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9/12 04:34:59
Name 이치죠 호타루
Subject [데이터 주의, 완결, 스압] 바르바로사 작전 (12) - 중부 집단군 (4)
아무래도 연재와 개인적인 일 두 가지를 동시에 다루는 건 좀 무리 같아서... 먼저 이야기의 진척이 꽤 된 이쪽부터 마무리하는 게 좋겠군요. 허투루 마무리짓겠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애초에 그럴 거면 시작도 안 했구요.

그리고... 강철의 왈츠 시작했습니다. -_-;



이전 글 보기
https://www.pgr21.com/?b=8&n=66761 1941년까지의 소련 - 독소전쟁 초기 이들이 대패한 이유
https://www.pgr21.com/?b=8&n=66854 바르바로사 작전 (1) - 작전 수립 과정
https://www.pgr21.com/?b=8&n=66906 바르바로사 작전 (2) - 북부 집단군 (1)
https://www.pgr21.com/?b=8&n=66951 바르바로사 작전 (3) - 북부 집단군 (2)
https://www.pgr21.com/?b=8&n=67059 바르바로사 작전 (4) - 남부 집단군 (1)
https://www.pgr21.com/?b=8&n=67123 바르바로사 작전 (5) - 남부 집단군 (2) [데이터 주의]
https://www.pgr21.com/?b=8&n=67191 바르바로사 작전 (6) - 남부 집단군 (3)
https://www.pgr21.com/?b=8&n=67214 바르바로사 작전 (7) - 남부 집단군 (4) [데이터 약주의]
https://www.pgr21.com/?b=8&n=67285 바르바로사 작전 (8) - 남부 집단군 (5) [데이터 주의]
https://www.pgr21.com/?b=8&n=67334 바르바로사 작전 (9) - 중부 집단군 (1) [데이터 약주의]
https://www.pgr21.com/?b=8&n=67408 바르바로사 작전 (10) - 중부 집단군 (2) [데이터 약주의]
https://www.pgr21.com/?b=8&n=67508 바르바로사 작전 (11) - 중부 집단군 (3) [데이터 약주의]



"레닌그라드 포위의 진행상황과 연계하여 보았을 때, 지금까지 진행된 남부 집단군 및 중부 집단군 사이에 있는 배후의 적을 성공적으로 일소한 결과로 중부 전선군의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군을 향한 결정적인 작전의 수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일소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육군과 공군이 한 곳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각 집단군에 하달한다. (후략)"
- 아돌프 히틀러, 총통 지령 35호, 9월 6일



Previously on Barbarossa...

간단하게 말하면, 1승 1패였습니다. 독일군은 키예프 포위전을 위해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을 내려보냈고, 물론 이는 거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전력을 돌파해 가면서 수직갱을 뚫듯이 내려가는 상당히 까다로운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은, 비록 사령관이 격렬하게 반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하달된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키예프의 대포위전에 단단히 일조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측면을 치기 위해 브랸스크 전선군을 조직하여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병력은 패잔병이거나 장비가 부족해서 거의 서류상의 병력일 뿐이었고 그나마도 일점 돌파가 아닌 2점 돌파라는 치명적인 실책을 스타브카(Stavka)가 범하면서 반격은 시작하자마자 실패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예비 병력으로 있던 제4군이 후방에서 끌려나와야 했고, 제2기갑집단군처럼 강력한 방어를 갖출 여유는 없었던 이들은 전선의 돌출부이자 모스크바로 나아가는 교두보인 옐냐(Yelnya)를 결국 지키지 못하고 군대를 뒤로 물려야 했습니다. 이 승리에 스탈린은 크게기뻐했고, 근위사단이라는 명칭을 옐냐 반격작전에 투입된 사단들에게 수여합니다. 이것이 대전 기간 여럿 만들어진 근위사단의 유래가 됩니다(지금도 러시아에는 근위사단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사단들이 여럿 있습니다).



들어가기 전, 지금까지의 전반적인 상황 정리

지금까지 제가 글을 쓰면서 한 가지를 까먹었더군요. 대국적인 상황을 정리하는 걸 잊어버린 겁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거의 없었다는 쪽이 좀더 정확하겠습니다마는...

이 시점이 되어서 전장 지도를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엄청나게 전장이 난잡하다는 것이죠. 분명히 각종 전장 지도는 날짜별로 잘 나와 있기는 한데, 이걸 뭐 어떻게 정리하라는 건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여기저기서 전선이 밀고 밀리고를 반복하다 보니 시작부터 끝까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어디서 풀어나가야 할지 상당히 골치가 아팠죠. 그래서 정리를 한 차례 하고 지나가는 겁니다.

