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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0/10 17:13:19
Name Neandertal
Subject 노벨 문학상도 못 받은 주제에 어딜 작가라고...
스웨덴 한림원에서 수여하는 노벨 문학상은 그 자체로 대단한 영광임이 틀림없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상당한 문학적인 성취가 있었음을 인정받게 됩니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은 수상자 선정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항들이 고려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지역별 안배라든가 장르별 안배, 대표작 발표 시기 및 정치적인 고려도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서구권 작가들에 대한 편중도 있다고 봐야겠지요. 따라서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 작가의 문학적 성취가 노벨상을 받은 사람에 비해서 떨어진다고는 결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1년에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이고 생존한 사람에게만 상을 수여하는 규칙까지 감안했을 때 전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 1명씩 대표 작가들만 추려도 거의 200명 가까이 될 테니 사실 노벨 문학상을 받는 사람보다 받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는 필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도 작가의 문학적 성취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다른 수상자들과 견줘봤을 때 받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작가들이 결국 수상하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오늘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을 한 번 추려보았습니다. (이 리스트는 인터넷 상에 있는 같은 주제의 자료들 가운데 주로 공통적으로 거론이 되는 사람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부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등 굵직한 작품들로 세계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역시 노벨상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본인은 차라리 안 받아서 다행이라고 했다고 하네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도 충분히 노벨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지만 못 받은 작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대표작들로는 [픽션들], [불한당들의 세계사], [알렙], [칼잡이들의 이야기]등이 있습니다.


치누아 아체베
나이지리아 작가인 아체베도 역시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현대 아프리카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인데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신의 화살], [더 이상 평안은 없다]등의 작품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존 업다이크
미국 작가 존 업다이크도 아까운 노벨상 미 수상자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지요. 권태와 고독에 가득 찬 미국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깊이 있게 묘사했던 작가입니다. [달려라, 토끼], [돌아온 토끼], [토끼는 부자다], [토끼 잠들다]의 ‘토끼 4부작’이 유명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도 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 한 작가라는 게 중평입니다. 읽기 어렵기로 소문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대표작인데 의식의 흐름을 좇아 인간의 내면을 탐색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책 제목처럼 “잃어버린 노벨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임스 조이스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작가 제임스 조이스.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그도 노벨상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더블린 사람들], [율리시스]등이 대표작이 있고 [피네간의 경야]는 이곳 피지알에서도 몇 번 “유머 게시판(!)”에 등장한 적이 있지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로 대표되는 러시아 작가입니다. 볼셰비키 혁명 때문에 독일로 프랑스로 나중에는 미국으로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20세기에 가장 많이 연구되어지는 작가 가운데 한명이고요. [롤리타]외에도 [세바스찬 나이트의 진짜 인생], [절망], [사형장으로의 초대]같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p.s.
왜 한국 작가들이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가에 대해서 번역의 부실함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은 데 어떤 사람은 "번역도 번역이지만 한국문학이 세계인들에게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작품들을 내놨는지도 한번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웃들(일본, 중국)에 비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딱히 문학적 감수성이 떨어질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아직 소개가 덜 된 측면이 크다고 봅니다. 좋은 한국작가들 작품들이 보다 더 많이 외국에 소개되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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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10 17:20
수정 아이콘
까뮈는 받았으니 괜찮아요.
MoveCrowd
14/10/10 17:26
수정 아이콘
1900년대 중반 격동의 시기를 다루었던 작품들은 어느 정도 보편성도 있다고 보는데
말씀하신대로 소개의 매력이 일단 떨어지는게 문제라 봅니다.
일본, 중국에 비해 애초에 문화적 수요가 너무 적어요.
삼공파일
14/10/10 17:27
수정 아이콘
"한국에서는 왜 노벨 문학상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다소 천박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마지막 부분의 지적이 조금 공감됩니다. "나는 왜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문학에서의 보편성이라면, 한국 문학은 "나는 왜 한국인인가?"라는 질문을 더 강하고 짙게 던지는 것 같아요. 다른 국가나 민족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특수성이 있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만큼 한국사회가 히스테릭하고 신경증적인 무언가가 깊게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한국사회가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인간적이지 못한 그런 이유가 아닐지요. 뭐, 그래도 예로 나온 작가들만한 작가가 한국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요.
기아트윈스
14/10/10 18:01
수정 아이콘
글쎄요. 보편성도 결국은 특수한 사례에서부터 파고들어야 나오는 거니까요. 전 차라리 "나는 왜 한국인인가?"에 대한 질문이 더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편적인 레벨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예컨대,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프리카 이야기를, 미국인은 미국인의 권태와 고독을 이야기하지만 그 특수 사례들을 깊이있게 파고들어갔을 때 결국 보편성의 우물을 만나는 것 아닐까요.
헥스밤
14/10/1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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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기아트윈스 님에 동의합니다. 몇년 전에 노벨상을 수상한 중국의 모옌이라거나, 일본의 마지막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를 '노벨상 타이틀'을 빼고 보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감성의 작가'라기보다 '굉장히 특수한 중국적 감성의 작가' 혹은 '굉장히 특수한 일본적 감성의 작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의 소위 제3세계권 수상작들을 봐도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주변의 독서가 친구들의 입장입니다만) '세계적 보편성 자체에 대한 추구를 통해 만들어낸 고전적인 역작'이라는 느낌보다는 '특수성에 대한 철저한 추구를 통해 이뤄낸 보편성을 갖춘 명작'에 가깝다는 생각이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노벨상을 노려볼만한 작품은 고은의 작품보다는 조세희나 황석영, 김훈이 아닐까 싶은데 조세희 선생은 난쏘공 빼곤 사실상 장편이 없는 상황이고, 황석영 작가와 김훈 선생은 최근작들이 뭐랄까 아 그게 좀, 싶고. 의외로 성석제 선생이 각 잡고 장편을 몇 개 뽑아낸다면 혜성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자, 그러니까 여기 딱 들어맞는 쿤데라 선생 노벨상좀... 이라고 하기엔 이번 신작 평이 좀 안좋더군요. 쯥.
기아트윈스
14/10/10 18:35
수정 아이콘
저도 늘 "하고 많은 한국 문인 중에 왜 늘 고은이지?" 생각하곤 하는데 저만 그런 게 아닌가 보네요 -_-;

저 같은 문알못은 고은 시를 아무리 읽어봐도 별 감흥이 없더군요
헥스밤
14/10/1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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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문알못이라 고은의 시 자체가 가지는 내적 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노벨문학상이라는게 내적 미학과 외적 요소(국적적 감수성이 되었건, 역사적 비평이 되었건, 인문학적 통찰이 되었건)가 꽤 중요하게 고려되는 상인데 고은의 시는 저 외적 요소 측면에서 너무 애매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농담이지만, 차라리 유하 시인이나 하상욱 시인이 오히려 더 '한국적'이고 '특수하며 보편적인' 감성일 수 있다는 생각도 가끔 할 정도로.
삼공파일
14/10/10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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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은 아프리카인을 파헤치고 미국인을 파헤치고 나면 인간이 나오는데 한국인은 아무리 파헤쳐도 한국인 밖에 안 나오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분들이 예로 드시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서 그런 걸 느꼈달까요. 물론 제가 한국인이니까 한국인이라는 굴레를 벗을 수 없으니 좀 하기 안 맞는 얘기일 수도 있겠네요.
14/10/10 18:01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작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외부적인 문제가 좀 더 크다고 보는 입장인데
(사실 국내에서 인기 있는 외국작가들 작품이 다 엄청 뛰어난것도 아닌데, 김훈 박민규 김연수 이런 작가들이면 꿀릴게 뭔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뭐 내부적인 문제로 보자면 일단 문학책을 읽는 사람 자체가 없다는게 백만배는 더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국어국문과에서 수업을 듣습니다만, 국문과 학생들도 읽는 사람들이나 읽는 분위기입니다.
기아트윈스
14/10/1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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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문제가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 건 문학에 대한 수요의 크기 (문학 시장의 파이?)와 노벨상 수상자의 면면이 꼭 비례하지 않으니까요.

http://ko.wikipedia.org/wiki/%EB%85%B8%EB%B2%A8_%EB%AC%B8%ED%95%99%EC%83%81_%EC%88%98%EC%83%81%EC%9E%90_%EB%AA%A9%EB%A1%9D

위 링크는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리스트, 그리고 그들의 출신국가, 집필언어를 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로 출판되는 문학시장의 크기와 비교도 안될 만큼 작은 시장의 구성원일 게 분명한 소수언어 작품들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곤 했지요.

