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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0/15 00:11:57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일반] 남한산성- 겨울 성의 허파, 벼러진 추상의 칼날
  일전의 인터뷰에서 김훈이 말했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지 않아요. 펜 든 작자들이 하는 그런 소리 죄다 개소립니다. 칼 든 사람은 자신이 더 세다고 말 안 해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글쟁이다. 그리고 칼보다 날카로운 글을 쓴다.

  더 이상 쪼개기도, 날 세우기도 불가능해 보이는 간결하고 견고한 문장은 김훈의 트레이드마크다. 담백하다기보다는 차갑고 단단하다는 표현이 차라리 어울릴 것이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단문들 사이로 너무나 적나라한 삶의 몸뚱이를 내보이는 글은 쉽게 호오가 갈린다. 조세희보다도 건조한 그 글을 나는 거의 사랑한다. 그리고 남한산성은 김훈이 일궈낸 최대의 문학적 성과라 단언한다. 침략군에 토끼몰이 당하듯 들어간 작은 산성의 생활은 단단한 문장과 어우러져, 비교할 상대조차 마땅치 않은 처참함을 보여준다.

  소설의 분위기란 결국 작가가 무엇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어느 부분을 상상하게 하느냐에 따라 갈린다. 그런 면에서 김훈의 묘사는 교묘하다. 김훈과 다른 작가들과의 차이를 크게 두는 요인을 들자면, 우선 위 전제의 역전일 것이다. 모두가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사소한 부분을, 김훈은 시시콜콜히 써내려간다. 임금의 수라에 올라가는 젓갈과 반찬들이 어디서 난 것인지부터, 보초를 서는 병졸들이 어떻게 추위를 견디는지 샅샅히 쓴다. 이러한 문체적 특징은 다른 작품에서도 폭넓게 관찰된다. 부정을 저지른 마을 이방이 이순신의 곤장을 맞고 살점이 녹아내리는 '칼의 노래'속 장면에서도, 순장을 피해 도망치다가 문득 쭈그려 앉아 소피를 보는 여인의 모습(현의 노래)에서도 김훈은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그 과정을 통해 인문들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도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된다.

  반대로, 일반적으로 깊숙이 묘사된 법한 부분은 짧은 문장 한둘로 압축되어 독자의 머리를 때린다. 무모한 싸움인 줄 알면서도 전초전을 준비하고 명령해 결국 패배한 영의정의 고단함을 김훈은 이렇게 쓴다. '영의정 김류는 밤새 폭음했다.'

  극히 미시적인 삶의 조각에 눈을 들이밀고, 필요 없는 설명을 솎아내는 서술 방식은 읽는 이를 잡았다 풀어 능숙히 다룬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감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과감한 생략 같은 엇박자의 즐거움이다. 이러한 과정과 기법에서 김훈 특유의 미니멀리즘이 지면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산성의 성은 그런 효과가 극대화되는 공간이다. 우리 모두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성 안에 영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표류할 뿐이다. 화평을 촉구하는 이들은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 ㅡ 명에 대한 충의를 안다. 전쟁을 말하는 사람들도 성 안의 기아와 현실의 엄정함을 이해한다. 양측은 서로의 입장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이미 알고 있다. 애꿎은 병졸을 사지로 내모는 영의정도, 그 실패를 비난하는 내신들도 모두 처절하지만 공허한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 안에서도 왕은 외딴 섬이다.

왕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자. 사실 수많은 역사극에 왕이 등장하지만 그네들은 늘 권력에 휘둘리거나 휘두르거나 추구하거나 포기하는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모두가 '인간적인' 면을 강조해 새 것인 양 하지만 애초에 헌 것이 없었다. '왕'이라는 직책 혹은 지위를 더 깊이 파고든 건 오히려 이영도였다. 초기작인 '드래곤라자'의 등장인물 길시언이 보여준 왕은 '모두에게 등을 보이는 자', 즉 가장 앞에 서 모든 외부의 억압을 짊어지는 이였다. 비교적 최근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의 왕은 인간이 앞다퉈 내보내는 가장 해로운 것ㅡ눈물ㅡ을 마셔 가장 아름다운 울음을 울며 가장 단명하는 새다. '남한산성' 속 왕은 거의 인물이 아닌 인외적 존재에 가깝다. 화평을 배격하는 신하의 격한 상소에 왕은 말한다. '네 글이 가팔르나 그 뜻이 어여쁘다.' 왕이라는 자리에서 그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닌 하나의 국가이자 세계다. 나이 지긋한 내신에게도 서슴없이 어여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모든 백성은 자신의 세포에 불과하다. 이러한 왕ㅡ모두가 전형적이고 평면적이다 말하는 왕을 이전에 본 적이 있는가. 김훈의 문장 속에서 왕은 그 나름의 존재를 강고히 쌓아올렸다. 김훈의 왕은 고민하는 흔적 없이 고뇌하다가, 결정하고 떠안는 고독한 왕이다.

  글을 되돌린다. 앞서 말한 김훈과 타 작가 사이의 차이 중 하나는 추상적 언어를 다루는 방식이다. 물론 표현하기에 따라 말은 다르겠지만 시든 소설이든 무릇 문학은 구체성에서 추상성을 끌어내는 작업이다. 많은 작품의 의도가, 혹은 의미가 한 두 줄의 문장으로 옮겨진다. 그럼에도 작가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은 그런 주제 의식을 얼마나 흥미롭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고아소년의 인생역정' 따위로 요약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구체성이 가미된 세상과 인물이 현실을 묘사하는 문장과 어우러져 추상적인 것을 이끌어내는 게 문학의 기본이다. 김훈에겐 아니다.

