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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6/25 20:49:59
Name 신불해
Subject 강희제 이야기(11) ─ 바다와 대륙



싸움 한번 못한 상황에서 처절한 실패를 겪은 후, 정성공이 겪은 문제는 병사들의 사기 문제였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의욕을 상실한 상황이었기에 정성공은 부하들에게 이는 일시적인 차질일 뿐이며, 앞으로 한두 달간 해변에 고립되게 된 함대와 병력들을 재정비할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근처의 항구에 정성공의 군대는 상륙했고, 주민들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성대한 연회가 펼쳐졌는데, 아무래도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모양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눈속임도 통하지 않고, 병사들 사이에선 더 이상 고생하기 싫다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정성공은 청나라에 투항하거나 도망치는 병사들을 단속하느라 골머리를 썩혔습니다. 사실 정성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고, 안정적인 수입원인 해안가 약탈, 해적질, 동남해와 일본 무역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만주족 병사들의 창에 찔려 죽는 일과, 폭풍우에 쓸려 몰살 당하는 일이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주족 정권의 첩자들은 혼란을 이용해 여러 공작을 펼쳤고, 정성공 부대 내에서는 투항자가 더 늘어나게 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전에 만주족 정권을 섬기다가 정성공에게 항복한 사람들이었고, 이제 다시 편을 갈아타는 것입니다. 의심병이 생긴 정성공은 자신의 휘하 장수들 중에서 만주족 휘하에서 온 인물들은 모두 해임했습니다. 전투 중에, 상대편 쪽으로 달려갈지도 모를 지휘관에게 함대를 맡길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상한 분위기와 숨이 턱턱 막히는 강박증이 함대에 닥쳐왔습니다. 한 선장은 선원들에게 선박의 노를 모두 붉은 색으로 칠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미신적인 요소와 함께 병사들이 가만히 할일 없이 있어 불안감이 더 증폭되지 않도록 할 일을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심병이 도진 정성공은 이것이 청나라와 싸움이 벌어질 시 모종의 계략이 있는것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증거가 불충분했는데, 정성공은 일단 그 선장을 해임시킵니다.
 
 
그동안 잘 이용했던 현지 주민들이나 암시장 상인들의 정보 루트도 이제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몇차례 잘못된 정보로 낭패를 보게 되자 ─ 이게 의도적이든 실수였든 간에 ─ 정성공은 복건 이북에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것을 전제로 군사활동을 펼쳐나갔습니다. 적군은 멀리있었지만 이동 루트에 대한 정보를 믿지 못하고 계속 방비를 해야 했기에 불안감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습니다.
 

병사들이 약탈을 하고 다니면서 군기도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약탈은 정성공이 질색을 하는 행위 였지만, 그의 부하 장수들이 허락한 것입니다. 사기가 낮아진 병사들을 진작시키는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성공은 1658년 말까지 복건 북부에 다수의 진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고, 북벌 시에 보급 루트와 위급시에 바다로 돌아갈 수 있는 비상 탈출로를 모두 확인하고 준비했습니다.
 
 
재정비는 끝났고, 더 이상 머뭇대기에는 병사들의 사기도 걱정되는 상황. 정성공은 1659년 4월 무렵 함대를 양자강 하구로 총집결 시키며 다시 한번 작전 수행에 나섰습니다. 간부들을 불러 모은 정성공은 이 작전이 얼마나 중대시한가를 지휘관들에게 똑똑히 알렸습니다.


"각 제독과 통진(統眞)은 지난 10여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겪었으나, 공명을 떨칠 사업은 바로 이번 일에 있다!"


함대는 전진을 개시했습니다. 지난번의 악몽이 남은 양산 일대를 지났지만 바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잠잠했습니다. 정성공 함대는 장강 남안에 위치한 초산(焦山)에 상륙하여 엄숙하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명나라의 역대 황제에게 지금부터 남경을 공략하겠다는 사실을 알리는 전승기원으로, 이는 3일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첫째 날, 정성공과 그의 측근들은 붉은색 옷을 입고 하늘에 제물을 올렸습니다. 둘째 날, 그들은 검정색 옷으로 갈아입고 대지를 향해 같은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마지막 날, 흰색 옷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을 위해 예를 올렸습니다. 전원이 하얀 옷을 입었고, 수백 척에 이르는 정성공 함대 모든 배의 돛에 흰색 깃발이 높이 걸렸으며, 갑판에도 흰색 깃발이 휘날렸습니다. 이 날을 본 목격자는 강이 한여름에 갑자기 눈으로 뒤덮인 듯 했다고 할 정도로 실로 장관이었으며, 의식은 함대의 모든 병사들이 위대한 명태조의 이름을 세 차례 연호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수천명이 넘는 목소리가 한번에 명 왕조를 찬양하니, 사방이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과거부터 자신이 꿈꾸웠던 광경이 현실로 된 모습을 본 정성공은 의식이 끝난 후에도 감정을 주체 못하고 눈물을 계속 흘렸다고 합니다. 그는 그날의 기분을 시로 남겼습니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사이에 오래된 염원이 새겨져 있고
궁궐을 휘감든 가을바람은 차갑구나
참나무 껍질은 갈수록 두꺼워지고
무심한 새들은 돌아오는구나
 
