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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4/05 19:18:26
Name 王天君
File #1 noah.jpg (227.9 KB), Download : 43
Subject [일반] 노아 보고 왔습니다. (스포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전 전반부에 해당하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세계 각국의 설화에서 공통적으로 내려오는 대홍수 이야기입니다. 이 홍수 이야기에서 가장 단순하게 떠올릴 수 있는 함의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필멸자의 분노와 나약함, 그리고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인간의 경외일 것입니다.  조금 더 성경적으로 파고든다면 신이 손수 선별하고 수행한 권선징악과 신의 단호함, 그 안에서 오롯이 살아남은 노아네 가족의 고립감, 그 와중에도 대다수의 동물들은 멸종을 면할 수 있었던 생태계 보존의 묘한 책임감과 안도감 , 방주라는 조난 대비 체제의 신비함 같은 것들이 있겠죠. 하지만 이것은 이 영화의 뼈대에 불과합니다. 여기에는 필히 살이 붙고 뼈대의 변형이 필요합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두시간 짜리 복음 전파 영상을 만들 리는 없으니, 이 영화가 성경의 내용과 다르다고 화를 내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지요.

이 영화의 제목이 왜 ‘노아’라는 한 인물의 이름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실질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기독교 신의 권능도 아니고, 대홍수라는 재난 자체도 아닙니다. 노아가 겪는 모험이나 위기가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도 않지요. 대신, 이 영화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의 목소리를 들은 자,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을 전력을 다해 완수하려는 자, 종교적 믿음과 휴머니즘 가운데에서 갈등하는 자, 이것이 바로 영화가 두시간동안 그려내는 노아라는 인간의 삶과 의지입니다. 선지자이자 메시아, 중간자로서 인간 세계에서 어떻게 그가 행동하고 선택했는지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궁금했던 것이죠.

영화의 초중반은 노아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관을 재현해내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노아가 살고 있는 공간은 황량한 돌무더기와 메마른 대지가 전부인 공간이며 살아있는 존재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 광활한 벌판에 덩그러니 놓여진 텐트나 돌아다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암울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산 생명을 잡아먹는 죄를 저지르며 대다수의 인간들은 타락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타락한 자들과 그들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노아는 자신의 가족을 결연히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어느날 모든 생명이 물에 빠져 죽는 꿈을 꾸고 이를 신의 뜻이라 받아들입니다. 이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는 할아버지 므두셀라를 찾아가고, 인류의 멸망이 신의 뜻이라면 이를 의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대답과 함께 나무의 씨앗을 건네받습니다. 도중에 만난 거인들, 원래는 천사였지만 신의 눈에 벗어나는 무단 행동으로 인해 저주를 받아 돌의 몸을 가지게 된 그들은 노아를 신의 뜻이 담긴 자라 하여 조력자를 자처합니다. 그리고 작은 씨앗이 거대한 숲을 이루는 기적과 함께 본격적인 방주 제작이 시작되고 온 자연에 이 기적이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트랜스포머스러운 돌거인의 존재를 꼭 성경의 훼손으로 볼 것이 아니라 헐리우드적 재미를 위한 존재라고 너그럽게 넘긴다면, 이 전개 부분은 비교적 성경의 재현에 충실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노아를 둘러싼 갖가지 CG나 현란한 편집으로 이루어진 신의 기적은 눈요기를 하는데 부족함이 없죠. 그리고 이 전개까지 노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할법한 기독교적 영웅의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신에게 충실하고 자신에게 성실한, 양심이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방주가 완성이 되가고 두발가인이 등장하는 순간 노아는 전형적인 영웅을 벗어난 인물이 됩니다.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는 전 인류를 외면해야 하기 때문이죠.

감독이 봤을 때, 대홍수로 인한 인류의 멸망에 노아는 그 책임이 적지 않은 인물입니다. 단순히 신에게 구원받은 인물이 아니라, 인류 살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학살의 주동자죠. 신의 무자비한 벌을 예지했다면, 이를 순순히 따르고 다른 이의 죽음을 모른 척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지 의문을 던집니다. 그는 방주를 다른 이들로부터 차단하고자 거리낌 없이 두발가인 측의 사람들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살인을 저지르는 노아는 그렇게 정의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아의 행동에서 신을 제거한다면, 그는 타인의 생명에 무관심하기 짝이 없는 악당에 가깝죠. 대재앙이 덮쳐도 그는 주변을 무시하고, 자신의 척도에 따라 타인을 심판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의 독선은 그의 가족들과 부딪히면서 더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노아는 애초에 인류 존속에 뜻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짝 없는 햄의 고통을 외면하고, 햄이 구하고자 했던 여자애를 죽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의 후손은 없으며 자신의 대에서 인간이란 종이 끝날 것임을 가족들에게 선포합니다. 그가 방주를 만들고 자신의 가족들을 태운 이유는 인간 외의 생명체를 관리하기 위함이지 그들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기어이 일라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죽이려 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아는 인간의 ‘생명’ 그 자체에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이는 노아와 대립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표면적으로 햄은 외로움과 욕정 때문에 노아와 반목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고, 두발가인은 노아와 선악의 대결을 펼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생명과 관계된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햄은 짝을 찾을 경우 가질 수 있는 미래의 생명을 위해, 그리고 두발가인은 스스로의 생명을 위해 노아와 맞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 역시도 바깥의 사람들을 구할 것을 애원합니다. 그리고 노아는 이들 모두의 청을 기어이 좌절시키죠. 신의 대변자가 인간의 생명을 직접 부정하는 것을 옳다고 보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노아는 정의와 신앙이 서로 엇갈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광신도로 해석할 수도 있죠. 그가 신의 뜻을 따라 인류의 멸종에 조력자로 힘썼던 것은 인간 세상이 타락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려는 것 또한 신의 뜻이나 정의와 합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가 멸망해야 하는 이유가 신의 뜻인지, 아니면 신의 뜻이라 믿고 있는 노아 자신의 생각인지는 알 길이 없죠. 분명한 것은, 그가 선지자로서, 그리고 권력자로서 자신의 종을 스스로 심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특히 구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독선적인 부분이죠.

