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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3/31 18:54:27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임진왜란 - 3. 원숭이의 야망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기껏해야 하급 병사의 아들로 바늘장수였다느니 하는 배경을 가진 인물이 있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히요시. 이후 기노시타 도키치로로 이름을 바꿉니다.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오다 노부나가 밑으로 들어갔는데 그의 말을 끌었다고 하죠. 노부나가에게 차를 끓여 바치는 일을 했는데 차맛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베어버리던 노부나가가 그만은 아꼈다느니, 신발을 가슴에 품어서 따뜻하게 했다느니, 그 성질 더러운 노부나가가 그만 보면 마음이 풀어지고 웃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실록에서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기사에서 사관이 그를 논하면서 약간 다른 에피소드를 적어놓기도 합니다. 당시에 적은 거든 나중에 덧붙인 거든 조선에도 그의 기행이 알려졌다는 거죠. 육손이였고, 당시 전국시대 무장들의 공통된 취미인 남색-_-;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부하 무사들이 예쁜 소년들을 보여줬는데, 그 중 한명에게만 관심을 가졌다고 하죠. 나중에 무슨 말을 하더라고 물으니까 "누나 있냐고 하시던데요?" 라고...
그의 전략은 기상천외했습니다. 강 상류에서 뗏목을 만들어 하류로 이동, 해체한 다음 그걸로 성을 세워 버립니다. 일야(一夜)성이라고 부르죠. 용맹보다는 지략이 좋아서 다른 가문들을 깨뜨릴 때 유력 호족들을 포섭하는 일을 주로 맡았습니다. 때문에 미천한 출신과 함께 말만 잘 하는 놈이라고 무시당했죠. 하지만, 노부나가의 매제 아사이 나가마사가 배반해서 퇴각해야 되는 상황에서 후미를 맡아서 큰 피해를 입고도 살아서 돌아갑니다. 이후 조략(적을 포섭하는 것)과 전투 양면에서 크게 활약하고 마침내 노부나가의 가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됩니다.
노부나가가 1582년 혼노지에서 죽자 최전방에 있던 히데요시는 싸우고 있던 모리 가문과 화친을 맺고 엄청난 속도로 퇴각, 반역자 아케치 미쓰히데를 죽이고 다른 노부나가 가신들을 쓰러뜨리고 마침내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을 이룹니다. 그리고 8년, 마침내 그는 일본을 통일하죠.
원숭이, 대머리 생쥐라고 놀림 받던 그는 이렇게 천하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히데요시는 전면전보다는 수공, 말려죽이기 같은 작전을 썼고 그런 성향으로 인해 평화주의자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특히 천하인이 된 후에는 결전보다는 압도적인 규모로 겁 먹게 하거나 포위하는 공격을 많이 했죠. 국지전에선 이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무릎 끓었고, 쥬코쿠의 모리 가문도 히데요시의 충실한 편이 되었으며 큐슈의 시마즈는 20만으로 공격, 몇 번의 전투만에 항복을 받아냅니다. 동쪽의 호조 가문도 20만명으로 포위, 말려죽이죠. 일본 동북부 오우슈의 패자 다테 마사무네도 항복해 버리구요. 아직은 서부가 일본의 중심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도검을 회수하는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다이묘들을 견제하는 정책을 어느 정도 펼칩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큰 일을 하나 벌이죠.

그의 일대기를 보면 존경은 힘들어도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밑바닥에서 출세한 것이나 그 처세술로 일본에서도 인기가 정말 많죠. 다만 천하인이 된 후에는 사람이 워낙에 달라져서 인기가 적습니다. 천하인이 되기 전 이름인 하시바 히데요시로 더 유명할 정도니까요. 그리고 그의 말년에 벌인 일들을 보며 일본에서도 노망설이 나올 정도입니다. 글쎄요. 정말 매력적인 인물인데... 노망설의 근거 중 하나가 바로 하필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사건이죠.

시작해 보죠.