그냥 아직 노벨문학상급 작품이 없거나, 아니면 주류문단의 트렌드와 약간 빗겨나가있어서 주목을 못받거나 등등의 이유를 꼽는 게 더 맞지 않을까요.
14/10/10 18:45
수정 아이콘
정비례하는건 아니지만 무관하다고 보는것 역시 좀 그렇죠.. 노벨상 수상작중에도 3세계 작품들은 이미 국내에 소개가 되었음에도 대부분 인지도가 없었던걸 보면요.
swordfish-72만세
14/10/10 18:16
수정 아이콘
윈스턴 처칠: 노벨 문학상도 못받은 것들이 작가라고....
기아트윈스
14/10/10 18:22
수정 아이콘
버트런드 러셀: 노벨 문학상도 못받은 것들이 작가라고....
Neandertal
14/10/10 18:48
수정 아이콘
솔직히 처칠에게 문학상 준 것은 좀...--;;;
Shandris
14/10/1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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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얘기가 그 얘기 같아요 시장이 작아 번역이 안되니 세계인의 공감대를 끌어낼 수 없는...
Legend0fProToss
14/10/10 18:24
수정 아이콘
일단 나오는게 많아야 좋은게 나올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지가 못하지 않나요?
yangjyess
14/10/1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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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다른나라 문학을 수입할때 어떤 작품들을 들여올까요? 그 나라에서 많이 읽은 작품을 가져옵니다. 그럼 외국에서 한국작품을 고를 때는? 한국에서 많이 읽힌게 어떤게 있나 보겠죠. 결국은 해외에 우리작품을 알리려면 국내 독자에게 잘 읽혀야 합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외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것은 물론 문학성도 겸비했겠지만 그 이전에 국내에서의 흥행이 먼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래도 최근에는 우리나라 소설들도 많이 알려지고 있는 추세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한국 단편소설들을 극찬하는 글을 프랑스 일간지에 실었다는 기사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5/18/2014051802394.html
기아트윈스
14/10/10 18:36
수정 아이콘
갑자기 생각난건데 드래곤 라자가 꾸준히 중국, 일본 등지에서 인세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수억원 규모라고.....
이러니 이영도 신작이 안나오지 ㅠㅠ
헥스밤
14/10/10 18:51
수정 아이콘
정말 좋은 일임에는 분명한 일이나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클레지오 자신이 노벨상 수상 훨씬 이전인 2000년대 초부터 한국에 자주 들르고 한국어도 약간 하며 한국어 시도 쓰고 한국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했던 진성 한국문학덕후(?) 였지요. 2008년 클레지오가 노벨상 수상하던 때에 온 언론에 '대표적인 친한파 작가 클레지오, 노벨문학상 수상. 이제 한국도 노벨문학상에 한 발 더 다가가나' 하는 기사들이 나온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문학에서 세계적 인정을 받은 사람이 한국에 관심을 가져주는 건 좋은 일이고 그를 통해 한국 문학이 더 잘 알려질 수 있으리라고 희망해 볼 수 있지만, 클레지오가 최근에 한국 문학에 대해 언급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문학이 잘 알려지는 추세'를 보여주는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yangjyess
14/10/10 19:28
수정 아이콘
예..저 사례 하나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문학이라고 문학계만 발전한다고 알려지는게 아니라 전체적인 국력의 신장도 있어야 하고 뭐랄까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에서도 책깨나 읽고 쓰는 문화가 있더라'하는 인식을 심어줘야 하는게 중요할텐데.. 그런 면에서 지젝이나 피케티 같은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강연도 하고 뭐 이런 것들도 긍정적인 전망을 하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바이링궐 에디션 같은 한국문학의 영문판 출간 기획 같은 일도 해 나가고 하다보면 까짓거 우리라고 못할게 있나 싶습니다. 지금까지 왜 안됐나 왜 시궁창인가를 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가진 가능성과 잠재력을 발견하는게 실질적으로는 도움이 되겠죠. 꼭 노벨문학상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Neandertal
14/10/10 18:38
수정 아이콘
박민규 작가의 작품이 번역되면 해외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 지 궁금하긴 합니다...그 맛을 살려서 번역을 할 수 있을 진 잘 모르겠지만...--;;;
켈로그김
14/10/10 18:40
수정 아이콘
임성한 작가님 화이팅...
생명의징표
14/10/10 19:30
수정 아이콘
2015 노벨문학상 수상자 : 임영란(임성한,56세)

그리고 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도깽이
14/10/10 18:45
수정 아이콘
뜬금없지만서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편소설 한번 더 내고 문학상 받았으면 좋겠네요. 최신장편소설 색채가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해는 솔직히 말해서 아쉬운 작품이거든요.
전립선
14/10/1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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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이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14/10/1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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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창작가 나왔는데 한국은 왜 노벨문학상을 못받았는가에 대해서 딱 한마디 하셨는데

'장편을 못써서 그래' 라고 하시더군요 단편 쓰는 사람중에 장편에서 그 역량이 발휘가 되면 노벨상 받을 사람이 많은데(예로 오정희작가 한분을 드셨던)

다들 단편을 많이쓴다고...
할머니
14/10/1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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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가 다시 한 번 설산을 넘으면 급을 장편에서 뽑아준다면..
14/10/11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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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김연수가 받을 거면 비슷한 장르군에 받을 작가들이 즐비하니까요. 이언 매큐언부터 시작해서 내려가다보면 폴 오스터도 있거니와...
할머니
14/10/12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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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심이죠 크크
14/10/1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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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을 '끌어갈' 힘이 없다고 하죠..개인적인 사상을 논외로 하고보면 김훈 이문열정도가 인간 보편적 문제의식을 담으면서 장편소설을 끌어갈 필력이 된다고 봅니다.
구밀복검
14/10/1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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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냉정하게 말해서 받을만한 작가도 작품도 없는 거죠. 예컨대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보다 한국적이고 전통적이며 기교가 넘치는 장편 소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니 아예 없을 수도 있고...그러나 이문열과 황제를 위하여가 노벨문학상 레벨인가, 세계 문학의 고전 반열에 오를 법 한가 생각해보면 회의적이죠.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고요.
뭇 사람들이 일본도 중국도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한국이 못 받을 것이 있겠느냐고들 하지만,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만 하더라도 진지하게 접했을 때 그러한 시각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히 밀도있고 전율 넘치는 작품으로, 과연 한국에서 이런 작품이 나온 적이 있는지, 나올 수는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죠.
할머니
14/10/1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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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훌륭한 소설이라는데는 동의하지만 한국 근대문학의 No.1으로 뽑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평론가 황현산이 이문열에 관해 평한 적이 있습니다.

" 이문열은 관념의 귀신을 그리는 데 강하고 사람의 현실을 그리는 데 약하다. ...중략.. 이 특징은 그의 다른 여러 소설에도 연장되어 자주 관념적인 토론이나 해설이 이어가기 어려운 사실의 서술을 대신하곤 한다. 이문열은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에 새로운 색깔을 덧붙이는 데 뛰어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의 장기가 아니다. "

정확한 비평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제를 위하여나 금시조, 사람의아들 같은 이문열의 대표작은 황현산의 지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그의 스타일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최인훈의 광장이나 구운몽은 충분히 황제를 위하여 윗선에 들어갈만한 문학이 아닌가 싶네요. 다른 부분은 차이라고 말하더라도 철학의 깊이란 부분에서 비교하기 어려운 작품이 아닌지 싶습니다. 또한 최인훈의 두 작품은 철학의 깊이뿐만 아니라 철학을 담는 서사의 설득력, 스타일을 훌륭하게 보여준 작품이면서도 한국의 특수성을 통해 보편의 영역으로 들어간 작품이 아닐지요. 특히 구운몽의 스타일과 철학적 깊이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훌륭하죠.
구밀복검
14/10/10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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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위하여>는 장르에 있어 <백년의 고독>이나 <한밤의 아이들> 같은 탈식민지 문학작품에 해당될 텐데, 그 와중에 가지는 오리지날리티가 꽤나 강렬하죠. 되도 않은 상황에서 정감록이나 유학의 정전들, 실록이나 군담문학의 형식을 활용해 짐짓 무게감과 장엄함을 가장할 때와 같은 것에서 느껴지는 극단적인 해학과 유머가 발군이며, 그 과정 속에서 복고주의부터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조선땅을 수놓은 온갖 수많은 전근현대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희화화하죠. 이것이 그저 폭소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한말부터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의 근현대사를 역사적인 방식이 아니라 문학적인 방식으로 관통해버립니다. 한국의 근현대사 외에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소재를, 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으로 서술해나가고, 종국에는 한국근현대사 그 자체를 서사로 써내죠.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기엔 지나치게 독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봐야 백년의 고독 아류잖아'라고 한다면, 오르한 파묵이나 살만 루슈디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비판일 텐데 이쯤 되면 억지스러워지고..

더불어, 관념성을 말하자면 구운몽이나 광장이 훨씬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요.
소독용 에탄올
14/10/10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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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황제를 위하여가 그렇게 대단한 작품이라면 어디서 한번이라도 들어봤어야 하는데 ㅡㅡ;
왜 들어본기억이 안나나 모르겠습니다.

제 문학적인 관심을 아주 잘보여주는 지표로서 문학지문에 나왔는데 기억을 못하는건지, 안나와서 기억을 못하는건지 모르겠네요......

