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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8/09 21:34:12
Name 눈시BBver.2
Subject 희망과 절망 - 7.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
지도는....... 그냥 한국지도 보고 참고해 주세요 ㅠ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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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화요일

맑다.
김효신의 집을 찾았다. 효신이는 학도의용대에 지원했고 나만 남았다. 효신이 부모님께서 효신이를 대신하여 집에 머물러주길 바랬다. 뭔가 망설이고만 있을 때는 아니다.

조국은 지금 위난에 처해있지 않은가. 결심이 중요한 때다.

7월 20일 목요일
쾌청한 날씨다. 대구역에 나갔다가 학도병 모집 벽보를 보았다.

“가자! 김석원 장군 휘하로!”

이 귀절이 나를 뜨겁게 했다. 김신부님께 상의했다. 조국이 위난에 처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쫓겨만 다녀서야 될까. 나는 결심했다.

- 이우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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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2사단은 춘천-홍천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도 주변의 병력 및 한국에서 징발한 병력으로 여전히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정예로 인정받아서 그런지 이들은 이천을 이용해 (여기서도 막혔으면서 -_-;) 대전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들이 빠진 빈자리는 1사단이 중부전선으로 가서 메꿨죠. 이들의 목표 역시 대전이었습니다.

3, 4, 6, 105전차사단이 미군을 공격하는 동안 이들에게는 진천을 뚫고 대전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미군이 저렇게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국군이 밀리면 안 된다는 것, 김홍일은 수도사단을 이 곳에 투입합니다. 수도사단을 이끄는 것은 돌아온 맹장 김석원이었습니다.


"국군 장병과 경찰관들은 들으라! 내가 이번에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한 김석원이다. 국군 장병과 경찰관은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하겠거늘 지금 너희들이 가는 곳은 어디냐. 쫓기고 밀려 현해탄 물속으로라도 뛰어들 생각이냐. 지금 총을 든 너희들이 여기까지 쫓겨왔기 때문에 뒤에 있는 너희 부모·형제·자매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 줄 아느냐. 돌아서라, 어서. 대한의 아들아, 돌아서서 북으로 가자. 이 김석원이가 앞장서 갈 테니 너희들도 같이 가서 나와 함께 싸우자"

김석원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사단지휘소를 북쪽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지휘소는 청주 북쪽으로 이동했고, 그 자신은 적의 포탄이 떨어지는 곳까지 나아갔죠.

시작은 늘 그렇듯 밀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진천을 수비하던 건 1연대 뿐, 김석원 준장은 진천 고수를 명하지만 8일 전차를 동반한 공격에 밀리고 맙니다. 이걸 본 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군단 예비인 2사단 20연대와 17연대, 독립기갑연대 등을 지원합니다. 이제 해볼만하다 싶었던 상황, 그래봐야 병력과 장비는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적의 목표는 문안산-봉화산 고지, 김석원은 고지 바로 앞에서 지휘를 계속합니다.

"누구든 사단장의 명령없이 후퇴하면 총살이다. 나와 너희들이 죽어야 할 자리는 이 문안산·봉화산 고지인 줄 알아라!"

이 때 적의 포탄은 그의 근처에도 계속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고문관들은 후방으로 물러나자고 했죠. 겁 먹은 것도 먹은 거겠지만 사실 이게 합리적이긴 합니다. -_-a 사단장 죽으면 다 끝이예요. 이 때 나름 유명한 말이 나왔죠.

"김석원이를 죽일 포탄을 아직 만들지는 못했소. 병사들이 쓰러지고 있는데 나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수 없소."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미군은 부산에서 배 타고 집으로 가면 그만이지만 자기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내 땅이기 때문이다.  단 한치라도 적에게 내어 주느냐 혹은 우리가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동포 형제들의 생사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끝까지 싸워보지도 않고 함부로 후퇴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38선에서 이곳까지 쫓겨온 패잔병들을 후방에서 지휘하면 지휘가 잘 되겠소? 안됩니다. 그러면 또 전선이 금방 무너집니다. 겁이 나거든 당신이나 후방으로 물러가시오.' 하고 단호한 말로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8일은 버텨냈지만, 9일 아침 적의 집중공격에 문안산-봉화산 일대를 내 주게 됩니다. 헌데 그의 판단은 역공이었죠.

