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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02 05:26:38
Name 눈시BBbr
Subject 휴전과 고지전 - 2. 회담장에 나와라

밴플리트는 리지웨이와는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데 집중했던 리지웨이에 비해 (그리고 그 모든 걸 다 쌩까고 자기 위주로 놀았던 맥아더에 비해 (...)) 친한파적인 성격이 강했죠.

이후의 작전에 대해서도 의견이 달랐습니다. 그는 휴전 얘기가 나올 때 이미 제압작전(Overwhelming)을 구상해 놓고 있었고, 9월 1일에 개시하자고 건의합니다. 여기에는 원산 상륙과 함께 전선을 끌어올리고 최종적으로 평양-원산까지 진격하자는 내용이 있었죠. 리지웨이는 이를 거부합니다.

리지웨이는 감제고지 위주로 적을 회담장에 끌어올리는 수준만의 작전을 명령합니다. 여기에는 와이오밍-캔자스선 사이에 너무 남쪽으로 내려간 부분이 있어서 이 곳을 정리하는 의도도 있었죠. 하지만 그게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지 생각 못 했을 겁니다.

기존 UN군의 작전 방침은 적의 대규모 공세시 지연전을 펼치며 남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와이오밍선에서 캔자스선으로 후퇴 후 반격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런 제한전에서 그런 방법은 쓸 수 없었고, 와이오밍선의 방어를 강화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천천히 북진을 시작하죠. 때는 장마가 그친 8월 18일, 작전명 포복(Creeper)이였습니다. 워낙 계속 싸워서 전 전선을 하나로 구분하기 힘들긴 하지만 대략 하계, 추계로 나뉘어지죠.

+) 참고로 이 때 병력은 국군 26만여, 미군 25만여, 기타 UN군 2만 8천여, 미군 지원 카추사 2만 7백여명이었습니다. 공산군은 그 두배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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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의 중심은 역시 해안분지 펀치볼이었습니다. 동해안의 국군 1군단은 펀치볼의 동쪽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 전진, 북한군 13, 45사단을 격파했죠.

수도사단의 경우 924고지를 점령하며 사살 645명의 전과를 올렸고 47명이 전사, 418명이 부상당합니다. 한편 11사단은 884고지를 점령하면서 1252명을 사살, 전사 121명과 부상 472명의 피해를 입습니다.

http://www.army.mil.kr/history/휴전회담/추계1.html

펀치볼 장악 임무를 맡은 미 10군단은 좌측에 국군 7사단을, 우측에 국군 8사단을 두고 중앙에 미 2사단을 배치합니다. 시작은 펀치볼 좌우에 있는 남쪽으로 치우친 경계를 끌어올리는 거였죠.

8사단은 8월 8일부터 9월 16일까지, 펀치볼의 우측 노전평을 공략합니다. 총 4324명의 적을 사살했고 540명의 전사자와 2464명의 부상자가 나왔죠.

분명 성과는 나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피해가 너무 컸죠.

특히 미 8군 사령부를 경악하게 만든 피해가 나온 곳이 있었으니, 도솔산 서쪽 수리봉이었습니다. 이후 이 곳은 피의 능선이라는 섬뜩한 이름이 붙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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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미 2사단은 국군 5사단 36연대를 배속받습니다. 이제 막 훈련이 끝난 김에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를 확인해 보려 했죠. 이들은 어렵잖게 5~7부 능선까지 도달했지만, 거기서부터 지옥이 시작됩니다. 적의 지뢰지대가 들어차 있었고 적의 화력이 집중됐거든요. 이에 사단에서는 무려 200문의 포를 동원, 4km밖에 안 되는 공격 전면에 퍼붓습니다. 이런 도움 끝에 22일 36연대는 목표한 고지를 모두 점령하는데 성공했죠.

하지만 곧 적의 파상공격이 시작됩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미군은 여유를 부립니다. 국군에서 미군의 투입을 요청하자 "전공을 뺏을 수 없다"며 거부했죠. 이게 정말 생각해 준 건지 미군의 피해를 줄이려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판단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적은 끝없이 몰려왔고 27일에 고지를 완전히뺏기게 됩니다.

이에 미 2사단 9연대가 투입됩니다. 동쪽의 가칠봉 역시 미 38연대가 투입됐고, 서쪽에는 미 23연대가 투입됐죠. 좌우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9연대의 진격은 지지부진했습니다.