1. 카운트 다운
집결된 힘을 외부로 투사, 국론을 통일하고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 공을 세운 이들을 위한 해외 영지 확보... 대충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보자면 이 정도가 있겠죠. 히데요시의 야망과 이 현실적인 이유의 결합이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 당시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먹고 인도까지 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품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어디까지나 지나가는 통로에 불과했죠.
잠깐 딴 얘기로 가 보자면 일본의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아들이 죽은 것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서 (혹은 그런 척 해서 부하들의 충성을 이끌어서) "대명을 치겠다!" 고 하면서 준비를 하죠. 여기서는 주로 그런 광기로 다룹니다.
도시이에와 마츠에서는 천하(-_-;)를 차지한 지도자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강력하게 하기 위해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추진하는 걸로 나옵니다. 무리수긴 하지만 이해는 해 주자 이거죠. 자. 어느 쪽일까요? 정말 출생부터 죽음까지 상상을 마구 넣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죠.

91년 1월. 히데요시는 전국에 총 2천 척의 선박을 건조하라는 명을 내리고 선원들을 차출하라고 합니다. 8월에는 큐슈의 나고야에 전진기지를 만들죠. 불멸의 히데요시는 무슨 지금 일본 중심 쯤에 있는 나고야로 묘사해 놨더군요. 대표적인 오해지만... 92년 1월 5일에는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2월 28일에는 나고야(명호옥)성이 완공됩니다. 소 요시토시는 정발과 송상현에게 최후 통첩을 하고 이건 조선 조정에 올라가서 이일과 신립이 한 달간 전국의 요새를 순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3월부터 일본에서 소집된 전군이 나고야로 집결합니다. 13일에 1군이 대마도에 도착했죠. 27일에는 직접 히데요시가 나고야로 향하구요.

4월 12일. 난중일기에는 거북선이 완성되었다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정말 아슬아슬했네요. 그렇게 운명의 날이 시작됩니다.

2. 일본군 편성

1진 고니시 유키나가 7000 + 소 요시토시 5000 등 총 16700
2진 가토 기요마사 10000 +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 등 총 22800
3진 구로다 나가마사 5000 + 오토모 요시무네 6000 등 총 11000
4진 시마즈 요시히로 10000 등 총 17000
5진 후쿠시마 마사노리 4800등 총 8700
6진 하치스카 이에마사 7200, 쵸소카베 모토치카 3000 등 총 15700
7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000 +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 총 157000
8진 모리 데루모토 등 30000
9진 우키다 히데이에 등 10000
수군 구키 요시타카, 와시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도라 등 9450

이상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왔던 병력입니다. 이 중 초기에 온 것은 7진까지고 8, 9진은 대마도 등의 섬에서 대기하다가 진격 중에 추가 투입돼서 확실히 점령을 위해 움직였죠.
물론 후방에는 10군부터 16군까지 대기 중이었습니다. 총 30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고 그 중 절반 가량이 투입된 거죠. 거기다 격군이나 일꾼 등을 병력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에 저기서 각 군마다 +a가 있습니다. 수군은 격군을 뺀 숫자니 저기서 최소한 두 배로 생각해야 되고 육군에서도 일꾼 등 비전투병력을 포함시키면 많으면 두 배, 적어도 오천에서 만 까지 추가해야죠.

아무튼... 투입된 병력을 보면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 밑에서 새로 발탁된 이들로 다이묘 출신이 아니라서 대대로 충성을 바치는 부하가 없었던 히데요시가 열과 성을 다해 키워주던 부하들이었습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는 어릴 때부터 토라노스케(스케는 일본에서 흔히 쓰는 이름으로 호랑이의 철수? -_-; 이런 느낌으로 생각해 주세요)라는 아명으로 히데요시가 키워주던 친척이었죠. 이들이 히데요시의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후 중부에는 땅이 없어서인지 큐슈에 영지를 내리는데 경쟁을 위해서인지 영지 하나를 반으로 갈라서 줬다고 하는군요. 임진왜란에서도 1, 2군을 맡아서 경쟁하게 했죠. 결과적으로 패착이긴 했지만... 아무튼 이 둘은 각자의 방식대로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바치다 죽습니다. 마사노리 역시 기요마사와 비슷했구요.
3군 구로다 나가마사는 히데요시의 모사이자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 경계했다는 구로다 간베에 요시타카의 아들로 역시 큐슈에 영지를 받은 후 은거한 아버지를 대신해 나왔습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 역시 히데요시의 동료이자 부하였던 하치스카 마사카츠(맨 위에서 말한 일야성을 세울 때 도운 장수입니다)의 아들이죠.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 도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고, 시마즈 요시히로, 오토모 요시무네, 나베시마 나오시게,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모두 큐슈의 다이묘들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했거나 패한 가문입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 역시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시코쿠의 가문이었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리 데루모토는 다 쥬코쿠의 (일본 혼슈의 서부) 모리 가문으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후 이에야스만큼은 아니더라도 거의 동맹관계나 다름 없던 가문이었고 때문에 이들은 거의 총대장이나 다름없던 위치였고, 우키다 히데이에는 모리를 칠 때 항복해서 히데요시에게 모리를 견제할 겸 대우를 받았던 가문으로 명목상의 총대장은 그가 맡았습니다.

