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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4/04 19:53:45
Name 눈시BB
File #1 조선_지도2.JPG (105.9 KB), Download : 55
Subject [일반] 임진왜란 - 6. 조선의 반격,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지금처럼 한 두달씩이나 지역별로 하고 싶지만...
그냥 한 큐에 끝내겠습니다. =_=; 아래 일들이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서 정리하기도 머리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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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들은 도망가기만 했고 의병들만 열심히 싸웠다."
지금이야 많이 바뀌었지만 심심하면 볼 수 있는 말이었죠. 틀린 말입니다. 물론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의병장들 대부분은 전현직 관리였고 의병을 일으키면 곧바로 초토사, 토적사 등 직위를 주며 관군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병농분리인 이상 그 휘하 병력도 원래 징집돼야 됐거나 패해서 흩어진 관군들이었죠. 전편에 언급한 원호도 따지고 보면 의병이나 다름 없구요. 이들은 그 지방에서 명망 높은 사대부들로 당연히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 수령들보다 더 잘 따르는 환경이었구요. 차이는 원래 편제대로 관군에 속해 있느냐, 의병장 밑에서 모였느냐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의병이 민중항쟁이라는 측면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의병장들은 거의 모두 사대부들이었습니다. 특히 사림이 크게 발달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의병이 많았죠(물론 직접 점령지였다는 것도 크겠습니다만). 왜군이 백성들을 마구 죽였다느니 하지만 전쟁 초기만 해도 일본군의 약탈이나 학살은 그리 크지 않았고, 이들 의병들은 그 전에 일어났습니다. 못 살겠다 싸우자 이런 식이 아니었다는 거죠. 오히려 당시 유교 사상에 따른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봐야 될 것입니다. 유교와 충성을 외쳐대던 사대부와 장수들이 도망갈 때 이들은 유교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고려의 몽골 침략기의 의병들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저희 학교 같은 경우는 의병이 일어난 것에서 특히 유교를 지키는 것을 크게 보더군요. 특히 조선 말의 을미의병 같은 경우 나라 그 자체보다는 유교 사상을 더 지키려 했다고 평가합니다. 한계가 있었다는 거죠. 근데 그걸 답사 가서 의병장 후손 앞에서 말 하려고 했던 교수님은 용자이실까요? -_-; 아무튼 구한말 때의 의병은 명성황후 민비의 죽음보다 단발령에 반발하는 게 더 컸다고 하니... 뭐 그건 그 때 얘기고 임진왜란 때는 유교가 곧 조선이었고 왕이 곧 나라였죠.
그럼, 시작해 봅시다. 모두 얘기하기는 아무래도 힘들고 각 지역별로 유명한 의병과 관군의 반격 위주로 가 보겠습니다.

1. 경상도
탄금대 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인 4월 24일. 곽재우 의병군이 거병합니다. 5월 18일에는 낙동강과 진주 남강이 만나는 기강에서 적의 보급기지를 공격, 승리하고 6월 8일에는 진주로 가는 길목인 정암진 전투에서 승리하죠.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이라 불렸고 천강홍의장군(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라는 깃발은 왜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죠.
그 전술을 보면 재밌는 게 많습니다. 부하들에게 자기와 같은 옷을 입게 해서 적을 헷갈리게 한다든가 하는 거요. 그래서인지 임진록 2에서 곽재우는 분신술이 있죠. 가장 재밌는 얘기는 궤짝에 벌통을 둔 채 버려운 거죠. 일본군은 식량인 줄 알고 들고 갔는데 열어 보니 벌이 쏟아져 나왔고 그렇게 혼란한 틈을 타서 공격해서 이겼고, 후에 다시 화약을 넣은 궤짝을 버려 두니 이번엔 안 속겠다고 불을 질렀는데 화약이라서 터졌고 또 그 틈을 타서 공격~
거병 직후 김수가 도망가는 걸 너무 심하게 까서 김수가 그 보복으로 곽재우를 도적이라고 모함하자 김성일이 구해주기도 합니다. 김수가 전쟁광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전쟁 준비를 했고 도망가긴 했어도 경상도에 계속 남아 있었던 걸 보면 그리 깔 인물은 아니지만, 곽재우를 모함한 걸로 지나치게 까이는 감이 있죠. 김성일이 둘을 중재하기 위해 곽재우를 만났는데, 도망간 수령들은 모두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너무 꼿꼿했던 모양이네요. 김성일도 변명해 주면서도 "말이 너무 큰 자"라고 살짝 디스하기도 합니다.
의령, 창녕, 함안 등에서 큰 활약을 하면서 유곡도찰방이라는 직위를 받았고 10월에는 절충장군 겸 조방장으로 승진, 12월에는 성주목사에 임명됩니다. 사관은 경상우도가 산 건 모두 곽재우의 공이라고 적을 정도였죠.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 방어사에 임명돼서 역시 큰 활약을 합니다. 전후에는 벼슬을 끝내 거부했고, 영창대군을 비호한 대신들이 탄핵당할 때 상소를 올리는데 "선조의 유언에 따라 영창대군을 지켜야 되는데 지키지 못 했으니 죽여야 된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때 그 대신들은 "영창대군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있었거든요 =_=; 이후 솔잎만 먹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김면, 손인갑, 정인홍은 고령, 합천, 거창 등에서 거병해서 낙동강의 요충지 무계를 공격합니다. 숨어서 활을 쏘면서 100여명을 죽였고 적 본군이 오자 도망갔다고 하는군요. 그렇게 그들은 경상우도에서 큰 활약을 합니다. 김면은 합천군수, 첨지사, 경상우도 병사까지 임명됩니다만 93년 안타깝게 병사하게 됩니다.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다고 하며, 유언은 "오로지 나라만이 있는 줄 알았고, 내 몸이 있는 줄은 몰랐다." 숙연해지네요. 손인갑은 무과에 급제해서 훈련원첨정으로 있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합천 군수 전현룡이 도망가자 김성일에 의해 합천가장을 맡게 됩니다. 정인홍과 합쳐 선봉장의 역할을 맡았고, 6월 말에 전사합니다. 정인홍은 이전에 정철, 윤두수 등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는데, 이 때 의병을 일으켰고 임란 후에는 인조반정 후에 밀려나서 처형당하고 고종 대에 가서야 복권됩니다.