"사단장 김원석이가 너희들 앞에 여기 이렇게 서 있다. 만약에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하면 너희와 내가 모두 함께 죽는줄 알아라!"

진짜 무슨 중세시대 공성전 하는 것 같은 이런 독려 속에서 역습은 성공, 문안산-봉화산을 회복했고 적의 반격에 다시 봉화산이 무너질 것 같자 18연대를 투입해 탈환했죠. 이런 혈전은 10일까지 이어집니다. 이후 미군의 패배에 따른 전선 균형을 위해 청주로 철수하게 되죠.

+) 이 때 고지를 탈환하고 보니 기관총병들을 도망 못 가게 묶어놨다고 합니다.

북한군은 이 때 자신들의 장기인 후방 침투를 통한 포위를 시도하려 했지만 이미 국군은 떠나 있었고, 따라붙으려는 북한군에게 UN군의 폭격이 쏟아집니다. 이 날 2사단 병력이 조치원의 미군 쪽으로 증원돼서 화력이 약해졌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다가오는 적을 포격 및 공군으로 정확히 유도해 큰 피해를 입혔죠.

이후 청주를 지키느냐를 두고 회의가 열렸고 김석원은 당연히 청주를 지켜야 된다고 했지만 대다수는 청주에서 버티는 게 이득이 안 될 거라 판단, 김홍일의 결정에 의해 철수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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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의 귀재였다 / 1사단장 시절 / 준장으로 / 예편되었다 사변 전
7월 초 / 그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 / 수도사단장이 되었다 사변 직후

전쟁이 한 장군에게 다시 철모를 쓰게 했다

그 뒤 수도사단은 / 한국전쟁 야전의 중앙이었다
후방의 아이들이 그 이름을 가지고 놀았다
김석원이다 / 김석원이다 후퇴하라 / 살고 싶으면 후퇴하라 / 호랑이 김석원이다

그는 윤선도와 한용운이 누구인지 몰랐으나 제 부하들은 잘 알았다

김석원 장군 - [만인보], 고은

좋게 봐도 한 고려 조선시대 맹장 같은 모습, 나쁘게 보면 일본군의 돌격 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은 모습입니다. 헌데 그 결과는 놀라울 정도죠.

이 전투로 북한군 2사단은 전사만 550명을 기록하게 됩니다. 부상자는 샐 수 없을 정도였죠. 반면 국군의 주축이던 수도사단의 피해는 전사 28명과 부상 135명.

그 혈전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냥 무작정 밀어붙이고 아군 다 죽을 때까지 버티라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군의 피해가 커지기 전에 빠졌고, 공격할 때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시킨 것이죠.

솔직히 어떻게 했나 모르겠습니다. 정말 "의지의 힘"이라는 게 떠오를 정도죠.

6사단의 경우는 뭐 혼자서도 잘 해요 수준이었고 국군의 주력은 계속되는 패배의 공포 속에서 정신 못 차리던 상황, 이 진천 전투의 의의는 큽니다. 이 때 국군은 싸울만 하다는 걸 느끼게 됐죠. 여기에 여기서 더 밀리면 끝이다고 외쳤던 김석원의 호령이 휘하 병사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도 했구요. 이제 전쟁 시작이었던 미군에 비해 국군은 정말 끝에 몰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구요.

이후 김석원의 명성은 더 높아져서 그의 밑에 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 퍼지게 됩니다. 저렇게 후퇴도 못 하게 했는데도 전사자가 저 정도면 그럴 만 하죠. 나중에 가면 미 고문관까지 일렬종대로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고 하죠.