... 전국시대에 관심 없으신 분은 재미 없는 분석이겠지만 꼭 필요한 분석이죠. 결국 선봉은 히데요시의 부하로 이제 막 다이묘가 된 충복들이고, 그 뒤를 받치는 것은 히데요시에게 패한 큐슈, 시코쿠의 가문들이며 (거기다 이들은 히데요시가 오기 전에는 각 지역에서 지배자가 될 뻔 했습니다) 총대장 등을 받는 것 역시 히데요시의 부하라기보다는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모리, 우키다 가문이었습니다.

이게 뭐가 문제냐면 이들은 결국 히데요시의 충복들이고 전후에도 히데요시를 위해 싸우다 망해 갔던 가문들이라는 거죠. 저 가문들의 대다수가 세키가하라의 결전에서 이에야스와 싸우다 망했고,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동군을 편들긴 했지만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비호하다 죽습니다. 구로다야 뭐 -_-; 따로 놀지만요. 히데요시의 적이라 할 만한 이에야스 병력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고, 우에스기, 마에다 같이 히데요시 편이긴 하지만 역시 임진왜란 때 온 다이묘들보다 훨씬 큰 가문들도 병력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동북의 패자 다테 마사무네도 병력 조금 이끌고 왔다 간 수준?

공을 세운 이들에게 영지를 나눠주기 위해서라는 목표를 생각하면 고니시, 가토, 후쿠시마, 구로다 수준으로 줄고 그나마 고니시는 철저한 반전파였습니다. 이외에는 큐슈의 옛 패자들에게 "니네 땅은 쪼개서 내 부하들에게 줄 테니 니네는 조선에서 새 영지 만들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명분 내지 던져준 떡밥일 뿐 사실상 임진왜란은 히데요시가 자기 세력만을 보내서 치룬 전쟁이라고 봐야겠죠. 전쟁이 잘 되면 동쪽의 병력도 투입됐겠지만 잘 안 되니 오히려 믿을 만한 자기 편만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일본 서부 역시 초토화 됩니다. 뭐... 그것만으로 조선이 휘청거렸으니 대단하긴 하지만요.

3. 그들의 전투력
그래도 히데요시가 믿었던 건 그들의 전투력이었겠죠. 4~5미터에 달하는 장창을 이용한 족경(보병)은 왠만한 훈련 없이는 활용하기 힘듭니다. 병사들이 하나하나 다 맞춰서 움직여야 했거든요. 이들은 100년간의 실전 경험으로 잘 다듬어 졌고 같은 영지에서 뽑힌 이들이기 때문에 유대도 남 달랐습니다. 전쟁이 무섭다고 도망가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 하고 가족들도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싸워야 살아남는 환경, 도망가면 인간 취급도 못 받는 환경, 그것은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은 남자들은 잘 도망가도 여자들은 욕을 당하느니 목숨을 끊은 경우가 많죠? -_-; 여자도 그렇지 않으면 살기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당시 왜성은 공격 측이 진입하기 힘들고 들어와도 포위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울산성 전투에서 그 방어력을 자랑했죠. "성을 높이 세울 뿐이었다"는 조선과 비교하면 여러 면에서 충분한 노하우가 있었던 겁니다.
이미 일본 무장들이 잘 했던 "나는 어디의 누구며 무슨 서버에서 만렙을 채웠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전투는 없어지다시피 했고 글을 몰라도 이런 전술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었죠. 뭐 그렇다고 개인의 용맹을 뽐내지 않은 건 아니지만요 ^^; 거기에 조총, 걔네 말로 철포가 전래되면서 급속하게 퍼져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족경과 철포가 잘 조화된 전술이 퍼져 있었죠. 유럽이 용병이 보편화된 것처럼 "잡병"이라는, 용병이라 할 만한 병농분리도 시도되었지만 아직은 병농일치에 가까웠습니다. 보통 이렇게 비대화된 병력은 통일되고 안정되면 비용 등의 문제로 축소되죠. 바로 그 직전, 전국시대를 통해 커지고 정예한 병력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간이었죠.
군대 갔다 오신 분은 중대, 대대급 작전이랑 사단급 작전이 차이가 나는 걸 아실 겁니다. 전국시대 중반만 해도 이런 전국시대는 비교적 소규모 병력들끼리의 전투였죠. 이것 때문일까요? 큐슈와 호조 가문을 칠 때 히데요시는 20만의 병력을 운용하면서 대부대에 맞는 경험과 보급 체계 등을 확인합니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전의 예행 연습이 되었죠. 물론 그래도 고치긴 힘들어서 임진왜란 기간 중에도 지들끼리 따로 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죠.