이들을 모두 통솔하여 활약할 수 있게 한 인물이 바로 욕을 엄청나게 먹고 있는 김성일입니다. 그는 임란이 일어난 죄로 체포되었다가 죄를 공으로 씻으라고 초유사에 임명되었는데, 적이 진주 쪽으로 오자 격퇴하기도 하였고 아군의 병력이 없자 삼국지에서 볼 수 있는 공성계를 시전하기도 합니다. 적은 복명이 있을까 두려워 도망갔다고 하죠. 임란 중에 올라온 그의 장계를 보면 경상우도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죠. 수령들이 도망가자 의병들을 가장으로 앉혔고, 도망간 김수를 비판하면서도 곽재우와 화해시키기도 했고, 부호들의 식량을 징발해서 의병들에게 지원하는 등 반격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그의 장계에 나오는 의병장들만 해도 열 명은 충분히 넘어가더군요. 또한 적이 호남을 치기 위해 진주성을 노릴 것이라는 걸 간파하고 각종 준비를 해서 진주대첩의 숨은 공로자이기도 합니다. 93년에 순찰사에 임명되어서도 분주히 일하다가 과로로 병사하죠.
이 정도면 죄를 공으로 덮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면에서 저는 전쟁을 모르고 유교 사상에 틀어박혀 한계가 있었지만 나라가 위험하면 누구보다 열심히 싸운 조선의 대표적인 사대부라고 평가하고 싶네요.
김시민은 진주 판관으로 임진왜란 당시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김성일의 부름을 받고 그 직을 대리하게 됩니다. 진주에서 성을 복구하고 병사와 백성들을 다시 부르면서 안정시키죠. 적이 오자 그는 곤양군수 이광악,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곽재우 등과 함께 적을 요격하고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기도 합니다. 후에 의병장 김면의 요청으로 금산에서 남하하는 적을 요격했고, 이 공으로 7월 진주목사에 임명됩니다. 그리고 10월에 진주대첩이 일어나죠. 이거 이것도 따로 다뤄야겠네요. -_-;
곤양군수 이광악은 친원균파로 이순신과 싸우는 모습으로 좋지 않게 등장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그냥 원균 말만 듣고인 듯) 진주성 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하고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병사가 돼서 큰 활약을 펼칩니다.
유숭인은 함안군수로 성을 지켰고, 곽재우 의병군과 합동으로 공을 세우기도 하는 등 크게 활약합니다. 후에 경상우도 병사가 돼서 창원을 공격하고 진주성을 구원하다가 전사합니다.
이들로 인해 낙동강 서쪽은 대부분 지켜졌고, 창원 등까지 공격하는 등 일본군은 낙동강 보급로가 거의 끊기는 위기를 맞습니다.

한편 경상좌도에는 의병장 권응수가 있었습니다. 임란 발발 당시에는 박홍의 휘하에 있다가 박홍이 도망가고 군사들이 흩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켰고 박진의 별장에 임명됩니다. 10월 25일에는 영천성을 탈환합니다. 그 전에는 박진과 함께 경주성을 탈환하다가 실패하고 후에도 여러 전공을 세워 정유재란 당시 경주를 방어합니다. 선무공신 2등에 올랐습니다.
박진은 밀양 부사로 패배 후 후퇴했다가 경상좌도 병사가 된 후 경주성을 공격합니다. 8월 20일 1차 공격에는 실패해서 500~600의 피해를 입지만 9월 8일에 2차로 비격진천뢰를 이용했고, 적은 그 위력을 보고 성을 비워 버리죠. 이후  동쪽에서 적을 압박하면서 황해도 병사까지 오릅니다. 다만... 최후가 안습이었죠. 이는 명나라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상주에서는 정기룡이 상주가장으로 판관에 임명돼서 11월에 상주를 탈환했고, 후에 여러 가지 공을 세웁니다. 정기룡에 대해 육지의 이순신이니 조자룡이니 하는 말들이 많은데 추풍령에서 나름 전공을 올리고 금산에서도 조경을 구해내기도 하며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조자룡) 용인 전투에서도 유일하게 소규모 승리를 거두기도 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다만 대다수의 전공이 행장록에서 나온 거기도 해서 지나친 과장은 금물이죠.