잊혀진 묘비들이 땅 위에서 나뒹굴고
사당의 계단에는 이끼들이 잔뜩 끼어 있구나
찾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
세상사 근심만이 돌아오는구나
 

8월에 이를 무렵 정성공 함대는 다음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양자강 쪽에서 버티는 청군의 지휘관은 나명승(羅明昇)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넒은 양자강의 강 유역 요지 곳곳에 군대를 배치했고, 남경에 가까운 상류에는 곤강룡(滾江龍)이라는 방어 시설을 설치했습니다. 약 15킬로미터에 걸쳐 강 중간 중간에 솟아 있는 섬들 사이를 뗏목으로 연결한 이 댐은 마치 강물 위에 세워진 만리장성과 같았습니다. 그 곤강룡의 곳곳에 요새가 들어섰고, 요새마다 강의 하류를 향해 대포가 배치되었습니다. 삼나무 목재로 만든 요새 기단들만 해도 각각 소총과 탄약으로 무장한 500여명의 병력을 지탱 할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고 합니다.
 

정성공 함대의 가장 큰 전함도 왜소하게 보이게 하는 이 떠 있는 요새들은, 밑바닥에 흙과 바위를 실어 안정을 유지했고, 강에 닻을 내리고 거대한 쇠사슬로 서로를 연결시켰습니다.
 
 
정성공의 부대에 합류하여 선봉에 선 장황언은 곤강룡과 대적하기 위해선 여러 방면에서 정밀한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정성공을 진강(鎭江)을 노리기로 했습니다. 진강은 상당히 강력한 요새 였지만, 진강을 무력화 시켜야만 다른 요새들을 함대가 공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정성공은 양동 작전을 계획 합니다. 진강을 노리는 동시에 과주(瓜州)를 노리기로 한 것입니다. 이 두 요충지만 손에 넣는다면, 북경으로 곧장 이어진 대운하의 한쪽 끝을 확보하게 되어 북쪽에서 남경으로 보내는 모든 물자를 중간에서 차단이 가능하게 됩니다.
 
 
공격의 주력인 함대 병력은 장황언의 부하들이 주축인 남군과, 정성군의 부하들이 주축인 북군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공격이 시작되었고, 함대는 적의 포병들을 고립시켜 재보급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포격을 가했습니다. 강 한가운데의 바지선들은 대포를 쏘면서 응사를 했지만, 정성공 함대에 큰 타격을 주는것은 어려웠습니다. 곧 만주족 대포의 탄약이 바닥이 난것입니다. 함대는 진강을 통과해 곤강룡에 이르렀습니다. 선봉 선단이 바지선들을 공격하여 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동안, 용감한 잠수부들은 댐 아래로 헤엄쳐 들어가 요새 기단을 연결하는 쇠사슬을 끊어 내었습니다.
 
 
그 동안 양자강 남안에서 장황언 부대는 중무장한 진강 요새를 우회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정성공의 깃발을 높이 들고 현지의 호륙을 기대하며 내륙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32개 지역에서는 정성공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적장 나명승은 강물 위의 한 기단으로 휘하 병사 500여명과 함께 내몰렸습니다. 탄약이 다 떨어지자 그들은 화살을 쏘면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고, 정성공의 수군이 물밑듯이 기단으로 몰려들자 그들은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과주에서는 정성공의 휘하 장수 마신과 주전빈이 선봉으로 나서 싸웠습니다. 주전빈은 강기슭에서 내달려 가파른 등성이를 넘고 사다리를 타고 직접 성벽으로 올라, 부상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부하들을 지휘했습니다. 곧 저 멀리 함대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도 과주성 위에 정씨 가문의 깃발이 올라가는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주전빈은 5발이나 되는 화살을 맞았지만, 위풍 당당하게 서있었습니다.
 
 
정성공이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진강과 과주가 모두 정성공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남은일이라고는 그저 남경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될 일 뿐입니다. 정성공은 적장이었던 주의좌라는 인물을 생포했는데, 주의좌는 정성공의 앞에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유생으로 알려진 정성공의 효심에 호소했습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연로한 부모님을 돌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너 같은 반역도의 피로 어찌 내 칼을 더럽 힐 수 있겠느냐?"
 
 
정성공은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금 500냥을 주고 풀어주었는데, 아마도 다른 병사들의 투항을 기대한것으로 보이지만 부모님의 이야기를 꺼냈던 즉시 남경으로 달아나서 사태를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정성공은 이 시점에서 성공적으로 양자강의 요충지를 장악하여 대운하를 차단한 상황이었습니다.