문학전공자가 아니면 밀도있고 전율넘치던, 전통적이고 기교가 넘치던 안사거나 안읽는지라,
사실 한국문학이 어떻고 이전의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14/10/11 01:38
수정 아이콘
김현이 쓴 평론이라도 읽어보시길
소독용 에탄올
14/10/11 02:38
수정 아이콘
네 감사합니다.
할머니
14/10/10 23:44
수정 아이콘
비극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이문열의 능력은 발군이죠. 대단한 작가에요. 그런데 이문열이 정말로 '문학적인 방식'으로 구한말부터 해방정국을 관통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철학이 하나의 길로 통하게 하는거고, 문학이 길 위에 서있는거라면 이문열은 전자에 가까운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톨스토이에 대비하는게 이문열에게 찬사일지 가혹한 처사일지는 모르겠지만, 안나카레니나와 황제를 위하면을 비교하면 황제를 위하면의 단점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저마다 관념의 대변자이지만 동시에 개인으로 존재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대벼하는 관념을 배신할 공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문열의 인물들에게는 그러한 공간이 없습니다. 안나는 이유없이 개구리를 밟아 죽일수도 있고, 방안에서 남몰래 수음을 할수도 있지만 황제에게는 그런 공간이 없죠. 이현웅이나 김광국도 마찬가지구요. 유일하게 관념이 아닌 개인으로써 존재하는 기자는 그저 청자로써 역할을 수행할뿐이죠. 안나, 레닌, 브론스키, 카레닌등의 인물들을 통해 러시아의 격변기를 여과없이 드러내면서도 개인으로써 그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에서 황제를 위하면의 한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운몽이나 광장은 물론 관념적이죠. 그런데도 제가 감히 두 소설이 황제를 위하면보다 윗선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두 소설이 관념으로부터 멀지 않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최인훈은 인간으로써 그들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관념의 대변자가 아니에요. 그들은 그저 관념 위에서 춤출뿐이죠. 관념을 드러내면서도 그 위에 놓여있는 개인을 잃지 않아요. 광장에서의 이명준의 중립국행과 배안에서의 자살은 소설이 단순히 관념적일뿐 아니라, 도통 관념적이 될 수 없는 인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문학이 철학을 넘어설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길들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길 위에 서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거요.
구밀복검
14/10/1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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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성을 잃는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말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추측컨대 이문열 특유의 등장인물의 입을 빌린 선언과 강변, 이데올로기 설교 등을 반복하면서 문학이 아니라 에세이나 개똥철학서에 가까운 형태의 작품을 종종 쓰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황제를 위하여>는 그와는 거리가 멀죠. 예컨대 작중 등장인물인 황제가 사회주의자인 이현웅을 단죄하는 장면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황제의 발화 그 자체가 해학 그 자체인데, 황제는 다소간 정신이 멀쩡하지 않고 정감록에 경도되어 자신이 하늘로부터 민족의 주인으로 선택받았다는 망상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하며, 황제의 발화 자체에 대해 자연스럽게 객관적인 검토를 할 수 있게끔 유도함으로써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편향성에 빠질 위험을 매우 크게 감소시키고, 당연한 귀결로 양가성을 잃지 않습니다. 채만식이 종종 써먹은 수법과 비슷하지만, 더 세련되죠. 가령 채만식의 <치숙>과 같은 작품에서 조카가 숙부를 비판하는 장면은 언뜻보기에는 양가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조카 쪽에 대한 풍자의 의도가 훨씬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반면, 황제가 이현웅을 꾸짖는 장면과 같은 것에서는 이념에 대한 결론적인 판단은 유보한 채, 이념과 이념 사이의 갈등 양상을 묘사하는 선에서 그치며 - 그것도 심각성을 띠지 않으면서도 마냥 가볍지는 않게 - 작중에 등장하는 상황, 작가가 상상 속에서 구성해낸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선에서 만족합니다. 이런 것은 전혀 철학적이지 않으며, 그야말로 문학적인 태도죠. 특히, <황제를 위하여> 같은 경우에는 이문열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메시지와 주제의식이 약하다면 약한 작품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이런 것들에 문학성이 희생당한 작품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작가 본인이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바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나머지, 창작자가 진지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려고 하는 유형의 작품들과는 달리 인상이 조금 흐릿하고 결론이 밋밋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죠.
할머니
14/10/1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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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핸드폰으로 작성해 댓글이 영 별로 인것 같아서 집에 와서 수정했는데 그새 답변이 달렸네요.
14/10/11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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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독자를 이끌어 다다를 인식의 지평으로 평가받기 어렵습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황석영의 <손님>은 별로 대단할 게 없는 작품이죠. "기독교고 공산주의고 필요없이 우리의 것이 좋은 것이여"가 뭐 그리 대단한 주제의식이겠습니까. 오에 겐자부로가 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노벨 문학상을 받을 작가, 현재 아시아 작가들 중 황석영은 가장 고유한 문학 세계를 갖고 있다'고 평한 건 이런 이유가 아니죠. <손님>이 6.25 전쟁이라는 한국어권 독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고유의 소재를, '황해도 별신굿'이라는 우리 고유의 서사적 양식의 외피를 쓰고 써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이 양자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바로 황석영이 쓴 손님의 플롯이죠.

굳이 우리 고유의 서사 방식이어야한다,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건 형상화 과정 중 선택지의 하나일 뿐이에요. 다만 20세기 제 3세계에서 자국의 근현대사를 다루려는 위대한 작가들이(가르시아 마르케즈의 <백년의 고독>,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과 그 외 많은 작품들, 이스마일 카다레의 <H 서류> 등등등) 대개 이르는 지점이기도 하죠. 답은 명확합니다. 작가가 쓰려고 있는 (해당 민족 있어선)굉장히 근대적인 양식의 [소설]이라는 매체가 자국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각자 다른 양상이겠지만 자국 고유의 서사 양식 간의 충돌을 겪지 않았던 민족이 없거든요. 그리고 [자국의 근현대사]란 주제로 다루는 데 있어 형식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면 이 둘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찾으려는 게 가장 그럴듯합니다. 소설 주제와 형식 간의 일관성을 도모하기 쉽죠. 물론 이걸 제대로 하기 위해선 작가 자신이 비단 탁월한 소설가여서만은 안 되고, 자국 고유의 서사 양식을 상당한 수준으로 소화하고 있어야 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이 점이 <황제를 위하여>가 한국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빼놓아선 안 될 작품인 이유구요.

구운몽이야 제쳐두고라도 같은 6.25를 다룬 <광장> 어디에서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나 황석영의 <손님>에서 드러나는 문학적인 형상화 과정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굳이 탈식민론일 이유는 없습니다. 탈식민론의 탈자도 안 나오지만 캐나다의 근현대사를 집약한(캐나다가 문학 형식적인 면에서 탈식민론을 운운하는 게 불가능하기도 하구요.) 마거릿 애트우드의 <눈 먼 암살자>는 아주 세련되고 수준 높은 형상화를 구현하는데 성공하거든요. 이를 통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을 받구요(제 개인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문학상이기도 합니다. 물론 뻘스러운 수상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헌데 <광장>이 과연 비슷한 소재를 다룬 황석영의 <손님>과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와 비교할 때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이 그만큼 성공적이었는진 의문입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해서 이 형상화 과정에 그만큼 고민을 하긴 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주제의식에만 골몰했기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와서 독자가 광장 읽어도 그 외엔 딱히 건질 게 없어요. 주제의식은 노골적이고, 플롯은 엉성하고, 보이는 건 결국 광장과 골방이란 표현으로 집약되는, 6.25 중간 이명훈 개인의 사색과 사변 뿐이거든요. <광장>이란 소설이 반드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집필될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당대에 이명훈 같은 고민을 하는 젊은이가 많았다는 것빼고는요. 그 점에 있어서 광장은 철저하게 시대에 복무하는 작품인 거구요.

이것도 그 나름대로 소설에게 기대할 수 있는 미덕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하지만 결코 이게 문학의 본질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네요. 작가의 시대의식을 말해줄지언정 소설가의식이라고까지 추켜세울 건진 모르겠단 말입니다. 그럴 거면 꼭 문학이어야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당대성에서 조금 물러서기만 하면 굳이 소설이 아니어도 되거든요.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을 위해서면 그냥... 뭐가 있으려나, 박찬승이 쓴 <마을로 간 한국전쟁> 같은 책 읽으면 됩니다. 제국주의에 대해서라면 그냥 탈식민주의 관련 서적이나 박지향이 쓴 <제국주의 : 상상과 현실> 같은 책 보면 되겠구요. 이런 책들의 학적 엄밀성과 별개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개인이라면 알아서 그 속의 인간들과 지금의 자신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 인식이 주는 특유의 정서에 빠지기 마련이거든요. 오로지 문학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문학적 형상화 과정을 통한 미감을 느낄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이게, 자꾸 문학적 형상화 과정이라고 자꾸 하니까 괜히 거창해보이는데 전혀 거창하지 않거든요. 좋은 영화의 조건으로 수준 높은 연출을 기대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전 영화는 잘 모르지만 만약 영화에도 특정한 주제와 더 유의미하게 상통할 수 있는 거시적인 연출 형식이 있다면 그러한 방법론에 입각하는 게 더 영화적 형상화가 잘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할머니
14/10/12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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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써 <황제를 위하여>가 취한 형식에 대한 선택이 뛰어난 작품이라는데는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위하여>를 한국 근현대소설 맨윗줄에 놓는데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황제를 위하여>가 보편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고 보기에는 어렵거든요. 황제나, 이현웅이나 김광국들의 인물은 인간이 아니죠. 개별 인물 한명 한명이 서적일뿐이죠. 말씀하신대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개인이라면 알아서 그 인식 속에서 특유의 정서를 느끼겠으나, 오로지 문학이 줄 수 있는 양가적인 것들을 포기할 만한 것은 되지 못하죠. 톨스토이가 보여준 것처럼 두 영역이 서로 상충하는 것들도 아니구요.

최인훈이 <광장>에서 하지 않은 형식에 대해 왜 하지 않았냐며 비판하는게 <광장>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광장>이 광장과 동굴이란 표현에 다다르기전까지의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소설이 아니거든요. 소설은 이현웅의 인생을 따라가며 종국에 광장과 동굴이 나올수밖에 없게끔 만들었죠. 주제의식은 노골적이면 설득력 있고, 이명훈 개인의 사색과 사변은 인류 보편의 사색과 사변으로 나아갑니다. 이명훈은 탈이념의 이념으로써 드러나는게 아니라, 이념위의 인간으로써 모습을 드러내니까요.
14/10/13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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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써 <황제를 위하여>가 취한 형식에 대한 선택이 뛰어난 작품이라는데는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위하여>를 한국 근현대소설 맨윗줄에 놓는데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황제를 위하여>가 보편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고 보기에는 어렵거든요. 황제나, 이현웅이나 김광국들의 인물은 인간이 아니죠. 개별 인물 한명 한명이 서적일뿐이죠. 말씀하신대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개인이라면 알아서 그 인식 속에서 특유의 정서를 느끼겠으나, 오로지 문학이 줄 수 있는 양가적인 것들을 포기할 만한 것은 되지 못하죠. 톨스토이가 보여준 것처럼 두 영역이 서로 상충하는 것들도 아니구요.)

무슨 말씀인진 알겠는데 전 대체 그런 걸 왜 소설에서 기대하는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같은 논리면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백년의 고독>이나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역시 보편의 영역에 들어서지 못한 작품 아니겠습니까? 대체 세계 문학가들 중 몇이나 이런 잣대로 소설을 평가하는데 동의할지 모르겠군요. 물론 황제를 위하여가 백년의 고독이나 내 이름은 빨강보다 위대한 소설이란 건 아닙니다만, 설혹 이 둘에 미치지 못한 작품이라고 할지언정 그 이유는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용을 담는 그릇, 즉 주제의 형상화 과정이 저 두 작품만큼 세련되거나 엄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보편의 영역에 들어서지 못했거나 주제의 형상화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스스로가 상정한 작가관에 충실하게 살아간 태도야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전 그의 문학관에 그닥 동의하지 못해서요.

(최인훈이 <광장>에서 하지 않은 형식에 대해 왜 하지 않았냐며 비판하는게 <광장>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광장>이 광장과 동굴이란 표현에 다다르기전까지의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소설이 아니거든요. 소설은 이현웅의 인생을 따라가며 종국에 광장과 동굴이 나올수밖에 없게끔 만들었죠. 주제의식은 노골적이면 설득력 있고, 이명훈 개인의 사색과 사변은 인류 보편의 사색과 사변으로 나아갑니다. 이명훈은 탈이념의 이념으로써 드러나는게 아니라, 이념위의 인간으로써 모습을 드러내니까요.)

