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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9/03 01:59:24
Name 신불해
Subject 떠오르는 태양과 저물어가는 달, 명조와 북원의 대격전

명태조 주원장



전중국이 극심한 대혼란으로 흔들리던 1355년, 원나라 말기에 무수히 존재하던 반란군 세력 중 곽자흥을 중심으로 하던 세력은 곽자흥 사후 주원장을 핵심으로 삼아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주원장은 장강 이남으로 남하하는 전략적 행보를 통해 남경을 장악했고, 이후 진우량, 장사성 등의 라이벌을 파양호 전투 등에서 모두 물리치고 중국 내에서 적수가 없는 가공할 최강의 세력이 되었다.


이후 주원장은 '오랑캐는 중원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 는 포고문을 내걸고(그러나 이중적으로 주원장은 원나라가 지난 100여년간 정당한 중국의 주인이었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북벌을 감행, 이에 서달 등이 25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원나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마침내 1368년 7월 28일, 원나라 제국의 황제 혜종 토곤 테무르 칸은 세계제국의 수도였던 대도를 떠나 상도(上都)로 도주했고, 대장군 서달이 이끄는 명나라 군단은 무혈입성에 성공한다.


욱일승천하는 명나라의 기세와 쇠약해진 원나라 조정의 힘을 고려하자면, 군사전략적으로는 원나라 조정은 더욱 더 북상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토곤 테무르 칸은 상도에 머물렀을까? 


제아무리 원나라 조정이 몽골 제국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징기스칸의 후예임을 긍지로 여긴다 하더라도, 1200년대의 그들과 1360년대의 그들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였다. 1360년의 원나라 황제에게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인의 상무정신이 없다' 는 식의 비난은 사실 합당하진 않을 것이다. 계통적인 권위를 제외하면 기실 그들은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토곤 테무르는 광동의 정강에서 논어와 효경을 배워 중국 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았기 때문에 초원은 그에게 별다른 울림을 주지 못했다.


토곤 테무르가 유목생활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는것 외에 다른 이유로는 정치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저 북방의 초원에는 과거 쿠빌라이 칸에게 패배한 대가로 모든 영광과 빛나는 황금을 상실한채 역사의 그늘에서 살아야 했던 아리크 부케의 후예들을 비롯한 정치적 반대파들이 한가득 있었다. 이 굶주린 늑대들, 소위 '몽골 전통파' '유목 전통파' 들은 쫓기는 황제에겐 두려운 존재였다. 좀 더 미래의 일을 지금 꺼내 살펴보자면, 북원 정권이 멸망한 1388년 이후 도망친 군주 토구스 테무르를 살해한 인물은 명나라의 병졸이 아니라 아리크 부카의 후예이자 적대적 동족인 이수데르(也速迭児) 였다.


토곤 테무르가 미래를 예측할 능력을 가지고 있진 않았겠지만, 그는 이미 1360년 우구데이의 후손 아르카이 테무르가 일으킨 반란, 그리고 이에 호응안 유목 전통파들의 움직임 때문에 골치 아팠던 경험이 있었다. 그로서는 늑대같은 동족들에게 돌아가느니 대도 탈환을 계속 시도해보는 쪽이 안전해 보였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북방의 몽골 정권, 즉 '북원' 은 아직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아직 산서, 섬서, 감숙 등에서는 원나라 잔여세력인 군웅들이 잔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저항세력들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해서라도 명나라는 서둘러 북원 정권을 괴멸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1369년 6월 상우춘 등의 군사작전으로 토곤 테무르는 상도를 피해 응창으로 피난했고, 1370년 4월 여기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 응창 역시 1370년 5월 경 이문충에게 함락되었고, 황제의 손자였던 매적리팔라 등도 포로로 전락했다. 결국 황태자 아유시리다등은 남은 세력을 규합해 카라코룸으로 들어섰다. 마침내 몽골 세력은 징기스칸이 금나라 원정을 감행했던 1211년 이후로 160여년만에 북중국에서 완전히 축출되어 몽골리아로 되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원나라 - 북원 정권 근거지의 이동





한편, 북원 정권을 북중국 내에서 축출하는 동시에 주원장은 위협적인 원나라 잔여세력과의 싸움도 이어나갔다. 여러 군사세력 중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바로 왕보보(王保保)라 불린 코케테무르(擴廓帖木爾)였다. 


명나라에서 코케 테무르와 맞선 군사적 라이벌은 다름 아닌 명조의 군사적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제국의 대장군, 서달(徐達)이었다. 주원장을 보필하여 수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서달은 코케 테무르와의 전투에서도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당초 명나라군이 대도를 향해 진격하여 함락한 직후, 코케 테무르가 이끄는 군대가 대도, 이제는 북평을 향해 진격해 왔던 적이 있었다. 이때 서달은 코케 테무르와 맞상대 하는 대신 오히려 색다른 기동작전으로 적의 허를 찔렀다.