충격적인 보고가 전해지자, 청나라 조정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21세의 순치제는 미친듯이 실성하며 소리를 쳤고, 자신이 직접 원군을 이끌고 남경으로 가겠다고 미친듯이 분노를 토해냈습니다. 순치제와 정성공의 대결이라면 상당한 구경거리가 되었겠지만, 효장문황후는 황제가 경솔한 언행을 한다면서 그를 진정시켰습니다. 순치제의 분노는 쉽게 가라 앉지 않아 그는 마구 칼부림을 하면서 황상을 내리쳐 산산조각 내었고, 아담 샬은 간신히 젊은 황제의 노기를 가라앉히는데 성공 했습니다
 
 
청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소문은 일반 백성들 사이로 금세 퍼질 텐데, 그들의 동요가 전국에서 벌어지면 사태가 산불처럼 커질 가능성도 충분했습니다.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나돌았고, 정성공의 30만 대군이 북경으로 운하를 타고 진격할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정성공의 부대는 의기양양했습니다. 드디어 사람들은 이 싸움이 무엇인가 기대해볼만 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지난번 양산에서의 폭풍우 같은 재앙조차 하늘이 기개있는 사나이들을 시험해보기 위한 시련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양자강 상류와 내륙에서는 장황헌 부대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현지 백성들도 움직일 기세였습니다.
 
 
과주성이 함락되었음으로 양자강 북안이 확보되었습니다. 반대쪽 남안에는 진강이 있었고, 이곳도 정성공이 장악을 했습니다. 훗날의 이야기를 하자면 아편전쟁 당시 청나라는 진강이 무너지자 꼬리를 내린바 있습니다. 진강의 싸움에서는 청나라의 장수 관효충(管效忠)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성공 군단에 있던 철인부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철인 부대는 일반 병사들에게는 신병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철갑주 등을 차고 일본식으로 얼굴까지 온몸을 가른 그들은 부대 최전선에 배치되어 철벽과도 같이 적을 막아세웠고, 긴 창으로 무장해 기병들이 탄 말을 쓰러뜨렸습니다.
 
 
입고 있는 갑주도 어마어마한 무게인데, 당시가 한 여름이었음을 감안하면 철인 부대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골라 모은 괴력의 사나이들인지 알법했습니다. 만주족 기병대는 철인부대에 달려들었지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녹아내렸습니다. 그 뒤를 이어 정성공 부대의 기병대가 달려들어, 진강은 곧 대학살장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만주족 병사들은 서로 먼저 도망가려고 밀어내었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무수하게 발생했습니다.
 
 
정성공의 의도는 명확했습니다. 계속된 승리에 고취된 그는 양자강 상류로 진격하기를 원했는데, 그가 가장 신뢰하는 장수 감휘는 신중할것을 부탁했습니다.
 
 
"아군은 이미 대운하 남쪽에 요충지를 장악하여 만주족의 북쪽 중원로를 차단하게되었습니다. 남경으로 곧바로 진격하는 대신, 남경을 우회하여 내륙과 상류의 다른 도성들을 장악하고 남서쪽으로 진출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아군은 적의 증원로뿐만 아니라 남경을 버티게 해주는 식량 보급로도 차단하게 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과도한 인명 손실 없이 남경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전례를 따져보자면, 명태조 주원장은 지금의 남경인 집경을 공략하기전에 채석(采石), 우저(牛渚) 등을 먼저 공략한 전례가 있습니다.
 
 
초전의 연승을 누리고는 있지만, 후방에 강력한 방어부대와 동맹 세력없이 너무 내륙 깊숙이 온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남경을 공략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정성공 부대의 등장으로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기세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한족들이 많은 남경을 함락시킨다면 효과는 제대로일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또한 만주족 병사들이 적고 한족이 많은 남경의 특성상, 내부 도움도 기대해볼만 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남경에 입성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병사는 나이만 먹을 따름이지. 시류에 따라 우리에게 가세한 병력은 머뭇거리면 실망하고 우리를 저버릴 것이외다."
 

이제 계획에 따라 85,000명이 넘는 대부대는 남경의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남경은 풍전등화에 놓였고, 정성공은 일생일대의 기회이자 전성기를 맞이한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남경에 정성공이 살려준 주의좌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경 도독 낭정좌(郞廷佐)에게, 정성공의 최대 약점은 자만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낭정좌는 이 말을 듣고 정성공에게 항복할 의사가 있다는 말로 아첨을 하면서, 단지 두려운것은 세상의 이목이니 한달 가량의 말미를 주라고 말했습니다. 형식적으로라도 저항하는 시늉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주족 정권에서 일한 바에 따르면, 30일 정도를 버틴다면 만주족 정권도 북경에 있는 그들의 가족들을 해치지 않을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정성공은, 그의 참모들과 동맹들을 경악시키고, 그리고 후대에 본인도 후회할만한 일생일대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30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경의 항복을 기다린 것입니다. 정성공은 한달만 기다리면 된다는 낭정좌의 말을 수하들에게 전했는데, 감휘 등의 부하 장수들은 이에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


"구걸에 가까운 호소는 위장이며, 어떠한 담보도 없이 평화를 청하는 자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것, 손자병법에서도 그리 말하지 않습니까?"