이에 군단에서는 작전을 확대해 적을 분산시키기로 결정합니다. 국군 7사단이 서쪽의 백선산을 공격했고, 미 1 해병사단이 펀치볼 북쪽으로 공격했으며, 국군 5사단 역시 가칠봉을 이어받아 공격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좌우는 물론 후방이 포위될 위기에 처한 적들은 9월 3일부터 철수를 시작했고, 5일이 되면서 모두 철수, 무혈점령할 수 있게 되었죠.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국군 36연대의 피해는 전사 132명, 부상 916명에 실종 122명이었고 미 2사단의 피해는 전사 및 실종 740명에 부상자가 2천명 이상이었죠. 북한군의 피해야 만오천명 이상으로 추정하지만 추정일 뿐, 아군의 피해가 너무 심각했습니다. 피의 능선, 너무나도 많은 피가 여기에 뿌려진 것이죠.

+) 이 때 흑인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부상자 한명에 4~5명이 호송을 이유로 물러나는 등 군기가 개판인 모습을 보여줬고 흑인 부대를 없애게 됩니다. 의외로 이게 인종차별 문제가 조금씩 해결되는 이유가 됐죠.

이 때 뿌려진 포탄만 해도 어마어마했습니다. 105mm가 32만여발, 155mm가 9만여발이었죠. 이 포탄을 담은 상자와 탄피을 옮기는데도 어마어마한 트럭이 필요했습니다. 밴플리트가 이 전투에 대해 "개전 이래 가장 많은 포격을 실시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죠. 하지만 그렇게 많은 양을 쏘아부어도 힘들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적은 아군의 포격시 엄폐호에 숨거나 후방으로 물러나서 피했죠. 고지가 험할수록 사각지대가 많았고, 지형에 맞춘 진지는 포격으로 파괴하기도 힘들었구요. 공군 역시 마찬가지라서 아예 모든 걸 불태우는 네이팜 탄 정도가 효과를 볼 정도였습니다.

고지를 기어올라가야 하는 정면 공격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죠. 이후 이런저런 방법들을 생각하긴 합니다만... 문제는 지금 국군이 각개전투로 대표되는 고지전 교리에만 너무 매달려 있다는 거겠죠 -_-a



밴플리트는 이런 결과에 충격받았고, 이런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작전을 건의합니다. 맹조의 발톱(Talon)이었죠. 제압작전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원산에 상륙해 전선을 끌어올리고 단숨에 평양-원산까지 진격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리지웨이는 이 역시 거부합니다.

압록-두만강까지 가는 게 아니라 전선을 끌어올리는 계획, 분명 확전 내지 휴전이 어려워지는 문제는 있겠지만 고지쟁탈전을 보면 차라리 이게 낫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영토도 늘고 = =a 쉬운 작전은 아니겠지만 할 거면 이 때밖에 없었습니다. 공산 측은 갈수록 북한 지역을 요새화 했거든요.

밴플리트는 이러고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리지웨이 역시 끝까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저 고지전만 반복될 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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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의 작전이 바뀜에 따라 미 1 해병사단은 펀치볼 북쪽으로 향합니다. 중요고지 두 개가 있었는데 각기 김일성과 모택동이었죠 (...)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말해줍니다.; 좌우에서는 국군 5, 8사단이 가칠봉과 노전평에서 공격 중이었죠.

해병대답게 작전은 과감히 진행돼 8월 30일부터 9월 4일까지 1단계 작전을 성공했고, 11일부터 20일까지의 2단계 작전을 성공, 두 고지를 모두 점령하면서 펀치볼 북쪽을 완전히 확보합니다. 이 때 국군 해병대의 전과는 사살 382명과 포로 44명, 피해는 전사 103명과 부상 338명이었습니다. 미 해병대의 피해는 안 나와있군요. 다만 이 때 미 해병대가 헬기를 이용해 부상병들을 후송했고, 이 때부터 헬기가 본격적으로 쓰이게 됩니다.

한편 국군 5사단은 미 2사단에게 가칠봉을 인수받고 북쪽으로 공격을 계속합니다. 그들의 최종 목표 고지의 이름 역시 김일성이었죠. (...);; 10월 20일까지, 나름대로 진격에 성공하고 김일성고지 역시 세 차례나 점령했지만 그 때마다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여기서 피해가 너무 컸죠. 전사 699명에 부상 4131명, 실종 436명이었습니다. 피의 능선 전투에 있는 걸 합친 것 같습니다만, 정말 상상하기 힘든 피해가 나온 것이죠. 전과는 사살 1102명에 포로 250명이었구요.

