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1/26 11:04:26
Name nickyo
Subject 흔한 설날의 동네축구 수비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첫 설 연휴를 맞이했다. 호상을 치뤄서인지 생각보다 분위기가 우중충하지는 않았다. 원체 시골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슬프게 기리다기보단 농을 하며 웃어 보내주는지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제사를 지내고 나니 사돈댁 친척들이 하나 둘 찾아왔다. 예전같았으면 할머니께서 친가쪽 사람들을 쫒아내는 모양새가 되어버리니, 사돈댁이 모이는 걸 조금 느지막히 모였으면 좋겠다 하셨지만 할머니도 안계시니 이제 일찌감치 모이고는 하는 것이다. 다행히 그쪽 사돈댁과는 어찌어찌 안면이 트여서 함께 어울리기에 어색하지는 않았다.




사돈댁의 삼촌 하나는 전직 축구선수였는데, 축구선수라고 하기엔 2부프로를 밟지는 못했던 분이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운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메시와 모 부대 소대의 스트라이커 병장정도의 차이를 갖는다. 명절만 되면 이 분이 잔디구장을 빌려서 사촌들과 축구를 하고는 했는데 워낙 청소년기 애들이 많아서 어른 몇이 끼면 10:10 정도의 축구를 할 수가 있었다. 예전에는 친가가 대부분 올라가면 사돈댁이 오셨기 때문에 함께 할 찬스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일정이 맞아 떨어져 같이 축구를 하게 되었다.





사촌동생들은 생각보다 본격적이었다. 축구화에 각종 해외구단, 멘체스터 리버풀 FC바로셀로나 등등의 화려한 레플리카를 갖춰입고 축구용양말에 정강이 보호대까지. 영하 10도에 반바지를 꿋꿋히 입는 그 정신에 좀 감동했다(..). 심지어 잔디구장에서의 축구라니, 고등학교때 축구에 미쳐서 내가 이 학교 최고 센터벡이라며 허세를 부리던 기억이 나 덩달아 신이 났다. 나도 유니폼이 막 사고 싶어질 정도로. 무려 승합차 세대가 줄줄히 움직여 구장에 도착하자, 이것 참 모양새는 k리거가 따로없다.




고교를 졸업하고 공을 차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름 기초체력이 떨어지지는 않는 선에서 관리해왔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피트니스 센터도 꾸준히 나가는 편이었고, 커다란 체구에 비해서 순발력이나 속도가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게다가 나름 축구좀 한다던 고교시절 친구들이나 체육특기생들에게도 꽤 위협적인 수비수였던 경험이 있었기에, 두근두근 손 발끝이 약간 달아오르며 흥분감이 고조되는 것이었다. 추운 날씨에 가볍게 몸을 풀어주고 적당히 팀을 나누었다. 사촌동생들과 선수출신 삼촌은 적팀이었다. 나는 내심 내 진가를 보여주겠다며 포백체제를 갖추고 윙백들에게 오버래핑을 주문했다. 마치 피파온라인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그리고 10분뒤에 심폐가 놀라서 죽을뻔 했습니다.






깜빡한게 있다. 동네축구의 진리. 윙백은 오버래핑하고 수비가담하러 내려오지 않는다. 왜냐? 달려갔는데 뛰어오면 지치잖아. 동네축구의 기본은 거지같은 기초체력이다. 그러니 역습에 센터벡은 둘, 상대 공격수는 넷 이상이다. 왜 공격수가 넷이냐고? 미들이 셋쯤 되는데 둘에서 셋이 거의 공격수랑 비슷하니까. 수비가담이 없다. 내가 무슨 비디치도 아니고 넷이 오는데 센터백 둘이서 무슨 수가 있나. 지역마크를 한답시고 거리를 두면 패스패스패스 하는 사이에서 마네킹이 되고, 압박으로 붙으면 옆으로 통. 또 붙으면 다시 통. 모기모드 박지성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한차례 실랑이를 벌여 겨우 실축이나 운좋은 인터셉트로 앞으로 공을 던지고 나면, 미친듯이 단거리를 오고간 탓에 다리는 푸들푸들 숨은 커헉켁켁. 죽을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웩.






다행히 선수출신 삼촌은 아이들에게 슈팅기회를 주기위해 볼을 오래끌었다. 나는 그 삼촌을 삭제시키기위해 따라붙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느껴야 할 진리가 있다. 뱁새가 황새 쫒아가면 다리가 찢어지고 고자가 됩니다. 삼촌을 딱 10분 더 따라다니고 20분만에 나는 하늘이 노래지고 천둥번게가 귓가에서 치는 상황에 놓였다. 으어어어 좀비수비수가 되가는 기분이었다. 내 기초체력이 언제 이렇게 거지같아졌지? 고등학교때는 90분 뛰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라고 생각했더니 고등학교가 5년전일이다. 토하고 싶었다..