지금 남경은 원군을 기다리고 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남경을 공략하는것은 어려워질것이라고 하며 그들은 정성공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가 남경 도독의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진실로 믿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지난번에 정성공은 양자강 상류로 진격하겠다고 했는데,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발언과 완전히 배치되는 일입니다. 자기가 버티고 있으면 수 많은 남경 내의 한족들이 먼저 반응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과거에 남경에서 공부했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고, 이 당시의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혹자는 정성공이 자기 생일날에 맞춰서 남경을 함락시키려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릴없이 보름이 지났습니다.


군사들의 기강은 점점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남경으로부터는 어떠한 저항의 낌새도 없었고, 정성공의 군사들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하기만 한 성벽을 따분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경계 근무를 맡은 포위 병사들은 성 주변을 어슬렁 거리거나 성벽 앞의 커다란 해자에서 낚시를 하기까지 했습니다. 술병을 차고 보초를 서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맍족 진영으로 탈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일은 어려운것도 아니었습니다. 투항하는 자들은 그냥 걸어서 남경 안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항복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정성공 부대에서 오랫동안 싸운 베테랑이었으나, 과주성 전투에서 현지의 소녀를 강간하려다가 정성공의 제지때문에 실패했고, 목이 잘려질 뻔했으나 그간의 공을 생각해서 군료를 대폭 깎는 수준에서 끝났습니다. 그는 성에 들어가 낭정좌에게 말했습니다.


 "정성공 군사들의 불안감이 날로 고조되고 있고, 기강은 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성공의 생일 축하연이 준비되고 있으니, 혹시 적의 기강이 해이해질 때를 기다린다면 그 날 밤이야말로 적기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도성 후문까지 만주족의 원군이 도착했지만, 오히려 정성공은 기고만장하여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증원군이 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하루면 그들을 몰살시키거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테고, 따라서 앞으로 많은 싸움을 하는 수고로움을 덜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게 요지입니다. 하지만 부하 장수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감휘



정성공의 오랜 수하이자 벗이며, 신뢰하는 동료인 감휘가 가장 먼저 인내심을 잃었습니다. 이때 만주족의 한 부대가 도성의 서문으로 나왔는데, 도발을 일삼던 병사들은 곧 물러나 양군의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감휘는 만주족이 아군의 방어 능력을 시험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적군의 이러한 태도를 이유로 들어 항복을 기대하면 안된다고 주장했고, 이는 타당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귀신이라도 쒸였는지 정성공은 남경이 싸우지 않고 항복해올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정성공은 감휘에게 진정하라고 당부하며, 만주족의 원군이 설사 당도하여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아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항복을 안한다고 쳐도 이기는건 문제가 아니라고 본것입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물리적으로 공격을 가할수는 있지만, 그 경우 저들의 마음까지 승복시키지는 못할걸세."
 

감휘는 너무나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뛰쳐나오고선 울화를 내뱉었습니다.
 

"나는 두 번 다시 오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
 
 
결국 감휘가 옳았습니다. 첩자들은 이미 정성공의 부하들 속에서 암약하고 있었습니다. 남경을 지키는 낭정좌는 현지 농부로 위장시킨 첩자를 포위대의 진지로 들여보내 술과 음식을 팔았습니다. 처음에야 당연히 쫒겨났지만, 포위가 길어지면서 군기가 느슨해지자 그들은 환영을 받는 존재로 바뀌고 맙니다. 식품을 파는 그들은 그 과정속에 정성공 군사들의 상태와 군수물자 보관소의 위치등을 주위 깊게 살필 수 있었습니다.
 
 
이 원정 당시에는 일본에 원병을 구하러 가기도 했던 주순수도 종군 했었는데, 그는 당시 정성공 군대의 상태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작은 승리에 익숙해져, 상명을 따르지 않는다."
 
 
 정성공 군대의 취약성은 곧 증명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정오, 500여명의 만주족 병사가 난데없이 기습을 가하자 넒게 진지를 펼친 정성공 군대는 적의 공격 사실도 뒤늦게 깨닫고 우왕자왕했습니다. 500여명의 만주족 부대는 철수전에 정성공 부대의 1개 포위대를 궤멸시켰으며, 그보다도 더 심한 피해는 장작더미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발생했습니다. 정성공은 조금 뒤로 물러났습니다.
 
 
진정한 역습은 다음날에 일어났습니다. 전날의 수백명 단위가 아니라 수천명이 넘는 정예병이 물밑듯이 튀어나왔고, 엄청난 함성 소리와 함께 대포를 쏘아댔습니다. 넋을 놓고 있던 정성공 부대는 바다처럼 쏟아지는 대포와 불화살 세례에 기겁을 하고 맙니다.
 
 
동시에 정성공 진지내에 암약하던 첩자들도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빈 술항하리에 폭탄이 담겨져 있다가, 가장 큰 화약고에 폭발시키자 주변 일대는 물론 인근에 정박해 있던 선박까지 날아가버렸다고 합니다. 폭발 그 자체보다도, 앞뒤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고 오해가 퍼져 군대의 상황은 더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승세를 깨달은 만주족 부대가 전력을 다해 공격하자 정성공 부대는 질서 있게 퇴각도 못하고 강을 따라 동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감휘, 만례, 장영, 임승, 진괴, 남연, 이필, 반경종 등 숱한 명장들도 어이없이 횡사해버리고 맙니다. 남경 강변에서 만주족 부대가 건져올린 시체만 4,500개구에 이르렀으니, 건져져지 못한 시체나 강에 빠지기전에 사망한 병사들,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을 모두 합치면 피해가 어마어마 했을 것입니다.
 