경상도가 너무 길었네요. 다른 도는 좀 줄이겠습니다. 어차피 진행하면서 다 해야 되니까요. 아무튼, 경상도만 봐도 낙동강 서쪽은 거의 탈환했고, 좌도도 상주, 경주 등이 탈환되는 등 일본군이 완벽히 점령한 곳은 부산 외에는 없다시피 했습니다. 평양성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93년 1월, 그 때까지 이미 조선군은 충분히 활약을 하고 있었죠.

2. 전라도
6월 22일, 금산을 점령한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6군은 본격적으로 전라도를 노립니다. 하지만 경상도 쪽에서 가려던 병력은 곽재우에 의해 정암진에서 패배했죠. 7월 7일, 그는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1만을 주어 웅치로 보내고 자신은 2000병력으로 이치를 넘으려고 했죠. 이에 전라감사 이광과 임시 도절제사에 임명된 권율이 막기 위해 휘하 병력과 의병장들을 총동원해 방어선을 설치합니다.
웅치에서는 김제 군수 정담과 휘하 방정영과 박석, 의병장 황박, 나주 판고나 이복남, 해남군가 병응정 등이 나섰습니다. 이들은 황박, 이복남, 정담 순으로 3개의 방어선을 나누어서 저항했지만 대군의 공격에 다음 날 1,2방어선이 무너졌고, 3군에서 일시 막아냈지만 화살이 떨어진 것을 안 일본군은 다시 공격, 패합니다. 이후 이정란이 전주성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수습했고 이광도 굳게 성을 지키죠. 이 전투에서 정담과 강운, 박형길 등이 전사했습니다.
한편 이치에서는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1천명이 막고 있었습니다. 권율은 후퇴하려는 병사를 보면 벙거지에 표시를 해 뒀다가 전투가 좀 잦아들면 즉결처분하면서 군기를 세웁니다. (불쌍하네요) 황진은 이 때 이마에 적탄을 맞는 등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습니다.
다음 날까지 계속되는 접전 속에 웅치를 돌파한 일본군은 전주성 근처까지 이르렀고 이치의 상황도 절망적이었죠. 하지만 이 때 적들이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금산이 공격받고 있었거든요.

고경명은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로... 에 저희 조상님이세요 >_<
아무튼 아들 고인후와 부하 유팽로, 안영과 함께 그는 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합류, 칠천명의 병력을 모아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합니다. 이 때 금산성에는 만 명의 적이 있었는데, 고경명은 주위에 불을 지르고 비격진천뢰 등을 동원하며 사납게 공격하죠. 첫 날 곽영은 철수를 권유하지만 고경명은 거부하고,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이를 꿰뚫어 보고 곽영의 진을 공격, 후퇴시킨 후 고경명을 공격합니다. 관군이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의병은 끝까지 항전했고 고경명과 유팽로, 안영은 전사하죠. 둘째 아들 고인후는 종에게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물었고, 주인을 걱정한 노비는 거짓으로 알려주지만 후에 아버지의 목이 걸린 것을 알게 되고 만류하는 노비를 호되게 꾸짖은 후 돌격, 전사합니다. 1차 금산 전투입니다.
이후 첫째 아들 고종후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걸 생각하면 숙연해지네요.

최경회는 상 중에 임란이 발발하자 형 경운, 경장과 함께 화순에서 의병을 모집합니다.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이 전사하자 그 병력까지 흡수했고, 금산과 무주에서 전라도로 향하는 적과 맞서 싸웁니다. 이듬해 경상우도 병사로 승진한 후 2차 진주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김천일은 나주에서 거병해서 역시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1537년 생으로 고령의 나이에 갑주를 입는 것조차 무거워 했다는군요. 하지만 그 뜻만은 높아서 창의사에 임명된 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경상도에 김성일이 있었다면 전라도에는 권율이 있었죠. 그는 이치전투의 승전으로 전라 감사로 승진했고, 12월에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직산까지 북진합니다. 당시 체찰사 정철이 군량 문제로 진격을 멈추라고 했지만 행재소에서 다시 북상하라는 명을 받고 북진, 이 때 임금에게 검을 받고 "말 안 듣는 놈은 다 베어라"는 말까지 듣습니다. 용인 전투 꼴 안 나기 위해 독성산성에 주둔했고, 이 때 우키다 히데이에의 병력을 물리치죠. 계속 북진해서 행주대첩을 이루지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죠. 그의 부하로 유명한 것이 황진과 이복남입니다. 황진은 후에 안성, 죽산성 등을 점령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역시 진주성으로 들어가 전사합니다. 이복남은 웅치 전투에서 활약하고 승진해서 95년에는 전라도 병사까지 이릅니다. 이후 정유재란에서 남원성이 포위되자 겨우 50명의 병력으로 들어가 전사합니다.