한편 서쪽 백석산은 국군 7사단이 맡게 됩니다. 9월 24일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7사단은 어느 정도 진격했지만 백석산 남쪽에서 적의 강력한 방어에 부닥칩니다. 여기서 각 부대간의 협조도 제대로 안 됐고 전차의 오폭까지 겹치면서 물러나야 했죠. 7사단은 8사단과 교대했고, 8사단은 30일부터 이틀간 공격을 펼쳐 백선산을 점령해 냅니다.

7사단의 전과는 사살 740명에 포로 75, 피해는 전사45명에 부상 250명이었습니다. 8사단은 사살 111명과 포로 28명, 피해는 전사 50명과 부상 243명이었죠.

한편, 이번에도 문제는 미 2사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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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능선, 요새는 잘 안 쓰는 말이니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영어로는 Heart Break입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아프다는 부상병의 말을 종군기자가 옮겼고, 그 후에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이죠.

참 어렵게 피의 능선을 점령한 미 2사단, 그들에게 북방 929고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번에도 미군은 좀 쉽게 봤어요. 적이 후퇴한 지 1주일 정도밖에 안 됐기에 크게 방어가 안 돼 있을 거라 여겼죠. 하지만... 적은 결사항전의 태세로 비교적 오래 준비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투입된 것은 9연대와 23연대, 여기에 전차까지 증원했지만 진격은커녕 피해만 누적됩니다. 이런 상황이 9월 13일부터 23일까지의 공격이 모두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 때 사단장이 교체되는데 기존의 정면공격에서 좀 영역을 넓혀보기로 합니다. 23연대에는 프랑스 대대도 증원됐죠. 하지만 그러고도 진격에 실패합니다.

밴플리트는 이런 상황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피의 능선에서처럼 아무리 화력이 강해도 어렵다는 것이 드러나 버렸으니까요. 그래도 피의 능선은 조금이라도 점령에 성공이라도 했지 단장의 능선에서는 그것도 안 됐죠.

9월 27일, 사단장 로버트 영은 작전을 완전중지합니다. 그 동안의 작전을 분석해 좁은 공간에 축차 투입한 것과 화력지원이 적절치 못했다는 것을 지적했죠. 여기다 중요한 것은 후방 문등리에서 적이 계속 증원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희소식도 들립니다. 전차기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됐는데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죠. 미군은 공병을 투입해 길을 닦아서 전차를 투입하려 했고, 적의 박격포를 제거하는 작전을 폅니다.

단장의 능선 전투 2단계는 10월 2일에 시작됩니다. 작전명 터치다운, 1단계의 대실패를 만회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미군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무조명 무지원의 야간 공격을 한 것이었죠. 국군이 한 야간 공격도 의외인데 미군이 했으니 더 의외였습니다. 거기다 박격포를 제거하기 위해 한 것은 특공이나 다름 없었구요. 프랑스와 네덜란드대대 역시 어둠을 이용해 적을 공격했죠. 거기다 전차가 후방으로 기동해 적의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적의 기세가 크게 꺾입니다.

마침내 작전이 완료된 것은 10월 15일이었습니다. 적 사살 1473, 포로 606, 아군 전사 597, 부상 3064, 실종 84였습니다.

피의 능선에 이은 단장의 능선 전투, 미군은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수많은 피로 알아가게 됩니다. 포병과 공군의 우세로는 고지전에서 완벽한 우위를 다질 수 없다는 것을요. 모두 병사들의 피로 알아낸 것이었죠.

뭐 그래도 조금씩은 배워가긴 했습니다. 낮에만 공격하던 미군이 밤에도 공격하고 헬기의 위력도 알게 되고, 정면 공격만이 아닌 교란 작전과 협공을 배워가게 됐으니까요.

미군은 물론 국군의 피해 역시 너무나도 컸고, 완벽한 우위를 보여줘 휴전회담에 끌어들인다는 작전은 실패나 다름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작전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더 세게 밀어붙였다가 적이 아예 삐쳐버리면 안 됐으니까요 -_-;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적에게는 충분한 타격을 주긴 했습니다. 어찌됐든 적은 밀려났고, 피해는 더 컸거든요. 단장의 능선 전투가 끝나면서 공산측은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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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rmy.mil.kr/history/휴전회담/punchball.html

후... 그럼 다른 전투들도 짚어보고 넘어가도록 하죠.

