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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8/12 00:58:11
Name 눈시BBver.2
Subject 희망과 절망 - 8. 후퇴, 또 후퇴
+) 대전에 연락장교로 투입된 김종오 대령이 있는데, 6사단장 김종오 대령과 헷갈렸네요. 어떻게 이름도 계급도 똑같은 사람이 있지 --;

"대전에는 막강한 미 제24사단과 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취하고 있다. 대전만 떨어지면 남반부는 그만이다. 전면공격을 하면 큰 출혈이 날 것이다. 군은 총력을 기울여 대전을 포위하여 적의 마지막 거점을 분쇄하라"

대전을 점령하는 효과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교통의 요지 중의 요지니까요. 북한군은 여기에 3개 사단(원래는 4개 -.-a)을 투입했고, 아군의 방어가 강할 것이라 판단, 포위 공격을 시도합니다. UN 공군의 폭격에 따라 야간 기동으로 전환했음에도 참 신속한 기동이었습니다.


이에 24사단장 딘 소장은 대전을 고수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판단, 지연전을 실시하며 후퇴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미 큰 피해를 입은 19연대는 영동으로 철수하게 했고, 21연대는 옥천으로 철수해 있었습니다. 전면은 34연대가 맡으면서 대전-옥천간의 도로와 터널을 폭파하기로 했구요.


하지만 워커 중장은 18일에 대전에 직접 방문해 20일까지 버텨주기를 주문합니다. 미 1 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해 영동으로 이동 중이니 그 시간을 벌어달라는 것이었죠. 다만 이건 명령 수준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귀관이 만일 그 이전에 철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귀관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오. 본관은 귀관을 지지하오"

이에 딘 소장은 철수 시간을 24시간 연장하기로 합니다. 20일까지였습니다. 한편, 북한군의 공격은 20일 새벽 03시에 시작됩니다.



문제는 병력이었습니다. 이미 북한군을 막을 병력이 아니었던 상황에도 병력을 쪼개야 했죠. 딘은 이제까지 보여준 북한군의 포위 공격을 걱정하고 있었고, 이 예측은 맞아떨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알고 있음에도 병력을 쪼개면서 제발 버텨주기를 바라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여기서 더 컸던 것은, 북한군이 오지 않은 동북쪽에도 병력을 배치했다는 것이죠.

그는 국군을 불신했고 가장 위험한 것을 진천에서 내려오는 북한군 2사단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들이 내려오면 미군의 퇴로가 끊기는 것이었거든요. 실제 2사단은 김석원의 수도사단에 당해서 참가 못 했음에도 말이죠. 사실 이런 불신을 품을 만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막 한국에 도착했던 딘은 이런 모습을 보게 되거든요.

"전쟁이 시작되자 곧 육군본부는 사실상 참모부장인 김백일 대령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본부내에서는 서로가 "공산당원이다"라고 의심하고 욕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결이고 뭐고 없었다. 그래서 한국군의 고위층은 내가 그들의 행동을 결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_-; 19일까지 양측의 전투가 계속됩니다. 이 때 딘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의 1일 포격량보다 많은 양"의 포탄이 오갔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어떻게 막아내긴 했지만 적은 그저 시간을 버는 공격일 뿐이었죠.

20일 03시, 총공격이 시작됩니다.

전방을 맡은 34연대 1대대는 적의 포위 공격에 말려 연대에 알리지도 않고 후방으로 철수, 헌데 본대에 이런 무전이 도착합니다.

"1대대와 무전 교신을 한 바, 대대는 지금도 건재하여 진지를 지탱 중"

연대장과 딘 사단장은 이를 믿고 대전 시내에 들어오고 있던 북한군 전차를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처음 쓰인 3.5인치 로켓포의 효과는 좋았습니다. 그렇게 두들겨도 안 깨지던 전차가 한 방에 깨진 것이죠. 하지만 북한군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시내에 풀어놓으며 곳곳에서 미군을 공격해 왔습니다. 나중에 가면 사단장이 직접 로켓포 병력을 끌고 전차를 사냥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어쨌든 이런 반격 및 공군의 도움으로 15대나 되는 전차를 격파하긴 했습니다만.

