ^^;
인사는 이 정도로 하고.. 제목에 쓴 'four o' clock - 오후 네 시'에 대한 생각을 뭉게뭉게 펼쳐나가 볼까요.

오후 네 시라..
이 시간은 참 애매한 시간이죠.
해가 질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쨍쨍하게 비치는 시간도 아니구요.
뜨겁지도 않고 쌀쌀하지도 않은 미묘한 시간이죠.
뭔가 한참 하고 있을 시간 같기도 하고, 하루를 슬슬 정리할 시간 같기도 하고.
점심을 먹기엔 너무 늦고, 저녁을 먹기엔 너무 이르고.
낮잠을 푹 자 버리면 밤에 잠들지 못할 것 같은 애매한 시간이 오후 네 시인 것 같습니다.

이런 '오후 네 시'를 이름으로 가진 꽃이 있습니다.
바로 분꽃이에요. 분꽃은 영어로 Four o' clock (beauty of the night이라는 이름도 있다는군요) 인데요. 아시다시피 분꽃은 오후에 피고 아침에 지지요.

전 처음에 이 사실 때문에 굉장히 분꽃을 미워했습니다..^^;
어렸을 때 살던 아파트 단지에 화단마다 심어져 있던 꽃이 분꽃이었는데, 아침에 학교에 가면서 화단에 핀 꽃을 보는 걸 너무 좋아했던 제게 분꽃은 시들시들한 모습만 보여줬거든요. 처음엔 제가 물을 안 줘서 시들시들한 거라고 생각해서 정말 열심히 물을 줬습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책가방을 메고 나오면서, 컵라면 그릇에 물을 떠갖고 내려와서 화단에 물을 주고, 그릇을 화단 뒤쪽 으슥한 곳에 숨겨놓고 학교에 갔다가 집에 들어올 때 다시 그 그릇을 갖고 들어오는 식이었죠.
그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라, 집에 일찍 왔던 탓에 매일 시들시들한 분꽃만 보였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집에 박혀서 책을 읽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화단을 볼 생각조차 못했지요. 오늘도 시들시들한 분꽃을 미워하면서, 꽃봉오리를 꼭 접고는 도도하게 얼굴 안 보여주려는 그 모습을 미워하면서 열심히 책만 읽어댔습니다. 이렇게 물을 열심히 주는데 맨날 시들시들하기나 하고.. 그 때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했던지 일기장에 온통 분꽃 얘기 뿐이었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네 집에서 숙제를 하고 늦게 들어온 날이었습니다. 슬슬 컵라면 그릇에 물 주는 일도 질려서 매일매일 하던 일을 일 주일에 세 번 정도로 줄인 터였는데, 아니 글쎄-

분꽃이 활짝 피어있지 뭡니까.
그 때의 감동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에요. 일기장에 분꽃이 피었다, 분꽃이 피었어요, 분꽃이 드디어 피었나봐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피워 주고 갔나봐요, 라면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 놓았더군요. 한 바닥 쓰는 것도 귀찮아하던 일기를 세 바닥쯤 분꽃 이야기로 메워 놓고 다음날 아침 너무너무 뿌듯하게 컵라면 그릇에 물을 담아 화단으로 내려갔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녀석들은 또 시들시들한 채 절 쳐다도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너무너무 상처를 받아서-_-; 울면서 일기장을 찢었습니다. 학교에 가져가서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 하는 날이었는데.. 그딴 건 머리속에 없었고 그저 서럽기만 했죠. 어제는 피어 있었는데 이게 뭐냐. 나한테 거짓말한 나쁜 꽃 같으니라구. 다시 물 주나 봐라, 절대 안 준다. 라고 몇 번이고 다짐하면서 일기장을 찢어 분꽃에게 뿌려 버리고 눈물 범벅이 된 채로 학교에 갔습니다.

선생님께선 울면서 학교에 온 절 걱정하셨고 그 날 오후,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게 됐죠. 전 또 울면서 절 배신한 분꽃에 대해 선생님께 핵심 없고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선생님께선 참을성있게 들어 주셨고, 달래 주시다가 점심도 먹여 주시고, 재미있는 책도 보여 주시고 하시면서.. 교실에서 함께 데이트를 해 주셨죠. 그리고 네 시가 조금 지난 다음에 선생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그럼 이번엔 산책하러 나갈까?"

