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9/12 11:03:11
Name 신불해
Subject 아부키르 만의 사투가, 전 유럽을 잠에서 깨우다 ─ 나일강 해전




"최근의 전투에서, 전능하신 신은 폐하에게 위대한 승리라는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¹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조지 3세(George III)에게 보내는 보고문 중에서

 "친애하는 넬슨, 이제 경은 진정으로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소." ²
 윌리엄 해밀턴 경(Sir William Hamilton)

 "이 승리로, 전 유럽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³ 
 캘커타 총독 모닝턴 경  




1798년 8월 1일~2일 



나일강 해전(Battle of the Nile) 혹은 아부키르 만 해전(Battle of Aboukir Bay)



프랑스 혁명 전쟁(French Revolutionary Wars) 중 벌어진 전투


프랑스 군의 이집트 시리아 원정으로 촉발된 싸움의 일부









나폴레옹의 상황





 무명의 청년 장교였던 나폴레옹은 툴룽 포위전(Siege of Toulon)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령에서 준장으로 계급이 올랐고, 당시 중앙 정치계의 핵심적 인물이었던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의 동생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Augustin Robespierre)의 주목을 받으며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ian Reaction)으로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조사를 받았고, 혐의를 벗었으나 후원자를 잃고 곤란한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방데미에르 13일 쿠데타에서 시위군을 완벽하게 진압함으로써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후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은 경이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승전을 거듭하였다. 몇 달 만에 12차례나 거둔 승전보는 드라마틱하게 보도되었고, 그는 전 유럽에서 중요성을 지닌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4) 당대 최고의 지휘관 중 한 사람이자, 아마 제정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군사적 인물인 (5) 알렉산드로 수보로프(Aleksandr Suvorov)는 친구와의 편지에서 자신이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역을 주목하고 있으며, 나라면 그를 이길 수 있다." (6) 라고 말하는가 하면, 호레이쇼 넬슨은 "프랑스군의 지상전은 마치 우리의 해전을 보는 듯하오. 그들은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고 휴전이라는 말을 모르는것 같소." (7) 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Treaty of Campo Formio)을 맺고 12월 5일 귀환 할 무렵에는 그의 이름이 프랑스 전체를 떠나가게 할 정도였다. 이는 당시 프랑스의 총재정부(Directoire)에겐 좋지 않은 신호였다. 나폴레옹이 수도권에 있다는것 자체가 총재들에게는 정치적 위협이었던 것이다. 


 이에 총재들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정세란 대단히 급박하여 오늘의 유명인이 내일이 되면 거리에서 처형을 당했고, 오늘 환호한 대중들은 내일이면 폭도가 되어 사람을 습격했다. 말하자면 눈 깜짝할 사이에 인기가 있다 사라지니, 나폴레옹에게 일거리를 하나 주어 유명세를 잦아들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는 나폴레옹 스스로도 "파리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이 없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나 역시 사라질 것이다." 라고 말한 데서 당시 사회상을 짐작 할 수 있다. (8) 이에 육군성에는 사무실 구석에 오랫동안 묵혀 있으면서, 몇번이나 재구상 되었다가 해군력의 부족으로 포기되었던 영국 원정 계획서를 꺼내들었다. 이것은 함정의 의도가 다분했다. 


 나폴레옹은 5만의 병력과 장교 선택권을 갖고 있었고, 서류상으로는 50여척의 호위 군함을 휘하에 배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 영국해협의 항구를 검토한 그는 1798년 2월 영국 침공계획은 불가능 하다는 의견을 냈다. 해군의 준비상태가 너무나 느려 희망이 없으며, 전함 대부분은 장비를 갖추지 못하였고 승무원도 없는 상태란 것이다.


 "영국 원정은 위장 전술로만 가능할 뿐,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앞으로 수년간은 영국 해군력에 절대우위를 확보할 수 없다. 제해권을 장악하지 않고 영국 기습한다는 것은, 역사상 가장 어렵고 무모한 작전이 될 것이다." (9)


 그 후 나폴레옹은 총재 중 한명이 되기 위해 손을 써보았으나, 나폴레옹의 나이가 너무 젊고 총재들 중에서 자리를 양보할 사람이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그때, 탈레랑(Talleyrand)은 영국 침공의 대안으로 이집트 원정을 총재정부에 권유했다. (10) 이집트 원정은 바로 나폴레옹이 원하는 싸움이었다. 이미 1797년 8월 16일 나폴레옹은 총재정부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진정으로 영국을 쳐부수기 위해서 먼저 이집트를 점령해야 할 때가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앞두고 있는 이 시기에 레반트에서의 우리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절차를 밟아야 할 절호의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11)