이럴 때는 날짜를 딱 하나 잡고, 전체 전황을 살펴보는 쪽이 정리하기 빠릅니다. 일단 9월 19일, 그러니까 키예프가 독일군의 손에 떨어진 시점을 기점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사실 이렇게 되면 몇 가지 건너뛰게 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도 간단하게 곁들여가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제2기갑집단군은 키예프 포위전에 참가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한창 키예프에서 탈출하려는 전력을 소탕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남부 집단군의 주력부대 역시 말할 것도 없이 키예프 포위전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오데사에서는 한창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만, 키예프 포위 이전에 제1기갑집단군이 드네프르 드라이브를 고속으로 걸어버린 덕분에 드네프르 강 서안은 죄다 남부 집단군이 접수하고 있었습니다.

스몰렌스크는 독일이 접수하고 있었고, 이들의 방어는 제2기갑집단군이 아닌 제4군이 대신했다는 것 역시 앞에서 밝혔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방어였지 공격이 아니었고, 공격할 상황도 못 되었던지라 일단 스몰렌스크 - 키예프 일대에서 전선이 크게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라고 전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고... 스몰렌스크가 독일군 손에 떨어진 게 8월 7일인데 스몰렌스크 방면에서 반격작전이 없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죠. 그게 언급이 안 되는 이유는 손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반격작전이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것이죠. 이렇게 말입니다...



8월 11일이 되자, 스몰렌스크 외곽으로 쫓겨난 소련군은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서부 집단군 - 위의 그 총통 지령 35호에서 언급된 - 이 단체로 스몰렌스크를 공격, 포위 섬멸하기 위해 일련의 가열찬 공세를 가합니다. 날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금 된 이야기죠? 저번 글에서는 넣을 단락이 너무 애매해서 빼 버렸는데, 이번 글에서는 다음 이야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 넣을 수 없겠더군요. 그거는 그렇고, 스몰렌스크 위쪽의 화살표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제9군의 공세가 그 때 개시된 겁니다. 마치 회전문을 돌리듯이 말이죠.



그리고 한 달이 조금 못 된 9월 9일... 스몰렌스크 동남쪽의 전선이 약간 밀려나긴 했습니다. 거기가 옐냐니까요. 헌데 스몰렌스크와 그 북쪽의 전선의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제9군에 의해서 개시된 진격으로 인해 소련군의 우익이 엄청나게 뒤쪽으로 확 밀려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련의 아주 오래 된 도시 중 하나인 벨리키예 루키(Velikiye Luki, Великие Луки)가 바로 이 때 - 8월 25일 - 독일군 손에 떨어집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아예 거의 100 km 가량을 더 밀려나야 했죠. 이 시점에서의 전선은 이 정도로 형성됩니다.

한편, 북부 집단군은 이 시기에 거의 레닌그라드에 다다랐었고, 9월 8일이 되자 레닌그라드가 포위되었습니다. 8월 30일에 이미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마지막 철로가 독일군에게 끊겨버린 상황이었죠. 헌데... 옐냐를 생각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무리 라도가 호수가 지형상의 이점을 공격자에게 가져다주고 있다고 해도 돌출부가 있는 것 자체가 독일군에게 찜찜한 건 확실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면서 그 남쪽으로 소련군을 좀 밀어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북부 집단군이 레닌그라드 남쪽의 전선을 밀어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헌데 레닌그라드가 뭐 어디 보통 대도시입니까? 게다가 북부 집단군 자체가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다시피 가장 '약체'였고, 바로 이 때문에 제3기갑집단군의 일부가 북부 집단군에 차출됩니다. 흔히들 중부 집단군의 차출 하면 제2기갑집단군만 생각하게 마련인데, 북부 집단군의 케이스에서도 보듯이 다른 사례도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제가 지금까지 아주 귀에, 아니 눈인가요? 여하간 못이 박히도록 설명해 드린 바 있으니 자세한 설명은 패스하겠습니다. 답만 말씀드리면 바르바로사 작전상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하간, 그게 이 지도입니다. 데미안스크(혹은 데미얀스크나 데먄스크, Demyansk, Демянск)를 점령하기 위해 제3기갑집단군의 일부가 북부 집단군으로 차출된 겁니다. 이 때가 9월 6일입니다. 현재도 인구 5천 명 - 5만 명이 아닙니다 - 에 불과한 작은 도시인 데먄스크 점령은 꽤나 성공적이었습니다마는...



9월 16일. 보시다시피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반격이 개시됩니다. 남은 게 별로 없던 북서 전선군에 의해서 말이죠. 영웅적이기는 했습니다만 이들의 전력은 계속해서 떨어진 상태였고, 그러다 보니 반격이 성공으로 돌아가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이건 열흘 후의 지도를 보면 좀더 명확해집니다.



