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애써 합격한 대학교에 입학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당시 책임져야 할 많은 직책들을 떠안고 있었어요. 지역의 청소년 봉사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문학회의 장이었으며 편집부의 장도 맡고 있었습니다. 정말 쉴새없이 바빴어요. 솔직히 바쁜것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욕심이 많았거든요. 명예욕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바쁘다는 것 그 자체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땐 바쁘지 못했거든요. 속된 말로 '왕따'였으니까요. 그다지 심하진 않았지만.
짐작되는 바가 있는 몇가지의 원인으로 인해 저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그런 것이 너무 힘겨워 핸드볼을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열대 이상 맞지 않으면 집에 가는 길이 어색할 정도로 많이 맞기도 했고 육체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잠들 수 있다는 것이 좋았어요. 망상을 그만 둘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고 핸드볼 부원 이외에는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그렇게 살지 않아도 적당히 마음을 숨겨가며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글을 쓰는 재주가 있었고 상을 타오기 시작하면서 주위의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저는 그 평가에 맞추어 살기만 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역의 백일장에서 상을 탄다는 것은 글을 엄청나게 깊게 쓰는 것이 물론 중요하겠지만 어느 정도의 기술적인 요건만 갖추어져도 충분합니다. 저는 유명해졌습니다. 반장이 되고 회장 선거에 나가면서 사람들의 평가가 획일화되었습니다. 그 평가를 잊지 않았던 것이 중고교 시절을 버텨온 버팀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평가 뒤에 숨은 모습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 경험하셨겠지만 수능이 끝나면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갑자기 한가해졌습니다. 등록금을 내는 날은 다가왔고 무난히 대학에 가는 듯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가지 않았어요. 왜 국문과에 가는지 왜 대학에 가는지 왜 스무살을 맞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나도 얕았던 것입니다. 수만권의 책을 읽고 수백편의 시를 쓰고 수천명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 모두 가짜였던 것처럼 느껴졌어요. 대학에 가면 분명 고등학교때와 같은 삶을 살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스무살을 맞이했습니다. 영화관에 취직을 했고 영사 보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집에서 벗어나버렸어요. 집에 머물러버린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혼자 자취를 시작했고 단 한푼의 돈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집을 나오면서 가져온 것은 모아놓은 책들과 수백장의 록음악 CD, 그리고 비디오 플레이어와 텔레비젼이 전부였습니다. 가족들은 저를 미쳤다고 생각했고 친구들도 저를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좋았어요, 저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영사 보조일을 하면서 제 주변엔 영화만이 가득했습니다. 일평생 그렇게 많은 영화를 본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 영화관에 비치된 잡지는 스크린같은 영화잡지 뿐이었고 영사원이나 사장님과 하는 대화의 대부분은 이 영화는 어떻다, 저 영화는 어떻다였습니다. 필름을 손질하고 영사기에 걸고 작동을 시키고 조그마한 창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쳐다봅니다. 소규모 극장의 영사실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마치 시네마 천국의 장면들을 연상케 하듯 두대의 영사기가 있고 작은 백열등이 있으며 필름을 되감는 기계가 있고 스틸 사진들이 벽을 메우고 있습니다. 화면을 전송하는 작은 창이 있는데 그 창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종이 인형처럼 똑같은 모습들이 의자 위로 머리만 내밀고 있는 모습,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며 일년을 보냈습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엔 아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엔딩 자막이 마치는 순간까지 남아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심술을 부려 엔딩 자막을 내보내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트루먼쇼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짐캐리는 이렇게 인터뷰합니다. '배우에게 일평생 같은 역할만 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영화관에서 일한 일년만큼 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중학교때 고등학교때 무얼 하든 대학교에 가고 졸업해서 사회에 나가면 모두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중 하나일 거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그 일상으로의 길을 거부했고 영화와 음악속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영화관에선 일을 했다기 보다 매일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을 거듭했습니다. 상영되는 영화를 보고 싫으면 영사기가 돌아가는 동안 매점으로 내려와 빌려온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관에 공짜로 들여보내는 조건으로 비디오 가게 아저씨는 조금 지난 영화를 공짜로 대여해주었습니다.
지난 배우들을 생각하면서 저는 정말 즐거웠던 스무살의 하루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진짜인것 같았습니다. 살아있는 것 같았고 고등학교때의 모든 일들이 우습게 여겨졌습니다. 영화를 보며 남들의 인생을 훔쳐보며 음악을 들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었어요.