"코케 테무르는 멀리서부터 왔으니, 태원은 비워있을 것이다. 또 북평 역시 수비병이 있어 당장 함락되지 않을테니 차라리 지금 비어있는 태원을 공격하면 그 자는 진격을 거듭해도 얻을 것은 없고 물러나도 갈 곳이 없다. 만약 태원을 구원하러 오려고 한다면, 나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될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제나라 손빈이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원했다는 계책이었다. 이에 서달의 군대가 태원을 공격하자 결국 코케 테무르는 돌아올 수 밖에 없었는데, 미리 이를 예측하고 노리던 서달의 기습으로 코케 테무르는 엄청난 대패를 당해 간신히 도주했고, 태원 역시 함락되고 말았다.




주원장과 서달. 서달은 주원장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준 명장이었다.





이후 서달은 군사를 거느리고 현장에서 돌아와 잠시 쉬면서 주원장에게 큰 축하와 비단 등을 받았다. 주원장은 여기에 더해 서달 등에게 큰 논공행상을 하여 이를 기념하려고 했으나, 코케 테무르는 서달을 쉬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1369년 12월 코케 테무르가 난주(蘭州)를 공격하여 지휘사 우광(于光)을 죽이고 난주를 넘어 정서까지 진격해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1370년 1월,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 서달은 이문충(李文忠), 풍승(馮勝), 등유(鄧愈), 탕화(湯和) 등을 거느리고 다시 북정에 나선다. 여기서 양군이 갈라져 이문충 등은 앞서 말한 원나라 황제가 피한 응창을 공격하여 결국 그들을 카라코룸으로 쫒아버리는데 성공했다. 4월 경에 서달의 군대가 코케 테무르가 있는 정서에 이르자 코케 테무르는 잠시 물러서서 해자와 보루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고, 양군에 며칠에 걸쳐서 격렬한 전투를 거듭했다.


전투가 격렬해지눈 와중에 코케 테무르는 정예병을 보내 명나라 군의 동남쪽 보루를 기습했다. 이곳을 지키던 사람은 호덕제(胡德濟)였는데, 그는 명나라 개국공신인 호대해(胡大海)의 아들이었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자 놀라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기습을 받은 처음 그 순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자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급기야 전군 전체가 요동칠 위기 상황에 놓였지만 백전노장 서달은 침착하게 사태를 수습하여 직접 군사를 이끌고 기습병을 물리쳤다. 


호덕제의 행동은 참수를 당할만한 행위였지만 행동거지가 늘 덤덤했던 서달은 호덕제가 공신의 아들이라 죽이는 대신 수도로 압송하는데 그친다. 호덕제의 아버지를 공신으로 임명한 사람은 바로 황제 주원장인데, 주원장의 허락 없이 호덕제를 죽인다면 황제의 체면을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수하 장교 몇 사람을 처단하여 군율을 세운 서달은 다음날 격렬하게 공세에 나섰다. 사실 기습에 나선 코케 테무르도 이미 힘이 부치고 있던 참인지, 결국 이 날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했고 군대는 급격하게 붕괴되고 말았다. 


이 날의 승리로 서달은 포로만 무려 84,500명을 사로잡는 압도적인 전공을 거두었다. 코케 테무르는 처자만을 거느린채 간신히 도주에 성공해서 카라코룸으로 도주해야만 했다.


결국 명군은 1370년 한번의 출격으로 북원 황제가 있던 응창을 함락하고 코케 테무르의 군사력 역시 중국 내에서 축출시켜버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북원 세력이 결국 중국내에서 축출되게 되자, 여전히 중국에 남아있던 원나라 군사 세력들 역시 심각하게 동요하게 되었다. 결국 이 시기를 근처로 수 많은 원나라 잔여세력들은 명나라에 투항하게 되었고, 아직까지 남아있던 북원의 통치 범위 역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 당시의 상황으로는 남은 북원의 세력도 결국 얼마 못가 패망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 사실 그 시점에서 북원은 이미 패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원장은 응창에서 포로로 잡았던 토곤 테무르의 손자 매적리팔라을 종묘에 바치자는 신하들의 제안을 무시하는 관대함을 보였다. 포로를 종묘에 바친다는것은 흡사 로마에서 포로를 개선식에 끌고 오는것과 같이 포로에게 있어서 대단히 굴욕적인 행위였는데, 주원장은 그 대신 매적리팔라를 숭례후(崇禮侯)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원나라 황족에 대한 관대한 조치는 북원 정권에 대한 회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비슷한 시기, 주원장은 카라코룸에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했던 것이다.


"그대는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라. 사신을 보내 우리와 통문하고, 변방에서 안심하고 가축을 치되, 나의 위세를 빌어 그대의 부락을 호령하고 일방의 주인이 되어 종례(宗禮)를 따르라."