헥 헥 -_-; 전라도도 기네요. 이들은 웅치, 이치에서 적을 막아서 호남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웁니다. 일본에서는 전황이 바뀐 결정적인 전투를 오히려 이치 전투로 본다는군요. 권율도 행주보다 이치에서 한 게 더 컸다고 말했구요. 결국 전라도는 임진왜란에서 보존되며 후에 행주대첩까지 충청도와 경기도를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대신 그만큼 조선군과 명군의 식량까지 책임지게 되면서 다른 도보다 더 힘든 역할을 맡았고, 진주성 전투에서 다수의 전라도 의병이 참가해서 같이 싸우다 죽습니다. 정유재란 때는 그것 때문에 집중공격을 받아 초토화되죠. 호남이 지켜진 덕분에 조선 수군도 건재했던 걸 생각하면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죠.
전라도 의병장들이 일어난 이유 중에는 정여립의 난 때문에 훼손된 전라도의 이미지를 씻으려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선조도 그 때 미안했다고 그래도 열심히 싸워달라는 교지를 내리기도 했죠. 하지만 이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탄압당하면서 호남의 사림은 또 세력이 줄기도 합니다.

3. 충청도
충청도에서 유명한 건 역시 조헌이죠. 조헌은 대표적인 행동파로 도끼를 들고 상소문을 올리는 지부상소가 유명합니다. -_-; 꽤 거친 인물이었죠. 정여립의 난 때 서인 정철의 행동대장으로 크게 활약하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전에 그는 일본의 사신으로 온 현소를 죽이라고 상소하기도 합니다. 이게 거부당하자 고향으로 가서 왜란을 대비했죠. 그는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했고, 옥천에서 봉기합니다. 8월 1일 청주에서 그는 승병장 영규와 연합해서 청주를 공격, 탈환하죠. 이 때 도망친 공주 목사 허욱과 충청도 방어사 이욱도 지원했다고 하지만 주장은 그였죠.
금산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가 계속 머물면서 관군과 의병들이 서울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 탈환을 노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성과 남평의 군대가 패해서 남평 현감 한순이 전사하기도 했죠. 조헌은 여기를 노립니다. 그는 고경명과 함께 싸우려 했지만 병력이 모이지 않아 못 갔던 한이 있었죠. 이제 병력을 모아서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거부당했고, 권율과 곽재우에게도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당합니다. 하지만 그는 영규와 함께 당당히 나갑니다. 관군의 방해로 병력은 700으로 줄었고, 영규의 승병과 합쳐도 1300에 불과했지만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충청도 관찰사 허욱이 마지막으로 만류하지만 무시합니다.
금산성 앞 평야에서 이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고 장렬하게 전멸합니다. 일본군의 피해도 커서 전사자를 수습하는데 3일이 걸렸고, 이후 칠백의총이 세워집니다. 분명 승산이 거의 없는 싸움에 당당히 목숨을 바친 것을 보면 조선 사대부의 긍지가 어땠는지 알 만 하네요. 결국 고바야카와는 병력을 옥천으로 물립니다.
... 그런데 하필 이몽학의 난이 여기서 일어나서 주변 의병장들이 줄줄이 엮였으니 참...

4. 황해도
이정암은 전 참의로서 왕이 피난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지 못 한 것을 슬퍼했습니다. 분을 이기지 못 하고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드린 후 처와 함께 목을 메어 죽으려고 했다는군요. -_-; 다행히 구해졌고 "오늘 죽지 못 한 것도 운명이다"고 하며 직접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가 연안 부사로 있었을 때 선정을 베풀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에 광해군이 초토사로 삼았고, 연안성으로 들어갑니다. 연안성은 이미 신각이 (김명원 때문에 죽은 신각입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조헌의 경고를 받아들여 성 밖의 물을 끌어다 서문 안에 큰 못을 만들었고, 이 때문에 포위에도 견디고 끓인 물로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를 휩쓸면서 연안성에 이릅니다. 이 떄 주변 사람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고 하지만 이정암은 굳게 버텼죠. 적이 항복을 종용하자 "너희는 兵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義로 싸운다면서 항복을 거부합니다. 그 병력이 삼천으로 이정암의 병력은 수백에 불과했습니다. 일본군은 엉덩이를 까고 놀리면서 포위하고, 무사 장응기가 백마에 탄 적 장수가 바람에 넘어지자 -_-; 쏘아 죽이고 이정암이 이를 "적이 패할 징조"라면서 사기를 끌어올립니다.  그러면서 벌어진 포위전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싸웠고 섶을 모아 횃불을 준비한 후 "져서 욕을 당하느니 죽겠다"면서 (화약더미 위에 앉았다는 말도 있더군요) 결사항전합니다. 결국 8월 28일부터 시작된 포위는 4일간 이어졌고 9월 2일 적은 결국 물러나죠. 이런 활약에도 그는 장계에 "28일에 적이 왔고 2일에 갔다"는 간단한 장계를 올려서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며 조정의 찬사를 받게 되죠.

5. 강원도
강원도는 찾기 어렵네요. -_-a 전 편에서 얘기한 원호도 있고, 원주목사 김제갑은 적이 쳐들어오자 관군과 의병을 모아 영원산성에서 항전, 아들 김시백과 부인 이씨와 함께 순절합니다.

6. 경기도
적의 직접 점령지인 경기도에서도 안성에서 홍계남이 일어났습니다. 뭐 결국 이마저도 진압을 제대로 못 했다는 얘기죠.