각설하고, 통일 직후의 일본군의 전투력은 당시 유럽과 붙어도 우열을 가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실제 붙어 본 적이 없어서 조선 수군 vs 유럽 해군처럼 결론 내리긴 힘드네요. 임진왜란 기간 그들의 전투력은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 때문인지 정예병끼리의 결전인 평지에서의 회전은 몇 건 없고, 있더라도 조선군의 처절한 패배로 끝나 버리죠. -_-;

4. 그들의 방식
하지만 그들 역시 국제전은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조선을 마치 일본처럼 생각한 거죠. 그 때문에 한양을 향해서 죽어라 돌격합니다. 당시 일본의 각 영지는 본성과 지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마치 후삼국시대의 호족과 같은 형태였습니다. 지성이 공격당할 때 본성이 도와주지 않으면 충성할 이유가 없어진 거나 다름 없고, 다른 지성들은 항복하거나 도망칠 뿐이었죠. 때문에 적을 공격할 때도 필요한 요충지만 함락시키고 다른 지성들은 공작을 하거나 하는 식만 하고 본성을 공격할 때가 많았습니다.
왕이 도망가 버린 것도 크긴 할 겁니다. 대장이라면 맞서 싸우든가 항복하거나 할복하고 영민들은 공격측의 것이 될 때가 많았거든요. 하지만 전국시대에도 다이묘가 도망간 적은 많았죠. 그보다는 의병의 존재가 그들에게 정말 크게 다가왔을 겁니다.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면 당연히 항복하리라 여겼던 거죠. 그래서 최대한 백성들은 건드리지 않는 상태로 진행되었고, 백성들은 전투가 벌어질 경우 근처에서 구경할 때도 많았습니다. -_-; 조선에서도 후발대로 온 모리 히데모토 등은 조선인들을 최대한 안심시키고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여라는 쪽으로 확실한 점령을 꾀했구요. 물론 이 과정에서 일본에 협력하는 순왜도 많이 생겼습니다만...
조선인들은 의병을 일으켰죠. -_-; 물론 일본에서도 잇키라고 해서 농민군의 반란이 있지만 이것은 대부분 다이묘가 백성들을 괴롭히니까 그에 항의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혹은 당시 일본을 지배한 불교의 승병과 함께 해당 종파를 탄압하거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은 다이묘들에게 반기를 드는 방식이었죠.
전쟁의 광기로 인한 약탈도 제법 보입니다만, 전쟁 초기 일어난 의병 중에 이것 때문에 일어난 의병은 사실상 없어 보입니다. 의병장들은 사재를 털어서, 혹은 도망친 관군을 다시 규합해서 의병을 일으켰죠. 일본 입장에서는 그저 황당했을 겁니다. 이건 의병 편에서 자세히 얘기해보도록 하죠. :) 초반에 7도를 차지한 것 때문에 일본이 압도적으로 민 것 같지만, 그 속사정은 이런 거죠. 일본은 경상도 내에서도 완전한 점령을 할 수 없었고, 관군과 의병의 역습으로 곳곳이 잘립니다.
그 외에도 조선의 장수가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하자 잘 대우해준 경우가 많죠. 당시 일본은 적이라도 장수로서 대단하면 존경했거든요. 하지만 조선은? 그 딴 거 없습니다. 화살비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다 장렬하게 전사한 왜장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평가는 이랬죠. "고오오오오얀 노옴" 어쩔 수 없는 배경이었죠. 일본은 집안 싸움이었습니다. 상대를 좋게 봐 줘도 큰 손해는 없었죠. 어쨌든 같은 일본인이니까요. 하지만 조선은 옛부터 민족의 생존이 걸린 전쟁을 계속 치뤄 왔습니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죠. 거기다 유교식 세계관에서 적은 그저 오랑캐일 뿐이었구요.