어차피 명나라가 몽골리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주원장은 북원 정권을 인정하고 막북에 여러 유목민들이 난립하는 대신 큰 부족 하나를 후원하여 관리를 편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한 전제조건은 북원이 황제의 지위를 모두 포기하고, 명나라에 절대적으로 신종할 의무가 있었다. 만방의 주인은 천자이며, 천자는 오직 중원 제국의 황제만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중화적 질서 내에서는 그러하였다. 이는 명나라에서도 마찬가지고, 북원으로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유목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중화적 질서 안에서 100여년을 보낸 북원 정권으로서는 황제의 지위를 자신들이 유지하는 한 명나라를 인정할 수 없었다. 






원 소종 아유시리다라 칸



그러나 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유시리다라 칸은 황제국의 지위를 버리기는 커녕 오히려 대원제국의 부흥을 외치며 선광(宣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내세웠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신종은 커녕 결판을 내자는 태도였다. 당연히 명나라 역시 두 개의 황제를 인정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결국 양측은 사생결단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아유시리다라가 배짱을 부린 것은 상황 자체가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분명 1370년의 대패 이후로 수 많은 원나라 잔여세력들이 주원장에게 항복했지만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코케 테무르는 명나라가 여러차례 회유하는 조서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카라코룸의 북원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유시리다라는 승상 코케 테무르를 중심으로 영북행성(嶺北行省), 감숙, 요양행성(遼陽行省), 그리고 저 멀리 운남과 중앙 아시아에 이르는 남은 원나라 잔여 세력들을 황실의 권위를 이용해 모조리 긁어 모아 정치적 역량을 강화해 갔다. 여기에 더해 껄끄러운 유목 전통파와도 위험한 연합을 꾀했다. 이미 북원 정권이 초원인 카라코룸에 있는 만큼 이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다만, 이 늑대들은 여전히 조심해야 할 상대였다. 결과적으로 아유시리다라의 아들은 이 유목 전통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이러한 잔여세력 중에 가장 핵심은 바로 요동이었다. 요동은 몽골리아와 한반도를 열어주는 창구로서 이를 통해 고려와 외교적인 접촉을 꾀해 여러가지 상황을 만들어 볼 수도 있고, 명나라에 대한 전략적 선택지 역시 넒혀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떠나 요동에는 원나라 잔여 세력들이 상당 수 남아 있던 참이었다.


"요동은 바다 언저리에 있는 외딴 곳으로서 적의 국경과 매우 가깝습니다. 평장 고가노는 요양의 산채를 지키고 있고 지원 카라장은 심양의 옛 성을 지키고 있으며, 개원에는 우승 에센 부카가 있고 금산에는 태위 나하추가 있는데 이들은 서로 의지하고 수시로 침범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익(劉益)의 부하였던 방고라는 인물이 주원장에 보낸 상주문으로, 요동의 실정을 보여주고 있다. 유익은 요양행성 평장으로 1370년 무렵부터 명나라가 요동 지역에 회유책을 벌이기 시작하자 1371년 명에 항복한 사람이다. 그는 단순히 항복한것을 떠나 요동 지역의 주요 지리적 사항, 병마의 배치, 돈과 식량등을 기록한 대장등을 넘겨주었고 이로 인해 명나라는 요동 사정에 대한 대강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원말명초기 요동지역에 대한 오해 중에 하나는 이곳이 '무주공산'이라는 것이다. 이 오해는 국내에서 너무나 많이 퍼져 있어 상당히 심각할 정도다. 이는 1370년 경 이인임(李仁任)을 대장으로 고려가 1차 요동원정을 실시, 비록 전략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는 전략적 여건 때문에 퇴각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군사적 활약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요동은 무주공산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당시 요동의 세력은 '무수할 정도로' 많았다. 본래 원나라 자체가 중앙 통제력이 강력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원나라 말기 그러한 현상이 극도로 심화되자 이 틈을 타 무수한 군벌들이 요동 지역에서 분열 할거하여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다. 단지 그들이 독자적으로 활동했기에 고려군으로서는 압력이 비교적 덜 했을 수는 있다.