한편으로는 적절한 시기에 병력을 투입해 줬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무기의 보급도 잘 해 준 김홍일의 공이 컸습니다. 이 전투는 이 두 노장이 힘을 합친 몇 안 되는 전투입니다. 여기에 UN 공군이 더 이상 국군이 아닌 북한군을 제대로 공격해준 것, 그리고 패하긴 했어도 북한군의 주력을 미군이 붙잡아 준 것도 컸죠. 이렇게 한미연합은 뗄레야 떼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적절한 상황과 적절한 아군의 도움이 있다면, 그리고 그 지휘관이 정말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맹장이라면 구시대적인 전술로도 이만한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전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병력과 무기의 질 외에도 전쟁에서 의지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적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이죠. 이와 비견할 만한 건 프랑스군의 착검돌격이 있을 겁니다.

흥미로운 건 이 때 북한군 2사단장인 최현이 김석원과 한 번 붙어본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개성 코 앞에서 말이죠. 육탄 10용사의 돌격으로 패했던 그는 여기서 또 김석원에게 패하게 됩니다. "그 못된 놈을 또 만났다"면서 짜증냈다고 하네요. 짜증날 만 합니다. "폭풍"이라 하면 당연히 주력이 돼야 하고 실제 가장 최정예 사단이었던 2사단은 이렇게 계속 패하면서 낙동강 전선에 참가도 못 하는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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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6사단은 정말 혼자서도 잘 하고 있었습니다. (...)

6사단에서 가장 왼쪽을 맡은 건 7사단, 그들은 이천-충주 축선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15사단과 맞서게 됩니다. 이 15사단은 별다른 전투를 겪지 않아 병력과 장비가 충실했던 반면 후방의 부대라서 훈련도가 떨어졌고 전투 경험 역시 없었습니다. 헌데 이들이 상대한 게 하필이면 김일성에게 춘천바위라는 명칭을 하사받는 영광을 얻은(-_-) 7연대였죠.


이젠 저 미소만 봐도 무서워요;

그들이 장호원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종오 대령은 7연대에게 탈환 명령을 내립니다. 이 때 북한군이 대병력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입니다만.

7연대는 7월 4일 충주 중학교를 출발, 중간에 장갑차와 사이드카로 편성된 북한군 정찰대와 교전합니다. 북한군은 장갑차 1대와 사이드카 5대, 5구의 시체를 버리고 도주했죠. 이후 1개 대대와의 교전이 이어졌지만, 굳이 더 공격해 갈 필요 없이 이천에서 후퇴하는 19연대를 엄호하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진천으로 향하다가 됐다고 다시 음성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이들에게 무극리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구요.

이를 위해 1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정찰대를 보냈는데, 이들은 고개 위에서 북한군을 발견해 기습, 적은 도주합니다. 이어 적의 본대를 만나면서 고지를 두고 대치하게 됐죠.


연대장 임부택은 야간을 틈타 아군의 주력을 적의 측면으로 가게 한 후, 기습합니다. 북한군은 아군의 포병까지 동원된 이 공격에 물러났고 잠시 무극리 북쪽까지 탈환하는 데 성공했죠. 하지만 적의 증원군에 다시 후퇴하게 됩니다. 목표는 동락리였죠.

이후 들이닥친 북한군은 주민들에게 국군의 위치를 물었고, 그저 철수한 줄로 알았던 주민들은 자기들이 아는대로 대답합니다. 북한군은 이걸 듣고 나름 정찰을 하긴 했지만 국군을 발견하지 못 했고 안심합니다.

여기서 이 전투에 대한 설명이 갈립니다.


김재옥 여사

"나는 언제나 다름없이 학교에 나와 있었는데 그날 점심때가 되었을 무렵 밖이 소란하여 내다보았더니, 북한군이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학교 밖으로 나가서 그들의 동정을 살펴 보았더니, 이 마을 청년 한상준이 피살되고, 가가호호의 소, 돼지, 닭 등이 마구 도살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극리로 공격 중이라는 국군에 알리기 위해 가다가 피난민을 만나 국군의 이동 소식을 듣고 그 곳으로 가서 알리니) 빨리 가서 그들을 물리쳐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날 석양때부터 일몰시까지 동락리는 온통 불바다가 된 듯 하였는데, 다음날 알고보니 이 마을에 침입했던 적은 전멸되어 있었다"

통설이라 해야 될까요.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얘기는 동락초등학교의 김재옥 교사가 북한군이 들어오자 산을 넘어 2대대장 김종수 소령에게 알렸고 이에 따라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 애초에 계획된 매복, 그것도 3대대와 미리 짜고 한 것이었다는 것 (반면 "주민신고"를 통해 매복했다고는 합니다)과 그냥 김종수가 쌍안경으로 적을 보고 공격했다는 것이 있죠.