열흘 후의 지도입니다. 위의 지도와 비교해볼 때 전선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양군 다 공세로 나서기는 좀 어려운 측면이 있었죠. 서두에서 총통 지령 떨어진 거 이야기했습니다만, 주공은 러시아의 서부 전선군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전선이 여기에서 고착화됩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없는 반격 작전과는 달리 이 곳의 반격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습니다. 독일군의 발목을 여기서 잡아버리는 데 성공한 것이죠.

지도를 퍼 오려고 했는데 뒤에서 이야기할 중요 지점의 상당수가 조그만 마을들이라, 지도 앱 등으로 직접 검색해 가면서 보시는 편을 추천하고 싶네요. 지도 없이는 한눈에 들어오기는 어려운 이야기이니 말입니다. 일단 되는 대로 대충 이 일대의 지도를 퍼오자면 이렇습니다.



Openstreetmap에서 퍼왔습니다. 검은색 선은 철도를 의미합니다. 지도 최남단의 빨간색 포인트가 데미얀스크입니다. 그 동쪽의 갈색 큰 네모가 볼로고예(Bologoye, Бологое)입니다. 그 서북쪽으로 있는 파란 네모가 오쿨로프카(Okulovka, Оку́ловка)입니다. 그 북쪽의 녹색 네모가 네볼치(Nebolchi, Неболчи)입니다. 네볼치 서쪽의 보라색 네모는 부도고쉬(Budogoshch, Будогощь)입니다. 그 동북쪽의 짙은 파란색 네모는 티흐빈(Tikhvin, Ти́хвин)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서쪽의 주황색은 볼호프(Volkhov, Волхов)입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이게 왜 중요하냐면, 만약 여기에서 더 밀려버리게 될 경우 가뜩이나 북쪽의 노브고로드(Novgorod, Новгород,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 방면에 있는 대도시인 니즈니노브고로드(Nizhny Novgorod)와 구별하기 위해 벨리키 노브고로드(Veliky Novgorod, Великий Новгород)라 하기도 합니다)가 점령당한 상태인 소련군은 볼로고예까지 쭉쭉 밀렸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죠. 설령 볼로고예가 손에 떨어지지 않더라도 독일군 입장에서는 그 근방에 전선을 유지하면서 북쪽의 전선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볼로고예가 하필이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잇는 중요 철도지점이었던 것이죠.

좀더 설명드리자면, 사실 이미 8월 말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잇는 직통철도의 상당 부분은 독일군 손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볼로고예에서 서북쪽으로 70 km 떨어진 오쿨로프카에서 북쪽의 네볼치로 빠지는 우회철로가 아직 점령되지 않은 채로 있었고, 이 우회철로가 소련군의 최전방에서 물자와 병력 수송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여기서 네볼치에서 북쪽으로 부도고쉬를 거쳐 티흐빈까지 이어지는 철도가 또 있는데, 이 역시 최전방의 철도였습니다. 독일군에 의해 1941년에 일시적으로 부도고쉬가 점령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만 한 달간의 전투 끝에 부도고쉬를 탈환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탈환하자마자 소련군이 깔기 시작한 것은 바로 레닌그라드로 물자를 어떻게든 수송할 생명의 길이었으니, 이들 마을이 날아갔다면 레닌그라드의 운명은 장담하기 힘든 것이었을 터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도미노 생각하시면 됩니다. 툭 치면 쪼르르륵 밀려나는 그거 말이죠. 저 데미얀스크의 전선이 뒤로 더 밀려나면 볼로고예의 안위가 위협받게 되며, 이 경우 볼로고예에서 서북쪽으로 가는 철로가 차단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거의 99%라 봐도 되겠네요. 그렇게 되면 오쿨로프카와 네볼치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며, 이 경우 병력과 물자를 최전방에 제대로 수송하기 어려워지는 소련군은 북쪽에서 연쇄적으로 더 뒤로 밀려날 가능성이 매우 커집니다. 그렇게 되면 라도가 호수에 바짝 붙어있는 볼호프와 티흐빈이 동시에 위험해지며, 그렇게 되면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생명선을 깔기 매우 힘들어지고, 그렇다면 그 결과는... 레닌그라드의 전멸이죠.

물론 가정의 영역입니다만, 전선이 여기서 고착화되지 않았을 경우 벌어질 최악의 사태를 상정해보았을 때 전선의 고착화는 분명히 나름대로의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습니다.

하여간 이 정도로 전 전선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짚어봤습니다.