고려군의 1차 요동 원정



그러나 고려군이 물러난 지 1년 뒤 무렵 요양행성의 유익이 항복함에 따라 명나라의 위협은 요동의 군벌들에게 현실이 되었고, 이 시점을 기점으로 난립하던 군웅들은 북원의 지휘 아래 뭉치기 시작하여 원나라의 군사 기반이 되었다. 그 핵심은 나하추였다. 1360년대 초반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던 나하추는 이 시기를 이용하여 크게 몸집을 키웠고, 종래에는 요동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또한 명나라 역시 이 무렵에 요남 무렵의 전략적 요충지에 정료도위(定遼都衛)를 설치하여 요동에 대한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한 숫자의 군사 세력이 요동에 주둔하게 되었다. 정료위의 명군은 위(衛)라는 군사적 단위에 의해 구성되었는데, 이 지역의 위는 최종적으로 25위에 달하였고 그 유명한 철령위 역시 이러한 25위 중에 하나다. 25위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명나라는 고려의 2차 요동정벌, 곧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이전까지 13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게중 최소 다섯 개의 위가 1370년대 중반 안에 설치되었음이 기록상에서 확인된다. 한 개의 위는 보통 5,600명으로 구성되는데 명나라는 최소 1370년대 중반 무렵에는 2만 가량의 병력을 요동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1372년 11월, 1374년 11월, 1375년 12월 요동의 나하추와 명군은 계속해서 대규모 군사 격돌을 벌였으며, 이러한 전투들은 한번의 전투에서 사망자만 5,000여명이 나올 정도로 격렬한 전투들을 벌였다. 또한 1375년의 전투에서 요동의 명군은 아직 불완정하게 배치된 전력만으로도 나하추의 군단 거의 모두를 몰살시키는 가공할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나하추의 존재로서도, 명군의 존재로서도 원말명초, 여말선초의 요동은 무주공산 같은 태평한 곳이 아닌 아비규환의 전쟁터였다. 오히려 고려로서는 나하추의 존재가 1387년 이전까지 명나라의 압력을 대신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도 있었을 것이다. 명으로서도 나하추를 원할하게 공격하기 위해서는 고려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민왕의 사망 이후 잠시 동안 험악해졌던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 관계는 1377년 이후 다시 평화 무드에 가까워졌으나, 나하추가 명에 항복한 이후 다시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2차 요동 원정까지 이어지게 된다.









어쨌든 1371년 이후로 명나라가 요동 지역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는 와중에, 1372년 정월부터 명나라는 최대 규모 수준의 군사 원정을 준비한다. 정로대장군 서달, 부장군 이문충, 송국공 풍승 등과 남옥, 부우덕 등이 참여해서 최대 15만의 군대가 몽골리아로 진격하기로 한 것이다. 15만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이번의 싸움은 지난번과는 달리 중국을 벗어나 막북까지 올라가는 큰 싸움이었다. 


전역의 전개 양상도 거대했다. 서달의 중군, 이문충의 동로군, 풍승의 서로군으로 나뉜 삼로군은 서달이 안문관을 출발해서 카라코룸으로 진격하기로 했고 이문충 역시 응창에서 출발하여 거용관(居庸關)을 지나 이에 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풍승의 경우, 감숙 방향으로 진격하여 독자적인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양군 모두 군대의 숫자는 5만여 가량이었다.







서달의 군대가 출발한 안문관




가장 핵심이 되는건 역시 서달이 이끄는 중로군이었다. 카라코룸을 향해 진격해오는 서달의 5만 군대를 막을 사람은 역시 서달의 맞수였던 코케 테무르였다. 서달은 여러차례 코케 테무르와 맞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번에는 운이 좋지 못했다. 서달의 농민군은 중국 내에서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몽골리아로 원정을 간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시당초 서달은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청나라 건륭제(1711.9.25 ~ 1799.2.7)의 시대가 오기전까지 그 어떤 중국 왕조도 몽골리아를 소위 '중국 내지화' 시키지 못했으며, 유목제국들과 유목성 성격이 강했던 북중국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거의 모든 군사 지휘관이 고비 사막의 폭풍과 더위, 추위와 물자 부족이라는 모든 난관을 뚫고 막북 원정이라는 과제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전한의 곽거병(霍去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행위는 청나라 강희제 시대가 와서도 가능성이 생겼다 정도이지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준가르의 가르단을 상대하려고 했던 강희제 역시 만만찮은 고생을 했는데, 이러한 어려움은 명나라군이 더 심했을 것이다. 다음은 막북 원정에 나섰던 청나라군에 대한 묘사다.




 선두의 퇴각군에는 심지어 말도 없었고, 무거운 식료품을 짊어진 낙타들을 이 굶어가는 병사들에게 내주어야 했다.(중략) 병력 유지를 위해서는 즉각 낙타 4백 마리 분량의 보급이 필요했다. 대신 황제는 대포까지 글꼬 국경 요새로 전면 철수하라고 명했고, 단지 4백의 병사만 남겨두었다. 가르단의 공식 항복 확약을 받기도 전에 이미 청군은 장성 밖의 값비싼 원정을 지속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급 비용은 원정 초기부터 끝까지 따라다녔다. 만주인 장수 마스카는 베이징에서부터 동행한 군 경험을 일지로 썻는데, 장성 밖 극한의 기후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장자커우의 장성을 지나자 병사들을 우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비탈 아래 좁은 길을 따라 다바간 산맥을 횡단해야 했다. 산맥을 지나 초원에 들어서자 너무 건조해서 "복숭아만 한 우박"을 맞으며 우물을 파야 했다. 고비 사막에 들어서자 물이라고는 (동물의) 시체가 썩어가는 작은 웅덩이뿐이어서 마실 때 능수버들 뿌리가 딸려 들어와서 구토를 했고, 조그마한 마멋을 빼면 짐승과 새라고는 없었다.