2차 진주성 전투도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이 1차 전투에서 크게 패한 것과 다시 밀려버린 것에 대한 분노를 푸는 거였는데, 전국시대에는 흔한 거였죠. 보통 이럴 땐 성을 비워 버리거나 할복하고 영민들은 살려달라 이렇게 진행됐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군사고 백성이고 다 죽여버리는 방식이었죠. 이 전투 외에도 정작 항복하거나 할복하거나 해야 되는 성주(?)는 도망가는데 정작 그 밑에 군사들은 싸우더라... 그런 경우가 흔했죠. 이런 식으로 중앙집권 국가와 봉건제 국가의 차이 혹은 내전만 치른 국가와 침략을 많이 받은 국가의 차이가 크게 나타납니다.

5. 일본은 수군이 강하다?
일본은 수군이 따로 없어서 육군이 배에 타면 수군이다. 일본군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입니다.
후삼국시대에 언급했듯 일본에는 해적 등으로 불리는 집단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서 자기와 이해관계가 맞는 다이묘를 따랐죠. 수군 중에 있는 구키 요시타카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들이 주로 왜구로 활약했고, 일본은 수전을 잘 한다는 오해를 낳게 됩니다. 이들 외의 일본군에서 해전에 익숙한 이들은 없다시피 합니다. 일본은 전형적인 해내국가였고, 전국시대 기간 중에도 해전은 없다시피 했죠.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이라는 서양에서 근대 해군 전략의 기초가 될 만한 이론을 세운 사람이 말했죠. 한 나라의 해군력은 그에 관련된 일에종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중요하다구요. 일본이 어업을 주로 하긴 했지만 바다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정말 적었습니다. 왜구로 활약한 이들 해적들은 소수였고, 임진왜란 해전 중에 조선 수군에게 소멸 수준이 돼 버립니다. 그 정도로 소수였죠. 그 이외의 수군은 어디까지나 바다가 있는 영지를 가진 다이묘들이었고, 당연히 수전을 몰랐습니다. 때문에 조선 수군은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는 거제도 동남쪽 길을 6년 동안 가지 못 했고, 진도도 바깥쪽으로 돌아가지 못 했죠. 일본 수군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일본과 부산간의 보급로 유지였고 수륙병진은 조선 수군의 활약과 육지에서 보급로가 끊긴 것 때문에 만들어진 작전이었죠. 일본 수군이 거제도에 도착한 건 전쟁이 벌어진 지 한 달 후, 옥포 해전 때였습니다.