"적의 T-34 전차가 시내에 진입시 제34연대 지휘소에 있었으나 통신 두절로 전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으며,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1대대의 독단 철수 소식은 뒤늦게야 들려옵니다. 아까 그 무전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역시 나중에야 알게 되었죠. 북한군의 미군의 무전기를 노획해 위장 보고를 한 것이었습니다. 이게 아주 제대로 먹혔습니다. 미군은 철수 시기를 놓쳤고, 이미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에 의해 갈갈이 찢깁니다. 무기고 차량이고 버리고 도망가다가 붙잡히거나 겨우 살거나 했죠.

딘은 18시까지 버티다가 철수합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습니다. 거기다 옥천으로 가야 되는데 금산으로 길을 잘못 잡아 버렸고, 적의 매복에 걸려 버립니다. 이렇게 "딘 장군의 실종"은 시작됩니다.

그는 겨우 17명의 병력을 수습해 적의 공격을 피해 아군 지역으로 후퇴하려 했습니다. 이 때 부상병이 물을 달라고 하자 직접 물을 구하려고 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버렸죠. 남은 이들은 그를 찾으려 애썼지만 찾을 수 없었고, 23일에 겨우 영동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36일, 그는 적의 손길을 피해 산야를 방황합니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으니 거의 물만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북한군에 붙잡힌 것은 8월 25일, 그를 친절히 안내하겠다는 한국인 한두규가 북한군에 밀고하면서였죠. 대전 남쪽 36km 지점의 진안이었습니다. 원래 그는 유럽 전선에서 죽으면 죽었지 포로가 되지 않겠다는 정신으로 싸웠던 이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고, 포로가 됐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굴욕일지는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딘

후에 북진 과정에서 그의 생존 사실이 알려졌고, 휴전 협상 과정에서 돌아오게 되니 1953년 9월 4일입니다. 그 때 그의 체중은 86kg에서 58kg으로 줄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은 그에게 Medal of Honer, 명예 훈장을 수여합니다.

길을 잘 못 든 것도 있겠지만, 그가 애초에 대전에 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대전에 남아서 싸웠고, 이런 큰 일을 당한 것이죠. 그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첫째, 제34연대와 그 배속 부대 전투원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둘째,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지휘도의 시범을 보임과 아울러 한국군 부대의 전의를 앙양하게 하는데 기여하며,  ·셋째, 북괴군의 전투 방식을 직접 관찰하여 차후의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무에 너무 접근한 탓으로 숲을 볼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미군은 물론 국군에서도 없었던 첫 사단장 포로, 다행인지 몰라도 북한군은 그가 장군인 걸 몰랐다고 합니다. -_-a

그의 이야기의 뒷 얘기가 또 있습니다. 그를 밀고했던 한두규는 수복 후 붙잡혀 징역형을 당하게 됐는데, 이 때 딘은 그의 감형을 탄원했다고 합니다. 이 덕분에 한두규는 57년에 출소합니다.

참...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해 주는 장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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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대전은 제3,4사단과 우리 탱크사단, 이렇게 3개사단이 공격을 담당했는데, 답답하게도 대전의 미군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대전지구의 지하남로당으로부터 한 건의 제보도 없었단 말입니다. 이래서 30명의 첩보원을 피난민에 섞어서 내보냈지만 한명도 돌아오지 않아요. 기다리다 못해 5명을 다시 보냈는데 안돌아오더군요. 또 3명을 보냈지만 영 함흥차사에요.