 좋은 물은 모래층 1.5미터 아래에 있었다. 사막을 건너자 다시 사람과 말을 질식시킬 정도의 폭우 세례를 받았고, 식량이 떨어져 앞으로 나가알 수 없었다. 이런 환경들과 기진맥진한 투쟁을 벌인 뒤 사람과 말은 거의 기는 속도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고비 사막 3백 킬로미터를 건너는데 12일이 걸렸다. 다른 부대를 만나야만 가르단과의 전투를 전개할 수 있었다.


 말을 사고 먹이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원정 전에 황제는 말 한 필의 가격을 12~20냥으로 책정하는 바람에 베이징에서 폭동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마도 지나치게 가격이 낮다 보니, 관리들이 고위 문사층을 포함한 현지 주민들의 말을 마구잡이로 징발했기 때문이다. 원정을 준비하면서 각 대장들은 말 열 필을 할당받아 먹인 후, 말이 살이 오르고 기운이 세지면 병부에 넘기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찰관들은 끊임없이 변경 주둔지의 여위고 굶주린 말들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어떤 부대든지 잠깐 머무르는 사이에 사람과 말이 쓸 보급품이 바닥났다. 황제는 단 두달의 짦은 원정을 예상했지만, 친정을 발표하자마자 그는 지친 병사들과 말에 대한 소식을 듣기 시작한다. 지친 병사들은 천천히 행군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보급품을 현지인들의 '도움'에 의존 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병사들이 몽골인에게 무기를 팔아 식량과 말을 사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병사들은 식량과 은을 같이 가지고 다녔는데, 은으로 물품을 구매하면서 현지 시장의 가격이 급등했고, 많은 병사들은 두 달분 식량을 지고 다니기를 꺼리거나 지고 다닐 힘이 없었다.


 황제는 퇴각한 장수들에게 분노해서 벌을 내리려 했지만, 이들이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점은 인정했다. 그는 "중국은 군사를 징발하고 보급 계획을 세우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 고 강조한다. ─ 중국의 서진 中 피터 C. 퍼듀


 

하물며 개국 초기 농민 보병을 이끌고 몽골리아의 지리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로 원정을 떠난 서달의 명나라군은 사실상 죽으러 떠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안문관을 떠나 북상한 서달군의 루트. 톨 강 부근에서 서쪽 카라코룸으로 진격해야 했으나 실패했다.




 서달은 남옥을 선봉장으로 삼아 난산(亂山)에서 승리를 거둔 후 계속 진격하여 현재의 톨 강(Tuul River)인 토라하(土剌河)의 전투에서도 코케 테무르를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코케 테무르는 이미 하종철(賀宗哲)과 병력을 합쳐 준비가 철저했기에 이 정도 패배로는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군은 이미 북방의 안문관에서도 무려 1,200km나 더 진격해 온 참이다. 보급은 커녕 되돌아가는것조차 버거운 수준이었다. 3월에 벌어진 첫 교전 이후 5월에 이르기까지 서달은 거의 2달을 망망대해와 같은 몽골리아에서 필사적으로 버텼으나 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처참한 대패를 당하고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수 만이나 되는 명나라 군이 전사했는데, 명군이 원나라 세력과 교전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큰 피해였다.





이문충이 지나간 거용관





 한편, 이문충의 경우 거용관을 지나 케롤란 강 부근으로 진격하였다. 그때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간혹 길을 막는 원나라 병사들이 있어도 이문충 군단의 위용을 보고 도주했는데, 케롤란 강에서 이문충은 부장 한정(韓政) 등에게 보급품을 지키게 하고는 자신은 20일 가량의 보급만 챙겨 급하게 톨 강 부근으로 진군하였다.


 이는 재빨리 서달과 만나 합류하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서달이 악전고투를 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버텼다는 점을 고려하면 차라리 속도가 늦어지더라도 보급을 든든하게 챙기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다. 중국 내에서의 전투라면 속전을 치루면서도 현지보급이 가능하나 몽골리아에서는 5만 대군의 보급을 현지보급으로 해결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톨 강 부근에서 이문층은 기병을 거느린 만자합라장(蠻子哈剌章) 교전을 치루어 적을 점차 물러나게 했는데, 점점 물러나는 적을 추격하다보니 어느새 오르콘 강 부근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북원군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는데, 이를 통해서 보면 톨 강에서 오르콘 강에 이르는 후퇴는 전략적인 유인책으로 판단된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최고 지휘관 이문충이 탄 말 마저 화살에 맞아 이문충이 땅에서 단병기만을 들고 필사적으로 적과 싸우는 위험천만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지휘 이영(李榮)은 자신이 탄 말을 이문충에게 주고 자신은 적병을 죽여 말을 뺴앗아 타 교전을 계속했다. 이문충 군단은 엄청난 전투 끝에 적을 격파하고 상당한 물품을 노획했다. 