 당시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 대비해 레이날의 『동인도와 서인도의 역사, 1780』과 볼네이의 『튀르크인의 실전에 관한 고찰, 1788』을 읽었다. 볼네이는 이 책에서 "오직 한 가지만이 프랑스에 보상을 해줄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이집트 점령이다. 이집트를 통해 우리는 인도에 갈 것이며, 수에즈를 운항하는 옛 루트를 재건하면 회망봉 루트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썻다. (12) 말하자면 이탈리아에 있을 때부터 이집트 원정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 인지 '동방으로의 원정' 에 대단히 매료 되어 있었다.


 "부리엔(Bourienne), 나는 파리에서 꾸물거리는 것은 질색이야. 너무 따분하네. 그리고 총재들은 무엇 하나 들으려고 하지 않네. 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곳에 오래 있다가는 머지않아 틀림없이 파멸할 걸세. 파리에서는 모든 것이 엉망이고 나는 이제 영광으로부터 버림 받았네. 이 조그만 유럽은 내게 충분한 영광을 가져다 줄 수 없어. 동양, 동양으로 가야 해. 동양이야말로 모든 위대한 영광의 원천일세." (13)


 1월 경 나폴레옹은 부리엔에게 이런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기에, 그가 영국 원정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점도 무리는 아니다. 영국 원정이 무모한 계획이기도 했지만, 당시 나폴레옹은 '이집트'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에서 베르트랑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영국 파견군 최고 사령관으로 있을 때, 그 작전에만 전념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우선 영불 해협 연안의 아영지를 시찰했으나, 실제로는 동양 파견군 생각밖에는 염두에 없었다. 플랑드르나 벨기에에 있을 때에도 전령을 보내 지중해 연안 방면을 살펴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14)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필요한 보급품 내역을 제시했을 때 총재정부는 사실상 이미 그에게 설득당하고 있었다. 그들이 매력을 느낀 부분은 지중해 계획에 비용이 많이 들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점이었다. 나폴레옹은 병력 2만 5천을 요구했다. 이집트 원정의 기밀은 잘 지켜졌고, 원정 사실이 유럽 전역에 알려졌을 때 조차 그 목표는 아일랜드, 영국 해협, 포르투갈로 보여졌다. (15)


 그런데 5월 19일 이집트 원정군이 툴룽 항을 출발했을 떄 그 규모는 3월에 나폴레옹이 제시한 예상치보다 훨씬 거대했다. 병력은 3만 5천 명이 넘었다. 호위 함대 역시 13척이나 되었다. 또한 유명한 과학자 몽주, 베르톨레, 푸리에를 포함한 150여명이 넘는 학자들이 동행했는데 이로써 함대는 도서관과 각종 기구를 갖춘 '백과사전' 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학자들의 갑작스러운 승선에 군부는 상당히 당황했으며, 그들에게 질투를 느끼는가 하면 일부는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 항해 중에 나폴레옹은 학술원 회원들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러는 동안 전속부관이었던 앙도슈 쥐노(Andoche Junot)는 코를 골고 자다, 갑자기 깨어나서는 이렇게 외쳐댔다.


 "장군님, 다들 곯아떨어지게 만드는 건 다 이 터무니 없는 학자들 탓입니다. 장군님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16) 


 어찌되었건 전체 원정군의 외양은 실로 대단했다. 십자군 이래, 지중해에 이러한 규모의 함대가 등장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넬슨의 상황


 넬슨은 1758년 9월 29일 에드먼드 넬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가난하진 않아도 특별 할 것이 없는 집안의 인물이었으나, 권위 있는 윌폴 가문을 친척으로 둔 어머니 캐서린 서클링의 인맥 탓에 어느정도 행운을 손아귀에 질 수 있었다. 그 행운이란 외삼촌 모리스 서클링(Maurice Suckling)이었는데, 서클링은 1759년 10월 서인도제도에서 승리를 거두어 명성을 얻은 사람으로, 이는 넬슨이 해군 생활을 하는동안 초반의 출세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후 넬슨은 스스로의 능력을 바탕으로 성공을 거듭했다. 넬슨은 당대의 영웅이었던 새뮤얼 후드 경(Sir Samuel Hood) 밑에서 경험을 쌓았고, 존 저비스 경(Sir John Jervis)의 신임을 받으며 자신의 탁월함을 증명해보였다. 넬슨은 코르시카에서 한쪽 눈의 시력을 상실했고, 스페인 군대와 교전을 하며 파편을 맞아 탈장을 하여 기침을 할 때마다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는 '영광스럽게 죽기 위하여' 싸우는 듯 해 보였다. 넬슨은 부인인 패니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조국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중대한 영광의 임무 때문에, 당신과 한순간도 함께 있을 수 없소." (17)