 
퇴각한 병사들은 간신히 그 날 밤 진강에 도착했습니다. 정성공은 부상자들 사이에서 감휘를 찾아 나섰다가, 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정말 때늦은 탄식을 했습니다.
 
 
"내가 그의 말만 들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이 아닌가!"
 
 
그러나 '일어나지 않았을' 일은 이미 일어난 후 입니다. 그동안 정성공은 다른 지역을 무시하고 곧장 남경으로 진격했기 때문에 점령했던 도성들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지도 못했습니다. 만약 정성공이 기반을 다지고 남경 공략에 나섰다면 패배는 일시적인 후퇴에 그쳤겠지만 지금은 다 틀린 일이었습니다. 10년의 공업이 물거품이 된 순간입니다.
 
 
달아나야 했습니다. 10년간 모은 정성공과 명 유신들의 군자금은 이미 바닥을 보였고, 곧 만주족의 부대가 밀려올테지만 진강을 지키기는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격론 끝에 정성공의 함대는 해안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바다로 나가면 여전히 정씨 가문은 가장 막강한 존재였습니다.
 
 
문제는, 양자강 유역에 이르러 새로 정성공에 합류한 세력과 동맹들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고, 자신들을 버린다는 소리나 진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머무르라고 애원했지만, 정성공은 부하 장수들을 새로 임명하며 진강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위험한 후미는 용맹한 주전빈이 자원해서 맡아 부대를 지켰습니다. 정성공과 별개로 군대를 상류까지 밀고 올라간 장황언은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후로도 그는 싸움을 계속하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처형당합니다.
 
 
정성공은 퇴각중에 숭명도(崇明島)를 공략하려 했으나, 이미 기운이 떨어진 정성공 부대는 별다른 힘을 내지 못했습니다. 자신감이 떨어진 정성공은 동의하고는 하문으로 돌아갔습니다. 북벌 싸움은 이로서 완전히 종료되었습니다.


청나라는 정성공을 막아내었고, 그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해안가에는 그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얼마든지 있었고, 이를 이용한 게릴라전은 여전히 위협적인 수단이었습니다. 이를 막는 방법은 단 한가자입니다. 해안 지역의 모든 교역은 불법으로 정하여 범법자들은 모두 처형하면 됩니다. 범법자들을 고발하는 자는 범법 상인의 전재산을 가지게 되고, 해안 지역에서 배란 배는 모두 불살라 버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청조의 계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성공 부대에서 투항 해 온 '황오'라는 인물은 한 가지 제안을 꺼냈는데, 너무나도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계획이었고, 대청제국의 군주인 순치제조차 잠깐 머뭇거릴 만할 정도로 대담한 제안이었습니다.
 
 
전 해안의 봉쇄. 바다 전체에 둘러지는 벽.
 
 
광저우부터 시작하여, 해안선을 따라 북경 근처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모든 해안에서 주민들을 완전히 소개시키는 방안입니다. 바다에서 50km 이르기까지 육지의 어느 누구도 거주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기면 극형에 처하게 됩니다. 농부와 어부들은 모두 불과 며칠 내로 고향을 떠나야 하고, 그들이 살던 집은 무자비하게 박살하여 파괴시키는것입니다. 가옥과 헛간은 불에 타고, 곡식은 한 톨도 남김없이 치워지고, 배들은 모조리 바다 속으로 가라않지는 것입니다.
 

이 제안 하나로 해안가 지역의 수많은 백성들은 유민이 되어버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성공 부대에는 물자 공급이 끊기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남은 재기의 루트는 있었습니다. 바로 대만입니다. 해안가가 모조리 봉쇄된 상황에서, 정성공이 다시 대업을 이루려면 몇년이 걸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든 해야했고, 대만은 또 그 계획을 실행시켜줄만한 자원이 있었습니다. 


이로서 정성공은 대만으로 예봉을 돌렸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 VOC와 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투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도 상당한 분량이 될 테지만, 여기서는 순치 12년인 1661년 12월이 대만의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날이 되었다는 정도로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바로 그날, 정성공이 대만의 VOC 총독 프리데릭 코예트(Frederick Coyett)에게 항복을 받았고, VOC가 협약을 맺고 대만에서 완전 철수함으로서 대만이 온전히 중국인들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대만에서 정성공과 맞섰던 코예트.