이에 이문충은 게속해서 적을 추격했으나, 이미 덮에 빠진듯 적병의 숫자는 끊임없이 늘어만 나고 있었다. 이문충은 이에 험지를 찾아 들어가 버티면서 가축으로 병사들을 먹이고 나머지 가축은 소와 말을 가리지 않고 들판에 모조리 풀어놓았는데, 이에 북원군이 복병의 존재를 의심하며 머뭇거리자 그 틈을 타 명군은 도주했다.


그러나 적군의 손을 피하긴 했어도 지리에 대한 무지로 이문충 군은 돌아오는 와중에 고생을 해야 했으며, 당초 보급이 충분하지 못했고 손에 넣은 가축들도 적군을 피하기 위해 풀어버렸기 때문에 극도의 굶주림과 갈증을 겪어야만 했다. 북원 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격렬한 싸움이었으나 아무래도 이문충 군단의 피해가 커서 선녕후(宣寧侯) 조량신(曹良臣), 지휘사(指揮使) 주현(周顯), 상영(常榮), 장요(張耀)가 모두 전사하였다.





거용관을 지나 케롤렌 강, 톨 강, 오르콘 강에 이른 이문충 군단의 이동 루트




 서달과 이문충이 극도로 힘겨운 전투를 벌인것과는 달리 서로군이었던 풍승은 그다지 힘든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진덕과 부우덕을 거느리고 감숙으로 진격했던 풍승은 난주와 소림산 부근에서 간단한 전투를 벌였고, 감숙을 지나서도 별다른 전투가 없었고 몇몇 마주쳤던 북원 장군들 역시 큰 저항을 보이지 않고 항복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가축 등을 노획할 수 있었다.


 이는 북원 조정이 이 전역에 있어 가장 핵심을 카라코룸 부근의 방위로 잡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달과 이문충과의 싸움에도 북원 군대가 대규모로 동원되었으니, 자연히 감숙 쪽의 전선은 취약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카라코룸을 지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니 만큼, 전략적으로 나쁠 것 없는 판단이었다.


 비록 서달과 이문충 모두 역전의 장수들이였지만 몽골리아의 전투란 내지에서의 전투와 전혀 다른 양상이었기에 대패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명군은 영하 30도 ~ 40도에 달하는 몽골의 겨울 기후에 대해서도 정보가 부족했고 지리에 대해서도 정보가 부족하여 연계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황금사(黃金史)에서는 명군이 겪은 어려움에 대한 묘사가 남아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은 우카간투(토곤 테무르) 칸의 아들 빌리그투(아유시리다라)가 '자다Jada제' 를 지내던 곳으로, 눈바람이 불어오자 한군과 말이 모두 동사했다고 한다. 남은 무리들이 돌아가는 길을 몽골군은 장성 부근까지 추격해 왔고, 도망친 병사들은 화살을 불태워 따뜻하게 하다가 아궁이에서 횡사했다. '한군이 여우고개에서 출발해 여우 꼬리가 모자의 술로 변했다'는 말이 바로 여기서 연유된 것이다.


 카라코룸을 직접적으로 노린 1372년의 원정은 북원을 완전히 격멸시켜버리겠다는 주원장의 의지였다. 그러나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주원장으로서는 난감한 지경에 빠진다. 이 작전의 실패가 뜻하는 말은 사실상 북원 정권을 직접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다는 방법이 없다는 뜻 아닌가.


 이 전투 이후 명나라는 당분간 수세에 직면했다. 1372년부터 1375년에 이르기까지 북원의 공세가 계속되었는데, 코케 테무르의 공격 등은 서달 등의 활약으로 막아내었지만 약탈 자체는 피할 수 없고, 특히 1372년 11월 나하추가 요동 최고의 군량 보급 창고인 우가장을 공격하여 양식 10만을 태우고 병사 5,000여명을 참살한 사건은 명에게 크나큰 아픔을 주었다. 다만 나하추의 이러한 공세는 1375년 요동의 섭왕(葉旺)이 나하추의 공세를 완벽하게 저지한 이후로는 뜸해지게 된다.


 한편 1372년의 승리로 한 숨을 돌리고 자신감을 얻은 아유시리다라와 코케 테무르는 고려에게 병력 동원등을 요청하기도 했다. 1376년 10월 경 고려 조정에는 북원 승상 코케 테무르가 보낸 서신이 도착했는데, 코케 테무르는 1375년에 사망했음으로 그가 보낸 최후의 서신이 되었다.


 코케 테무르는 이 서신에서 고려가 잠시 북원과 멀리하고 명나라와 가까이 하려 든 일에 대해서는 '귀국이 명에게 사탕발림을 해서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책략을 썻던 것 뿐이다' 며 굳이 큰 비중을 두려하지 않고, 대신 '옛 주인에 대한 의리와 장인 국가에 대한 의리' 를 강조하며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다. 또한 1377년 경에는 나하추가 7월과 9월 경 '명나라의 정료위를 같이 치자' 며 군사를 보낼것을 계속해서 고려에 독촉하였고, 고려는 날씨를 이유로 지연정책을 펴 최대한 버티고 있었다.