  이래서 미군의 배치·장비·병력 등에 대해서 정보를 얻지 못한 채「무서운 미 제24사단이 버티고 있다」는 전제 아래 소위「十六字 전법」대로 조심조심하면서 대전공격작전을 전개한 것이지요. 뒷이야기지만, 대전 함락후 김일성으로부터 군지휘부에 불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작전 실패라는 겁니다. 1개 사단으로도 대전을 단시일에 점령할 수 있는 것을, 탱크사단을 비롯한 3개 사단이 시일만 허비했으며, 미 제24사단 주력은 빠져나갔다는 거지요." - 당시 105 전차사단 정치부 대위 오기완(63년 월남)

20일에 시작해 20일에 끝난 전투, 하지만 북한군에게도 이게 그리 좋은 전투는 아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대전 전투에서 방어를 맡은 미군은 34연대 하나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은 이 사실을 알지 못 했고, 많은 병력과 시간을 끌어야 했습니다. 워커 중장은 20일까지 버티기를 주문했는데 북한군은 대전의 미군이 강할 거라 생각하고 그 때까지 시간을 끌어 준 것이었죠.

첩보를 38명이나 보냈는데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미군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얻지 못 한 채 공격해야 했죠. 김일성은 105 전차사단 하나만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걸 괜히 시간과 병력을 투입했다면서, 거기다 24사단의 주력을 깨뜨리지도 못 했다면서 크게 분노합니다. 특히 대상이 된 건 팔로군 출신들이었죠. 천천히 포위 후 제대로 공격한다 vs 그냥 한 방에 밀면 밀렸을 건데 왜 그랬냐의 싸움이었고, 김일성은 이것을 팔로군 출신들을 숙청하는 구실로 삼게 됩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삽질은 있었다 해도 전자가 옳은 것 같습니다만 -_-a 김일성의 조급증과 팔로군을 일부러 몰아세운 것에 가깝지 않아 싶어요.

이후 첩보원 38명 중 27명은 알아서 도망가고, 11명만 돌아왔는데, 전원 총살당합니다.


그리고 좀 다른 얘깁니다만.

대전형무소는 위치가 적절해서 그런지 양측에서의 학살이 이 곳에서 벌어집니다. 경찰들이 후퇴하면서 대전형무소의 수감자 및 대전 인근의 체포된 좌익 및 보도연맹원 등을 불러모은 이들을 학살했는데 과거사위원회에서는 그 수를 최소 1400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북한군 역시 여기에 우익들을 가둬 놓았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학살하니 그 수는 대전형무소에서만 최소 1300입니다.

참 많은 피가 흘렀던 곳입니다.

이 수가 얼마나 과장이 된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가령 북한군 측의 학살은 6800명에 달했다는 말이 곳곳에 있는데 과거사위원회에서는 이를 1300으로 바로잡을 것을 권고하기도 했죠. 지금 과거사위원회에서 규정한 수 역시 얼마나 정확한 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곳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만 확실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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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미 24사단은 만육천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대전이 적의 손에 넘어간 후인 21일, 이들은 무려 7305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20일까지 버텨주면서 미군의 증원군이 본격적으로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대전을 잃으면서 북한군은 (자기들 입장에선) 마지막 내지 끝판 앞잡이 쯤 되는 공세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UN군은 이에 맞서 낙동강으로의 전선 축소를 시작합니다. 지금의 병력으로는 더 이상 북한군을 막아낼 수 없었고, 어느 지점에서 최대한 방어하면서 증원을 기다려야 했죠.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의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을 만드는 동안 최대한 오래, 그러면서 아군의 피해는 적게 적을 막아내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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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재편에서 5개 사단으로 줄었던 국군을 다시 8개 사단으로 늘리려는 노력이었죠. 이를 위해 3, 5, 7사단의 이름을 다시 붙이게 되고 부산에서 9사단을 창설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자원은 없었습니다. 3, 5, 7사단도 그저 이름만 사단일 뿐이었죠.

그런 가운데서 7월 15일에는 2군단이 창설됩니다. 6, 8사단과 3사단(이래봐야 23연대 하나 - -;)이 여기에 포함됐고, 초대 군단장은 김백일이었습니다. 자... 그럼 다시 얘기를 시작해 보죠.


동해안에서는 다시 후퇴가 시작됩니다. 울진에서 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죠. 23연대와 독립 1대대만으로만 구성된 3사단(사단장 이준식)은 더 이상 5사단을 막아내기 힘들었고, 영덕으로 후퇴합니다. 이 때 북한군의 공격이 지속돼 영덕까지 뚫릴 위기에 처하지만 워커 중장이 여기에 최대한의 지원을 하면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해군이 직접 공격할 수 있었기에 지원이 쉽기도 했죠.