 심지어 그는 위험천만한 테네리페(Tenerife) 공격에 나섰을 때는 오른쪽 팔꿈치 바로 위에 머스킷 총알을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부 상을 입었고, 응급처치로 살아나게 되자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배에 오르는것을 고부하고 왼팔을 사용해 갑판으로 오른 후, 그 자리에서 오른 팔을 절단했다. 장교 후보생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스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평소 그의 성격대로 흔들림 없이, 용감하게 수술을 받았다." (18)


 그리고 넬슨은 팔을 절단 한 지 한시간 만에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왼손으로 교전을 재개했다. (19)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일화지만 당연하게도 넬슨의 정신은 상당히 망가졌으며,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정신적, 육체적 요양기간을 가져야 했다. 테네리페 전투는 사전 정보가 충분치 않았다는 것이 극명해 보였으므로 넬슨의 경력에 피해가 가지는 않았다. 어느정도 휴식기간을 가진 넬슨은 다시 전선에 나서길 갈망했고, 마침내 그 시간이 왔다.


 넬슨은 유언장을 미리 작성한 다음 1798년 3월 29일, 자신의 기함 뱅가드(Vanguard)에 탑승했다. 해군의 수뇌(First Lord of the Admiralty)였던 스펜서 백작(Earl Spencer)은 세인트빈센트 백작이 된 저비스에게 연락을 보냈다.


 "호레이쇼 넬슨 경을 다시 귀하에게 보내게 되어 매우 기쁘오. 그보다 열정을 지닌 장교는 없을 것이라 믿고, 귀하 또한 틀림없이 그를 휘하에 두고 싶어할 거라 생각하오." (20)


 넬슨이 복귀한 4월 경, 그는 보나파르트 군단의 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영국 스파이들은 프랑스군이 대규모 이동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목적지 가운데는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저비스는 전략적 정찰을 위해 즉각 넬슨을 파견하였다. 넬슨은 출항 전에 저비스에게 약속했다.


 "제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추측할 수 없을 겁니다. 쉽진 않겠지만, 반드시 프리깃함 몇 척이라도 나포해 오겠습니다. 물론 더 좋은 전리품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21)


 


추격
 

 넬슨은 정보를 모았고, 며칠 동안 눈에 띄지 않게 순찰을 하기 위하여 5월 8일 날이 저문 이후 함대를 이끌고 당시의 위치였던 지볼리터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실바람이 불어 출발이 지연되는 바람에 스페인 포대에게 공격을 당하는 봉변을 당하였다. 


 5월 17일 툴룽으로 향했던 프리깃함 두 척 가운데 한 척이 툴룽에서 125킬로미터 떨어진 씨시에곶 앞바다에서 프랑스 코르벳함 한 척을 나포하는데 성공했다. 그 정보를 통해 보나파르트 군대에 대한 상당한 전력을 알아내는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들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넬슨은 툴룽 남쪽으로 약 135킬로미터를 순양한 결과, 이탈리아나 지볼리터 해협으로 향하는 선박을 한 척도 놓치지 않을 이상적인 장소를 발견헀다.


 당시 넬슨의 전력은 전열함이 세척이었지만 그는 그대로 싸울 요량이었다. 넬슨이 툴룽과 사르데냐 사이의 순찰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면 보나파르트의 함대를 포착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2)


 목표물이었던 나폴레옹은 5월 19일 기습적으로 출항을 강행했다. 그런데 마치 운명이 무엇인가를 끌어당기듯, 코르시카 동해안을 지나 남쪽으로 향하는 프랑스 함대를 빠르게 항진시킨 강풍이 갑자기 사나운 폭풍으로 변해 넬슨 함대에 타격을 주었다. (23) 5월 20일, 함대를 강타한 폭풍에서 다른 함선들은 비교적 피해가 적었으나 정작 넬슨의 기함인 뱅가드는 심각한 손상을 입고 말았다. 기함 함장인 에드워드 베리(Edward Berry)가 기상을 잘못 파악하여 돛을 모두 펼친 탓이었다. 