다시 한 번, 브랸스크

약간의 준비 이후 - 약 보름 -  드디어 공세가 감행됩니다. 이게 그 유명한 태풍 작전(Operation Taifun, 혹은 Typhoon)이죠. 남쪽부터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브랸스크 일대에서 제2기갑집단군의 우익이 감행한 공세는, 기동전과 그 뒤로 이어지는 포위섬멸전의 모범이라 할 만합니다. 전선 돌파, 급격한 기동, 일부는 후방의 적을 저지하면서 전방의 적을 포위, 적의 섬멸로 이어지는 깔끔한 스텝이죠. 사실 어느 정도는 소련군이 박자를 맞춰 주기는 했습니다만.



작전 개시 단 하루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도시인 오룔(Orel, 혹은 Oryol, Орёл)이 - 지금도 인구 30만이 넘는 큰 도시입니다 -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단 하루 만에 독일군 손에 떨어집니다. 《독소전쟁사》에서는 독일군이 도시에 진입했음에도 아예 시내전차(電車)가 돌아다니고 있을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죠. 얼마나 독일군이 빨리 진격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3일이 지나자 오룔을 기반으로 하여 돌파한 일부 부대는 북쪽에서 몰려오는 적을 막으면서, 서쪽의 포위망을 닫을 준비를 합니다. 물론 소련군의 반격명령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앞선 글에서 제가 가열차게 소련군을 깠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반격 작전은 이럴 때 쓰라고 있어야 정상인데 이미 예비대고 뭐고 다 소진해버린 브랸스크 전선군이 무슨 수로 반격을 감행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하필이면 샤포시니코프가 후퇴불가 명령을 때려버리는 바람에 기동지연전을 펼칠 기회조차 막혔습니다. 결과야 뭐... 곧 보실 그대로입니다.



다음날이 되자 모루 역할을 담당하던 제2군과 제4군이 슬금슬금 독일군의 좌익에서 소련군의 우익으로 치고 올라가면서 포위망을 닫으려는 시도를 벌이게 됩니다.



3일 후. 남쪽의 포위망은 닫혔고, 북쪽은 간신히 명줄은 붙어 있으되 혈로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열흘 후. 북쪽에서 포위될 뻔한 제50군은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만 남쪽의 제3군과 제13군이 포위 섬멸당할 위기에 처하고, 이들은 문자 그대로의 혈로를 뚫어가면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시도합니다. 물론 독일군 사정상 포위망이 완벽했을 리는 없어서, 어쨌든 일부 병력이 살아나오기는 한 모양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시면 답이 나오죠.



10월 24일. 아래에 제13군이 살아 있는 걸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쨌든 일부 병력이 살아는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결과로 큰 도시인 오룔이 삽시간에 넘어간 것은 물론이요 오룔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최후의 관문인 툴라가 까딱까딱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에게도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 왜 제가 각 집단군 및 전선군의 전투서열을 비교하면서 이 이름들을 특기해 두십시오 한 사람들의 명단 중에 미하일 카투코프라고 있었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인물이 여기서 상당히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도를 자세히 보시면, 독일군의 전과확대 - 목표지점을 넘어 적의 후방에 이르기까지 밀어붙이는 것 - 가 10월 6일 이후로 크게 둔화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분명히 돌파하고 최전선의 적이 무력화되어 가는 와중에 기동부대 및 공군이 적의 후방을 강력하게 공습하여 결과적으로 전선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것이 독일군의 장기였는데, 그 구멍을 크게 뚫어버리는 과정이 지금 막힌 것이죠. 어째서 막혔냐 하면, 그걸 막은 게 카투코프라는 말입니다. 가로막힌 지점의 이름은 므첸스크(Mtsensk, Мценск). 위의 10월 6일자 지도를 보면 독일군의 진로방향을 가로막고 있는 웬 소련군 군대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이 카투코프입니다.

이 카투코프가 쓴 전술은 이렇습니다. 보병지휘관인 렐류셴코와 연계해서, 일단 보병이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가로막은 보병은 어디까지나 페이크. 독일군이야 저걸 놔두고 갈 수는 없으니 공군이든 포병이든 동원해서 예비 포격을 감행하는데, 그 틈에 보병은 줄행랑을 쳐서 뒤쪽으로 쭉 후퇴합니다. 그 동안에 길 양 옆의 숲에는 신형전차인 20여 대의 T-34가 매복을 했고, 대충 정리된 줄 알고 달려오는 독일군의 전차를 상대로 기습!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독일군 전차 14대를 박살내는 대전과를 올리면서 성공적으로 독일군의 발을 묶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독일군의 진군을 아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마는, 이 과정을 통해서 구데리안의 장갑부대는 꽤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당장 구데리안부터가 놀랐죠. 게다가 여기에서 시간이 질질 끌리는 통에 툴라까지 접근하기도 어려웠고, 여기에 독일군의 두 번째 문제가 더 크게 제2집단군을 덮쳐옵니다. 바로 라스푸티차였죠.