한편 8사단은 죽령에 도착, 각 고지를 점령한 후 적의 공격에 대비합니다. 이 때 지형을 이용해 V자형으로 배치했고 적은 V자 안의 살상지대에 도착,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죠. 이후 적은 측면을 찌르려 했지만 이것도 격퇴, 전선은 소강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후 적은 8사단을 공격하던 8사단을(...) 우회하게 하고 12사단을 공격에 투입, 18일에 이르러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후퇴하게 됩니다. 이 때 UN 공군의 폭격으로 적의 속도가 둔화되면서 후퇴가 쉬웠죠. 헌데 이 때 우측에 투입된 10연대 중 1대대가 그렇게 밀리지 않았음에도 독단으로 후퇴, 방어선 자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후 이 1대대장은 즉결 처분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 번 밀린 전선을 안정시키는 건 어려운 것, 10연대는 19일까지 이어진 공격에 무너집니다.

+) 이 때 처음으로 A부대, 민간인 노무자 부대가 배치됩니다. 이를 통해 산악지형에서 싸울 때도 보급이 비교적 좋아졌죠.

이렇게 밀리던 상황에서 이성가 사단장이 시도한 것은 역습이었습니다. 몰려오는 적을 "우연히" 기습해서 큰 피해를 주면서 북한군의 진격은 다시 멈춥니다.


한편 6사단은 문경 북쪽 조령과 이화령을 방어선으로 삼아 적 1사단을 맞이합니다. 이들은 지형을 이용해 적에게 큰 피해를 줬지만 적의 공격도 강해서 19연대와 2연대는 퇴각, 7연대는 방어선을 지켜냈지만 이 때문에 적의 공격에 노출되고 맙니다. 이 전투는 이후에도 계속됐고 6사단은 계속 막아내면서 큰 피해를 입었죠.

+) 이 때 6사단의 병력은 3개 연대임에도 2개 연대인 8사단보다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 동안 정말 잘 싸워줬지만 누적된 피해 역시 적지 않았던 것이죠.

이 전투는 7월 말까지 계속되지만 여기서는 크게 다루지 않겠습니다.


한편 보은과 문경 사이에는 30km에 달하는 공백지역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참 황당한데 당시 국군이 가진 지도에는 여기에 길이 없었거든요. 국군이 가진 지도는..................... 학교에 붙어 있는 한국 전도였습니다. =_=;;;;;;

이런 것조차 없을 정도로 국군의 상황은 열악했고, 미군에게 1:5만 축척 지도를 빌리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거 참; 북한군은 이 틈을 노린 것이죠. 여기서 또 절체절명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국군도 미군도 신경쓰지 않은 곳을 북한군은 참 귀신같이 알아서 그 곳으로 침투한 것이었죠.

헌데 정말 행운이 벌어집니다.

오산 쪽에 투입됐다가 후퇴하던 17연대는 17일 길을 막아서는 주민을 만나게 됩니다. 북한군이 그 길로 오고 있으니 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죠. 다른 주민들에게 정보를 더 알아내고 자전거를 타고 북상하는 적 전령 2명을 생포해 이미 1개 대대가 남하했음을 알게 됩니다.

17연대 1대대는 급히 그 곳으로 가 휴식 중인 적을 발견, 기습해 700명이나 되는 적을 사살합니다. 이어 17연대 주력이 도착했고, 20일에 적의 주력이 남하하자 또 한 번 큰 타격을 주게 됩니다. 이 전에 긴장한 병사 때문에 소수의 적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다행히 이게 적의 주력에 알려지지 않았죠. 공격할 때도 안개가 끼어 적인지 아군인지 제대로 모른 상태에서 한 거였는데 제대로 맞은 것이었습니다.

남하하던 북한군은 15사단으로 이미 6사단 7연대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던 48연대가 17사단에 당해 전멸했고, 별 피해 없이 따라오던 49연대도 여기에 당하면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 하고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게 됐습니다. 이 전투의 의의가 더 큰 것은 이 병력이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의 상주 점령은 6일이나 늦춰졌고, 그 사이에 미군이 도착하면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게 없었다면 북쪽의 6, 8 사단의 퇴로가 끊겼을지도 모릅니다.