뭔가 서로 살짝 겹친 것 같기도 하고 따로 봐야 될 것 같기도 한 이 작전, 확실한 건 이 2대대장 김종수와 김재옥이 이 때의 인연으로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학교는 운동장 덕분에 군대가 집결하기 좋은 곳입니다. 예정된 매복이었든 우연의 결과든 2대대는 동락초등학교에서 쉬고 있는 북한군 연대 병력을 기습할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됐고, 김종수 대대장은 연대장에 알리지 않고 독단으로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것으로 학교에 모여 있던 북한군은 궤멸됩니다.

한편 근처에 있던 3대대도 북한군의 진격을 발견했지만 긴장한 병사 하나가 총을 미리 쏴 버려서 제대로 피해를 입기도 전에 적은 도주했죠. 하지만 다음 날에 다시 진격하다 3대대에 다시 붙잡혀 이번엔 정말 호되게 당합니다.

다음 날 마을 수색에 나서서 붙잡은 북한군만 97명, 이 중엔 소좌(소령) 이상의 장교도 5~6명이 끼어 있었습니다. 이 때 투입된 북한군은 2000여명에 달했고, 그 중 사살만 800명으로 잡고 있습니다. 아무 피해 없이 내려오던 15사단에 연대 하나를 없애버린 것이죠. 역시 6사단 7연대는 대단하다는 것과, 기습의 효과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전투죠. 이후 7연대 장병들은 일계급 특진의 영광을 얻습니다.

이후 김종수 소령은 김재옥 여사와 결혼했지만, 이후 고재봉 사건 때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변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걸 주민들이 거짓말해서 이렇게 됐다고 판단한 북한군은 무극리와 동락리 일대의 주민들을 학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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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에 큰 피해를 입힌 7연대는 음성으로 후퇴, 여기서 1사단을 만납니다. 이 때 1사단장 백선엽은 군단의 우익을 담당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동했지만 당시 투입된 1사단 병력은 1개 연대도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7연대에게 1사단이 준비를 마칠 때까지 함께 행동하며 그의 명령을 들으라고 했죠. 헌데 이게 백선엽의 회고록에는 또 다릅니다.

"북한군 동태를 파악한 7연대 2대대가 적이 방심하는 틈을 타 기습공격을 펼친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간신히 사단의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다. 서글픈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부대원들을 점검해 보니 병력은 어느덧 5000명 수준으로 늘어 있었다. 전선에서 밀려 흩어지면서도 끝까지 제 부대를 찾아와 합류한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세의 침략에 흔들리면서도 이 땅을 지켜 낸 동력은 항전의지를 갖춘 국민에 있다는 점이 새삼 느껴졌다."

"우리는 1950년 7월 8일 백마령을 넘어 음성에서 6사단 7연대와 방어 임무를 교대해야 했다. 7연대장인 임부택 중령은 마침 동락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라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는 바로 방어 임무를 맡기에는 우리 사단의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들어 그를 설득했다. 바로 이동하지 말고, 준비가 될 때까지 1사단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어쩌면 애걸이었을지도 모른다.

임 중령은 그런 나의 궁색한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다. 7연대는 1사단과 함께 방어전에 임했다. 7연대 포병이 사단 정면을 엄호해 줌으로써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임 중령에게 고마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이 일로 김종오 6사단장에게 혼이 났다. 김 사단장은 “왜 이동하라는 나의 명령을 어기고 맘대로 작전을 펴느냐”면서 호통을 쳤다고 한다."