싫다고 할 이유가 없었죠. 그저 좋아서 따라나갔습니다. 분꽃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대야 옳을 정도로 선생님과 재밌게 보낸 시간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 앞에 낯익은 꽃들이 나타나더군요. 분꽃이었어요.

"얘들이 너 울렸던 거 맞지?"

선생님께선 차근차근히, 분꽃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분꽃은 원래 오후에 일어나는 잠꾸러기들이라 아침부터 오후 네 시 까지는 잠을 자는 거라면서, 저는 그 애들에게 있어 고마운 사람이라고 말해 주셨어요. 자는 동안 물도 주고 얼굴도 들여다봐 줬으니까 얼마나 고맙겠냐면서, 절대로 분꽃이 절 배신한 게 아니라구요. 다만 늦잠을 자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아이들이라서 어쩔 수 없이 제게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거라구요. 그 날은, 집에 들어와서 정말 길게 일기를 썼습니다. 분꽃에 대한 책을, 모아뒀던 용돈으로 사 와서 열심히 읽고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나네요..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한동안은 분꽃에 대한 이 생각들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이사를 오면서 화단이 없어지고, 웬 나무들만 가득한 단지에 살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 교정을 거닐다 분꽃을 발견했습니다. 5교시 수업까지 듣고 천천히 중앙도서관으로 향하던 그 시간은 오후 네 시.. 물론 분꽃은 활짝 피어 있었지요.

대학에 들어와 제가 보낸 오후 네 시는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1. 수업을 듣는 중이다, 2. 중앙도서관에 있다, 3. 지하철, 혹은 버스 안에 있다(집에 가는 길), 4. 친구들과 만나 놀거나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다. 그 이외에 한 게 없었죠. 분꽃을 보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날 본 분꽃 때문일까, 도서관에 들어간 제가 빌린 책은 "꽃이 남긴 짧은 이야기" 였습니다. 오후 네 시, 그 애매한 시간부터 기나긴 밤을 이슬을 맞으며 눈을 뜨고 가만히 꿈을 펼치고 있다가 남들이 깨어나는 그 시간이면 얼른 꿈을 접고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가는 꽃, 분꽃의 이야기가 짧지만 예쁘게 적혀 있었습니다. 매우 얇은 여고생 취향의 예쁜 책이었는데(평상시엔 이런 책 싫어해서 잘 안 봅니다-_-;) 덥썩 집어서 빌려왔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분꽃은 해마다 다른 빛깔의 꽃을 피우고 같은 줄기에서 빨강과 보랏빛의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사랑을 의심하다, 라는 꽃말은 어떤 줄기에서 어떤 색깔의 꽃이 필지 모르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네요. 언제 보아도 다소곳하게 피어 있지만 어떤 곳에서나 뿌리를 잘 내려 강한 생명력으로 많은 꽃을 피우는 분꽃.

전 이 분꽃을 보고 강민 선수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떤 빛깔의 꽃을 피울지 몰라 항상 기대하게 만드는 분꽃처럼 어떤 플레이를 펼칠지 몰라 항상 기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소 늦은 출발 같지만, 그는 다른 이들이 뭘 할까 고민하는 애매한 시간에 활짝 날개를 펼치고 일어나 그의 꿈을 그려놓기 시작합니다. 다른 이들이 잠들어 버리는 그 시간까지도요.
다른 이들이 깨어날 때 잠드는 분꽃처럼 그는 조용히 자신만의 꿈을 그립니다.
그래서 그의 움츠림은 좌절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날의 꿈을 준비하는 것일 테니까요.
몽상가, 다른 이들이 잠든 때 조용히 꿈을 펼쳐 세상을 담는 사람.
그의 캐논들은 분명히 분꽃이라고, 전 오늘도 멋대로 믿고 있습니다.


10월 말로 접어든 어느 가을날, 중앙도서관으로 가는 길의 분꽃은 져 버렸습니다. 길고 긴 꿈에 들어간거죠. 전 그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가 꾸는 꿈을 방해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ps. 처음 쓰는 글이라서 너무너무 떨립니다. 오류가 보이더라도 예쁘게 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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