어떤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시겠다구요? 간단합니다. 소설이 소설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벗어났으니까요. 앞서도 계속해서 언급한 부분입니다만, 소설이 소설이어야만하는 이유는 그 주제의식에 있는 게 아닙니다. 주제의식이 중요할 거면 소설을 왜 씁니까, 그냥 주제만 덜렁 던져놓지요. 그리고 이건 다른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헤겔 정신현상학 강독 비디오가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을까요? 아뇨, 결코요. 그건 영화라고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광장을 비판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탈이념의 이념으로써 드러나건 이념 위의 인간으로 서건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상관없는 문제죠. 그걸 등장인물의 독백과 대화를 빌어 아예 직접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무슨 관념들간 대리전쟁인가요. 이를 긍정할 수 있다면 공산주의 선동 소설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공산주의 선동 소설은 이념이 글러먹어서 틀리다구요? 아뇨, 그 이념이 글리고 틀리고 맞고는 소설이 말할 게 아닙니다. 아니, 소설 속에서 주제로야 이야기 될 수 있겠죠. 근데 그 명징성을 재고 따지고 하는 건 '소설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에요. 전 이게 단순히 좋은 소설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비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자신이 소설의 주제의식으로 삼은 인식이 그토록 고결하다면, 치열하게 갈고 닦아 도저히 소설의 형식 속에서 제대로 녹여내지 못할 수준이라면 그냥 소설이 아니라 저술로서 썼다면 됩니다. 그냥 학술서로요. 그 역시 부적당하다면 그저 한국전쟁에 대한 인상비평이라며 출판했으면 될 일입니다. 근데 그게 아니라 소설을 썼으면 소설의 형식적 기준에 따라 평가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죠. 그리고 광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결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없구요. 그러면 그냥 좋지 못한 소설인 겁니다. 그 주제의식이 얼마나 치열하고 대단하고 어떠했는지는 우리가 소설의 영역을 논할 때 따질 게 아닙니다. 뭐, 같은 맥락에서 전 이청준도 싫어합니다. 특히 <당신들의 천국>이요. 아주 후반부에 가면 등장인물들이 직접 작가의 주제를 독자에게 연설하기 시작하는데 보고 있자면 어이없죠. 현실의 어느 소장과 문둥병 환자가 저런 대화를 나누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런 대화가 제대로 독자에게 전달되게끔 고유한 서사 양식을 조탁해내거나 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시작부터 관념론이에요. 그러니 읽어나가기 심란해지죠.

이 주제의식을 제대로 녹여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카뮈의 <이방인>이 그 대표적인 사례겠죠. 소설의 주제의식이 집약된 후반부만이 중요했다면 카뮈가 뭣하러 전반부를 썼겠습니까? 시간 남고 할 일 없어서요? 아니요, 주제의식이 집약될 후반부에 독자를 제대로 몰입시키기 위해서죠. 후반부가 제대로 읽히려면 전반부에 이러저러한 사항들을 철두철미하게 깔아야하는 걸 까뮈는 아는 거죠. 그런 작가니까 노벨 문학상을 타는 겁니다. 반대를 한 번 살펴볼까요? 그러니까 작가의 인식과 작품 속 주제의식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 사례들이요.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우리로 하여금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극단적인 윤리관을 가진 인물을 제시하고 굉장히 세련된 형식과 언어로 우리에게 그 매혹을 던져줍니다만 이걸 작가의 의도로 오해해서 공격한다면 그건 얼간이에 다름 아닙니다. 이 하나의 사례론 부족하니 <호밀밭의 파수꾼>을 봅시다. 흔히 격렬한 애호와 격렬한 반감으로 나뉘는데요. 후자는 "오직 사춘기 코드를 유지하는 중2병 환자들에게나 통할법한 주제의식을 떠들어대는 작가가 마음에 안 든다"이라고 말하죠. 하지만 이건 주제의식과 작가 자신을 혼동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오독입니다. 샐린저가 실제 어떠한 생각을 할지 전 알 수 없습니다만, 소설 속 주제의식으로 작가 자신을 공격해선 안 될 노릇이죠.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작가 개인의 사상과 작품 속 주제의식을 혼동하며, 자칫하다간 작가의 삶이 드러내는 사상을 통해 소설의 주제의식을 재고해보기에 이르기도 합니다. 개인의 감상으로서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만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이보다 최악인 게 없죠.

문학이 지닌 윤리적 표준의 가능성 역시 부정하자는 건 아닙니다. 형식적 표준을 지향하는 소설만이 제대로 된 거고 나머진 불쏘시개란 말이 아니에요. 허나 윤리적 표준을 지향하는 소설의 경우 대개 시대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마련입니다. 아무래도 당대를 살아가니까요. 다만 이 경우, 작가가 상정한 시대가 작가 자신이 상정한 물리적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엔 문제가 따르죠. 이건 형식적 표준을 지향하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주제의식의 전달을 목적으로 삼는 작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전자야 이것이 플롯으로 형상화되는 과정 속에서 고유의 재미와 미덕으로 전해질 여지도 있거든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자민족의 역사가 진하게 배인 모옌이나 파묵의 작품을 재미나게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죠. 그러나 후자의 경우, 애초부터 목적으로 놓인 주제의식이 특정 독자층이 공감할 수 있기에 문제가 애매해집니다. 어쨌든 여기도 인간이고 저기도 인간인 만큼 전하려는 주제의식과 전달받는 그것 간의 공통분모가 있지 않느냐하겠지만 이 과정에서 특유의 윤리적 미감은 상당부분 퇴색될 수밖에 없거든요. 예컨대 주제를 가사로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노래를 생각해봅시다. 제 아무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본들 무슨 소린지 알아먹질 못하고 맥락조차 짐작 못하는 일본이나 미국의 대중들을 상대로 이것이 과연 80년대 한국의 대중들에게만큼 그럴싸하게 전해질까요. 그래도 노래 잘 부르는 건 알 수 있지 않겠느냔 반문도 있겠지만 '노래 잘 부르는 것(이걸 가수의 기교라고 뭉뚱그려 표현할 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굳이 가사/주제 전달에 방점을 둔 임을 위한 행진곡일 이유가 없을 겁니다. 아, 물론 일부 아주 감수성 풍부한 청중들에게 호소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절대로 한국의 특정 세대들에게 그러했던 만큼 압도적인 지지를 받기 힘들 겁니다.

윤리적 표준을 지향하면서도, 이러한 시대의식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작가라면 카프카 정도 있을까요. 허나 카프카 역시, 자신의 주제의식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이입하기 위해, 자신의 문제의식에 독자가 열렬히 전율할 수밖에 없게끔 소설을 썼습니다. 카프카만의 방법론으로요. 이미 말하고자하는 게 워낙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소설적 방법론에 있어서도 치열한 고민을 했다는 게 이상하겠지만 전 이게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은 이것을 소설로 풀어써야만 비교적 온전히 전해질 거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설적 형상화 과정에 있어서도 고민을 하는 게 당연했으리라 생각하죠.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우리가, 그리고 세계 문학계가 카프카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시대의식과 반드시 무관한 윤리적 표준만을 지향해야한단 말도 아닙니다. 하다 못해 위에서 언급한 카뮈의 <이방인>조차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죠. 하지만 <이방인>에서 카뮈가 제기한 문제의식이 시대라는 프레임 속에서만 그 올올한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광장>에서 최인훈이 제기한 그것은 아무리 봐도 한국전쟁이란 민족 공동체 차원의 비극적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겐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될 거 같거든요. 아니, 의미야 전해진다고 해도 그 의미가 전하는 떨림을 온전히 전하기 어렵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뭐, 하자면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문화대혁명기를 다룬 모옌의 소설처럼요. 그러나 역시나, 모옌은 문학적 형상화를 굉장히 능숙하게 해냈거든요. 공감과 이입이란 이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기능하는 거구요. 소설의 주제에 독자가 귀기울이는 건, 그리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가장 밀접한 온도를 최소한 느껴나마 보는 건 그 다음 일입니다. 그러니 모옌이 노벨상을 받았죠. 사실, 애초에 모옌의 경우는 이러한 형상화 과정이 워낙 탁월하기 때문에 윤리적 표준만을 지향했다고 말하긴 어려운 소설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간단합니다. 소설의 윤리적 표준을 지향하건, 형식적 표준을 지향하건 둘 모두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소설이란 이 둘 중 어디 하나로만 범위를 한정하기엔 워낙 스펙트럼이 커다란 장르입니다. 다만, 소설을 평가하는 시점에 이르러서 이를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으로 우리는 그 형식적 표준부터 따져야한다는 겁니다. 최소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윤리적 표준이 온전히 전달되고 있는지, 작가가 이를 자신의 언어로 얼마나 녹여냈는지를 말입니다. 전 그리고 광장이 이 기준을 도무지 만족시키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간혹 잘 닦인 사장이 눈에 띕니다만 그것이 고유한 소설적 형식으로 제시될 정도도 아니고, 플롯을 추상할 경우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죠. 무슨 놈의 세계며 인물들이 주인공 기다리는 npc처럼 가지런히 배열되어있죠. 이 과정을 딱히 더 그럴듯하게 형상화하려 들지도 않구요.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의 경우 애초에 군담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러한 전개 과정에 독자가 무리없이 이입할 수 있겠금 유도를 합니다. 서술 방식도 유머러스하여 거의 최적화가 되어있죠. 이 서술 과정이 화자와 주동 인물들에 대한 객관화로서 기능할 여지도 남겨두니 금상첨화죠. 주제의식을 덕지덕지 직접적으로 페이지마다 붙여놓는 걸론 이만치 세련된 조응 과정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럴 거면 뭣하러 소설을 봅니까. 그냥 강의 시간에 이렇게 비극적인 인물이 있었다는 이야기 듣고 다 같이 토의하고 생각해보고 말죠.

사실 제가 이렇게 강변할 것도 없습니다. 영미권에선 노벨상에 버금가는 권위인 부커상이 있으니까요. 물론 항상 완벽한 수상작을 배출하진 못합니다만, 그 수상작들 면면에 흐르는 기준을 추상하자면 대강 이렇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걸 소설로 쓰고자 한다면 소설적 방법론에 충실해야합니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다른 비유 생각하기 난망하여 앞서 했던 소릴 다시 한 번 끌고 오겠습니다. 위대한 철학을 소개하겠다며 정신현상학 강독 비디오를 틀어봐야 누구도 헤겔의 철학에 감화되어서 그 비디오를 위대한 영화라고 치켜세우진 않을 겁니다. 헤겔 그렇게 생각 안 할 걸요.