 한편 몽골리아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이 현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주원장은 전략 노선을 바꾸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가지치기'를 통해 북원 정권의 모든 외부적인 힘을 끊어버리고 약체화 시킨 다음 격멸시키자는것이 바로 그러한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공민왕 사후 관계가 험악해진 고려에 대해서 명나라는 갑자기 온건한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당연히 이는 북워 정권이 고려 조정에 직접적인 군사적 도움을 바라는 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터이다. 그 동안 주원장은 우왕 집권 이후의 정치세력에 대해 '그들이 공민왕을 시해한것이 아니냐' 는 의심을 보였으나, 1377년에는 억류했던 고려인 358명을 풀어주는 등 비교적 온건한 노선을 취하였다. 물론 그 후에도 대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의례적인 국가간의 사소한 마찰 정도로 보아도 무리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면서도 주원장은 몽골 세력과의 연계를 두려워해 그저 고려에 대해 온건책을 펴는데서 끝나는게 아니라, 노련하게도 아예 그 연계 자체를 차단하려고 들었다. 1384년 이후로 명나라는 북원과 고려의 사신 내왕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때문에 그동안 빈번했던 북원, 나하추의 사신 파견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북원의 날개를 꺾는데 있어 고려가 추가적인 변수라면,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요동이었다. 요동을 집어삼켜야만이 몽골리아의 카라코룸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주원장은 1375년 기존의 정요도위를 요동지휘사(遼東指揮使)로 개편하여 현지민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군사적 기능 역시 강화했다.


 전략적 식견에 있어 주원장의 치밀함과 뛰어남은 판세를 읽고 차분하게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끌고 오는데 있다. 그가 남경을 손아귀에 넣을때, 진우량을 공격할떄, 북벌을 감행하면서 산동을 공격할때 모두 그는 주변부터 제압하여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고 자신에게 판세를 유리하게 끌고왔다. 카라코룸 원정 실패 이후 북원 정권에 대한 그의 전략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카라코룸 정권의 붕괴를 위해 먼저 가지치기를 하려 요동에 시선을 돌린 주원장은, 여기서 또다시 가지치기를 시도한다. 그는 1383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 직접적으로 나하추와 통호하지 말것을 요구하는데 이어, 나하추를 공격하기 전 압록강과 동가강 일대의 여진 세력들을 회유, 복속하여 나하추의 날개를 꺾어버렸다. 1383년 4월, 원의 해서(海西) 우승(右丞) 아르구가 항복하자 주원장은 그에게 해서를 맡겼다. 이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해서는 나하추와 고려가 왕래를 하기 위해 필요한 루트였기 때문에 이는 나하추의 숨통을 조르는 행위였다. 


1384년에 이르면 주원장은 고려와 북원 사이에 있던 여진부락을 완전히 쓸어버려 연결 자체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이로써 북원은 고려와 외교적 연계가 끊어졌을 뿐만 아니라, 수하에 수렵민들인 여진족을 두고 교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나하추의 목덜미도 붙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나하추를 천천히 굶주린 주원장은 1387년 사람을 보내 나하추를 회유하는 동시에 풍승, 남옥에게 명령하여 20만의 대군을 파견해서 군사적 압박까지 감행했다. 병력과 일반인들을 모두 포함한 나하추의 인적 자원이 20만이었으므로, 나하추로서 이는 감당할 수 조차 없는 숫자였다. 결국 나하추는 굴복하였고, 요동은 명나라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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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칠것이 없어진 주원장은 1372년의 실패 이후로 무려 16년을 기다린 끝에 남옥의 지휘 아래 또다시 몽골리아 원정군을 조직하였다. 이와 동시에 외교적 가치가 나하추의 항복으로 인해 하락한 고려에게 철령위 설치라는 강경한 요구를 하여 고려 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정확히 어떤 의도로 철령위 요구를 했는지 알 수는 없다. 물론 '영토욕' 이라는 편리한 설명도 있긴 하나, 홍무제가 16년을 기다려온 막북 원정이 재차 시도되려는 이 중요한 찰나에 갑자기 외교적 분쟁이 뻔한 요구를 했던 이유를 모두 설명수 있을 만큼 편리하진 않다.


 고려에 있어 철령위 지역이 23년전에 수복한 영토라면, 홍무제와 명나라가 있어 이 부근은 이제 막 원나라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손에 넣은 지역이었고, 요동 전역이 모두 손에 들어왔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우선 원나라의 옛 관할지역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15만 대군이 막북 원정을 감행하던 상황이었으니, 아무튼 핵심은 고려보다는 북원에 있었을 것이다. 단순한 영토 야욕이라고 보기에, 주원장에게 시급한 문제들은 이미 많이 있었으며 실제로도 이후 철령위에 대한 언급은 갑자기 사라지게 된다. 