 뱅가드는 돛대가 밑둥부터 부러지며 전투 능력이 완전히 바닥났고, 넬슨은 안간힘을 써서 사르데냐만에 닻을 내리려 했으나 워낙 손상이 커 침로를 바꾸는 간단한 작업만 여덞 시간이 넘게 걸렸다. 또한 강풍으로 함대를 방해한 바람이 이번에는 너무 약해서 함대를 방해하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약해 강한 조류의 영향을 받아 정박지를 지나쳐 계속 표류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 뱅가드는 다른 선박인 알렉산더와 예인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넬슨은 낙담하여 알렉산더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예인줄을 끊으라고 명령했으나, 알렉산더의 함장 볼은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인내심을 가졌고, 5월 23일이 되서야 마침내 두 척의 전함은 산피에트로 섬과 북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안전하게 투묘 했다. 


RearCaptain Sir Edward Berry 1768




베리


 사실 그동안 볼을 잘난척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 넬슨은 닻을 내리자마자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후부터 넬슨은 볼의 조함술은 물론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판단력을 신뢰하였다. 실수를 한 베리에 대해서는 넬슨은 그 후 2개월만 집중적으로 간섭을 하긴 했지만, 그를 해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않고 믿어주었다. 그게 넬슨이 사람을 쓰는 법이었다. 이후 넬슨은 뱅가드의 수리에 전념하였다.


 그러는 동안 영국 함대는 한 척의 선박을 나포하여 프랑스군이 출항, 해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가운 소식도 전해졌다. 6월 7일, 증원 부대가 도착한 것이다. 넬슨은 이제 74문의 전함 열세 척을 지휘하게 되었다. 모두 영국에서 건조된 전함들이었다. 이후 넬슨은 끊임없는 순찰과 추적, 정비를 되풀이 하였다. 


 육지에 비하여 지중해는 방대한 영역에 비해 통신의 수단은 대단히 제한적이었고, 은신할 수 있는 항구들은 널려 있었다. 자비스가 보내는 소식들이 도착한다 해도 현장에서는 이미 늦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넬슨은 가장 확실한 수단, 즉 해상을 지나는 선박들을 찾아 나포하거나 중립국 선박들에게 질문하여 필사적으로 정보를 모았다. 프랑스 측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지나가는 함선들을 파괴하려고 애를 썻다. 프랑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넬슨은 5월부터 8월 사이에 최소한 마흔한 척의 크고 작은 선박들을 세워 정보를 얻어냈다.


 그 결과, 그는 보나파르트의 군대와 결코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해상에서 프랑스 함대를 추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4)





 넬슨이 사르데냐 서쪽 해안에서 강풍과 씨름하는 동안 보나파르트 군대는 더욱더 수월한 항로를 이용해 동쪽으로 향하면서 여러 파견대들과 연계해 몰타를 향해 가고 있었다. 6월 9일 그들은 몰타에 도착하여 다음날 상륙을 했고, 12일에는 몰타를 점령했다. 


 몰타는 과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걸 카를 5세(Karl V)은 요한 기사단(Knights of St. John)에게 몰타 섬을 넘겨 주었고, 대신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연안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선 몰타의 기사단은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하여 쓸모없는 압제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베르트랑은 이들이 "좋은 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25) 고 회고했다.

 나폴레옹이 몰타를 노렸던 것은 이미 1797년 9월 부터였다. 이 달 17일, 나폴레옹은 탈레랑에게 이러한 제의를 올렸던 것이다.


 "왜 몰타 섬을 점령하지 않습니까? 브뤼예스 제독이라면 몰타 섬에 닻을 내리고 그곳을 점거할 수 있습니다. 수도인 발레타 시를 수비하는 것은 400명의 기사들과 500명으로 편성된 1개 연대 뿐입니다. 1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기사들에게는 진절머리를 내고 있습니다. 기사들은 이제 살아갈 방법이 없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기 때문입니다. 사르데냐 왕이 우리에게 양도한 산피에트로 섬과 몰타와 코르푸 섬만 있다면 우리는 지중해 전체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26)


 과거 튀르크의 강력한 군대를 막아세웠던 몰타는 이제 예전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처량하게 몰락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별다른 어려움도 없이 몰타를 장악한 후,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일주일간 그 섬에 머물며 이 기간동안 섬의 기사단장과 기사들을 내쫒고, 군사와 민간 행정조직을 수립했다. 또한 귀족과 노예제도를 철폐시켰고 모든 몰타인들은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갖게 하였으며, 대학을 재건하고 60명의 몰타 젊은이를 프랑스에서 교육받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때서야 처음으로 부대 전체에 이집트가 목적임을 밝혔다.