  '2001년 가을 나는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로 시작해 '나는 내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 것이다'로 끝나는 '칼의 노래' 서문 첫문단에서도, '정의로운 언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아니다'라 말하는 에세이에서도 김훈은 추상을 벼려 곧장 찌르고 들어온다. 보통 금기시되어야 마땅할 일이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았다'고 병치해버리는 문장이 사실 가당키나한가. 그러나 김훈은 추상어로 점철된 문장을 줄줄 이어가면서도 결코 글의 탄력을 잃지 않는다. 나는 도저히 그 차이를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없다.

  실상 이 부분에 있어 김훈에 관한 세간의 평은 극과 극이다. 나처럼 한국어로 도달할 수 있는 간결미의 극한이라 평하고 찬탄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가득해 거북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 간극이 실은 방금 말한 부분ㅡ추상어 사용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잠시 서사에서 벗어나 단문과 추상 사이로 이어지는 사고의 흐름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가 혹은 서사에 기생하는 군살로 보는가 하는 차이. 후자의 시선으로 볼 때 김훈의 문장은 겉멋에 취한 글이나, 또는 문장의 외양에만 신경쓴 졸문으로 읽힐 수 있으리라. 다만 그렇게 보지 않는 이들의 눈에 그러한 김훈의 글은 매 문장마다 마치 팽팽하게 시위가 당겨진 각궁 같아서 긴장의 끈을 결코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게 잘 쓰여진 단문의 강고한 힘이다.

  실제 판매량이나 인지도 면에서 김훈의 글 중 단연 앞서는 건 '칼의 노래'다. 소재가 훨씬 대중적인 탓도 있고, 대통령 마케팅에 힘 입은 바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ㅔ 남한산성이 칼의 노래보다 몇 배는 더 수작이다. 이순신은 결국 이미 상징화된 영웅의 표본이다. 김훈이 아무리 그 뒤를 좇으며 '어깨가 좁고 둥근 여인'을 안는 남자를 그린다 해도, 우리 안에 깃든 성웅의 이미지는 견고하다. 때문에 '칼의 노래'는 이순신이라는 전쟁 영웅의 인간화로서 작동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에서 전신이 되어가는 모습을 전할 수 없다. 이런 하향식 전개는 모든 것을 최대한 단순한 명제들로 분해한 뒤 처음부터 쌓아올라가는 걸 즐기는 환원주의자에게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반대로 남한산성의 배경이 되는 호란은 치욕의 역사이며, 개인이 아닌 으스러져 가는 나라를 그리는 공간이다. 설령 역사책서 접한 적 없다 해도 조선의 패배는 책 첫머리부터 너무나 명확하다. 그 안에 갇혀 하루를 그저 버티며 매일 같이 더욱 비참해져 가는 이들에겐 어떠하겠는가. 임경업은 어쩌면 삼전도에서 당한 굴욕을 속으로나마 떨쳐내기 위한 신화일지 모른다. 이미 끝이 정해진 위에서 벌이는 탁상공론은 그래서 더욱 처연하다. 무너지는 나라의 이야기는 종국엔 스러진 사람들의 노래일 수 밖에 없는데, 왕은 인간을 벗어난 탓에 청나라 장수가 내려다 보는 앞에서 명을 향한 신년의 예를 올리고 몸소 춤춘다.

  수라를 올리는 상궁이 당장 저녁에 올릴 밴댕이 숫자를 고심하고 있을지라도, 왕은 초연하고 신하들은 끝없이 갑론을박하는 것이다. 왕은 추상의 언어 속에서 고고할 수 있다. 뒷간에서 매화가 아닌 똥을 싸는 내신들은 시시콜콜하게 인간이다. 때문에 결국 찾아들고야 마는 항복의 순간보다도, 명에 바치는 왕의 춤이 훨씬 더 서글플 수 밖에 없다.

  그 해 겨울, 그 고립된 성에서 그네들이 그토록 항전하여 흘린 건, 우리의 자존심이나 백성이 아닌 '대국'을 향한 무의미한 충정과 의리에서 우러난 육즙인 탓에.







3년 전 군에서 쓴 글인데 문득 생각나서 타이핑해봤습니다. 극단적인 표현들이 종종 있는데, 이미 박제된 글이라는 느낌이 있어서 되도록이면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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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공파일
14/10/15 12:33
수정 아이콘
기자 생활을 오래 하고 커리어도 쌓았지만 늦은 나이에 등단한 점이나 문학과 현실 사이에서 언제나 현실을 선택하는 세속성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그런 개인적인 점들은 김훈의 드라이한 문체를 빛나게 하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요. 본문에 이야기된 점들 때문에 김훈을 좋아하는 1인으로 재밌게 읽었습니다.
14/10/15 17:06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남한산성을 다시 읽고 싶게 하는 글이네요
노동주
14/10/15 23:41
수정 아이콘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흑산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칼의 노래보다, 남한산성의 무게와 그리고 흑산에 나오는 인물들의 핍진한 삶들이 저한테는 더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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