1388년 3월 경 명나라가 직접적으로 1천여명의 병력을 보내 국내 변경에 진입, 철령위를 실질적으로 설치했다는 고려 서북면 도안무사(都按撫使) 최원지(崔元沚)의 보고가 있긴 하나, 이에 대해서는 요동 원정을 추진하는 최영의 심복이었던 최원지가 사실을 날조, 조작 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이후 고려는 명나라와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이나 마찰을 빚지도 않았고, 이후 요동 지역에 철령위가 설치된 이후에도 고려의 압록강 이남 지역에 명에 의하여 회수되지도 않았다. 고려사에서는 이에 대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박의중이 청렴함이 황제를 감동시켜 철령위 요구를 중단시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대녕에서 시작된 남옥의 북진과 토구스 테무르 일행의 최후 도주
 


한편 북원 정권을 이룬 근간 중 코케 테무르는 1375년 사망했고, 아유시리다라 역시 1378년 사망하여 정권의 주축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그동안 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던 북원 내부의 갈등들은 모두 표면화 되었다. 


 유목 세계에 살면서도 황제를 칭하는 북원 정권의 가장 큰 목적이자 비원은 대도의 수복이었지만 현 시점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임무였다. 여기에 원나라를 좀먹었던 내부 분쟁 역시 커져만 갔다. 초원으로 쫒겨온 쿠빌라이 계와 이빨을 번득거리는 아리크 부카 계, 목초지 다툼, 그리고 초원 생활을 못 견디고 명나라에 항복하는 귀족들 등 다툼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아유시리다라의 뒤를 이은 토구스 테무르는 난관을 돌파해보려 정권의 중심지를 카라코룸에서 쿨룬부이르, 지금의 후른베이얼로 이동시켜 보았으나 뒤이어 나하추의 항복이라는 더 거대한 난관이 닥쳐왔다.


 나하추의 항복 이후부터 동조 세력들의 명조에 대한 항복은 절정을 이루었고 이 시점에서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남옥의 15만 대군의 기습은 치명적이었다.  당초 남옥은 초원에서 헤매게 되어 적을 찾지 못하자 회군할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정원후(定遠侯) 왕필(王弼)의 설득에 진격을 재개하여 야음을 틈타 기습, 포로만 10만명이 넘는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고 복원 정권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간신히 몸만 살아난 토구스 테무르는 툴가 강 유역으로 도주했으나 이번에는 옛 동족들이 자신을 괴롭혔다. 이런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아리크 부케의 후예들은 오이라트의 지원을 받고 토구스 테무르 일행을 추격했고, 이에 토구스 테무르는 카라코룸 쪽으로 몸을 피했으나 결국 아리크 부케의 후예 이수데르에게 토구스 테무르와 그의 아들 천보노가 모조리 독살됨에 따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로서 복원 정권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요동에 마지막 남은 몽골 세력인 옷치긴 왕가의 아자스리 역시 1388년 9월 직접 수하 49명만을 이끌고 요동도지휘사를 방문하여 명에 항복할 의사를 보임으로써 명조 초창기 몽골 잔여세력의 위협은 모두 일단락 되었다. 이후 주인이 사라진 막북지역은 이 틈을 노린 오이라트와 여타 세력들의 난립으로 한동안 대혼란기를 겪는다.




참초 :

명태조실록
명사 태조본기
명사 서달전
명사 풍승전
명사 이문충전
명사 남옥전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 르네 그루세
몽골제국의 만주 지배사 - 윤은숙
명대전기 요동방어와 인구변화 - 남의현
철령위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 박원호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제도개혁 - 김당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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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14/09/03 02:37
수정 아이콘
한신 = 서달 = 팽덕회(펑더화이)
장량 = 유기
소하 = 이선장 = 주은래(저우런라이)

비슷할까요?
우주모함
14/09/03 03:13
수정 아이콘
한신은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모택동에게 충성하는 척 하다가
나중에 오히려 모택동을 죽이려했던 임표와 비슷한거같기도 하네요.
기아트윈스
14/09/03 08:46
수정 아이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주원장의 후손은 오이라트를 때려보겠다고 토목보라는 곳에 진을 치게 되는데...ㅠㅠ
14/09/03 08:54
수정 아이콘
진정한 명의 주인은 장무기죠!!!

영웅문 3부 의천도룡기 덕분에 명나라측 개국공신들 이름이 꽤 낯익더군요 크크
14/09/03 09:54
수정 아이콘
위화도 회군을 안하고 밀고 나갔다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로 죄다 삭제 당했으려나?
로하스
14/09/03 10:11
수정 아이콘
지금 우리가 중국어로 글쓰고 댓글달고 있을지도 모르죠 흐흐
껀후이
14/09/03 10:32
수정 아이콘
무...무섭군요 덜덜
14/09/03 09:55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철컹철컹
14/09/03 10:30
수정 아이콘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은 아무것도 없는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혹시 책을 쓰시는 분인가요?
껀후이
14/09/03 10:32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흥미진진하네요^^
Grow랜서
14/09/03 22:26
수정 아이콘
잼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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