 "제군들! 그대들은 지금 정복에 나섰다. 이 정복이 문명과 세계무역에 미칠 효과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대들은 영국에 치명타를 날리게 될 때까지 영국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고통스러운 타격을 가하게 될 것이다." (27)


 한편, 이 잡듯이 바다를 뒤지던 넬슨은 6월 14일, 적이 4일 전에 시칠리아 앞바다를 출발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최근의 풍향을 감안하면, 그들이 포르투갈이나 아일랜드 등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려고 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6월 15일, 넬슨은 마침내 핵심에 접근하였다.


 "그들이 시칠리아를 건너갔다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여 인도로 병력을 보낼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티푸 술탄과 동맹을 맺으려는 의도로 보이며, 이것은 생각보다 그리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28)


 하지만 정작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넬슨은 우선 나폴리로 가서 정보를 모으는 동시에 나폴리 사람들의 협력을 촉구했고, 프랑스군이 몰타에 있다는 믿을만한 정보를 입수한 후 재빨리 메시나 해협(Strait of Messina)을 통과해 이동하였다. 그리고 6월 22일 만난 라구사 지방의 상선을 통해 프랑스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말한 정보 중 '프랑스 군이 몰타를 떠났다' 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이 전해준 날짜는 실제 프랑스 군의 이동일 보다 3일 앞선 것이었다. 이로 인해 넬슨은 치명적인 오해를 하고 만다. 때마침 서풍이 불고 있었고, 넬슨은 프랑스군이 자신을 훨씬 앞서갔다고 여긴 것이다. 실제로는, 프랑스군이 몰타를 떠난 6월 18일 넬슨은 180킬로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넬슨이 내린 결론은 곧바로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가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 무모한 측면이 있었는데, 영국 해군은 지중해 동부로는 진출해 본 적이 거의 없었으며 영어로 된 해도도 없었다. 넬슨은 어떻게든 적을 추격하려고 했기에 가장 빠른 직선 항로를 이용해 쉴새 없이 추격했다. 그때, 프랑스 함대는 해안선을 따라 크레타 섬의 남쪽 해안을 바싹 따라가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넬슨은 적을 추격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추격' 이 아닌 '추월' 이 되어버렸다는 문가 발생했다. 직선 항로를 이용한 덕분에 넬슨은 프랑스 선단의 진로보다 훨씬 남쪽을 지나쳐버렸다. 그가 지나는 길에는 프랑스 함대의 오물이나 쓰레기, 낙오된 사람들이나 선박들도 없었을 테니, 넬슨 스스로도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수 있다. 넬슨은 6월 28일 늦게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앞바다에서는 프랑스 선박이라고는 단 한 척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 날, 부하를 육지로 파견한 결과 영국 영사는 찾을 수 없었고 이집트 사람들 역시 전혀 혼란의 기색이 없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넬슨은 자신의 확신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고, 6월 30일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며 북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 곳에 프랑스 함대가 없다면, 최대한 빨리 이동하여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넬슨이 떠난 25시간 후, 저 알렉산드리아의 지평선 끝에서 수십척의 함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함대가 도착한 것이다. (29)





 전투 전야


John Jervis

저비스

 훗날 넬슨은 이 일로 자비스에게 몇 번이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이 위험한 임무에 최고의 함정, 최고의 병력을 모조리 지원한 세인트빈센트 백작 자비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안달이 나 있었다. 가끔 올라오는 이 후배의 보고에는, '풍랑을 만나 돛대가 떨어지고, 프리깃함들이 퇴각하고, 무모한 시도' 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적혀 있으니, 걱정하는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비스는 자기 스스로도 넬슨과 함대가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모르면서도, 해군성의 해군 장교들이 넬슨에 대해 퍼붓는 편협한 비난으로부터 넬슨을 보호하려 애를 썼다. (30)