10월 6일에 첫 눈이 내리고, 이 눈이 녹으면서 길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면서 독일군의 진격은 크게 둔화되었습니다. 예상의 3배나 되는 연료를 써 가면서 진군하는 판이었으니 연료가 어디 남아났겠습니까? 그래서 카투코프의 시간 벌기가 매우 중요했던 겁니다. 만일 이 시간 벌기가 없었으면 오룔보다도 더 큰 도시인 툴라가 넘어갔을 테고, 그러면 거리는 좀 멀지만(180 km), 모스크바의 남쪽은 그냥 닫혀버리는 겁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 툴라가 엄청난 공업도시라는 것. 전쟁 기간 내내 군수장비를 생산하고 모스크바의 남측을 보호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니 이 도시가 안 날아간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는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아실 듯합니다.

그러니 카투코프가 영웅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죠. 당시 대령이었던 그는 전쟁을 거치면서 결국 별 다섯 개를 달게 됩니다.

그것은 그렇지만... 그래도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여전히 엄청났습니다. 키예프에 맞먹는 사상자가 바로 이 브랸스크에서 발생했기 때문이죠. 8만의 사망자와 무려 66만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이래저래 양군에게 재앙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브랸스크 이후에 독일군이 툴라로의 공세를 재개한 것입니다.



10월 24일, 그러니까 포위망이 대강 정리되고 난 후, 공격을 시도하기 직전의 제2기갑집단군입니다.



10월 30일. 어쨌든 모스크바의 남쪽 측방을 포위하는 데 있어서 툴라의 점령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계속해서 적을 밀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진격 속도가 진창길이라 많이 더디기는 했지만 어쨌든 툴라를 점령하지 않고 모스크바를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독일군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측면 돌파를 노리고 있었죠. 그러나 이걸 모를 모스크바가 아니었고, 그래서 주코프가 계속해서 파쇄공격 허가를 요청합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파쇄공격은 적의 공격을 받아내기 위해 적의 공격 전에 공세적으로 나와서 적의 조직력이나 공격 계획 자체를 흔들어버리는, 일종의 방어적인 공세를 말합니다.



그래서 11월 10일이 되자 진격하는 적을 맞아서 파쇄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예로 파쇄공격을 맞이한 사단 중의 하나가 제112보병사단인데, 이 사단은 중부 집단군 예비병력이었고, 그런 탓에 장비가 좀 부실했습니다. 하필이면 대전차화기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사단이 제대로 피를 봤고, 제17기갑사단이 투입되었으나, 소련군의 반격으로 인해 우익이 진격해서 포위망을 닫는다는 시나리오 자체가 틀어져버렸습니다.



11월 27일의 지도입니다. 독일군의 우익이 거의 툴라를 포위하나 싶었습니다마는...



12월 5일의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번의 이 파쇄공격의 전과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우익이 그대로 밀고들어갔으면 적어도 툴라는 꼼짝없이 포위당했을 텐데, 우익이 밀려버리는 통에 툴라가 비록 돌출부 형식으로 노출되기는 했지만 완벽한 포위 섬멸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군 자체가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전투력이 고갈되어 지나치게 넓은 지점에 산개하게 되면서 별 이상 없이 후방으로 기병사단을 - 공수사단이 아니라 기병사단입니다, 기병사단... - 투입하는 데 성공했고, 바로 이 때문에 독일군이 쭉쭉 뒤로 밀려난 겁니다.

여기에 독일군 자체가 병력과 물자의 부족으로 공세종말점에 도달해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카투코프의 힘이 컸고, 그가 독일군의 전과확대 단계를 박살냈으며, 결국 그게 툴라를 지키는 나비효과를 불러온 겁니다.



뱌지마

이번에는 가운데 지점입니다. 이 당시 이미 레닌그라드의 방침은 포위 섬멸전이 아닌 포위전으로 바뀌어 있었고, 때문에 더 이상 레닌그라드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제4기갑집단군이 북부 집단군에서 차출되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쪽의 제2집단군과는 달리 이쪽은 전과확대도 꽤나 성공적으로 거두었습니다.



이게 지금 지도를 확대하다 보니 몇 야전군의 이름이 잘렸는데, 위에서부터 아래로 순서대로 독일군 제9군, 제3기갑집단군, 제4군, 제4기갑집단군, 제2군의 순서입니다. 최북단의 제9군과 최남단의 제2군이 양익을 보호하고, 제4군이 모루 역할을 맡는 동안 양익에서 기갑집단군이 돌파, 섬멸... 이제는 꽤나 익숙해지셨겠죠.