그리고 무엇보다... 뭐 그리 좋아하는 저술가는 아닙니다만 전 <근대 문학의 종언>에 대해서라면 고진의 의견에 철저히 동조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 문학에, 특히 소설에 과잉된 의미를 부여했어요. 거품이 너무 꼈습니다. 소설은 그냥 유희고 엔터테인먼트에요. 이를 평가하는 기준이라면 얼마나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호소했느냐, 그 호소하는 방법론에 얼마나 충실했느냐가 되어야한다고 보네요. 사실 틀릴 수가 없는 이야기죠. 영화나 소설이나 연극이나 주제를 서사로 풀어내는 건 마찬가진데 굳이 소설 속에서 의미를 넣어대고 그 의미가 얼마나 (전혀 소설적 방법론과 무관한 방식으로)투철하며 엄밀한지를 재고 따지는 건 소설의 영역을 이미 멀리 벗어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렇다고 위에서 말한 윤리적 표준 어쩌고가 다 헛소리, 거짓말이었다는 건 아니구요. 지금도 충분히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봅니다. 단, 다른 서사 매체인 영화나 연극이 그러할 수준으로만 말이죠. 하기야, 영화계도 정치적이고 시사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들에 대해 지나치게 관용적이지 않나 싶긴 하네요.
헥스밤
14/10/13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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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앗 어억 이 재밌는 논쟁을 지금에서야 보다니 아앗 어억
14/10/1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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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 제가 쓴 걸 다시 읽어 보니 광장을 평가할 온당한 기준에 대해서만 잔뜩 적혀 있네요. 정작 광장이 그 기준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긋나는진 부분부분만 핥은 채 지나간 거 같구요. 하여 몇 자 더 적습니다.

다른 사람이 제 댓글을 읽는다면 품었음직한 의문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왜 굳이 최인훈의 광장을 모옌이나 파묵하고 비교하는 걸까? 그보다 형상화 과정이 좀 떨어진다고 좋은 소설이 아닐 이유는 없지 않나? 또한 도리어 주제의식, 즉 시대의식을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는 태도는 광장이 더 좋은 평가를 받을만하지 않나? 설혹, 그렇지 않다고 할지언정 그게 저 둘의 작품들만큼 위대하지 못할 이유는 되어도 좋은 소설로는 충분히 남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최인훈의 광장을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보다 높게 평가한들 그걸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대강 이 정도가 되겠네요.

대답 먼저하겠습니다. [아뇨.] 최인훈의 <광장>은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이나 파묵의 <검은 책>이나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수준의 문학적 형상화 과정을 반드시 거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좋은 소설이 되지 못할 이유로는 차고 넘칩니다. 그저 저 소설들보다 해당 부분에서 부족한 게 있는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요. 최인훈이 <광장>에서 다룬 한국전쟁이 그냥 한국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인훈의 목적은 한국전쟁이란 시대의 비극과 아픔을 그려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를 관념적/윤리적/실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작가의 야망이 분명 소설 속에서 드러나죠.

주제의식이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이를 풀어내야할 서사의 스케일 역시 비대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광장의 주동 인물인 이명준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남북을 종횡무진합니다.

그 서사를 대강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남한에선 동굴의 한계를 느끼고, 북한에선 역시 광장의 한계를 느낍니다. 그리고 이 둘이 부딪치는 한국전쟁에선 휴머니즘을 외치며 양자 모두를 거부하는 지점에 이르죠."

솔직히 말하면, 주제를 풀어내고자 채택된 서사만 놓고 봐도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지나치게 주인공을 직접적으로 굴려요. 전혀 세련되지 못하죠. 문제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문제 상황에 들어갔다 나왔다 갔다 나왔다의 반복입니다. 반복 자체야 다른 좋은 소설에서도 곧잘 나타나는 양상입니다만 직접적인 건 좀 문제죠. 무슨 환협지도 아닌데요. 서사 자체만 추상하면 못할 말도 아닙니다. 남/북한을 판타지/무협 세계로 놓고 마법과 무공을 동굴과 광장에 대칭시키고 이러면 적당히 아다리 맞아떨어지려나요. 뭐 그런데 최인훈 본인이 그리 상정한 것이니 이건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또한 서사 자체만으로 소설이 좋다 나쁘다를 말하긴 곤란하기도 합니다. 서사가 단순해도 좋은 소설들은 많거든요. 플롯을 밀도 있게 짜면 되는 일이니까요.

그럼 광장의 서사가 어떻게 광장의 플롯으로 형상화되었을지 한 번 추측해봅시다.

"이명준은 전쟁 속에서 자신의 인식과 가치관을 완성시켜야하는 인물이니 너무 나이가 많으면 곤란합니다. 너무 어리면 또 문제의식을 구체화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니 대강 대학생 정도면 좋겠습니다. 주제를 제시하기 쉬우려면 분단이란 상황에 대해 주인공이 처음부터 문제의식을 품고 있는 편이 맞을 겁니다. 그럼... 보편관을 확충해나가는 주인공에게 있어 사상적 극복의 대상인 동시에 문제의식을 집약하는 인물로는 역시 아버지만한 게 없죠. 그러니 아버지가 월북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대학생 나이의 인텔리가 스스로 밥벌이하며 대학 과정을 끝내기는 좀 무리가 있으니 아빠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집에 얹혀사는 걸로요. 오, 그 집 딸내미랑 연애를 하고 그 안에서 동굴을 찾으려한다고 하면 적당히 뭔가 맞아떨어질 거 같습니다. 그러면 남한 사회내 광장의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자연히 넘어갈 수 있을테구요. 그리고 이 부재가 주인공으로 하여금 월북하게 만드는 거죠. 그런데 북한으로 가니 아버지가 엄청 실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라고 하면 딱이겠네요. 사실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떡밥일 뿐이니까요. 중간보스조차 못 된 아버지에게 주인공이 실망하고 북한의 광장으로 자연히 문제의식을 돌리도록 만드는 겁니다. 광장의 과잉만이 문제적으로 느껴지려면? 역시나 주인공이 그와 반대되는 동굴에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죠. 북한에서도 애인 하나 만든다고 합시다. 광장에 실망한 주인공은 자연스레 이 애인과 미래 꾸릴 생각에 전념하게 되구요. 한국전쟁의 비극성? 그렇게 투사한 애인을 죽이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글쎄,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그저 환협지삘났던 서사를 한국전쟁이란 시대 상황에 맞춰서 별다른 (플롯에 대한)고민없이 그냥 풀어낸 수준에 불과해보이는군요. 그렇다고 개별 국면에서 <광장>이 남/북한 체제에 회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조지 오웰의 <1984> 같은 작품 보십시오. 광장이란 말 한마디 없이도 소설의 문제의식에 독자가 전율할 수밖에 없도록 밀도 있게 쓰지 않습니까. 빅 브라더란 공포가 어떤 식으로 주동 인물에게 각인되는지 정말 처절하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헌데 최인훈이 <광장>에서 보여주는 건 뭡니까. "남한은 동굴밖에 없다", "북한은 광장밖에 없다"고 대놓고 이명훈 입으로 술술술술 내뱉습니다. 아주 소설에 대한 평론을 소설 속에서 쓰는 격이에요. 아, 뭐 그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고 치죠. 그런데 그것만 있다는 게 문젭니다. 아무런 형상화 과정 없이 "남한은 동굴 과잉임, 근데 북한은 광장 과잉" 이라고 주인공의 사념으로만 지시해대면 문제일 수밖에 없죠. 아, 이 사념을 형상화하는 과정이 전혀 없진 않네요. 근데 그게 기껏해야 "남한엔 멍청한 애들 뿐이고 북한엔 갈구는 군인 천지고"를 보여주는 에피소드 일부 까는 것밖에 없죠. 이러니 제가 위에서 [마치 주인공이 클릭질하길 기다리는 npc뿐인 알피지 게임 같다]고 한 거구요. 결론부 인식에 다다르는, 은혜의 죽음 역시 비슷합니다. 남/북한에 모두 실망하고 그나마 휴머니즘을 죄다 은혜에게 몰빵하는데, 이 몰빵하는 과정도 찬찬히 그려낸다기보다 그냥 이명훈이 대놓고 떠듭니다. 이쯤 되면 정말 진지하게 잭 런던의 <강철 군화> 같은 소설이랑 <광장>이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습니다. <강철 군화>에서도 작가가 주인공 입 빌려서 신나게 '이윤율 저하의 법칙'을 떠들어대거든요. 동굴, 광장 외쳐대는 이명훈이랑 똑같아요.

뭐, 플롯에 무리수가 있어도 이를 온전히 받아낼 그릇, 즉 형식이 받춰준다면야 전화위복이 될 겁니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처럼요. 근데 뭐... <광장>이 이 부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소설이란 건 할머니님께서도 동의하신 부분이니 넘어가겠습니다.

이렇듯 <광장>에서 드러나는 건 오로지 거대한 최인훈의 야망-주제의식일 뿐, 그 이하의 과정은 도무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해당 문제의식을 같은 방식으로 공유하던 60년대의 지식인이나, 같은 방식까진 아닐지언정 마찬가지로 분단을 시대의 문제로 받아들인 90년대 초반까지의 지식인/대학생/대중들 사이에서야 별다른 설득 작업이 필요없었을지 모릅니다만 그렇다고 결핍된 게 채워지는 건 아니거든요. 최인훈의 야망이 그렇게 거창하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겁니다. 분단 상황과 동굴/광장 이분법적 구도란 문제의식에 골몰하고 싶었다면, 그냥 그렇게 썼으면 될 일입니다. 단, 서사의 스케일을 굉장히 작게 해서요. 이러면 이제 한국전쟁은 다루기 어려워지겠죠. 그럼 한국전쟁은 포기해야합니다. 모름지기 위대한 작가라면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구분할 줄 알아야죠. 굳이 거창한 남북 횡단의 로맨스 스토리 끌어들일 거 없이, 남한의 대학생 이명준이 북한의 공산주의와 남한의 자본주의 사이에서 숙고하고 고민하는 과정만 덤덤히 풀어냈어도 전 지금보다 훨씬 <광장>을 재미나게 읽었을 거 같습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그리기 위해 필요한 건 이명준과 그 주변의 인물 정도밖에 없겠죠. 비유하자면 남한 버전의 <1984>로 쓰는 겁니다.