둘.
어느덧 저는 스물 아홉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니 저의 스무살도 마냥 환영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런 날을 가질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관에 가본지 1년이 넘었고 물난리때 휩쓸려간 500여장 가까이 되는 음악 시디들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매달 두근거리며 핫뮤직을 사러 서점에 들르던 일도 어느 샌가 없어졌습니다. 딱히 아쉬운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꿈만 꿔도 마냥 좋았던 때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지금의 순간들도 충분히 가치 있다 생각합니다. 그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도 '지금이 나쁘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 어떤 과거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추억마저 부정한다면 제가 살아온 전부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추억하며 그 당시에만 느낄 수 있었던 그 순간의 추억을 되새기기도 합니다.
셋.
고향의 문화원장님들은 그 명이 짧았다 하여 자리가 불길하다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겨울에 유적지를 함께 돌아보시던 그 분도 긴 생이 아니었어요. 깊은 산 조그마한 길을 '옛길'이라 부르며 평범하나 평범한 이름이 아니다 설명하셨지요. 오로지 사람과 들짐승만이 지나갔으며 그 기억들을 우리는 담아내지 못하나 이 길만은 모두 담아내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이야기하셨습니다. 얼마후 지인을 통해 유언도 없이 다른 생을 향해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산이 생각나 다시 올라가보니 보지 못했던 꽃들이 몹시도 화사했습니다. 새 한마리가 그 위에서 곱게 울며 날아가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습니다. 너무나도 화사한 꽃, 모공으로 파고드는 향기, 파릇이 올라오는 푸른 가지들. 소리지를 수 없음이 당연하다 논해왔던 그들에게서 뿜어나온 적막이 심장으로 스며들어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기억을 담아온 것일까요. 당장 기억나는 것만도 눈을 스쳐가는데 그 이상의 것을 담아 피어오르고 뿜어내고 바스러져버리는 것일까요.
화무십일홍이라 합니다. 꽃의 붉음이 열흘을 가지 않는다 사람들이 슬퍼합니다. 사람은 한낱 스쳐가는 것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하기에 슬프다 합니다. 길의 꽃들도 가지들도 그처럼 이미 스쳐나가 다시 돌아간들 기억의 이들은 이미 다른 이들로 바뀌어 있겠지요. 하지만 그 향기만은 남았습니다, 열흘을 남짓 살아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심장에 머물러 있는 향기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넷.
영화배우, 음악, 작은 창 사람들의 뒷모습, 그리고 옛길..저의 기억은 온전히 저의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즐겁게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 묻어나는 다른 인생, 다른 기억들이 뿜어내는 각자의 향기 또한 잊지 않습니다. 삶은 꽃처럼 피고 집니다.그 절정은 분명 그리 길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되새길때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고 언제나 웃으며 당시의 하루들을 추억하기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순간 순간에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첫페이지의 글로 부족하지 않을지 모르겠네요. 제목은 일전에 쓴 '화무십일홍'이라는 글과 이어지지는 않지만 헷갈리실지 몰라 2를 붙였습니다. 모두 멋진 한해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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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글을 읽으면서, 속으로 뜨끔 했었습니다..
외국에서 살아오면서, 친구들과 깊이 융합하지 못하는 문화적인 면들과, 그러면서도 세상과 적절히 타협해오면서 약사라는 자격증을 따서 여기까지 온것도 그렇고, 중3때 너무 한국이 가고 싶어서, 무단 결석을 한 생각과, 한국 노래 한곡을 받기 위해, 1시간을 전화모뎀으로 받아야 했던 기억들.. 남들은 공부잘한다고 좋겠다고 할때, 혼자서 한국생각하면서 울었던 많은 시간들...
개인적으로 요즘 과거의 추억들에 대해 많이 잊고 사는듯 싶습니다.
자꾸 부정하려고만 하고, 외국에 나와서 살수밖에 없었던 환경에 대해 원망해하기도 하고..
시퐁님 글을 읽어보니... 그것들도 다 제 추억이군요..
신년들어서 계속 힘들고, 매일 매일 똑같이 살아간다는 생각만 들고, 삶의 의욕도 많이 떨어졌었는데
시퐁님 글을 읽고 많이 힘이 납니다. 감사드립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