10월 10일, 각 전선이 밀어붙여지는 전형적인 과정을 거쳐서...



10월 16일, 그 결과로 소련군 제19군과 제20군이 포위됩니다. 당시에 소련군의 반격을 지휘하던 게 그 파블로프가 목이 달아날 당시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영웅인 볼딘 중장이었는데, 여기서도 그는 깨집니다. 데이비드 글랜츠는 《독소전쟁사》에서 그 원인으로 지나치게 복잡한 지휘 체계와 부족한 통신장비, 그리고 그로 인한 통신 체계의 조기 붕괴를 꼽습니다. 여하간 그렇게 또다시 소련군은 4개의 야전군(19군, 20군 외에 24군과 32군이 같이 걸려들었습니다)을 날려먹는 대참패를 맛보게 됩니다. 뭐 이 이후야 전형적인 포위섬멸전이었고, 역시 포위망은 그리 완벽하지는 않았으며, 일부 병력이 탈출한 것까지 똑같습니다. 같은 전투의 양상이 워낙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지겨울 정도죠.



그러나... 저 지도가 12월 5일 지도인데, 거의 두 달이 되어 가도록 소련군을 얼마 밀어내지 못하고 전선이 거의 고착화되고 맙니다. 물론 원인은 라스푸티차. 여기에 양군의 병력의 소진까지 겹쳐서 더 이상 서로 진군할 수 없었던 겁니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에서 표현을 좀 빌리자면) 마치 계속 난투전을 벌이다가 제풀에 지친 권투 선수처럼 말이죠.

그러나 이 패배 역시 소련군에게는 만만치 않은 비극이었고, 뱌지마 자체가 스몰렌스크와 모스크바 사이의 경로에 있다 보니 - 약 200 km 전방 - 이번에는 모스크바 자체가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스탈린 역시 심각하게 수도를 탈출하는 것을 고려했습니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수도에 남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그는 연설에서는 자기가 수도를 떠날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다고 좀 뻥을 치긴 했습니다만, 그런 선언이 있은 덕에 모스크바의 소요 사태도 어느 정도 가라앉을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로 인해 모스크바로 가는 최후의 관문인 뱌지마가 날아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까지 공격이 닿기는 어려웠습니다.



모스크바의 북익

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 게, 지금까지 이야기를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좀 미심쩍은 데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아니 전황 지도가 저 모양이면 대체 쌍안경으로 첨탑을 봤다느니 어쨌다느니 한 이야기는 다 어디서 나온 거냐? 그걸 본 게 이 북쪽의 이야기입니다. 점점 이야기가 길어지니 빠르게 지도로 넘기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차피 전술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게 없으니까요.



우선 가운데에 있는 칼리닌 전선군을 노리고 제9군과 제3기갑집단군이 공세를 개시합니다. 북쪽을 밀어붙여서, 뱌지마를 거쳐 모스크바로 진군할 집단군의 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죠. 덤으로 자기들이 북쪽에서의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구요. 아, 칼리닌은 현재의 트베리(Tver, Тверь)입니다. 오룔보다 큰 대도시였죠. 괜히 전선군 이름에 칼리닌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닙니다. 사실 원래 트베리였다가 당시 국가 원수였던 미하일 칼리닌(Mikhail Kalinin,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물론 명목상이었고 실권은 당 서기장인 스탈린의 것)의 이름을 따서 칼리닌으로 이름이 바뀐 거긴 합니다만...



이쪽은 포위섬멸전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밀어붙이기 쪽에 가깝긴 했는데, 어쨌든 모스크바 서북쪽에 쳐질 주코프의 방어선을 여차하면 포위할 전력을 갖추었고, 때문에 주코프는 더 뒤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모스크바를 노리고자 했고, 그 결과 모스크바의 북쪽은 고착화됩니다. 그게, 하도 전쟁이 길어지고 꼬일 판이다 보니 모스크바를 노리게 된 거죠. 뭐 여하간 그래서 12월 5일에 가면...



트베리가 점령당한 상태로, 그대로 쭉 북쪽에 전선이 저렇게 형성됩니다. 그러면 그 동안에 독일군이 손 빨고 있었을 리는 없고, 뭔가 움직임이 있었기는 했죠. 그러나 이 시기는 라스푸티차... 덕분에 독일군은 트베리, 그러니까 칼리닌을 접수한 한 달 후인 11월 16일에서야 공세를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독일군은 모스크바 전방 110 km 앞에 와 있기는 했습니다만.