제가 특정한 시대의식에 밀접히 관련된 문제의식에 별달리 공감을 못해서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전 공지영이 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정말 재밌게 읽었고 적어도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만큼은 그 주제에 동조할 수 있었거든요. 소설 속에서 설득을 해주니까요. 그럼, 공지영이 <무소>에서 보인 문학적 형상화의 수준은 그렇게 대단했느냐? 아뇨, 사장은 공지영이 이후 펴낸 소설과 비교해도 질박하고 중간중간 과정 생략이 잔뜩 되어버린 상황묘사는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워낙 간절하다는 건 충분히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간절함이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거구요. 작가가 만들어낸 플롯이 철저히 자신이 느낀 문제의식에만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전 공지영을 굉장히 싫어하고 작가의식은 아예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입니다만, <무소>에서 공지영이 문제로 지시한 시대에 맞서 펼쳐보인 플롯만큼은 높이 삽니다. 이 플롯에 담긴 치열함을, 치열함을 추동한 절박함을 높이 삽니다. 비슷한 소설로 김사과의 <미나>가 있겠죠. <미나>도 <무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되려 더 심하다면 심하죠. <미나>에서 김사과의 사장이란 <무소> 당시 공지영의 그것과 비교해서도 심란한 수준이거든요. 구성은 또 어떻구요. 전 주변 지인들의 추천을 수없이 받으면서도 번번히 <미나> 읽기를 꺼려왔는데 그 이유의 팔할은 펼치면 바로 보이는 첫 챕터가 도저히 용인되지 않을 수준이어서 그랬거든요. 지금도 그 첫 챕터만큼은 대체 김사과가 무슨 생각으로 끼워넣었는지 의문입니다. 그냥 아예 들어 내도 아무 문제 없어요. 박지예 죽음부터 바로 시작해도 되거든요. 하지만, 이처럼 사장이며 구성이 개떡 같아서 제가 중시하는 형식적 표준에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던 소설이지만, 전 그래도 여기서 사례로 이야기할 만큼 <미나>를 즐겁게 읽었습니다. <무소>의 그것과 같은 이유에서요. 아니, 되려 <무소>보다 더 즐거웠죠. 왜냐면 <무소>보다도 형식미가 아쉬운 대신 <무소> 이상으로 문제의식에 플롯이 충실하게 맞아떨어지는 소설이었거든요. <무소>의 경우는 공지영의 이후 행보와 맞물려 작가의식까지 승화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떨어졌던 비극을 마냥 형상화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만, <미나>는 결코 그런 여지조차 주지 않습니다. 작가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소설 속에서 그려낸 게 무엇이고 어느 지점에 있어 어떤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거든요. 즉, 윤리적 표준을 지향하는 소설이라고 할지언정, 그 플롯이 철저히 그 윤리적 표준에 맞춰 복무하는 작품이라면 그 역시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이게 만족스럽게 구현될 때 작가의 태도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구요.). 작품 내에서 [주제를 독자에게 설득하기 충분했다는 말이니까요.]

전 소설을 말할 때 주제가 형식이나 플롯보다 위에 놓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어쨌든 주제란 작가가 말하고자 바입니다. 그리고 소설이란 매체가 딱히 작가 스스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풀어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문제가 되는 건 <광장>에서처럼 특정한 주제를 단순히 제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꼭 다루고 싶은 소재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고, 다시 이걸 커버하기 위해 거창한 서사를 끌어들일 때입니다. 이 경우 작가는 자신이 끌어들인 커다란 서사의 무게를 온전히 지탱해야죠. 작가가 추구하는 바에 따라, 목적하는 바에 따라 책임 질 무게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 책임을 온당히 받아내지 못한 작품에게 그 주제와 야망의 원대함이 변명해 줄 건 무엇도 없습니다. 그건 역성일 뿐이에요. 작가가 소설 속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 인식이 얼마나 대단하든 작가를 작가로서 위대하게 만들어주진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작가의 태도란 위대한 문제의식이 아니라 자신이 골몰하는 문제의식을 펼쳐내는 위대한 과정과 여기에 성실하게 임하는 태도에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시대의식에서 몇 안 되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하여 그 주제의식에 근대 이후 모든 독자들로 하여금 기꺼이 설복하게 만드는 카프카가 위대한 이유 역시 여기서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카프카가 자신의 문제의식에만 철저히 충실하지 않았더라면 문학적 형상화 과정에 있어서도 성공적이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독자를 설복하기란 아주 요원한 일이었겠죠.
할머니
14/10/1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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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서사적 측면에서 이명준의 여행이 불필요했나요? 톨스토이의 <안나 카나레나>가 수많은 등장인물에게 페이지를 나누어주고 또 쉴 새 없이 러시아 곳곳을 움직이면서 등장인물들의 이념을 비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냥 도시를 기준으로 레닌, 카레닌등을 보여주면 될 것인데요. 남한의 대학생 이명준이 북한의 공산주의와 남한의 자본주의 사이에서 숙고하고 고민하는 과정만 덤덤히 풀어냈다면 결말은 달라질 수 밖에 없죠. 너는 이래서 별로고 재는 이래서 별로고 걍 다 별로다. 개같은 세상! 이라는 결론으로 귀결하겠죠. 이문열이 즐겨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는 성급한 희망으로 치닫거나. 최인훈은 <광장>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중립국에 가서 다시 한번 개박살 나면서 끝났겠죠. 김영하가 <검은꽃>에서 개박살난 인생들이 종점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개박살났는지 독자들에게 보여주면서 끝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광장은 처절하게 중립국에서 삶을 영위하느니 완전히 몰락하면서 끝납니다. 현실에 희망은 없는 것이기에, 주인공은 반드시 박살이 나야만 하는거죠. 단 숭고하게. 그럴때만 희망은 설득력을 얻습니다. 이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명준의 여행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남한의 대학생의 제자리에서의 사념투쟁이라니. 그렇게 쓰여진다면 이문열의 <들소>같은 호소력 떨어지는 성급한 희망만이 결론에 남겠죠. 또는 <황제를 위하여>같이 결국 다 그지같아 라던가.

주인공의 입에서 주제의식이 은유되어 나오느냐. 직접적으로 나오느냐. 또는 서술에 의하여 나오느냐. 아니면 애초에 감추어져 있느냐는 선택이지 질적인 차이가 아니죠. 직접적으로 표출됬을 때 그 대사가 얼마나 야하게 느껴질 수 있는지를 각오하고서라도 그 야함이, 설득력을 갖추었다면 문제될게 없습니다. 말씀하신 <1984>는 어떻습니까? 소설의 슬로건들은 얼마나 야하게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4>의 설득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죠. 그렇다면 <광장>은 어떻습니까? 이명훈의 입에서 주제의식이 나오기까지 소설은 기나긴 페이지를 할당해서 이명훈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여행 끝에 튀어나온 말이 광장과 동굴입니다. 벗을 수 밖에 없게 만들어버린 다음에 벗어서 보여준게 야한걸까요?

마지막으로 NPC라는데는 더욱 동의할 수 없는데요. 말씀하신대로 소설은 60년대 지식인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60년대 한국사회가 얼마나 교조적이 되어 있다는거죠.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이 1968년입니다. 황지우와 이성복이 등단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저항시들이 교조적으로 쓰여 졌습니까? 그것이 npc로 보인다면, 그것은 한국사회의 비극이지 소설의 한계가 아니죠. 소설은 시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죠.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에는 이명준이 있습니다. npc라기에는 지나치게 인간적이죠. 한권의 책 내내에 걸쳐 설득력을 획득한 광장과 동굴의 은유를 npc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겠죠. 적어도 npc라는 이름을 부여할라면 시작부터 끝까지 이념의 하수인으로써 존재하는 <황제를 위하여>의 김광국이나 이현웅정도는 되야겠죠.
14/10/14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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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님//

<황제를 위하여>의 김광국이나 이현웅은 npc 맞습니다. 근데 <황제를 위하여>는 그들이 npc처럼 비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군담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충분히 답해냅니다. 그네가 그렇게 구현될 수밖에 없는 세계관을 만들어 정당성을 부여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 군담소설이란 형식을 차용했기에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더 있죠. 이 자체가 문학적 승화 과정인 만큼 작품을 읽으며 즐길 장점으로 치환됩니다. 헌데, <광장> 어디에 대체 이런 정당성 부여가 있습니까? 장점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기껏해야 들 수 있는 이유란 대단한 주제의식을 펼치기 용이하단 점이 있을텐데 이건 npc의 필요성은 될지언정 npc의 문학적 정당성 부여는 해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광장>에 이명준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네, 이명준이 있지요. 오직 이명준만이 게임 같은 세계관 속에서 홀로 인간이 플레이하는 캐릭터처럼 움직이죠.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그게 이 소설에서 가장 크게 문제삼을 부분이구요.

<황제를 위하여>는 다릅니다. 이쪽은 그냥 만들어낸 세계 자체가 게임이에요. 이 중 가장 npc같은 캐릭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주동 인물 황제구요. 일관성이 있단 말이죠. 그럼 이제 독자가 소설 속에서 가장 비판적으로 보게 되는 캐릭터는 바로 주동 인물이 됩니다. 소설은 연의의 형식을 취할지언정 엄연히 사서를 기반으로 했다는 주장 하에 '당시 황제에 대한 비판자들의 이견' 또한 꼬박꼬박 첨부하며 주동 인물에 대한 비판적/현실적 시선을 형식 차원에서도 구현해내구요. 그러면서도 마냥 '주동 인물은 등신일 뿐'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야길 따라가보면 거기에서 일말의 진실성에 말미암은 설득력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이현웅에 대한 황제의 단죄는 이 양가성을 제대로 표출하는 장면이 되겠죠. 황제에선 이렇게 수준 높은 형상화가 굉장히 반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도 황제란 캐릭터와 황제의 사상과 황제의 이야기에 걸맞는 군담소설이란 형식 속에서요. 수준 높은 문학성이란,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에 맞는 서사와, 그 서사를 이물감 전-혀 없이 감당할 수 있는 플롯과, 이 플롯을 서술하기에 최적화된 형식을 찾아 그 모두를 완성도 높게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 사이 빚어지는 긴장을 밀도 있게 조응시키는 것입니다. 아니, 사실 수준 높은 문학성이라기보다 좋은 문학 작품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할 것이죠. 다만 황제를 위하여를 훌륭한 소설로 꼽는 이유는 주제/서사 자체의 부피와 성격상 감당하기 쉬운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플롯과 형식 차원에서 이를 너끈히, 아니 되려 추가점수 팍팍 올려대며 달성해냈기에 그런 거구요.