 넬슨이 물러나고 25시간 뒤, 날짜로는 이틀 뒤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7월 2일 상륙 2시간 만에 기습적으로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그는 넬슨 함대가 불과 하루이틀 앞에 도착을 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륙하여 클레베르(Jean Baptiste Kleber)에게 병력 6천명을 주어 알렉산드리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2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카이로로 이동했다. 끔찍한 더위와 낙오자를 잡아 고문하고 강간하며 신체를 절단해 살해하는 베두인을 버텨야 하는 지옥같은 여정이었으나, 피라미드 전투(Battle of the Pyramids)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카이로로 입성하였다. (31) 


Fran

브뤼예스


 육상 작전은 문제가 없었으나 걸리는 부분은 역시 해상의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해전에는 문외한이었으나 현재 싸움이 벌어지면 승산이 적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고, 싸움을 피하려고 한다면 함대가 알렉산드리아 구항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함대가 코르푸로 향하는것은 나폴레옹이 거절했다. 그러나 브뤼예스(Brueys) 제독은 이를 꺼리면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17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아부키르 만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프리킷함 '아레스스트' 함장인 발레 대위는 알렉산드리아 구항을 조사하여, 함대가 충분히 입항이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7월 13일 제출했다.


"제독 각하, 알렉산드리아 3개 수로는 중앙과 양 옆 몇 개의 암초를 파괴하면 충분히 심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들 암초는 매우 약하기 때문에 그것을 파괴하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32)


 그러나 브뤼예르는 '만족스러운 보고서가 아니다' 라며 나폴레옹은 이를 듣고 부관인 줄리앙을 파견하여 이동을 재촉했으나, 줄리앙은 도중에 현지인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헌데 8월 2일, 7월 30일 경 브뤼예스가 보낸 편지가 도착하였다. 아부키르 만에서 나와 알렉산드리아 구항으로 대피한다는 내용이었다. (33)


 나폴레옹은 이를 듣고 한시름을 덜었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바로 그 전날 넬슨의 함대는 아부키르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개전



넬슨은 프랑스군이 터키로 향했을 가능성 때문에 이틀 동안 북쪽으로 항해하다, 결국 시칠리아로 향로를 바꿨다. 그는 7월 20일 시칠리아에 도착했으나 프랑스 군에 대한 소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급을 받은 넬슨은 7월 24일 다시 정처없이 바다로 나섰다. 정보의 퍼즐을 맞춘 넬슨은 다시 한번 이집트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것이 늦어 보였고,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프랑스 군은 육상에 있을테고, 프랑스 함대 역시 위험을 벗어나 항구에 안전하게 정박해 있을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이집트로 가서 항구를 봉쇄한다고 해도, 금세 보급품이 떨어져 아무 성과도 없이 기진맥진 지브롤터로 비참하게 되돌아 갈것만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어마어마한 야망처럼 "아크레를 손아귀에 넣고, 자신의 병사들에게 터번을 두르고 터키식 바지를 입게 하며, 그들을 자신의 '성스러운 불사대' 로 삼아 '이수스 전투' 에서 대승하고, 동방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파리로 귀환" (34) 하였을지 모른다. 아니면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여 강화를 하고, 사파비 왕조 이란의 지지를 얻고, 인더스 강에 군세를 전개하여 영국을 인도에서 몰아내" (35) 었을지도 모른다. 운명의 여신이 그렇게까지 보나파르트를 돕는다면, 대체 무엇이 불가능하겠는가?


 그리고 그 무렵 각료들은 이런 결론을 이미 내리고 있었고, (36) 그 사실을 알았다면 넬슨은 스스로가 더욱 비참해 졌을 것이다. 프랑스의 함대를 전멸시키고 보나파르트와 그 미래의 '나폴레옹 제국의 원수들' 을 수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인도 제국을 프랑스의 공격에 노출시키게 되었으니 말이다. 넬슨은 그 당시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에 그의 심리상태를 알 수 없다. 


 8월 1일 새벽, 참담한 기분으로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을 넬슨은, 그러나 또다시 한 척의 전함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두번째 경험이었지만, 첫번째의 경우가 당혹스러움이라면 이 경우는 희망적이었다. 항구에는 공격받을 위협이 적은 프랑스 군수 물자 수송선만이 가득 있었던 것이다. 오후 3시가 조금 안 되어 마침내 영국 함대는 프랑스 군의 돛대를 발견했다.