위의 지도는 11월 16일, 아래 지도는 11월 20일의 것입니다. 모스크바로 가는 최후의 도시, 그러니까 서울로 치자면 마치 판교 일대에 있는 서울톨게이트와 같은, 이스트라(Istra, Истра) 및 그 북익을 보호할 클린(Klin, Клин)을 접수하기 위한 최후의 공세가 펼쳐졌고, 소련군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후퇴해야 했습니다. 1개 연대 병력이 중대 수준인 150 ~ 200명 가량으로 줄어버리는 엄청난 격전과 피를 흘린 끝에 11월 24일에 마침내 클린을 접수합니다. 기어이 독일군은 모스크바 서북쪽으로 20 km도 되지 않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포위망 없이 그 큰 도시인 모스크바를 접수한다는 것은, 스탈린그라드의 사례를 생각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대공세도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12월 5일이 되자, 위의 선을 끝으로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평

오늘 한 이야기를 종합한 지도를 보여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0월 2일.



10월 10일.



11월 16일.



12월 5일.

순서대로 된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불과 두 달 가량에도, 그것도 전투력이 꽤나 소진되었음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을 대단히 크게 밀어붙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상하기도 힘든 수의 많은 소련군을 섬멸했고 상상하기도 힘든 수의 많은 소련군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레닌그라드 점령도, 모스크바 점령도, 전쟁의 조기 종결도 모두 실패했습니다.

독일군이 실패한 원인은, 처음에 짚어드린 독일군 자체의 문제가 절반을 차지하고, 또 소련군의 영웅적인 항전이 나머지 절반을 차지합니다. 소련군은 결코 얻어맞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이 라스푸티차와 추위 때문에 졌다는 것은 절반, 아니 1/4만의 사실일 뿐입니다. 소련군은 엄청난 피를 흘렸지만, 결국 전쟁을 질질 끄는 데 성공함으로써 독일군이 그들이 가진 물자와 병력을 모두 소진하고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지게 만드는 큰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 보이기에는 엄청난 패배를 당한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리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독일군이되 독일군은 이겼으나 졌고, 소련군은 졌으나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칼자루를 독일군이 쥐고 있던 것은 여전히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비극은 한참 동안 더 이어지게 됩니다. 저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12월 5일까지의 양군을 다룰 것이었기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식 연재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후기에서 언급하겠지만, 생각해보면 긴 글이었습니다. 사실 원래 오늘 끝낼 생각은 없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딱 12회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3회로 끝낼 심산이었던 것을 12회, 그것도 마지막 글은 다른 글의 두 배 가량이 되는 길이로 끝을 내게 되었네요.

보통 때였으면 이 글을 반으로 갈라서 두 차례에 걸쳐서 연재했겠습니다마는, 제 본업도 본업인지라 이야기에 약간 속도를 내서 빨리 연재를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그래서 초장문 스압 압박의 글이 마지막에 탄생한 겁니다. 졸렬하나마 어쨌든 이번에는 제가 시작한 일을 제가 확실히 마무리짓고, 다른 일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크게 만족합니다.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뒷이야기 - 르제프 및 각 사령관들의 뒷이야기를 말합니다 - 및 상세한 소감은 후기에서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자료출처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모에! 전차학교》 3권, 타무라 나오야, 장민성 역
http://der-fuehrer.org/reden/english/wardirectives/35.html - 총통 지령 35호
https://en.wikipedia.org/wiki/Northwestern_Front - 북서 전선군
그 외 위키피디아 문서 다수(각 도시에 관한 내용, 철도에 관한 내용 및 함락된 날짜에 대한 내용 등등)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Skywalker
16/09/12 06:34
수정 아이콘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청색작전을 기다...
이치죠 호타루
16/09/12 09:19
수정 아이콘
어헣↗
그래도 기회가 되면 꼭 연재할 겁니다. 일단 제가주변 일부터 처리해야 해서...
뻐꾸기둘
16/09/12 07:40
수정 아이콘
분량이 엄청나서 놀랐는데 2회분이었군요.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이치죠 호타루
16/09/12 09:20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영원한초보
16/09/12 07:58
수정 아이콘
연재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줄 수 있는게 추천 밖에 없네요
이치죠 호타루
16/09/12 09:22
수정 아이콘
가볍게 보고 손댔던 게 심하게 크게 부풀기는 했는데, 그래도 저도 이것저것 알아보고 하는 과정이 꽤나 즐거웠습니다. 공부도 꽤 많이 되었구요.
홍스매니아
16/09/12 08:03
수정 아이콘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청색작전을 기다...(2)
이치죠 호타루
16/09/12 09:22
수정 아이콘
어헣↗
그래도 기회가 되면 꼭 연재할 겁니다. 일단 제가주변 일부터 처리해야 해서... (2)
16/09/12 13:54
수정 아이콘
예전에 하츠 오브 아이언 3 할 때 딱 이 시점 1941년 12월5일 시점에서 나치 독일로 게임 했었던게 생각나네요.
이 때에도 소련군이 너무 많고 중간에 동-서로 길게 늘어진 돌출부를 담당하던 9군이 전선을 유지하기 힘들어서 전선을 후퇴시키고 몇달간 전선 유지만 하면서 휴식을 취하다가 1942년 여름에 크림반도에 있던 11군을 중부집단군에 배속시킨 다음 모스크바 방면으로 공세를 가해서 결국 모스크바 접수에 성공했던게 기억나네요
이치죠 호타루
16/09/12 14:39
수정 아이콘
만일 호이2에 "식량자원"이라는 게 있었다면, 모스크바로 갈지 로스토프로 갈지 좀 많이 고민했겠지 싶네요.
16/09/12 15:10
수정 아이콘
저는 모스크바 공방전이 더 보고 싶네요.