7. 함경도
함경도는 이미 함경남도 병사 신할이 임진강으로 내려갈 때 상당수 병력을 빼 둔 상태였죠. 이후 함경북도 병사 한극함이 6진의 병력을 모아 남하합니다. 하지만 이 때 가토는 신나게 북진하던 상황이었죠. 개마고원 동쪽 마천령을 점령하려던 시도는 실패하고 마천령의 동쪽 해정창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 곳은 군량을 쌓아 둔 곳이고 현재 북한 김책시입니다. 뺏기면 안 되는 곳이었죠. 모인 병력은 천 명. 가토 기요마사가 그 이남에 병력을 놔뒀다고 해도 만 명은 족히 됐죠. 또 한 번 벌어진 평야에서의 회전이었습니다.
이 때 6진의 병사들은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잘 해서 기사 돌격으로 적을 많이 쓰러뜨렸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후퇴해서 창고의 곡식포대를 쌓아서 진지를 구축하고 조총을 응사했고, 부령 부사 원희가 적 진지에 돌격해서 몇 명을 쓰러뜨렸지만 곧 전사하고 맙니다. 이 때 전사한 조선군이 300명. 결국 한극함은 봉수치로 후퇴하고, 일본군은 7월 19일 새벽 기습을 가해서 조선군은 전멸합니다. 한극함은 여진족에게로 도망갔다가 받아주지 않아서 돌아왔고 백성들에게 잡혀서 포로가 됐다고 하는군요. 한편 이 때 임해군과 순화군이 회령부에 있었는데 국경인이 반란을 일으켜 그 둘 및 김귀영, 황정욱, 함경남도 병사 이영, 회령부사 문몽헌, 온성부사 이수 등을 모두 붙잡았다고 합니다. 국경인은 이들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겼고, 그래도 가토는 이 둘을 대우해줬다고 합니다. -_-; 왕족은 곱게 대접해 줘야죠. 국경인의 반란군이 오천이나 된다는데 반역향으로 찍힌 반발이 크긴 했나 봅니다. 거기다 왕자들이 온갖 횡포를 다 부렸으니... 이 둘은 광해군 때도 사고만 쳤습니다.
이후 한극함과 이영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참수당하는데, 사실 왕자를 제대로 호위 못 한 죄였겠죠. 전쟁 중에 패했다고 죽은 장수는 이 둘 뿐이었습니다.

가토는 18~19일 동안 해정창 전투로 함경도 조선 주력을 섬멸하고 23일에는 두 왕자를 붙잡았으며 24일에 회령을 점령, 함경도를 석권합니다. 그 동안 다른 군사와 장수들은 숨어 있었죠.
9월 16일, 북평사로 역시 숨어 있던 정문부는 이붕수, 지달원, 강문우, 최배천 등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으로 거병합니다. 이 때 일본군에 항복한 종성 부사 정현룡 등 항복하거나 도망간 수령들도 합세하죠. 처음 그의 병력은 300밖에 없어서 (스파르타? -_-;)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에게 갑니다. 이 때 그들은 국경인을 왕에 올리려고 했는데 그런 세력은 인정하되 왜적은 치자고 했나 봐요. 이 쪽도 공부해보면 재밌겠네요. 함경도의 특수성이라...
국세필의 의심을 어떻게든 넘기면서 정문부는 의병을 훈련시켰고, 경성과의 연락이 끊긴 것을 안 가토가 보낸 병력을 무사히 격퇴합니다. 한편 10월 국경인은 신세준과 그의 유생들에게 살해당했고 정문부는 이 틈을 노려 명천을 공격, 반란의 또 다른 지도자 정말수를 죽이고 이어 국세필과 그 일당까지 죽여 반란을 모두 진압합니다. 이후 10월 20일까지 3000명의 병력이 그의 밑에 모이죠. 이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길주를 치기 위해 진격했고, 몇 차례의 전투 끝에 11월 1일, 길주성을 탈환합니다. 이 때 함경 감사 윤택연이 정문부의 공을 두려워해서 그를 모함했고, 23일에 정현룡으로 대장이 바뀌죠. -_-; 그래도 정문부의 활약은 계속돼서 12월 23일에는 다시 6진으로 가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고 조정에서는 1월 13일 다시 그를 대장에 임명합니다. 해를 넘겨 1월 19일은 길주와 단천을 공격했고, 거짓 퇴각으로 일본군을 전멸시킵니다. 이외에 가부, 임명에서도 적을 이겼고, 가토 기요마사는 1월 28일 다시 마천령을 넘어 길주를 공격, 정문부는 이에 맞서 싸우죠. 가토는 일본군이 후퇴를 하려고 하는 중에도 계속 강경론을 펴며 함경도를 끝까지 지키려 했으나 지속되는 공격 끝에 2월 중순, 후퇴합니다.

29일에 한양에 도착한 2군의 전사자는 8864명, 정문부군의 공격과 추위에 절반 이상의 피해를 입은 거죠. 이후 함경남도와 북도의 의병이 규합한 후 그 병력은 다시 함경감사 윤탁연 휘하에 들어가고 정문부는 제대로 공을 인정받지 못 합니다. 후에 모함을 받아 안타깝게 죽었다고 하네요.