좀 쉬고싶은 마음에 골키퍼랑 자리를 바꾸려고 했는데, 고 사이에 동생하나가 이미 골키퍼랑 자리를 바꿨다. 사촌동생이 갑자기 미워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헉헉대며 무거운 다리를 이끌었다. 윙백들에게 아무리 수비위치를 지키라고 해도 이놈들은 오로지 공과 오버래핑뿐이다.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동네축구는 그냥 쓰리빽을 해라. 어차피 헤딩과 크로스는 확률이 희박하다. 공격가담을 하느니 수비위치나 지켜라. 위가 목 너머로 튀어나갈 것 같은 기분이 된 뒤에야 떠올랐다. 으으..






어찌어찌 전반이 끝났다. 스코어는 5:3. 우리가 2점차로 이기고 있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실질적으로 수비 2에 공격 7이었으니까.. 그런데 후반이 문제였다. 어떻게 좀 앉아서 쉬면 체력이 회복될 까 했더니 날씨가 추워서 휴식없이 바로 하기로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거기다 긴 츄리닝 바지에 후드티를 입어서 그런지 땀이 차서 몸도 무거웠다. 그나마 축구화가 아닌 일반 운동화도 잔디구장에서 뛰기에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역시 프로스펙스였다. 발에 딱 맞는 감각부터 뾰족한 디자인과 가죽, 짱짱한 봉합과 높은 마찰력을 지니는 믿창. 상대적으로 푹신한 승차감. 프로스펙스가 야심차게 내놓은 가죽재질의 구두같은 디자인. 편안한 운동화를 겸용할 수 있는 신발. 국내산 공정을 통해 우수한 품질을 자랑합니다. 축구에도, 농구에도, 런닝에도 만능인 운동화! 메이커에 매료되지 마시고, 품질과 디자인을 둘 다 잡으시려면 프로스펙스를 선택하세요!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는 페이크구요.


후반은 처참했다. 체력은 고갈되었으나 저쪽 삼촌은 슬슬 발동이 걸리는 상황. 본격 선수출신의 능욕.txt 였다. 그 삼촌을 삭제하려다 내 존재가 삭제될뻔했다. 후반내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삼촌은 이영표마냥 헛다리를 짚으며 슛을 팡팡 쏘았다. 지옥같은 후반이 지나고 결과는 8대 6. 처참한 패배였다. 패배에 분하기도 전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허벅지에 힘이 하나도 안들어갔다. 대체 얼마만에 이렇게 뛰어보는건가 싶었다. 잔디밭에 누워 퍼런 하늘을 보니 그래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다같이 땀을 뺐으니 목욕을 하자며 우리는 바로 사우나로 향했다. 나만 지친건 아니었는지, 음주에 찌들어있던 사촌동생도 함께 사이좋게 절뚝절뚝 엉금거리며 탕으로 들어갔다. 왠지 실금실금 웃음이 나왔다. 패배는 분했지만, 기분 좋게 몸에 남는 피로감. 이게 또 스포츠의 묘미 아니겠는가?





온수샤워로 욱신거리는 몸을 노곤노곤 녹이고 있자, 곧이어 사돈댁 조카들도 탕으로 들어왔다. 나는 사돈댁 조카들과는 함께 목욕을 온 것이 처음이었다. 사촌동생은 갑자기 빙글빙글 웃더니 내 어깨를 툭 치며 조카들을 가리켰다. 그런데.. ?????????????!!!!!!!!!!!!!???????????!!!!!!! 혼돈의 카오스였다. 사돈댁 조카들 평균연령은 16세 전후였는데, 시..시골애들이라 그런가? 아니면 저 멀리 흑형의 유전자가 있는가? 남탕 전체를 겸손하게 만드는 패왕색 패기를 뿌리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등장하는 것이다. 나와 내 사촌동생들은 재빨리 샤워를 끝내고 슬금슬금 탕의 구석진곳으로 자연스럽게 피했다. 축구에서도 졌는데, 사우나에서도 패배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은 열탕의 뜨거운 김일 따름이다. 2012년이 흑룡의 해라더니, 설 기념으로 강림하셨나보다. 천진난만한 조카들이 탕에 앉아 축구이야기를 떠들다가 냉탕으로 가자며 나갈때 눈 앞에서 벌떡 일어나는 조카에게 나도 모르게 흠칫 고개가 30센티쯤 뒤로 물러나게 되는것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패기의 탓이었다. 길에서 일진패거리를 만나도 이렇게 겁을 먹어본적이 없건만......애꿎은 눈빛이 허공만 맴돌았다.