서로에게 엄청난 피해를 강요하며 말 그대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 곳이라.

물론 스탈린그라드를 비롯한 남부 전역이 더 처절하고 전쟁의 끝을 보여준 곳이긴 하죠. 그러니까 청색작전 연재 전에 모스크바 공방전부터 쭉 이어서 연재해주시면 됩니다?

감사 인사는 후기 때로 미루겠습니다. 잘 읽고 있어요~
이치죠 호타루
16/09/12 15:59
수정 아이콘
화성 작전은, 저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흥미를 갖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제가 독소전의 여러 장군들 중에서 꼭 세 손가락 안에 꼽고는 하는 사람이 바로 발터 모델이라서요.
16/09/12 15:22
수정 아이콘
처음부터 다시 보러 갑니다. 연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연재도 기다릴께요~
이치죠 호타루
16/09/12 15:59
수정 아이콘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103 드래곤볼, 닥터 슬럼프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 별세 [201] 及時雨10149 24/03/08 10149 9
101102 [정정] 박성재 법무장관 "이종섭, 공적 업무 감안해 출금 해제 논의" [125] 철판닭갈비8247 24/03/08 8247 0
101100 비트코인 - 집단적 공익과 개인적 이익이 충돌한다면? [13] lexial3475 24/03/08 3475 2
101099 의협차원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라고 지시한 내부 폭로 글이 올라왔습니다 [52] 체크카드10122 24/03/08 10122 0
101098 [내일은 금요일]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떨어진다.(자작글) [5] 판을흔들어라1944 24/03/07 1944 3
101097 유튜브 알고리즘은 과연 나의 성향만 대변하는 것일까? [43] 깐부3506 24/03/07 3506 2
101096 의사 이야기 [34] 공기청정기6671 24/03/07 6671 4
101095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4) [8] 계층방정7408 24/03/07 7408 9
101094 대한민국 공공분야의 만악의 근원 - 민원 [167] VictoryFood10754 24/03/07 10754 0
101093 [중앙일보 사설] 기사제목 : 기어이 의사의 굴복을 원한다면.txt [381] 궤변13875 24/03/07 13875 0
101092 의대증원 대신 한국도 미국처럼 의료일원화 해야하지 않을까요? [12] 홍철5513 24/03/07 5513 0
101091 정우택 의원에 돈봉투 건넨 카페 사장 “안 돌려줘… 외압 있었다” 진실공방 [20] 사브리자나5261 24/03/07 5261 0
101090 성공팔이를 아십니까? [29] AW4696 24/03/07 4696 7
101089 사랑하고, 사랑해야할, 사랑받지 못하는 <가여운 것들> (약스포!) [3] aDayInTheLife1863 24/03/07 1863 3
101088 '해병대 수사외압 의혹' 피의자를 호주 대사로‥영전 또 영전 [56] lemma6901 24/03/06 6901 0
101087 종이 비행기 [3] 영혼1954 24/03/06 1954 6
101086 다양한 민생법안들 [10] 주말3658 24/03/06 3658 0
101085 (스포) 파묘: 괴력난신을 물리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 [33] 마스터충달4139 24/03/06 4139 12
101084 너무많은 의료파업관련 구설수 기사들 [21] 주말5641 24/03/06 5641 0
101083 의사분들 이러시는 건 심적으로 이해가 갑니다만 [150] 된장까스10865 24/03/06 10865 1
101082 지금은 성공 유튜버들의 수난시대 [106] 깐부10281 24/03/06 10281 5
101081 바야흐로 마라톤 개막 시즌 입니다. [30] likepa2982 24/03/06 2982 19
101080 총선용 의료대란과 꼬인 대처. 필수의료의 멸망. 모두의 패배. [444] 여수낮바다12739 24/03/06 12739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