남경 공략전에서 밀려 대륙의 본토에서 튕겨져 나온 정성공은, 오뚝이같은 근성으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대만을 자신의 수중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다시 한번 본토로 올라갈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만의 풍토병이 정성공에게 엄습했고, 그는 건강이 몹시 쇠약해지고 정신적인 불안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이때, 하문에 있던 자신의 아들 정경이 그의 유모 ─ 가법을 따른다면 정성공의 첩실이 되는 ─ 와 관계를 맺어 아이 ─ 아마도 정극장(馮錫範) ─ 를 만드는 패륜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약화되어 있던 정성공의 정신은 급격하게 붕괴되어 결국 그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발작적인 상태를 보이던 정성공은 결국 쓰러져서 사망했습니다.


하문에 있던 정경은 그 즉시 풍석범(馮錫範), 진영화(陳永華), 주전빈 등의 측근을 거느리고 대만으로 가서 지위를 이어받으려 하였습니다. 이때, 대만의 이상 기후를 감지한 청나라의 복건 총독 이솔태(李率太)와 정남왕 경계무 등은 정씨 정권을 항복시키려고 사람을 하문으로 보내 회유했습니다.


"제도를 준수하고, 변발을 하고 육지에 오르면 봉작을 우대한다."


당시 대만으로 떠날 준비에 바쁘던 정경은 백부 정태(鄭泰)와 의논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조선의 사례에 비추어, 변발을 하지 않고 신하라 칭하며 공물을 납부하겠다."


이것이 그들의 화평 조건이었고, 이 제안은 청나라 조정에 올려졌습니다. 하지만 실상 정경의 목적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청나라 조정의 회유를 받아들이는 척 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일단 자신의 정권이 공고히 지기 전에는 청나라와 함부러 적대 행위를 하는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하문을 정태 등에게 맡겨 놓은 뒤,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팽호와 대만으로 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정성공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강희 2년인 1663년 전선 90여척에 진영화, 풍석범, 주전빈을 데리고 다시 하문으로 돌아왔고, 낌새가 이상한 정태를 연회 중에 기습하여 처단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쟁은 정씨 집단을 약화시켰습니다. 정태의 가족이나 그 측근이었더 장수들은 청나라에 잇달아 투항했고, 투항하는 과정에서 병사 수천명과 선박 수백여척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청나라 수군의 핵심으로, 정씨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여러가지 공헌을 하게 됩니다.


정성공이 사망했고, 그 후예들이 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 작금의 상황이야 말로 하늘이 내려운 기회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수군 제독, 시랑(施琅)이었습니다.




 
명말 청초, 시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전중국 최고의 수군 제독이었습니다. 그는 정성공보다 나이가 더 많았으며 실제로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의 시대부터 함대에서 활약해 온 인물이었습니다. 본래는 복건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항해술에 신묘한 능력을 가진 그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반 만주족 항전에 참여했습니다. 정지룡 함대에서 그의 역할은 좌군 선봉 선단의 통솔이었는데, 함선을 지휘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수군 병기와 선박용 장비를 설계하는데 시랑은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후(鄭侯)라는 별명을 지녔던 그는 정지룡 함대의 선원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지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실력과 명성을 가진데다 경험까지 풍부한 시랑과 정성공은 서로간에 존중은 하면서도 약간은 소원한 껄끄러운 관계였습니다. 시랑은 가끔 정중하면서도 솔직하게 (정지룡이 통솔하던) 예전이 좋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 이는 정성공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둘은 충돌하게 됩니다.
 
 
어느날 시랑의 선단에서 한명의 부하가 불분명한 죄목으로 고발되자, 그는 탈출하여 정성공에게로 몸을 피했습니다. 시랑은 다른 부하들을 시켜 정성공의 진영으로 보내 탈출자를 붙잡고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속에 정성공의 권위는 무시되어버렸습니다.
 
 
예컨대, 시랑의 입장에서 보면 정지룡의 아들이 될법한 사람이자 또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본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성공에게 고분고분하게 구는 법이 없었고, 대놓고 정성공의 지도력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태도에 정성공은 시랑의 부관인 만례(萬禮)를 오히려 시랑 보다 높은 지위에 올리는것으로 응수했고, 분쟁은 이제 노골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1650년 쯤, 시랑은 류쿠 열도에서 많은 은을 수송하고 있었는데 이는 군수품을 사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불운하게도 엄청난 폭풍이 나타나며 많은 은이 유실되고 말았고, 감정이 폭발한 정성공이 시랑을 매우 크게 질책하자 격노한 시랑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상투를 칼로 잘라 들어올려 사의를 표시했습니다. 정성공은 우선 사태를 수습해서 그 자리에서 시랑이 함대를 떠나는 일은 피했다고 합니다.
 
 
이듬해, 정성공이 중국 본토 공격을 노릴 즈음 적들이 점령하고 있는 도성을 공격한 후 금은만 탈취하고 도성은 내버려두고 철수하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시랑은 이를 반대합니다. 이것이 보통의 해적질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이야기 였습니다. 이것이 자신을 향해 도적이나 다름 없다는 비난을 퍼부었다고 여긴 정성공은 정말 크게 노해 시랑을 가택연금 시켰고, 시랑의 행동 범위를 그의 선박 안으로만 지정하는 제한을 걸었습니다. 
 