해군, 해경 갔다 오신 분들은 아시겠죠. 육지와 바다가 얼마나 다른지요.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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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서 끊어야겠네요. 계속 카운트다운이니 전쟁의 시작이니 하는데 정작 시작도 안 했네요 ( . .) 일본 얘기만 실컷 했습니다.
히데요시에 대한 평가를 참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정말 매력적인 인물인데 말이죠. 그래봐야 자업자득이죠. 일본 전국시대 게임 신장의 야망 하시는 분도 히데요시가 잡으면 참수 1순위라고 하죠 -_-; 뭐 능력 하나만큼은 대단했고, 늙어서 맛이 갔는데 그 최고의 피해자가 조선이었다... 일단 이렇게 생각해두죠 뭐. 에효 이 원숭이는 진짜 -_-; 아무튼, 일본에서의 인식대로 사람 죽이는 걸 싫어하고 일본의 평화를 위해 일으켰다는 전쟁은 조선에는 최악의 피해를 내 버렸습니다.
일본 사극을 보면 한국의 사극과 느낌이 꽤나 다릅니다. 특히 주인공의 목표. 한국은 일단 나오는 게 충성이죠. 일본은? 출세입니다. 출세욕과 공명심, 능력, 이런 것에 집중하는 게 많죠. 히데요시가 맨 위에서 언급한, 노부나가를 위해서 맨 후미에 남아 적을 막은 것도 충성 쪽으로 서술하는 경우도 있지만 " 이 때가 자기의 공명의 길을 위한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고 해석하는 게 "대하드라마"에 나옵니다. 삼국지에서 신무장 꿈을 선택할 때 "출세"나 "할거"를 선택하는 분 있으신가요? :) 일본에선 이런 것에 중점을 많이 뒀습니다. 그 외에도 자기 가문을 살리고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부분도 많이 보이구요.
재밌게도 에도 막부가 생긴 후 조선에서 유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일본도 많이 바뀝니다. 군신간에 서로 이익 때문에 충성하는 것이 아닌 당연히 해야 되니까 한다는 것으로 바뀌었죠. 이 때 징비록도 들어오면서 일본인의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은 거의 징비록에 기본을 두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겸대, 두 주인을 섬기는 것도 많았고 배신도 많았죠. 전국시대에 새로 뜬 다이묘들을 "센고쿠 다이묘"라고 부르는데,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가 하극상입니다. -_-; 그것도 능력으로 본 거죠. 주인이 죽으면 가신도 할복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건 주인 가문이 망하면 자기 가문도 망하는 상황이라서 그런 게 컸습니다.

지금 일본의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습니다. 기껏해야 이순신 수준? 당시부터 실패한 전쟁, 쓸모 없는 전쟁이라고 평가했고 지금도 한국과의 역사적 마찰이 걸려서 아예 전국시대를 다루면서도 임진왜란은 묻혀 버렸습니다. 거기다 위대하고 재밌는 전국시대 영웅들을 얘기하는데 그들의 실패담이나 다름 없는, 좀 활약을 보인 장수도 고니시와 가토 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얘기하기 그랬겠죠. 히데요시의 망상에 이끌려 간 쓸모 없는 전쟁, 혹은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것, 그게 임진왜란에 대한 그들의 인식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은 물론 임진왜란이 일본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참 "유감"입니다.

잡설이 더 길었네요. -_-; 그렇다고 일본편을 둘로 쪼개기도 그렇고. 자. 본격적으로 전쟁 시작하겠습니다. 다음은 "나라가 망한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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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31 19:30
수정 아이콘
그렇죠-_-; 신장의 야망에서 장수 능력치가 아무리 아까워도
일단 히데요시는 잡으면 참수하는 맛이 쏠쏠.
통일할 때까지 살려두면 뭔가 일을 낼 것같은 찝찝함.
설탕가루인형형
11/03/31 19:49
수정 아이콘
너무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빨리 집에가서 쇼군토탈워2 하고 싶네요..이제 시마즈로 규슈 통일했는데...
오후의산책
11/03/31 19:51
수정 아이콘
남색이 우리나라에도 있엇나요?.
화랑인가..
큐리스
11/03/31 20:08
수정 아이콘
태합입지전 5탄 해봤는데요.
굳이 히데요시를 안 골라도 게임은 할 수 있기 때문에
안 고르고 했었네요...

근데... 순왜는 해설이 필요한 단어가 아닐까 싶은데요.
카서스
11/03/31 20:20
수정 아이콘
조금과장하면, 그당시 최소 15만의 정예, 최대로 잡으면 30만의 정예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없다... 라고 하더군요.

근데 제목이 원숭이의 장난은 좀 그렇지 않나요;
루크레티아
11/03/31 20:2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히데요시라는 인물은 어떻게 본다면 히틀러, 나폴레옹과 상당히 닮은 인물입니다. 인물 개인은 정말 뛰어나고 매력적이지만, 대차게 미쳐버린(?) 점이나 극단적으로 까이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심히 닮아있지요. 일본인들도 히데요시를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존경은 하지 않는다는군요.(이것은 같은 전국시대의 인물인 노부나가, 이에야스와는 상당히 다른 대접입니다.) 어떻게 본다면 셋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을 시행하고 현재 일본의 기반을 닦은 입지전적인 인물인데 말이죠. 물론 한국인들에게는 더 이상 말 할 필요도 없는 대접을 받고 있고, 받아야만 하는 인물이지만 말입니다.