 넬슨은 이 소식을 듣고 갑자기 성대한 만찬 자리를 가졌다. 장교들은 전투를 위한 건배를 하고, 바로 기다리던 적군을 보기 위해 갑판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은 영광과 포상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에, 혹은 목표물을 찾았다는 안도감에 몹시 들떠 있었다. 전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국 함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두 척은 알렉산드리아에 있었고, 다른 한 척의 배는 나포한 배를 끌고 오느라 13킬로미터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넬슨은 자신이 선택의 순간에 놓였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전투를 치룰 것인가? 아니면 기습의 이점을 버리고 다음 날 다시 기회를 잡을 것인가? 넬슨은 전자를 택했다. 3시가 되기 직전, 그는 전 함선에 프랑스군을 향해 나아가라는 신호를 보냈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함선들을 불러들였으며, 나포한 배는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넬슨의 뱅가드는 다른 몇척과 함께 가장 선두에 나섰다. 수심을 측정하고 대열을 형성한 넬슨의 함대는 5시 30분 이후부터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는 브뤼예스는 2시 무렵부터 나와 전투 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그의 병력 가운데 상당수가 보급을 받으러 해안에 가 있었고 대부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불러들이기 쉽지 않았다. 함정들 가운데 몇 척은 심지어 정원이 200명이나 부족했다. 브뤼예스는 필사적으로 사람을 배치했지만, 넬슨은 그 순간을 포착하고 달려들고 있었다.


File


 넬슨은 이미 4시 22분 경에 필요한 신호를 모두 보냈고, 어둠이 내린 후의 오인 사격을 막기 위하여 신호등까지 설치했다. 영국 해군의 선두함의 책임을 맡은 함선 골리앗(Goliath)은 프랑스 전열의 선두함을 돌면서 게리에르(Guerriere) 뱃머리에 사격을 시작했다. 이에 게리에르는 심각한 손상과 인명 피해를 입었다. 게리에르에는 쓸데없는 물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그 모습은 골리앗에서도 보였다. 적은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이다.


 골리앗은 그대로 돌면서 프랑스 전열의 두 번째에서 세 번째 함선 사이에 멈추었다. 그 뒤를 이어 젤러스(Zealous)는 게리에르에 공격을 가하고 유리한 위치에 멈추어섰다. 어데이셔스(Audacious) 역시 게리에르를 공격하고 게리에르와 그 뒤에 있는 프랑스의 '콘퀘란트' 사이에 닿을 내렸다. 


 오리온(Orion)은 프랑스의 세 번째 전함 '스파르티아트' 를 공격할 생각으로 영국의 전함들을 제치고 좀 더 먼 해안을 나아갔다. 이때, 적의 프리깃함 '세리외즈'가 사격을 가하자 일제 사격으로 한번에 침몰시키고는, 본래의 목표물을 지나쳐 다섯 번째 프랑스 전함인 '푀플 수브랭' 에 멈추었다. '테세우스' 가 그 뒤를 이어 젤러스와 게리에르 사이를 지나며 공격을 가하고, 스파르티아트 쪽에 위치를 잡았다.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던 넬슨은 자신의 뱅가드를 이끌고 스파르티아트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미노타우로스와 디펜스 두 척이 뱅가를 따라 좀 더 아래로 내려가고, 아퀼리옹과 푀플 수브랭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반면 '벨레로폰' 은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3층 갑판의 '오리앙' 쪽에 멈추었고, '미제스틱' 은 '에뢰스' 앞에 멈추어 서서 일방적으로 사격을 당했다. 목표물을 제대로 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였다.


 나포한 함선을 가지고 있던 '컬로든' 은 여울에서 좌초하여 이 유례없는 격전을 지켜만 봐야 했다. '알렉산더' 와 '스위프트슈어'는 8시 무렵 전장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서 엄청난 연기와 대포의 굉음이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알렉산더의 함장 볼은 벨레로폰을 격파하여 표류하게 만든 오리앙의 함미에 다가섰다. 이때까지 교전을 하고 있지 않던 '리앤더' 는 컬로든을 구할 생각이었지만 컬러든의 함장 트로우브리지는 전투에 합류하라고 권하였고, 9시가 되서 마침내 전장에 접어들었다. 