 
이쯤되자 시랑은 조용히 야음을 틈타 달아나 정성공의 숙부에게 몸을 피했으나, 시랑의 의견에 일부 동조하면서도 차마 정성공의 권위를 거스르기 힘들었던 숙부는 보호 요청을 거절했고 오갈데가 없어진 시랑은 결국 청나라 정부에 귀순 요청을 신청하게 됩니다. 소식을 들은 정성공은 격노해 시랑과 시랑의 아버지, 시랑의 가족을 모두 죽이기 위해 특공 암살대를 조직했지만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시랑은 가족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시랑은 대만의 형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정씨 집단은 서로 질시하고 마음속에는 응어리를 품고 있으며, 겉으로는 친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사이가 멀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화합하기 어려운 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확실히 점차 와해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랑의 말 처럼 정씨 집안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본래 정씨 집안은 남중국해에서 그들의 가공할 영향력을 이용해, 뱃사람들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협조를 얻어내서 내부의 협력자를 만들었는데 변방 주민을 강제로 내지에 이주시키다보니 현지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내륙의 양식들을 대만으로 이동시키지 못해 사료 값이나 군량의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시랑은 지금이 하문 등을 탈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이리하여 복건 수사 제독 시랑은 쾌선 160여척, 병력 3,000명을 준비하여 훈련을 시켰고, 동시에 대만 수복에 열을 올리는 네덜란드 세력에 협조를 구하여 2563명의 병사와 440문의 대포, 17척의 거함도 얻어내었습니다. VOC는 이 일을 계기로 중국과 통상 무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냥 그들을 이용해먹을 요량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문 등지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처음 승기를 가져간 것은 정씨 집안의 함대였습니다. 2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있는 정씨 집안의 장수, 주전빈은 기습 공격을 벌여 네덜란드 함선에 불을 질렀고, 놀라서 달려온 청나라 군 제독 마득공의 함선을 완전히 격파했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적군에 포위된 마득공은 자결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득공이 정군과 대치하는 동안, 총독 이솔태와 정남왕 경계무는 하문을 향해 진격했고, 시랑은 전선 100여척을 이끌고 달려왔으며 황오 역시 뒤를 따랐습니다. 시랑은 정군의 장수 황정을 물리쳤고, 하문을 함락했습니다.  다시 기세를 타서 금문까지 무너뜨리는데 성공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놀라 달아나려는 정경에게 투항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경은 여전히 이러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고려의 경우처럼, 만일 변발하고 투항해야 한다면 나는 죽어도 동의하지 않겠다."


 청나라 사신은 일이 여의치 않자 정경의 수하인 홍욱과 은밀히 내통하여 정경을 사로잡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만일 홍욱이 이 일을 승낙하기만 한다면, 그에게 후작을 내려주고 천주(泉州)를 세습하여 살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홍욱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웃으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청군의 공작으로 정군 내에 투항파가 생기려는 모습을 보고 정경에게 건의했습니다.


"하문과 금문이 함락되어 민심이 어지럽습니다. 경계무와 이솔태는 계속 사람을 보내고는 있으나, 사실 이것은 회유하려는것이 목적이 아니고 민심을 어지럽히려는 계략입니다. 신속히 대만으로 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시간을 늦춘다면 변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정경은 기회를 보아 전함 수십척을 이끌고는 바람을 타고 서둘러 대만으로 퇴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성공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운 주전빈을 포함해 여러 장수들이 청군에 항복했습니다. 이때 기세가 워낙 좋았기에 청나라 조정은 대만 정벌까지 고려하였습니다. 이 해의 12월, 그리고 1665년 3월 26일, 두 차례나 걸쳐 시랑에게 수군을 이끌고 대만을 원정하게 하였지만, 둘 모두 해상의 기후 상태가 좋지 않아 돌아와야 했습니다. 시랑은 2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난 후, 다시 한번 시도하였으나 또 해상 기후의 악화로 선박들이 난파되어 철수했습니다.


이 3번의 시도가 전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익하게 끝나자, 청나라 조정은 대만 정벌의 실효성에 대하여 큰 의심을 가졌습니다. 이 당시 청은 막 영력제를 처단하고 정씨 집단을 내몰아 정복 전쟁을 완수한 뒤라, 장기간의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도적때가 들끓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으며 재정 상황 역시 불안정했습니다.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려면, 전쟁을 하지 않고 휴식하는게 제일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오배의 무리가 세력을 떨치고, 또 오배를 처단한 뒤에는 대대적 정비가 필요했던 시점이라, 청군은 무력 토벌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청나라는 정경에 대해 화평 협상을 벌이려고 하면서 대륙 본토와 섬 대만 사이에는 화해 무드가 조성되었습니다. 청 조정은 1667년 6월 사람을 보내 회유 작업을 벌였고, 정경은 또다시 조선의 사례를 들먹이며 만일 이와 같다면 항복할 의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시랑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스러웠습니다. 회유 작업 자체는 계속 이루어져야 하지만, 군사적 개입이 있어야만 회유 작업도 실효를 거둘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신을 두 차례나 보냈지만 대만 측은 중요한 관원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대만의 무력 토벌과 회유는 동격이 되어야 합니다. 무력 토벌은 회유에 포함됩니다."
 