16~17세기는 한참 무기와 전략이 급변하던 시기였기에 일본과 유럽의 전투를 상상하는 것이 참으로 재미는 있지만 어려운 일이군요. 확실치 않은 것이라 찝찝하긴 하지만 당시 유럽은 대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원거리 포격전도 육상전에서 벌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일본군은 총은 있어도 포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고요. 무기의 질에서 볼 때에는 그래도 유럽이 앞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명나라에게 개발살난 포르투갈도 있긴 하지만 말이죠.

우리나라의 충, 효가 사실상 조선시대에 와서 지금의 형태로 정립이 되었듯이 일본의 주인을 올곧이 모시는 충성심, 소위 말하는 '잇쇼겐메이'정신도 마찬가지로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이후에 성립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사실 아무리 다이묘와 부시라도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관계였으니까요. 헤이안 말기 이후로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배신과 음모,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내온 일본인들이 불과 300여 년만에 완벽하게 '인의와 무사도를 중시하는 사무라이'로 탈바꿈 하였다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하고 무서운 것은 그러한 바뀐 모습을 완벽하게 포장해서 일본인의 고유 정서로 탈바꿈시키고, 상품화 시켜서 팔아먹는 일본인들의 치밀함이겠죠.

마지막으로 원숭이의 장난 보다는 원숭이의 야망이 더 적절해보이는군요.
감성소년
11/03/3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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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이 글 읽다보니 드는 생각이, 장미의 이름처럼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상세히 묘사하는 소설이 한 권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전쟁 소설이 아니라... 배경은 전쟁임에도 주인공의 겪는 주된 체험은 전쟁이 아닌 거죠.
배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전쟁이 한창 일어날 당시인데, 주인공이 꼭 이순신이나 이런 유명한 사람이 아닌 어느 절의 스님이라던가,
지방의 하급 관리라던가, 이런 사람들이 등장해서 그 시대를 묘사하는 식의..(고증을 철저히 해야겠죠 물론)
장미의 이름을 이미 읽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거기 나오는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처럼 주인공이 그런 식으로 등장해서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
적 상황, 또 이이나 이황 같은 사람의 사상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 당시엔 그런 사상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말이죠.
물론 그 정도 쓰려면 움베르토 에코만큼이나 글솜씨도 있어야 할 것이고 한데...
아니면 시오노 나나미라는 일본 작가도 역사이야기를 소설처럼 잘 쓰던데 말이죠.
그런 스타일도 괜찮으니까 역사서적 좀 나와줬으면 하네요.. 재미있게.. 크크
성야무인Ver 0.00
11/03/31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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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망났다라기 보다는 브랜드에 집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히데요시의 부인, 측실과의 결혼서부터 자기 여동생을 잘살고 있는 매제와 강제 이혼까지 시키면서 유력자에게 결혼시킨거 보면 말이죠. 아마도 후반기의 임진왜란도 자기 자신의 출신성분때문에 어떻게 하던 뭔가 해보고 그걸 발판으로 히데요시 브랜드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의병에 대한건 일본군 자체도 많이 당황했다는데 동의를 합니다. 일본전국시대의 경우 영지의 다이묘가 쓰러지면 웬만하면 백성이 나서서 일어나질 않습니다. 일어나더라도 특정지역에만 한정되 있기에 일본민중의 경우 지배자란 충성을 해야 되는 존재가 아니라 굶주리지 않으면 그만이었다라고 보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중앙집권적인 조선과는 많이 달라서 의병에 발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질 몰랐던것 같습니다. 근데 일본수군이 강하다라는 오해는 어디서 나왔나요?? (저도 굉장히 궁금헌데) 전통적으로 일본에서의 수군은 극히 일부 다이묘만 제외하곤 전부 육전으로 해결해서 수군이 강하다라는 이야기는 기록이 많이 없던것 같은데요. 수군(해군)이 발전했던건 메이지유신 이후가 아니었던가요???
나이트해머
11/03/3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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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의 전국시대로 인해 일본이 획득한 경험많은 중하급 무사진들이야말로 일본군의 힘이었지요.
반면에 조선은 중하급 지휘관들(현대식으로 따지면 하사관층)을 모두 '군관' 이라는 정체불명의 직책에 몰아넣어버렸다는게 문제가 좀 큽니다. 조선군이 전쟁내내 고생한 게 이들 하사관 문제였으니 말이죠.
이런식으로 몰아넣어 놓으니 수백, 수천단위는 그래도 문제가 덜하지만 만단위로 넘어가면 문제가 커지는 건 어쩔수 없다 봅니다. 수군이라면 '배' 라는 단위체로 운용이 되니까 괜찮긴 하지만.
캐리건을사랑
11/03/3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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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세계 최고의 수군을 가진 조선 vs 최고의 육군을 가진 일본
Siriuslee
11/03/3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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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읽으니 당시 일본내 총 석고의 수가 대략 2000만 석고이고,
당시 조선 8도의 총 석고를 일본에서는 대략 800만 석고로 파악했다고 하더군요.
(또 어느 의견을 보니 실제로는 대략 1200만 석고정도는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전쟁후에 조선내 경작지가 절반을 날라가는 상황이었으니..
성야무인Ver 0.00
11/03/3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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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앞으로 몇백년이 아니 몇천년이 지나도 원숭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지 못할것 같습니다. 기록에도 태어났을때 원숭이 같다라고 나와있고 오다 노부나가는 아예 사루(원숭이)라고 불렀고 선조 수정실록에도 원숭이같은 인상이라고 씌여있으니 그 인상자체가 독특했나 봅니다. 그리고 관백이 된 이후로 신하들 사이에서도 원숭이라고 부르는거 자체를 금지했으니까요.
벤카슬러
11/03/3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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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은 글 정말 잘 봤습니다.
단순히 '나쁜 XX'라고만 생각했던 풍신수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능력이 뛰어났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어쨌든 나쁜, 어쩌면 미친 XX...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안 일으키고 내치에만 전념했으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을지 궁금해집니다.
아마 일본에서 무열왕이나 문무왕, 혹은 왕건 쯤의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눈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Siriuslee
11/03/31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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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명단에서도 보이는 모리 데루모토의 위엄
하지만 실상은 후방에서 띵까 띵까 하다 철수..