물론 가장 높게 추가점 받을 부분이라면 이 모두를 아우르는, 세계를 풀어내는 방법론일테죠. 주인공마저 게임 속으로 집어넣으면서 그 게임이 게임이어야할 이유를 문학적으로 보여주니 말입니다. 문학적으로 참신하고 보기 좋게 만들어냈단 소리죠. 백년의 고독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걸]로 보이긴 그네도 마찬가집니다. 허나 누구도 이를 책잡지 않는 건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탈식민론적 형식 때문이죠. 그리고 이건 황제를 위하여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이야깁니다. 연의류 군담소설에서 npc스러운 인물들이 등장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걸요. 이게 바로 이문열이 해당 작품에서 제시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탈식민론 차원의 문학적 반성입니다. 따라서, 말씀하신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은 작가 이문열의 다른 작품이라면 몰라도 결코 황제를 위하여에 대한 비판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개인은 근대 문학에 이르러 발견되기 시작한 [개인]인데 근대적 발화 형식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탈식민주의 서사 형식에 이런 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혹시나 싶어 덧붙이는데, 마콘도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있다지만 계룡산엔 황제가 있답니다. 캐릭터의 매력에 있어 차이가 날진 몰라도 둘에 대한 형상화가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긴 곤란하거든요. 더군다나 마르케즈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형식에 기저로 깔린 인식을 추상하면 "세계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를 어떻게든 해보려는 근대적 리얼리즘은 헛짓거리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인데 반해, <황제를 위하여>에서 이건 "세계를 파악하네 마네하는 건 애초부터 문제가 아니다. 근대 리얼리즘이니 뭐니 복잡할 게 생각할 거 하-나 없어. 복잡하니까 안 보이는 거야. 착한애는 잘 되고 나쁜 앤 벌 받음. 그러니 이딴 씨잘데기 없는 건 치워버리고 황제느님 쿵짝이나 구경하세"란 식이거든요. 군담소설에 태연히 배인 선악구도와 권선징악이 그러하듯 말이죠. 부엔디아 대령을 바라보는 <백년의 고독>와 황제를 바라보는 <황제를 위하여>의 온도 차가 존재하는 건 이 때문이구요. 만약 그 형상화의 양상이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 역시 이 때문입니다.

"npc들만이 판치는 게임 속 세계에서도 가장 npc같던, 거의 마을 입구 다람쥐 수준에 지나지 않던 황제가 한국 격랑의 근현대사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역정을 거치며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npc들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거듭납니다."

황제를 위하여의 주제/서사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으로서 npc들의 세계를 유유히 부유하던 이명준과는 다르죠. 이러한 역설적 주제/서사는 마찬가지로 역설적인 형식, 역설적인 플롯과 맞물려 황제가 다다르는 인식에 문학적 설득력을 부여합니다(소재 차원에선 적절히 도교 계열 노장 떡밥도 뿌려두는 것도 물론 이문열은 잊지 않았구요.). 그리고 소설의 주제의식은 이때 황제가 다다른 지점에 집약됩니다. 다만 이 부분에선 이문열이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합니다. 지독한 관념 과잉이라 문제인 자신의 다른 소설과 굳이 비교를 않더라도, 이 소설에서 드러난 주제의식의 관념적 형상화 과정은 좀 미진한 구석이 있거든요. 이건 분명 <광장>이 낫긴 하죠. 워낙 비중을 많은 비중을 할애하기도 했구요. 그러나 처음부터 인간인 이명준의 사유는 이명준 내부에서만 고양될 뿐, 플롯 차원에서 설득력을 얻기 힘듭니다. 그게 고양이 맞긴 맞는지, 그냥 도피일 뿐인지도 확답하기 어렵구요. 다 플롯 차원에서 제대로 설득력을 갖추질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숭고미는 이미 처음부터 이명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에게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구요. 만약 그 문제의식을 전-혀 공유하지 않는 독자라면? <광장>은 그냥 제 이야기를 풀어가기만 할뿐 그 이상의 어떤 안배도 해두질 않았습니다. 그 독자가 느낄 건 점점 비참해져가는 이명준에 대한 연민 정도 남겠네요.

위와 같은 이유로, <황제를 위하여>에 대해 "정신병자가 마지막에 정신 차리고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주제의식이겠느냐"란 비판은 따라서 절반만 가당합니다. 어쨌건 황제가 그 지점까지 이르는 과정까지 소설은 굉장히 훌륭하게 집필되었고, 직접적인 의식의 고양 과정이 밀도 있게 서술되진 않았습니다만 이전까지의 과정을 통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사실 뭐 이런 식으로 책잡을 거 같으면 가르시아 마르케즈 <백년의 고독>에 대해서도 "그래서 결국 다 망했다는 거잖아? 기승전패배주의인가염?"이라 비판할 수 있거든요. 후반부 가면 힘을 잃는 건 백년의 고독도 마찬가지구요. 도리어 이전까지 레일을 분명하게 깔아 황제가 다다를 지점이 어디인지 정도는 어느 정도 짐작을 가능케하니 <황제를 위하여>의 주제가 독자에겐 더 선명하게 다가오겠죠. 물론 두 소설은 모두 주제의식 자체에 방점을 두기보단 그 문학적 형상화에 방점을 둔 작품인 만큼 이러한 잣대로 우열을 가리는 건 부당할 것입니다. 사실, 어떤 소설도 '손에 분명히 잡히는 주제의식/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비판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노래의 주제가 가사라면 소설의 주제는 곧 서사인데요. 뭐, 이 때문에 저는 이 댓글란에서 주제와 주제에 대한 추상인 주제의식을 의식적으로 구분한 거구요......라고 말하면 좋겠는데 쓰다보니 중간중간 빼먹은 부분도 없잖아 있긴 하네요.)

뭐, 그렇다고 "모든 소설의 세계관이 <황제를 위하여>처럼 npc 쓸 거면 죄다 npc로 도배하라"는 게 아닙니다. 허나, 님께서 말씀하신 [당대 한국 사회가 원래 그러했다]는 게 <광장>을 위한 변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게 변론으로서 기능하려면 "당대의 그러한 한국 사회"가 <광장>내에서 효과적으로 형상화되었어야죠. <1984>처럼 해당 부분을 빽빽한 밀도로 상당한 비중을 할애하여 서술하던지, 아니면 우회일저언정 <황제를 위하여>처럼 고유한 형식을 통해 승화시키던지 말일입니다. 이런 게 문학적인 방식이죠. 당대 사회상이란 핑계로 변명이 가능하다면 뭣하러 조지 오웰이 <1984>를 그리 길게 썼겠습니까. 광기 어린 사회주의란 좋은 핑계도 있겠다, 그냥 단편으로 끝내버리죠. 이야기도 겁나 간단한데요. 허나 조지 오웰은 그러지 않았죠. 그것만으로 소설에 설득력을 부여하긴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설득력을 부여하려면 책 한 권 채울 분량의 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러니 <1984>가 위대한 소설인 겁니다. 헌데 대체 <광장> 어디에 조지 오웰이 <1984> 정도의 밀도가 느껴지는지 전 모르겠네요.

그러고보면 [<1984>에서도 주제의식을 인물의 입을 빌어, 사변을 빌어 형상화하지 않느냐]고 반론하셨죠? 제가 앞서 카뮈의 <이방인> 이야기할 때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나 <미나>를 통해서도 반복한 부분 같은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제 얘기가 그리 명징하진 못했나보네요. 다시 한 번 설명드리겠습니다. <1984>와 광장의 다른 점은, <1984>의 경우 철저하게 주제의식 하나에만 골몰한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의 한치 앞 세계로 서사의 스케일을 줄이고, 그만큼 쪼그라든 서사 속에서 주제의식에 철저히 골몰하는 플롯을 완성해하지요. 그리고 단일한 세계의 단일한 사건에 단일한 주제의식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촘촘히, 아주 밀도 있게 그려나가죠. 소설의 포커스는 철저히 외부 상황에 대한 주인공의 인식에 맞춰지는데, 이 외부 상황이 한정되어 있으니 발화 시점을 자주 바꿀 이유가 없고 자연히 플롯 속 이물감이 적어지죠. 이러한 과정을 거쳤으니 후반부 주제의식으로 폭발을 해도 그 과정은 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광장>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남한에도 있고, 북한에도 갔다가, 한국전쟁도 합니다. 헌데 이 모두를 훑고 가면서 정작 소설의 초점은 <1984>처럼 주인공의 인식에 맞춰져있죠. 남한/북한은 서로 굉장히 이질적인 공간이며, 이명준 자신도 동굴/광장이라는 도식을 통해 그 이질성을 긍정합니다만, 이명준의 문제의식이 독자의 문제의식으로 전이되기엔 그 각각의 사회적 모순을 밀도 있게 형상화하고 있지 못합니다. 각각의 사회에서 느끼는 문제의식은 아예 이명준 본인이 직접 나서 이름 붙이기 급급하구요. 그럴 수밖에요. 앞서 말했듯 남북한에 한국전쟁까지 거쳐야하니 소설이 오죽 빠듯합니까. 당연히 독자가 느끼기에 소설 속 문제의식의 밀도에서 <1984>와 <광장>은 큰 격차가 있습니다. 오직 분단의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만 별 차이로 느껴지기 않겠죠. 위에서 말한 npc 문제도 이 때문에 성립하는 겁니다. 똑같이 npc처럼 보인다고 해도 <광장>의 npc들과 <1984>의 npc들은 질적으로 달라요. <광장>은 npc들이 npc인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거나, 말할지언정 기껏해야 이명준의 사념 속에서 거의 명제화된 "광장or동굴의 한계"만을 찍고 넘어갑니다. 반면 <1984>는 이 부분에 굉장한 비중을 할애하죠. 그들이 그렇게 굴러가도록 만들어버리는 체제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주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묘사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밀도가 달라요.