 
시랑은 자신의 책략을 성심껏 써서 중앙에 상소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강희는 막 친정을 시작했기에 실질적으로는 오배 등이 여전히 전권을 가진 상황이었습니다. 오배 등은 시랑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여 아예 보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되려 성가신 소리를 해대는 시랑을 북경으로 불러들였고, 그의 수사 제독 직을 없애버려 정경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여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했습니다.
 
 
1669년에는 청나라 쪽에서는 형부 상서 명주, 정남왕 경계무 등이 파견되어 천주에서 정경이 보낸 사람들과 회담을 벌였습니다. 정경이 보낸 사람들은 계속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습니다.
 
 
"조선의 사례에 비추어 변발을 하지 않고 대만을 세습하여 신하로 칭하고 공납을 바치면 그만이다."
 
 
명주는 강희의 의사를 표명하며 반대했습니다. 
 
 
"제도를 준수하여 변발을 하고 투항하면 작위와 봉록을 우대하고 아낌없이 상을 내릴 것이다. 대만 지역에 거주함도 허가한다. 그러나 조선과 비교하여 변발을 하지 않고, 다만 공납을 바치고 투항하겠다는 것은 절대로 윤허할 수 없다. 번봉하여 대만을 세습함은 허가하나, 번봉을 받아들여 신하로 칭하면 자연히 그 제도와 복장을 다르게 할 수 없다."
 
 
조선은 고래부터 아예 중국과는 다른, 그들에게 있어 이민족의 땅에 이민족의 풍습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도 모두 외국인입니다. 그런데 대만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복건에 있던 중국인들이 그저 땅만 옮겨가서 살고 있을 뿐이니, 그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고 중국인에게는 청나라 조정이 내린 의무 ─ 즉 변발을 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회담은 성과없이 끝나버렸습니다.
 
 
청나라의 철기병은 대만의 정경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위력도 발휘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해양의 파도가 심하고, 정씨 집단은 당시로서는 적어도 인적 자원에서는 남중국해에서 최고 수준의 선원들을 보유하고 있어, 어마어마한 영토와 국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거의 동격이나 마찬가지 입장에서 서로를 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경은 투항도 분명히 고려는 해보았지만, 자신이 투항 후에 안전할것이라는 보장은 할 수가 없고, 지금은 청조와 1:1로 마주대할 수 있는 입장이니 이를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정성공 시대부터 이어진 대만 개발이 효과를 거두어, 황무지 개간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어 풍작을 내어 생활이 여유로웠고 면화를 심어 자급자족할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해상 봉쇄책으로 분명히 대만도 타격을 입긴 했지만, 과거 명나라의 교역 금지로 정권이 붕괴 위협까지 받았던 청나라의 홍타이지에 비해 훨씬 여유로웠습니다. 바로 남중국해의 풍부한 교역 루트 때문입니다.
 
 
정씨의 선단은 이미 할아버지 정지룡의 시대부터 바다의 전설이자 남중국해의 해상왕이 되어, 교역으로 엄청난 부를 누렸습니다. 일개 해적에 불과한 정지룡이 복건 융무제 정권의 핵심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정경은 팽호를 문호로 삼고 일본, 필리핀, 월남, 태국, 육곤(六昆 : 섬라의 속국), 대니(大泥), 캄보디아, 자바, 동서양(동양은 필리핀과 브루나이 방면, 서양은 베트남과 말라카 방면)으로 자유롭게 통상 무역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금은과 약재 등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었고 필리핀으로서는 나무, 후추, 단향, 상아 등을 얻을 수 있었으며, 또한 식량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무역으로 원하는 바를 모두 얻고 흑자를 얻으니 회유 정책 따위가 귀에 들어올리 만무한 것입니다. 무기를 만들 재료도, 설탕이나 특산품을 동남아에서 구입하여 일본에 판매한뒤, 그 이익으로 재료를 사들여 만들면 그만입니다.


결국 누구를 위한 평화회담인지 모를 이 애매한 관계는 결국 삼번의 난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회의장에서 보이는 거짓된 미소와 내용 없는 인사치레는 모두 유리조각처럼 부서졌고, 이제는 오직 칼의 대화만 남아 있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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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탄 초인
13/06/25 21:24
수정 아이콘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눈팅만 하다가 댓글을 남깁니다.

좋은글 많이 부탁 드립니다. ^-^
몽키.D.루피
13/06/25 23:56
수정 아이콘
앞뒤로 nll이니 연예병사니 해서 오늘따라 강희제 이야기가 묻히네요;; 잘 보고 있습니다. 정경이 남중국해 해상왕이었다고 하니까 문득 신라시대 해상왕이라는 장보고는 어느 정도 였는지 궁금하네요.
Je ne sais quoi
13/06/26 08:3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역시 큰 일을 하는데는 결단력이...
13/06/27 18:09
수정 아이콘
계속해서 잘 보고 있습니다.
Black_smokE
13/08/13 16:48
수정 아이콘
혹시 몇부작으로 기획하고 계신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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