이를 북관대첩이라고 합니다. 그 공을 기리기 위해 북관대첩비가 세워지고, 일제시대에 일본에 뺏겼죠. 다시 돌려받았습니다만, 조일전쟁을 쓴 재미교포 자칭 사학자 어떤 분은 그것도 모르고 안 돌려받고 뭐 하냐고 했다죠. -_-; 아무튼, 다른 도도 힘들었겠습니다만 정문부는 북방의 추위와 험한 지형, 일본에서도 명장으로 인정받는 가토 기요마사의 정예병력, 여진족의 위협과 반란군과의 싸움, 그리고 감사 윤탁연 등과도 싸워가면서 그렇게 큰 공을 세운 것이죠.

8. 정리
정말 길군요. 이런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명군이 들어온 후 평양성 전투가 벌어지고 휴전 협정이 되기까지 각지에서 많은 의병과 관군들이 싸우죠.
곳곳에 의병을 모함한 관리들이 보이긴 합니다만, 마찬가지로 열심히 싸운 관리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왕을 위해 싸웠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죠. 썩은 관군은 어디까지나 "썩은"에 초점을 둬야 되죠. 도망간 관군들이 많고 곽재우가 다 죽여버려야 된다고 했지만 그렇게 도망간 이들 중에는 김시민, 박진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전쟁 초기에 도망가지 않은 관군은 다 전사했습니다. 정발, 송상현, 이전 편에서 안 다뤘지만 -_-; (몰랐어요) 문경의 신길원, 신립, 김여물 등이 그랬고 졸전으로 평가받는 임진강 방어전이나 용인 전투에서도 열심히 싸우다 죽은 장수가 분명 있었죠. 어디까지나 "썩은"에 초점을 둬야 됩니다. 류성룡-이순신, 윤두수-원균으로 뭔가 동서인이 선악 관계가 되는 것 같지만 일어난 의병들은 동서인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부산, 울산 등 주요 점령지를 제외한 다른 지역 대부분이 탈환되었고, 전라도 충청도에서는 금산을 지속적으로 공격해서 충청도 대부분을 탈환, 평양성 전투가 있기 이전에 이미 수원까지 진출합니다. 평안도는 개성 바로 서쪽에 있는 연안성도 점령하지 못 했고(남은 지역은 다 점령당하긴 합니다 -_-;), 함경도는 반란에도 불구하고 북도 대부분이 탈환되었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왕명을 받들어 승병을 이르킵니다만, 역시 대접은 좋지 못 하네요. 보이는 승병은 이 둘 외에 조헌과 함께 일어난 영규 정도. 그런 상황에서도 나라를 위해 일어난 걸 생각함녀 대단합니다.

결국 일본군이 조선 7도를 점령한 시기는 6월 이후 길어야 반 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도 곳곳에서의 저항으로 상당수 탈환한 상태였죠. 실질적으로 전토가 점령된 도는 황해도와 강원도 정도였고 당시 조선의 군현으로 따지면 절반도 되지 못 했습니다. 전라도의 권율군은 수원까지 이르렀죠. 보급로가 거의 끊겨 굶주려야 했고, 겨울이 되면서 월동준비를 못 해서 추위에 떨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진격할 희망도 잃게 됩니다.

12월 11일, 마침내 명군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넙니다. 명나라의 개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죠.


p.s : 위에 제주도에서 하는 말은 "위에 무슨 일 있어요?"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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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해머
11/04/04 21:03
수정 아이콘
만약 초유사 김성일이 진주성에 입성해서 판관이던 김시민을 부르기 전에 일본군이 진주성에 당도했다면 조선은 끝나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정도죠. 진주성만 장악하면 섬진강을 확보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섬진강을 확보하면 전라도도 손쉽죠. 연해지역의 수영들을 육상에서 공격이 가능한 상황이 전개되는 판. 여기에 낙동강 하류와 상류를 완전히 장악한 셈이니 중류쪽에서 일어나는 의병들을 제압하고 경상우도 완전장악도 가시권에 들테니... 여기에 낙동강-섬진강 수로를 장악하면 중부지역의 보급도 몇배는 원활해집니다. 낙동강수로를 거의 장악도 못하고 보급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죠.

4월에 전쟁이 터졌고 김성일이 진주성 방어태세를 재정비한건 5월, 통상어른이 경상도로 출격한 것도 5월.
한달 조금 안되는 그 짧은 기간이 전쟁의 성패를 가른 셈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모리
11/04/04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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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에 적이 왔고 2일에 갔다"

덜덜덜;;; 너무 쿨한데요;
키스도사
11/04/04 21:36
수정 아이콘
유명한 의병중 김덕령 장군도 있죠.전라남도 담양에서 거병하여 남원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하였죠.
1594년엔 이순신과 수륙합동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별다른 피해없이 끝...

사실 그것보다 어린시절에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화가 나면 눈에서 불이 나는데 그게 10리밖에서 보인다는 이야기가 더 유명했던 분이고 훗날 억울하게 잡혀왔을때 사람들이 겁에 질려 쇠사슬로 몸을 묶었는데 그걸 힘으로 풀고 도망갔다가 다시 담을 타고 돌아와 "나는 도망가려면 도망갈수 있지만 죄가 없기에 돌아왔다!"고 하시는 패기도 보여주셨다는 카더라도 유명하고요

뭐 훗날 이몽학의 난에 휩쓸려 죽임을 당하지만...
7년간의 전쟁중 가장 중요했던것이 바로 전라도 부근 방어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라도 방어선이 붕괴되면 서해안과 남해안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이 발생, 해군이고 뭐고 그냥 끝나버릴뻔 했죠.