한껏 겸손해진 자세로 사우나를 끝내고 새빨개진 볼을 한 아이들에게 바나나우유를 하나씩 돌렸다. 너희들은 꼭 옷을 입고 있어라 하고 머리속으로 되뇌였다. 비록 여러모로 졌지만 내가 제일 맏이었기 때문에 음료수 정도는 쏠 수 있지 하는 대인배의 마인드를 발휘했는데, 20명이 바나나우유를 먹으니 3만원이 나갔다. 홀리 크랩............. 하루에 세번의 좌절을 맛보다니, 영 씁쓸한 설날이었다. 흑룡을 이길 수는 없으니, 올해 혼자 조기축구라도 다녀서 올해 추석이나 내년 설에는 꼭 복수하고 말겠다며 속으로 불끈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사우나에 올때 꼭 수건을 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축 처진 어깨를 다독이던 사촌동생이 그날따라 어른스러워보였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방과후티타임
12/01/26 11:11
수정 아이콘
첫번째 좌절은 연습하면 되고 세번째 좌절은 다시 안쏘면 되지만 두번째 좌절은 어찌해야할지.....
정 주지 마!
12/01/26 11:18
수정 아이콘
흐흐흐.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 대단치 않은 패기를 지녀서인지 공감이 많이갑니다.
고교 축구 선수 출신 제 후배가 조기 축구 아저씨들 하고 뛰면 승패를 늘 지 마음가는데로 결정하더군요.
선출이라는게 진짜 따라갈수없는 차원인 것 같습니다.
12/01/26 11:23
수정 아이콘
아 아침부터 더럽다 두문단 뺄까......
속으론 수사반
12/01/26 11:29
수정 아이콘
음 그래서 조기 축구 진리의 전술 3-5-2가 있지요.
12/01/26 11:49
수정 아이콘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해 프리스타일 풋볼을 합니다. 아니다, 이게 더 밸붕인가!
HarukaItoh
12/01/26 13:32
수정 아이콘
다같이 모이면 운동하는게 역시 여러모로 긍정적인거 같습니다. 어색함을 씻어준달까..
그리고 프로스펙스 신발 이름 좀 알려주세요 크크.. 광고효과 대박입니다
PoeticWolf
12/01/26 15:00
수정 아이콘
흐뭇하네요. 운동하는 가족. 부럽습니다.
너는강하다
12/01/26 15:03
수정 아이콘
동네축구에서의 포백운용은... 네명의 센터백이 진리입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107 개혁신당 이스포츠 토토 추진 공약 [26] 종말메이커4909 24/03/08 4909 0
101106 이코노미스트 glass ceiling index 부동의 꼴찌는? [53] 휵스5567 24/03/08 5567 2
101105 토리야마 아키라에게 후배들이 보내는 추도사 [22] 及時雨7195 24/03/08 7195 14
101103 드래곤볼, 닥터 슬럼프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 별세 [201] 及時雨10079 24/03/08 10079 9
101102 [정정] 박성재 법무장관 "이종섭, 공적 업무 감안해 출금 해제 논의" [125] 철판닭갈비8198 24/03/08 8198 0
101100 비트코인 - 집단적 공익과 개인적 이익이 충돌한다면? [13] lexial3424 24/03/08 3424 2
101099 의협차원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라고 지시한 내부 폭로 글이 올라왔습니다 [52] 체크카드10066 24/03/08 10066 0
101098 [내일은 금요일]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떨어진다.(자작글) [5] 판을흔들어라1891 24/03/07 1891 3
101097 유튜브 알고리즘은 과연 나의 성향만 대변하는 것일까? [43] 깐부3463 24/03/07 3463 2
101096 의사 이야기 [34] 공기청정기6635 24/03/07 6635 4
101095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4) [8] 계층방정7352 24/03/07 7352 9
101094 대한민국 공공분야의 만악의 근원 - 민원 [167] VictoryFood10701 24/03/07 10701 0
101093 [중앙일보 사설] 기사제목 : 기어이 의사의 굴복을 원한다면.txt [381] 궤변13791 24/03/07 13791 0
101092 의대증원 대신 한국도 미국처럼 의료일원화 해야하지 않을까요? [12] 홍철5468 24/03/07 5468 0
101091 정우택 의원에 돈봉투 건넨 카페 사장 “안 돌려줘… 외압 있었다” 진실공방 [20] 사브리자나5199 24/03/07 5199 0
101090 성공팔이를 아십니까? [29] AW4639 24/03/07 4639 7
101089 사랑하고, 사랑해야할, 사랑받지 못하는 <가여운 것들> (약스포!) [3] aDayInTheLife1808 24/03/07 1808 3
101088 '해병대 수사외압 의혹' 피의자를 호주 대사로‥영전 또 영전 [56] lemma6838 24/03/06 6838 0
101087 종이 비행기 [3] 영혼1899 24/03/06 1899 6
101086 다양한 민생법안들 [10] 주말3594 24/03/06 3594 0
101085 (스포) 파묘: 괴력난신을 물리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 [33] 마스터충달4057 24/03/06 4057 12
101084 너무많은 의료파업관련 구설수 기사들 [21] 주말5574 24/03/06 5574 0
101083 의사분들 이러시는 건 심적으로 이해가 갑니다만 [150] 된장까스10789 24/03/06 10789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