그 동안의 작전을 성공리에 끝낸 국군 1군단은 10월 12일부터 월비산을 공격합니다. 1군단의 목표인 남강을 차지하기 위해서였죠. 19일까지 진행된 작전 동안 수도사단은 사살 891명, 포로 37명의 전과를 올리며 전사 70, 부상 250의 피해를 입습니다. 이후 한 달간 전선은 소강상태를 이루다가 후방 공비 토벌을 위해 수도사단이 빠졌고 11사단이 맡게 됐죠. 이 틈을 타 11월 18일부터 적이 반격을 해 와 월비산을 다시 뺏기게 됩니다. 이후 반격으로 월비산 남쪽 351고지까지는 탈환했지만 월비산 탈환은 실패합니다. 52년에는 이 351고지도 뺏기지만 그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죠.

한편 가칠봉에서는 국군 3사단이 투입돼 예의 1211고지, 김일성 고지를 점령하려다 실패합니다. 적 사살 502명, 아군 전사 132명, 부상 182명이었습니다.

단장의 능선 전투 동안 미 2사단의 좌익을 맡은 8사단은 우측의 2사단은 물론 철의 삼각지대로 진격한 미 9군단과 간격을 맞추기 위해 어은산으로 진격, 10월 말까지 격전을 치르면서 목표를 달성합니다. 사살 1472, 포로 106, 전사 241, 부상 1148이었습니다. 이후 공비 토벌에 투입됩니다.

그 동안 중부전선에서도 공세가 시작됩니다. 작전명 코만도(특공? -_-a)이었습니다. 와이오밍선 강화 및 철의 삼각지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작전이었죠. 서쪽부터 국군 1사단, 영연방 1사단, 미 1 기병사단, 미 3사단, 미 25사단 (터키여단 포함), 국군 6사단 등이 투입됩니다. 국군 1사단과 미 25사단은 별 피해 없이 작전을 마쳤고, 다른 사단들은 좀 어려운 상황에 빠집니다. 전체적으로는 쉬웠던 모양입니다. 그 흔한 지도 하나 없는 걸 보면요 (...) 아직은 공산군이 움츠릴 때였고 (반격 계획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만) 각 고지마다 1천미터가 넘어가는 동부전선보다는 화력으로 제압하기가 더 쉬웠을 테니까요.

가장 어렵게 작전을 진행한 건 미 1기병사단으로 사상자가 2900명 발생했습니다. 이를 합쳐 미 1군단 전체에서 나온 사상자는 4처여명이었죠. 이렇게 미 1군단은 연천부터 철원까지 이르는 철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한편 미 9군단(미 24, 25사단, 국군 2, 6사단)은 이에 맞춰 철원-금성까지 진격합니다. 피해가 적진 않았지만 역시 동쪽보다는 나았던 모양입니다.

8월 중순의 동부전선부터 9~11월의 중서부전선까지, 아군은 전선을 10km 이상 끌어올립니다. 많은 피해야 있었지만 이 때까진 그래도 (휴전 회담에 나오라는 것 외에) 나름 목표가 있었습니다. 중요 고지 위주로 진격했기에 굴곡이 많았던 전선을 정리하고 겨울을 대비해 보급로를 확보한 것이죠. 11월에 다시 공세를 시작할까 했지만 공산측이 다시 회담장에 나오자 취소했구요. 53년의 중공군 최종공세에서 몇 km 정도 밀렸지만 이 때 확보한 선이 대부분 휴전선이 됩니다.

이후 왠만큼 다 차지한 UN군은 방어로 전환했고, 이후의 작전들은 대부분 공세의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한 전초기지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그만큼 피해도 줄었죠. 반면 공산군은 주도권도 뺏을 겸 그 동안의 준비로 전력도 상승한 겸 해서 겨울부터 작은 공세를 시작합니다. 서부는 정치적인 목적 상 빠졌고, 동부에서는 워낙에 양 쪽 다 공격하기 힘들어 소강상태가 지속됩니다. 적의 주공은 철의 삼각지대였고 여기서는 격전이 계속되죠.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백마고지였습니다.

+) 다시 말 하면 2년 동안 모든 전선에서 고지전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루어진 건 아니라는 겁니다.

자, 그럼 회담장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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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h buRn
12/12/02 14:22
수정 아이콘
고지전에 나왔던 것처럼 의미없는 싸움은 아니었군요..
좋은 글 잘보고 있습니다.
눈시BBbr
12/12/02 19:23
수정 아이콘
사실 고지전에서 나오는 한치라도 더 얻겠다는 식의 얘기는 51년 겨울 가면 거의 끝납니다
전쟁 종결도 많이, 꽤나 많이 다르구요

... 헷갈렸네요 -_-a 새로 쓴 글 봐주세요~
blue wave
12/12/02 20:24
수정 아이콘
네. 이제 거의 끝나가는 느낌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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