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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7/30 10:02:04
Name 당근매니아
File #1 baekseok.jpeg (16.3 KB), Download : 44
Subject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은 사실 '95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다. 고작 20주기도 되지 않았다. 죽은 시기를 대강 돌이켜보면 90년대 중반 북한을 덮친 고난의 행군을 노구가 이기지 못하고 스러졌다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남겨진 글 중 가장 나중의 것은 먹을 것과 당에 관한 시여서 슬펐다. 60년 대에 이미 협동농장에서 일하다 죽었다는 이전의 이야기와, 그에 비하면 아주 최근에야 배 곯다 죽었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슬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는 평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한참 예전에 포기했던 듯 했다. 뒤를 봐주던 동료 문인은 숙청당했고, 아무리 찬양시를 쓴다고 해도 수도로 돌아갈 길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을 수 밖에.

백석은 3남 2녀를 두었고, 연인이었던 기생 자야는 고급 요정을 꾸렸다. 요정은 기부되어 지금은 절이 되었다. 그 길상사의 위치와 크기와 그 값어치를 보면서 어지간히 수완 좋은 여자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독재 시절 대원각은 훌륭한 밀담과 음욕의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에서나 보는 그러한 삶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 또한 종종 들었다. 자야는 '96년에 대원각을 법정에게 기부했고, '97년에는 다시 백석 문학상을 만들고, '99년 길상사 안의 작은 암자에서 죽었다. 백석은 '96년 1월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네트를 떠도는 많은 글들에서는 자야가 평생 혼자 살았다고 적고 있었다. 40년을 넘게 이어온 사랑 이야기가 주였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그 죽음 이후에 자식을 자처하는 이들과 사찰 사이의 송사가 있었다고 했다. 사찰은 그 일부를 내어주어야 했고 십여년 전 모르던 시절에 들른 그 자리엔 찻집이 있었다. 여전히 같은 주인일지 이제는 팔아버렸을지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자식들이 누구의 사생아인지도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백석의 시 중 좋아하는 것은 사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뿐이긴 했다. 다른 글들은 색깔이 달라 잘 읽히지 않았다. 문장을 나긋거리며 이어나가는 수법은 늘 머릿속을 맴돌았고, 훈련병 시절엔 그 글과 황동규의 글을 계속 읽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외우지는 못한다.

모던뽀이도 기생도 죽었고, 글에는 이제 사어가 가득하다. 얼마나 더 해설 없이 저 글을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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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30 10:15
수정 아이콘
저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백석의 작품 중 단연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해요. 이 시를 읽으면 세종대왕이 한 소끔쯤 더 고마워질 정도로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도 참 좋긴 한데, 말씀대로 '색깔이 달라 잘 읽히지 않는' 느낌이 있고요. 특히 2연이 조금 막히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다른 연들은 정말 아름답지요.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후우. 이 정경이라니.

또한 백석 이야기라면 여승도 도저히 빼놓을 수 없겠는데요.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부분은 마치 금간 항아리의 틈새로 흘러내리는 물 같은 느낌입니다. 억지로 버텨온 삶이 결국 무너져내리는구나 싶어서 눈물마저 찔끔 나더라고요.
내려올
14/07/30 10:22
수정 아이콘
저는 '응앙응앙'이 백석님 시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로 시작하는 '수라'도 좋아해요
14/07/30 10:40
수정 아이콘
저는 '고향'을 좋아합니다.
뭐 굳이 하나를 뽑지 않아도 한 수 한 수가 다 보석 같은 시들입니다만.
자의든 타의든 북으로 향했다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한 예술인들을 보면 참 슬프네요.
마일스데이비스
14/07/30 10:44
수정 아이콘
몇년 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처음 접한 뒤부터 문득문득 생각날때 마다 읽으면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딱히 엄청 슬픈 일이나 서러운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고생을 했다거나 우울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어째선지 나긋나긋 읽다보면 눈물이 핑 고이더군요.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부분은 정말 아름다운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루크레티아
14/07/30 11:01
수정 아이콘
여승이 갑이라고 생각합니다.
단풍노을
14/07/30 11:46
수정 아이콘
유일하게 외고 있는(지금 다시 암송해 보니 또 한 군데 막히긴 했습니다만) 시가 백석의 <고향>입니다.
<흰 바람벽이 있어>도 좋아하는데 이건 좀 외울 엄두가 안 나네요.
14/07/30 13:07
수정 아이콘
흰 바람벽이 있어는 이렇게 말하자면 백석시인에게 좀 죄송스럽지만... 선배의 시를 그토록 좋아하던 후배 윤동주가 리메이크를 넘어선 업그레이드판을 만들어버려서 말입니다. 물론 백석의 다소 정돈되지 않은 가락이 정겹기는 한데, 별 헤는 밤은 탑으로 치면 거의 석가탑 같은 완성판이라는 느낌입니다.
14/07/30 11:50
수정 아이콘
글발이 참 좋으시네요.
14/07/30 13:16
수정 아이콘
묻어가는 취지에서...
https://www.pgr21.com/?b=8&n=47118
人在江湖
14/07/30 15:05
수정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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