자신이 깨달은 신의 뜻이 세상의 정의에 반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는 곧 인간이란 존재를 얼마나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지와도 결부됩니다. 노아는 감히 신을 의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온 세상 사람들을 등지는 결과를 낳게 될지라도 신을 따르려 합니다. 신의 뜻을 노아가 이를 참되게 따르는 것이라 해석한다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았음에도 결코 신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부자유한 존재가 됩니다. 자신의 생명과 후세, 현재와 미래가 아담의 원죄로 인해 저당잡혀있는 존재들이죠. 이것이 만약 노아가 신의 뜻을 오해했다면, 이는 인간은 스스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어리석고 죄 많은 존재로 귀결됩니다. 그 어떤 쪽으로든, 인간은 신이란 존재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 노아는 일라의 딸들을 죽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기독교적으로 읽힙니다. 정의에서 시작해 결국 사랑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기독교,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사랑을 가장 큰 가치로 삼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지요. 동시에, 이는 인간이 독립자존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이야기입니다. 노아가 신의 뜻을 어기고 자신 안의 인간다움에 근거해 선택을 내리기 때문이지요. 여태까지 노아는 신의 눈으로 인간이란 존재와 세계를 인식했지만, 그 순간은 일라의 아이들을 같은 인간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에서 미래를 찾고 희망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가 선한 존재인 동시에,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해낼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두발가인의 진영에서 어린 아이가 식량과 교환되는 비인간적인 부분과 대조가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고립된 채 술독에 빠져 살던 노아는  결국 다시 가족과 함께 하게 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를 신의 본질을 그때서야 이해하게 된 노아의 거듭남으로 볼 것인지 자신의 정의에 반하면서까지 사랑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노아에 대한 신의 용서와 허락인지는 각자가 맞다고 생각하는 해석이 있을 수 있겠죠. 그리고 햄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뱀가죽을 팔에 두르고 아이를 축복하는 노아를 보면서 전 원죄라는 불완전성을 사랑으로 극복하리라는 노아의 인간다운 결의를 느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성경의 이분법적 세계에서 옳은 쪽에 서있던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과 인간, 선과 악, 생명과 죽음, 그 모든 사이에 있던 한 인간의 고뇌를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인간을 통해 성경을 그려내고 그 성경이 어떻게 인간으로 결부되는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왜곡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 영화가 성경의 한 구절을 이용해 인간 자체에 대한 질문을 심도있게 던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 므두셀라는 참 묘한 인물입니다. 홍수를 수긍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포기한다는 점에서는 죽음에 잠식되어있는 인물이지만 일라에게 생명의 기적을 내려준 거 보면 또 생명을 믿는 인물이거든요.

@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던 로건 레먼이 홍수 때문에 쩔쩔 맨다는 건 뭔가 웃기네요.

@ 성경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이 영화를 봤으니 고작해야 반쪽짜리 감상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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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ohny=쿠마
14/04/05 19:26
수정 아이콘
이... 이게 반쪽짜리라뇨... 덜덜...

비신자분들이 이런 정도의 감상을 느낄 수 있을 정도라면, 확실히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들기는 했나봅니다. 크_크
Security
14/04/05 19:29
수정 아이콘
노아 4D로 볼 수 있는데는 없는지...아무리 찾아도 안나오네요.ㅠ.ㅠ
jjohny=쿠마
14/04/05 19:30
수정 아이콘
Security
14/04/05 19:32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크크크크...그렇긴 하네요. 물 같은걸 끼얹는...
샤워까지 해서 영화관에서 1석2조를 노리려고 했....
사티레브
14/04/05 20:00
수정 아이콘
돌거인언급 스포아닌가요
다른 예고편에서는 몰라도 일반 예고편에서는 나오지도 않아요

그리고 글 군데군데 스포가 엄청 많네요
jjohny=쿠마
14/04/05 20:09
수정 아이콘
하...하긴... 제목은 스포 있음으로 바꾸는 게 맞지 싶습니다. (스포라 여겨지는 부분들을 지우기엔, 글이 너무 아까워서...)
王天君
14/04/05 20:14
수정 아이콘
아 맞다. 왜 없다고 써놨는지;;;; 있다고 쓰려던 거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성동구
14/04/05 21:08
수정 아이콘
뜬금없지만 가디언들이 인간을 향한 질투 때문에 천사에서 돌거인으로 전락했나요?
저도 영화를 봤는데, 제가 본 기억에 의하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들을 천사들이
신의 허락없이 무단으로 도와주러 갔다가 저주에 걸렸다고 들었는데요......
王天君
14/04/05 21:53
수정 아이콘
맞네요. 제가 다른 창작물이랑 헷갈렸나봐요. 수정할께요. 감사합니다.
14/04/05 22:46
수정 아이콘
정말 훌륭한 리뷰인 것 같습니다.

영화는 재미있게 봤는데 보면서 느꼈던 점들이 잘 정리가 안 되서 막연한 인상만 남아가던 차에 이 리뷰를 보니 한번에 영화 내용이 싹 정리되는 것 같네요.
얼라이언스스파이
14/04/07 06:02
수정 아이콘
무엇보다 영화가 재미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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