정말 진주성 전투는 신의 한수인듯.
Siriuslee
11/04/04 21:44
수정 아이콘
보통 우리민족 종특으로 활쏘기를 꼽는데,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활쏘기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의 정치 기본인 성리학에서도 활쏘기는 마음 정진에 도움을 준다고 장려 했다고 하고요.
구한말에도 외국인의 기록에는 어린아이나 아녀자들도 활쏘기에 능했다고 적혀있다고(카더라) 합니다.

이런것이 위기상황에서 그 힘을 발휘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괜히 옛날 옛적이야기에 '지나가던 선비' (보통 과거를 보러 상경중)가 활쏘기로 영물을 쏴죽였다는 이야기가 많지요.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의 전술중에 하나가
야영중인 일본군 부대에 가까이 다가가서 곡사로 3~4발 정도만 속사걸고(..) 쏜다음에
화살이 떨어지기전에 퇴각..
화살맞고 일본군이 찾으러 가면 어디서 쐈는지 누가 쐈는지도 모르는 전술을 썼다고도 하죠.
Siriuslee
11/04/04 22:04
수정 아이콘
일본군이 저렇게 거점과 거점만 점령하는 식으로 침공하는 모습이
언젠가 다시 보이는데,

바로 중일전쟁때입니다.(똥싸느라 늦어서 시작된 전쟁...)

이때도 일본은 예전 역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상해에서 난징까지 일직선으로 달립니다. 결국 또 난징을 점령하긴 했지만, 이미 중국 국민당 정부는 도망간 뒤였고,
역시 상해에서 난징까지 이어지는 병참선을 지키기 위해서 불필요한 병력을 계속 중국에 주둔시켜야 했습니다.

이때 괜히 중국 건들지 말고 동남아 진출에 주력했거나,
아니면 중국을 건들려면 확실하게 중국을 집어삼키거나 했으면..
(물론 일본은 이때 육군만 100만에 가깝게 중국에 투입되어있긴 했습니다.
단지 중국이 너무 넓어;; 병참선 수비하는데 모든 역량을 써야했었죠.)

지금 제가 한글로 타이핑을 하고 있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성야무인Ver 0.00
11/04/0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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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썼는지는 기억은 안나는데 임진왜란때 참전한 일본군 장수중에 하나(크리스찬 다이묘였던 호소카와였던가요??) 가 일본으로 보내는 편지에 경상도에서의 일본군의 기아상태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쓴게 있습니다. 일본군이 굶어서 풀뿌리만 먹고 있고 왜 참전했는지 분통을 터트리면서 빨리 철수하길 바라는 그런 내용이죠. 아마도 그런상태를 보면 실제 각지 파견된 장수들간의 보급에 대한 유기적인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은듯 합니다. 이렇게 된데엔 의병의 활약이 컸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11/04/04 22:45
수정 아이콘
우리 민족에게는 큰 상처이지만 이야기만 본다면 우리나라 역사 통틀어서 가장 재미있던 시대는 임진왜란이 아닌가 싶네요
일본의 명장들과 크고 작은 구국영웅들까지 특히 정문부의 북관대첩은 진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네요
위에 열거한 전투들은 왠만 한건 다 알고 있는데 북관대첩은 북관대첩비 때문에 이름만 들었지 몰랐거든요
그냥 단순한 국지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대첩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네요
왜 북관대첩은 다른 전투에 비해 왜이리 안알려졌을까요?
11/04/04 22:56
수정 아이콘
이전부터 진주성 전투를 '혈전'이란 단어가 붙은만큼 대단할꺼라 생각했는데 과연 그랬었네요. 진주에서 훌륭한 조상님들을 많이 잃었군요. 일본에서도 진주에서 주요인물이 사망했는지 궁금하네요. 그렇다면 양국 영웅들의 무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진주대첩 관련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Je ne sais quoi
11/04/04 23:13
수정 아이콘
1. 계속 읽을 수록 제게는 유교의 나쁜 점이 부각이 되는군요. 물론 좋은 점들도 많지만 결국 큰 그림은 이미 망쳐놓은 상황에서 지엽적인 부분에만 너무 매달리는 느낌이 들어서.. 게다가 지금까지도 나쁜 점들만 남아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도 하고...
2. 일본 중국에 뭐라 하기 전에 우리나라도 국사 교과서 좀 제대로 쓰면 좋겠네요. 나름 역사에 관심이 있는 편인 저도 들어보지도 못한 애들도 가끔씩 나오고 그럽니다. 아.. 요즘엔 우리나라 국사 교육 선택이지요 -_-;
3. 그 와중에 깨알같은 조상님 자랑 ^^
양정인
11/04/04 23:17
수정 아이콘
애초에 일본군은 왕이 이렇게 쉽게 수도를 비워두고 튈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했고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서 의병들에게 시달릴 것도 예상을 못한 것이 임진왜란이 장기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조가 도망을 안갔다면 초기에 몰려온 1, 2군에 왕이 잡혔을 것이고, 그 이후엔 임진왜란이 어떤 전개를 보일지는 예상하기 힘들죠.
물론 각지에서 의병들과 관군들이 들고 일어났겠지만 주 목표는 '왕의 구출' 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왕은 북으로 튀었고 의병과 관군의 목적은 왕의 구출이 목표가 아닌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것이 목표가 된 것이죠.