육군 공식 전사가 김종오의 허락이 떨어진 1사단과 6사단 7연대의 합동 작전이었다면, 그의 회고록에서는 그의 고집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고 그 말을 들어준 임부택은 오히려 김종오에게 혼났다는 것이죠. 공식 전사보다 그의 회고록이 더 그에게 불리하게 서술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이후 1사단은 7연대와 함께 12일까지 음성에서 방어전을 계속하다 후퇴 명령에 따라 후퇴하게 됩니다.

그 외에 6사단 2, 19연대는 북한군 1, 12사단(병력 합 2만명)에 맞서 충주에서 9일까지 버티다 후퇴했고,

이성가 대령의 8사단은 제천에서 북한군 8사단에 12일까지 맞서면서 적의 진격을 늦추었습니다. 특히 8사단은 잘못된 정보 때문에 충주까지 후퇴했다가 돌아와 급히 적을 상대해야 했지만, 그래도 6일 동안 막아낼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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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연전 기간 동안 국군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야 여러가지로 찾아볼 수 있죠.

일단 적의 주력을 미군이 붙잡아줬습니다. 물론 국군 앞에 나타난 적도 최소 한 개 사단으로 언제나 국군보다 앞섰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압력이 준 것이죠. 여기에 미군 및 UN공군이 아군을 오폭하지 않고 북한군을 제대로 노리기 시작했고, 부산에서 화기가 계속 도착하면서 아군의 화력도 강해졌죠. 따지고보면 난이도 높은 걸 미군에게 맡기고 나름 쉬운 걸 맡은 거지만, 곳곳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최소한 자기 임무만큼은 제대로 하게 된 것이었죠.

그리고 국군이 맡은 중부전선은 지형을 활용하기가 쉬웠습니다. 여기에 이제 막 북한군을 만나 공포를 겪고 있던 미군에 비해 슬슬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김홍일이라는 제대로 된 지휘관을 만나면서 작전도 더 제대로 세울 수 있었죠. "더 이상 밀리면 끝이다"는 것도 컸습니다. 미군이야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는 걸 나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지만, 국군은 도시 하나하나를 뺏기는 것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결국 이 때문에 안동에서 미군과 대판 싸우게 되죠.

따지고보면 계속 패배하는 길이었지만, 희망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쟁 초의 수주일 동안에 극히 미미한 장비와 간부급의 미약한 훈련수준으로 인해 서부의 한국군은 대체로 파멸되었다. 대다수의 장병들은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동부의 한국군 사단은 처음 모습을 대체로 그대로 지닌 채 반도를 남하하면서 지연전투를 전개했다. (중략) 한국군의 포병과 지원 탱크 병력은 전쟁의 잔여기간을 통해서 보잘 것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 투지는 왕성했다. 1950년 7월을 통해서 한국군 각 부대는 계속 전투를 수행했다. 많은 부대가 훌륭한 전투능력을 발휘했다.

미군의 지원이 없었던들 대한민국은 전면 붕괴했을 것이지만 한편 3년 동안의 전쟁에서 병력의 가장 큰 부분을 계속 부담한 것은 대한민국이었다.

1950년 여름 한국군 희생자의 숫자는 하나의 결정적인 사실을 가리켰다. 승승장구하는 괴뢰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한국군은 여러 번 적에게 결정적인 손실을 입혔다. 당시 미군 장교들은 적의 피해를 한국군의 작전에 의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 한국군의 부대들은 전멸의 운명을 무릅써 가면서 괴뢰군의 여러 연대와 심지어 사단들까지도 파멸시켰다. 이것은 후일 노획된 괴뢰군의 문서를 통해 비로소 판명된 사실이다.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로 후퇴했을 때 미군 장교들은 그때까지의 괴뢰군 인명피해를 3만 명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실제 숫자는 6만 명에 가까웠는데 그 대부분이 한국군이 끼친 피해였다."

<한국전쟁> 페렌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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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봐야 계속 밀리고 있는 건 사실이죠. 어느새 소백산맥이고, 소백산맥을 넘으면 경상도입니다.