그보다 어제지른 토탈워:쇼군2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는데..
빨리 집에 퇴근 하고 싶네요
11/04/01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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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본창 쪽보다는 고니시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건 세키가하라의 패자에 대한 애착일까요.
미쓰나리에 대한 빠심충만
11/04/01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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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럴 땐 성을 비워 버리거나 할복하고 영민들은 살려달라 이렇게 진행됐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군사고 백성이고 다 죽여버리는 방식이었죠. 이 전투 외에도 정작 항복하거나 할복하거나 해야 되는 성주(?)는 도망가는데 정작 그 밑에 군사들은 싸우더라... 그런 경우가 흔했죠.

이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조금만 더 풀어서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11/04/0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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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 기다리기가 항상 힘드네요 ㅠㅠ

지난 1월에 오사카를 다녀왔는데 볼게 많아서 오사카 성을 떠나기가 참 힘들더군요. 히데요시의 인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 그 영화의 정점이었던 오사카 성, 그리고 허망한 몰락과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다시 한번 느끼지만, 정말 히데요시는 매력적인 인물인 것 같네요.
28살 2학년
11/04/0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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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학업에 치여 살다보니 pgr에 자주 들어올 시간이 없어 눈시BB님의 글을 제대로 못보고 있습니다 ㅠㅠ
눈시BB님 글은 제가 흥미 있어하는 부분의 얘기가 많아 즐겨보고 있습니다.
대충 보면 글을 쓰신 정성에 모자랄까 주말을 이용해 말짱한 정신으로 정독하고 있어요.
저번에 대야성과 나주 관련글도 감사했습니다.
빼꼼후다닥
11/04/0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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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쇼군2를 즐기고 있는데... 오다 노부다가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지더군요... 그 기반으로 그렇게 크다니... 만약 오다 노부다가가 죽지 않고 일본을 통일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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