일본군은 임진왜란이 장기화가 될 줄 예상했다면 '전라도' 를 공략하는데 더 신경썼을 겁니다.
장기화가 될 것을 예상 못했기에 전라도 공략이 늦었기도 했고 의병들의 활약까지 겹치면서 전라도를 지킬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유재란때는 충청, 전라, 경상을 우선 장악하려는 일본의 전략을 보면 임진왜란의 초기 전술의 실패가 가져온 영향을 알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비로움
11/04/04 23:46
수정 아이콘
오와, 눈시BB님 장흥 고씨이신 모양이네요. 저도 장흥 고씨인데, 참 반갑습니다.

어렸을때 학교에서 <훌륭하신 조상님을 조사해오세요>라는 숙제를 받고 할아버지께 여쭈어봤더니 알려주신 조상님이 고경명 장군이셨어요. 좋기는 좋았는데, 뭔가 곽재우 장군에게 처지는 느낌이라서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벤카슬러
11/04/04 23:5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다만 광주가 낳은 스타(?)인 충장공 김덕령 장군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게 좀 아쉬울 뿐입니다 ^^;;;
충장로(금남로와 함께 광주 최고의 번화가),
충장부대(광주전남을 지키는 향토사단인 31사단),
거기에 김덕령 장군에 관한 전설이 있는 말바우시장...
죽어서도 광주를 지키고 있는 김덕령 장군이십니다 ^^;;;

근데 댓글을 달다가 충장이라는 시호에 관해 궁금증이 생겨서 한번 찾아봤는데요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은 분이 몇 분 더 계시더군요. 잘 알려진 분이
김덕령 장군 말고도 신립 장군(탄금대 전투의 그 신립 맞습니다)
정운 장군(녹도만호 정운... 불멸의 이순신에도 나오시는 분이죠)
권율 장군(행주대첩... 워낙 유명한 분이니까 패스. 다만 칠천량 해전의 빌미를 제공한 분이라서...)
그리고 이 글에도 나오는 이복남 장군도 충장 시호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 통틀어 총 14분이 충장 시호를 받았다고 하네요.
출처: 엔하위키 http://www.angelhalowiki.com/r1/wiki.php/%EC%B6%A9%EC%9E%A5%EA%B3%B5

그럼 충무공은? 의외로 충무공도 몇 분 더 계시더군요.
조선시대 총 9분이 충무 시호를 받으셨다고 합니다.(충장 시호보다는 좀 귀했던 시호인 듯 합니다.)
이순신 장군 말고도...
진주대첩의 김시민 장군도 충무 시호를 받으셨구요. 임진왜란 전에는 남이 장군,
임진왜란에서도 공이 있지만, 임진왜란 이후 이괄의 난 평정 공신으로 충무 시호를 받은 정충신 장군도 있네요.
근데 이분은 시호보다 군호가 더 유명하시죠... '금남'이라고. 예, 광주 최고의 번화가이자 518 하면 빠질 수 없는 그 금남로 맞습니다.
출처: 엔하위키 http://www.angelhalowiki.com/r1/wiki.php/%EC%B6%A9%EB%AC%B4%EA%B3%B5

누가 어떤 시호를 받았는지 연구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네요 ^^

ps) 글 쓰다가 로그인 3번 풀려서 날리고 다시 쓰고 있네요 ㅠ.ㅠ 댓글 달때 조심하세요 ㅠ.ㅠ
ps2) 그리고 이 글에 제 조상님도 나오십니다... 경상도에서 활약한 박진 장군이 저희 조상님이시더군요 ^^;;;
황사저그
11/04/05 00:30
수정 아이콘
홍의장군 곽재우 하면 생각나는 일화가, 이 분이 나중에 화왕산성이라는 곳을 지키게 되는데, 이 성에 가토 기요마사가 공격해들어오죠. 병력차가 워낙 압도적인지라 성 안의 부하들이 다들 덜덜 떠는데, 유독 곽재우만, 청정이란 애가 싸움을 아는 애면 우릴 공격할 리는 없으니 안심해라 라며 태연자약하게 성 아래에서 대치중인 가토군을 째립니다. 실제로 가토는 며칠 성 주위를 돌면서 겁만 주다가 철수해버리죠. 약간 제갈량과 사마의 냄새가 나서 나중에 홍의장군의 신성함을 위해 지어진 이야기 느낌도 나지만.....(확실한 기억은 아닌데, 철수하는 가토군을 곽재우군이 쫓아가는 이야기가 나왔던거 같거든요) 하여간 곽재우의 전투에 대한 재능은 확실히 비범했던거 같습니다. 정암나루에서 싸울때 일본군이 미리 설치해둔 길잡이 표식을 진흙탕에 옮겨꼽아서 발을 묶었다는 야사도 남아있거든요.
11/04/05 03:47
수정 아이콘
천년 가까이 왜구들한테 시달림 받은 것과 일본을 후진국 오랑캐 정도로 생각했던 것도 의병결집에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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