17연대 전 장병은 1계급 특진했고, 옹진 때부터 격었던 굴욕을 만회하게 됐습니다. 반면 15사단장 박성철 소장은 이 일로 인해 경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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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부터 20일까지의 기간을 북한군 3차 작전 혹은 공세라고 부릅니다. 이 때 북한군의 진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3, 4, 105전차사단은 대전을 점령했고, 김천으로 향합니다. 상주로 향하던 15사단은 위의 전투로 큰 피해를 입었고, 1사단은 국군 6사단과 격전을 벌이며 문경 북쪽까지 진출했죠. 8, 12사단은 8사단과 싸우면서 안동 근처까지 진출했고, 5사단은 동해안에서 국군을 영덕 남쪽까지 밀어냅니다. 한편 6사단은 군산 코 앞까지 진출, 치고 달려라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사단은 김천까지 가려다가 미군에 당해 아예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되지도 못 했는데 이건 좀 뒤의 얘기군요.

이 때, 대전 함락을 기점으로 미군은 전선을 제대로 축소시켜 공간을 내 주고 시간을 버는 작전에 돌입합니다. 증원되는 미군들은 이제까지처럼 제대로 준비도 없이 전방에 투입되는 게 아닌 정해진 낙동강 전선으로 향했죠.

하지만 국군은 이에 반발합니다. 대체 어디까지 물러날 거냐는 거였습니다. 이 때 상황을 보면 이제 북한군과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때가 다가왔고, 큰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미군이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죠. 하지만 국군에게 이렇게 상황을 냉철하게 보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차피 미군과 UN군은 배 타고 집에 가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밀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아픈 것이었습니다.

이게 충돌한 것이 안동이었습니다.

안동은 북쪽에서 8사단이 잘 막았고, 여기에 수도사단까지 도착하면서 상황이 더 좋아지게 됩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이 북쪽에서 북한군의 진격이 참 느렸죠. 여기다 수도사단 하면 누가 있겠습니까.


김석원은 여기서 안동 시민들에게 우리가 잘 막을 테니 생업에 종사하라는 연설을 합니다. 그의 성격상 이는 진심이었을 겁니다. 안동 시민들은 정말 안심합니다. 여기에는 김석원 자신의 명성의 힘도 컸겠죠.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낙동강 방어선에 안동은 포함돼 있지 않았고, 실제로는 계획보다 더 밀려 버립니다. 김석원의 호기로운 주장은 오히려 독이 되어 다가왔죠.

더 이상 물러나면 안 된다는 국군과 더 물러나야 제대로 싸울 수 있다는 미군, 이들의 불화는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정말 씁쓸하기 그지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자, 그럼 다음 편에서 이 얘기와 낙동강으로 물러나는 부분을 다루면서, 3부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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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페리안
12/08/12 03:32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몇 편정도 남은 건가요??
Je ne sais quoi
12/08/12 07:24
수정 아이콘
딘 소장은 정말 역사에 이름이 길이 남았네요. 저도 최초의 미국인 장성 포로로 어렸을 때 부터 기억할 정도니 ^^;;
12/08/12 09:13
수정 아이콘
이게 강용준의 화령장기행에 나오는 그 전투군요. 저 박성철 소장이 7.4 남북정상회담 때의 그 박성철이라던데.
12/08/12 10:17
수정 아이콘
매번 댓글은 안달고 있지만 잘 보고 있습니다
앞으론 댓글 달도록 할께요!
12/08/12 12:52
수정 아이콘
참 6.25라는 전쟁이 참 극적인 장면이 너무 많은거 같아요 이렇게 낙동강 전선으로 뒤로 밀리면서도 끊임없이 상륙작전을 준비해서

실패도 했다가 인천이라는 대박을 한번 터트리고 올라가다 다시 또 내려오는...

군대를 다녀왔음에도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분들의 희생에 고개를 들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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