이래서 주제/서사의 스케일을 줄였어야한다고 말한 겁니다. <1984>처럼 단일한, 그리하여 결정적인 사건(혹은 세계)와 이 결정적 사건 하나에 딸릴 부차적 요소에만 매진했다면 그만치 좋은 소설은 못 되어도 어쨌든 <광장>보단 나은 무언가가 나왔겠죠. <1984> 수준의 밀도가 <광장> 정도의 스케일을 가진 서사에서 성립하려면 거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하나 써야하겠네요. 아, 모든 소설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되어야한다는 건 아닙니다. 근데 최인훈의 <광장>의 주제의식은 그 정도 밀도가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에요. 사실 소설의 주제/서사 자체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굉장히 단순해요. 결정적인 사건은 하나죠. 이 단일한 사건의 전후로 카라마조프가란 기형적인 가족들이 존재하고 이걸 도스토옙 특유의 다성성으로 형상화하다보니 분량이 늘어난 거지 말입니다. 그래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서사의 전개만을 생각했을 때 필요치 않았던 이러저러한 부분을 자신의 야망으로 지시하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내에서 엄청난 수준으로 봉합해냈으니 그저 잘 쓴 소설을 넘어 위대한 소설이 된 거구요. 근데, 최인훈이 <광장>에서 드러낸 야망은 어떻습니까? 한국전쟁과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분단 상황이란 국가적 비극에 대한 이데올로기 차원의 재구성이었습니다. 황석영처럼 이걸 신천리 하나로 집약한 것도 아니에요. 거의 남북을 종단합니다. 이문열처럼 형식적으로 우회와 승화의 여지를 잔뜩 만들어두지도 않았어요. 기냥 정면 돌파합니다. 그러면 플롯의 밀도를 무식하게 높여야지 방법 있습니까? 뭐, 실제로 그렇게 집필되어다면 참 굉장했겠죠. 근데 못했잖아요? 그럼 아무 것도 아닌 거죠.

헤겔이 말하죠. 잿빛에 잿빛을 겹쳐그려봐야 늙어버린 활력이 살아나진 않는다구요. 찬란한 주제의식을 제 아무리 강조해봐야 그게 부족한 플롯의 밀도를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그 자체로 찬란하고 위대한 주제의식은 소설에 있어서 이점이 아니에요. 도리어 언제나 발목을 잡아채는 약점이죠. 효과적인 형상화를 위해 그만큼 플롯이 감당해야할 부분이 무거워지니까요. 그게 이점이 되는 순간은 어디까지나 성공을 했을 때밖에 없습니다. 도스토옙이 다성성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거 같애요? 아니요. 그걸 제대로 했으니까 위대해진 거죠. 제대로 못하면 다성성이고 뭐고 어딨습니까, 그냥 중구난방 막장드라마죠. 지금 우리 눈 앞에 <광장>이 어떤가요? 음... 한 번 이문열이 <황제를 위하여>를 해학과 풍자가 아니라 정감록을 진지하게 믿고 황제에 강력하게 이입하여 소설을 썼다고 생각해봅시다. 그것도 제 나름 근대적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황제가 정신승리하는 과정을 진정한 인식의 분투 과정으로 나름 치열하게 묘사하면서 말이죠. 물론 이 와중에도 김광국이나 이현웅이 npc인 건 변함없구요.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소설이겠습니까. 전 <광장>의 문학적 형상화가 이것과 뭐가 얼마나 다른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 위대한 주제의식을 제외하면요. 적어도 60년대 지식인들이 굉장히 강렬하게 문제의식을 공유했다고 하는데, 진지 빨고 쓰여질 황제 역시 환빠들이나 정감록 신봉자들의 강렬한 공감쯤은 살 수 있겠죠.

혹, 제가 비꼬는 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꽤 진지합니다. 도스토옙도 주제의식/메시지만 놓고 보면 별 거 없어요.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욕망 덩어리고 신 없이 도덕의 근거를 마련할 수 없으니 서구주의/합리주의/사회주의는 쓰레기. 슬라브/러시아/정교회 짱짱맨"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제를 추상하면 아마 이쯤 될 겁니다.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그나마 19세기라는 게 쉴드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진지 빨고 쓰여질 황제 수준입니다. 지금의 독자들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찾아 읽는 건 21세기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놀랄 만큼 꼴통적인 마인드 뚝뚝 떨어지는 주제의식이 감탄스럽기 때문일까요?

"현재 서구 세계는 꼴같잖은 페미니즘/발작적인 포스트모던/정신나간 히피/문란한 성문화 등등으로 작살난지 오래다. 그냥 신인류 만들고 인간은 멸종되는 게 바람직할듯"

프랑스 작가 미셸 우옐벡이 98년도에 발표한 <소립자>란 소설의 주제를 추상한 겁니다. 이문열의 패배주의는 이 소설에 비하면 장밋빛 낙관주의죠. 그리고 우옐벡은 이 작품으로 일약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받는 스타가 됩니다. 당장 현대 작가인 미셸 우옐벡에 대해서도 문학은 주제의식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이 주제의식을 얼마나 밀도있게 풀어냈느냐를 먼저 본 거죠. 그리고 이건 19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눈으로 보기에 메시지가 얼마나 개떡같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메시지를 향한 향한 높은 수준의 문학적 형상화만이, 그 과정에 배인 열렬한 밀도만이 시대와 공간적 한계를 (비교적)자유로이 가로지르며 문학을 향유하는 이들에게 다가서는 겁니다.
14/10/14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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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님//

제 댓글을 잘못 읽으셨네요. 전 서사적 측면에서 이명준의 여행이 불필요했단 말을 한 적 없습니다. 되려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의 관념적 재구성이라는 최인훈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선 그에 준하는 서사적 스케일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말했지요. 이명준의 여행은 황제의 여행처럼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을 겁니다. 다만 그 여행을 형상화하는 과정이 너무도 질박했다는 게 문제란 거죠. 서사의 스케일이 커지면 주제는 더 이상 주인공의 독백이나 사변만으로 질박하게 내뱉어져선 곤란합니다. 이것이 플롯 차원에서도 발 맞춰 다루어져야죠. 아니면 형식적인 차원에서라도요. 왜냐면 서사의 스케일이 커지는 순간 주동인물의 사변은 단일한 외적 상황에 대한 주동인물의 내적 사변만으로 남는 게 아니라 다변하는 외적 상황에 발 맞춰 변해가는 주인공의 문제의식으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서사가 비대해지면 플롯이 감당해야할 게 많다고 제가 누차 말씀드린 거구요(물론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을 수 있긴 합니다. 근데 그게 좋은 소설이라고 불릴 순 없겠죠.). 플롯 차원에서 이 형상화를 제대로 못할 거 같으면? 결국 문제의식 제기, 심화, 해소 모두 주인공의 사변 속에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을 거 같다면? 주제를 한국전쟁의 재구성이 아니라 분단 상황의 이념적 재구성 정도로 후퇴하고, 서사의 스케일도 그에 맞게 줄였어야죠. 1984는 이러한 맥락에서 꺼낸 이야기구요. 이를 제대로 못한 가장 대표적인 소설이 광장과 당신들의 천국이란 겁니다.
할머니
14/10/1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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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저 님// 무슨말을 하시는지 잘알았습니다. 비꼬는게 아니라 진심입니다. 좀 더 생각해보고 그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우면 새로 글을 쓰겟습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14/10/13 01:29
수정 아이콘
얀 마텔의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그 주제의식의 상당 부분은 휘발되고 소설 형식으로서 어필할 수 있는 완성도도 감퇴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이입할 수밖에 없게끔 영화는 만들어졌죠. 조난 당한 소년이 호랑이와 한 배에 오른다는 상황설정이 워낙 흥미로우니까요. 그리고 이 호랑이가 실은 소년이 자신이 살아남는 과정에서 저지른 죄를 씻기 위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여지를 남기니까요. 이것이 바로 플롯의 힘입니다. 정작 극단적인 상황 속 주인공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번뇌하고 고민하던 부분은 영화의 물리적인 시간 문제로 거의 통편집 되었습니다. 리처드 파커가 마냥 주인공이 창작해낸 허구의 존재인지에 대한 것도 영화에서와 달리 모호하게 처리되었죠. 이를 마냥 허구라고 할 경우 주인공이 경험한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모두 거짓이 되며 독자로 하여금 치열하게 주제의식으로 몰아가는 과정이 생략되는데 말입니다. 뿐입니까, 매끄러운 성장담을 보여주려 아난디라는 없던 여성을 끼워넣고 정작 주제의식과 매우 밀접한, 바다 위에서 만난 다른 조난자를 리처드 파커가 물어죽이는 에피소드는 삭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재밌습니다. 지나치게 재밌습니다. 감동을 호소하는 관객들이 즐비하고 주인공이 작가에게 전해주었던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확실한 답을 받았다고 생각하죠. 이것이 바로 플롯의 힘입니다. 주제가 휘발되어도, 주제까지 치열하게 몰아가는 소설 특유의 형식과 전개 과정이 생략되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왜곡되고 찢겨져서 날리는 주제일지언정 관객이 알아서 끌려들어가게 플롯이 만들어주니까요. 그것이 플롯의 힘이고, 달리 말하면 이야기의 힘입니다.
라라 안티포바
14/10/11 00:49
수정 아이콘
저 중에 톨스토이는 정말 놀랍고, 푸르스트나 조이스 작품은 제가 정말 재미없게 읽어서 명성에 비하면 못 받은 것이 놀랍긴 하나 그럴수도 있지 뭐 싶네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롤리타말곤 읽은게 없어서 판단불가...
14/10/1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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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정말 유명하길래 읽어보려했는데 잠와서 다 못읽겠더라구요..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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