낙동강이 머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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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09 21:51
수정 아이콘
김석원 장군은 와우 하셨다면 십중팔구 호드, 오크로 하셨을 장군이시라는...;;
Brave질럿
12/08/09 22:00
수정 아이콘
와..
3시26분
12/08/09 22:06
수정 아이콘
저런 일화들이 정말 있었던 일일까 싶을정도로 흥미진진 하네요.
여기 쓰인 전투만 모아도 전쟁영화 두세편은 나올듯. 대단합니다.
눈시BBver.2
12/08/10 00:12
수정 아이콘
안타까운 건 이런 전투들이 시간관계상 생략되고 바로 낙동강으로 간다는 거겠죠. 낙동강 전선과 인천상륙작전이 정말 대단하긴 하지만요 =_=
12/08/09 22:27
수정 아이콘
아오...큰일이네요. 이젠 의지란 단어만 봐도 웃음이....ㅠㅠ
Tristana
12/08/09 23:23
수정 아이콘
6사단 신교대에서 지겹게 보고 들은 7연대 전장병 일계급 특진....
지금 6사단 19연대 3대대가 신교댄데 시설이 최악이라능...

잘 보고 있습니다.
앉은뱅이 늑대
12/08/09 23:51
수정 아이콘
"미군의 지원이 없었던들 대한민국은 전면 붕괴했을 것이지만 한편 3년 동안의 전쟁에서 병력의 가장 큰 부분을 계속 부담한 것은 대한민국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병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전투병만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수긍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전력의존도로 보면 절대적인 부분이 미군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죠.
눈시BBver.2
12/08/10 00:15
수정 아이콘
그야 당연한 거죠. ~라면이 들어갈 필요도 없이 "전력"도 "화력"도 "훈련도"도 아닌 "병력"이라고 했으니까요
친절하게 미군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전면 붕괴했을 거라고 앞에 적어놓기도 했죠. 국군이 병력의 가장 큰 부분을 맡지 않았으면 전면 붕괴하는 게 아니라요.
잿빛토끼
12/08/10 10:01
수정 아이콘
항상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이제 직장도 생기셨으니 글을 재촉할 수 없고...
꾸준히만 써 주세요^^
그리고 글을 읽으면서 한가지 궁금한게
미국에게 한국이란 어떤 의미였을까요?
눈시BBver.2
12/08/10 11:05
수정 아이콘
네 감사합니다 ' '
미국에게 한국이라...
이득으로 보면 아시아에 친미 국가로서 교두보로 절대 잃으면 안 되는 땅일 것이고, 자기들이 해방시켜주고 도움을 주고 있으며 한국 정부 역시 친미적이니 도의적으로 반드시 지켜주고 키워줘야 될 나라였겠죠. 한편으로 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이 막 시작할 무렵에 이 나라를 돕지 않는다면 1세계의 맹주라는 의미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일 거구요.
아마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일본을 상대한다는 느낌으로, 일본에 점령된 나라들을 "구한다"고 했듯이 북한 및 공산주의에게서 한국을 구한다... 이렇게 생각했지 않나 싶어요.
중공군에 한창 밀려 사기 떨어지자 다시 사기를 끌어올린 것도 "단지 한국을 구하는 게 아니라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가 얼마나 단결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전쟁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뭐 한국이 얼마나 자유 민주주의를 했나 싶지만 그렇게 따지면 북쪽 애들도 제대로 공산주의 안 했잖아요. 그래도 공산주의라는 이념 하에 뭉쳤으니 여기 역시 그렇게 봐야죠.

... 직장 말씀하시니 몰컴하는 게 찔리네요 ㅠ
rechtmacht
12/08/11 07:21
수정 아이콘
고재봉 사건이 뭔가 해서 검색했다가 한 5분 벙쪘네요 어이가 없어서

진짜 하늘이 무심하네요
Je ne sais quoi
12/08/12 00:01
수정 아이콘
1950년대이긴 하지만 현대전에서도 저런 의지력이 전투력으로 연결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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