File



 넬슨의 전함 열 세척 중 열 두 척이 전투를 치루고 있었다. 이 시기의 함대 전투란 분 단위의 싸움이 아닌, 시간 단위의 싸움이었다. 해상 전투는 장기간 지속되어 승부가 나기까지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그 와중에 상대적으로 정확한 일제 사격을 가하는 영국군은 점차 프랑스군을 압도해나갔다. 모두가 기진맥진했지만, 프랑스 군은 육체적인 부분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프랑스 장교들은 승리를 포기하고 영광스럽게 죽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쏟아지는 포격 속에 안전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이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승리를 목전에 둔 넬슨이라고 해도 말이다. 넬슨은 프랑스의 대인 공격용 유탄에서 튀어나온 쇠구슬을 머리에 맞았다. 머리의 살점이 찢겨져 나간 심각한 부상이었다. 충격을 당한 넬슨은 잠시 쓰러질 뻔 했지만 베리가 옆에서 그를 부축했다. 넬슨은 엄청난 피를 흘리면서 베리에게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죽노라. 부디 내 아내에게 안부를 전해 주시게." (37)


 하지만 베리는 급히 응급조치를 했고, 넬슨도 조금 정신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베리는 넬슨을 사관실로 옮겼는데, 그곳에서는 부상병들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넬슨은 치료를 거부하면서 버텼다. 자신보다 훨씬 부상이 심각한 병사들이 많은데, 자신이 사령관이라고 먼저 치료를 받을 수는 없으니 차례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군의관 제퍼슨은 이를 무시하고 넬슨의 상처를 소독하고 반창고와 붕대를 붙였다. 


 넬슨은 하고 싶은 말을 적기 위해 비서를 불러 보고서를 작성하려 했지만, 몇 마디 작성하던 후에 두 사람은 이를 그만두었다. 넬슨은 다시 갑판으로 올라왔다. 전투는 거의 끝이 나고 있었다.


File

 게리에르, 콘퀘란트, 스파르티아트는 거의 전멸당하여 결국 항복하였다. 아퀼리옹 역시 공격을 받아 버티기 힘들었으며, 푀플 수브랭은 용감히 싸웠지만 닻줄이 끊어지자 표류했다. 브뤼예스의 기함 오리앙이 가장 어려운 적수였다. 워낙 강력한 방어력을 가졌고, 선체 높이와 사격의 강도가 강력했기 때문이다. 영국군 사상자의 4분의 1은 오리앙의 공격을 받은 벨레로폰에서 나왔다.


 하지만 너무 많은 공격을 받은 탓에 브뤼예스도 사망했고, 오리앙에서는 배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오리앙의 프랑스 병사들은 불 속에 죽 던지, 어둠 속의 바다에 몸을 던져 빠져 죽던지의 가로에 놓여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넬슨은 마지막 남은 보트 한 척을 보내 그들이 목숨을 구하게 했다. 



File


11시, 마침내 오리앙의 화약고 두 개가 장렬하게 폭발하며 전투는 종결되었다. 나머지는 소탕전에 불과했다. 프랑스의 전함 열 척과 프리깃함 한 척은 나포당하거나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런데, 프랑스 군의 후위에는 피에르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의 손상되지 않은 전함 세 척과 프리깃함 세 척이 아직 남아 있었다. 피에르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 브뤼예스 제독의 기 신호만 기다렸다." (38)


 빌뇌브는 그렇게 말했으나 차라리 두려움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못한 것처럼 보인다. 빌뇌브는 새벽이 가고 정오가 될때까지 머뭇거리다가 도망쳤다. 브뤼예스의 신호를 기다렸다 쳐도, 오리앙이 격파되어 그것이 불가능해질 무렵부터 정오까지는 13시간에서 14시간 무렵이 된다. 빌뇌브는 그 시간 동안 싸움을 구경만 하다 달아났다. 


 



1793년 이전의 함대전은 주로 단종진을 형성하여 양측이 현측을 마주한 채 전투에 돌입되었으며, 이는 패전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가장 궁극적인 방어 전술이 되었으며 이로인해 많은 '이기길 바라기보다, 패배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소극적인 제독들이 양산되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공격적인 제독들이 등장했으며, 그 절정은 바로 넬슨이었다. 


 넬슨이 입은 그 무수한 부상 전력에서 보이듯이, 그는 무서울 정도로 적에 가까이 붙어 싸우는 것을 즐겨했다. 넬슨은 영국 함대의 포격 속도에 대해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해군은 그 당시 존재하던 모든 군사적 조직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조직 중 하나로, 수십, 수백년에 걸쳐 쌓아온 경험과 노련미, 인재들의 풀을 자랑하고 있었다. 넬슨 역시 후드나 자비스 같은 위대한 선배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지 않았던가? 


 이에 비해 프랑스 해군은 확실히 영국 해군에 비해 열등했다. 프랑스 혁명이 '대육군' 의 위대함을 알렸다면, 해군에 있어서는 치명타였다. 해군은 전문기술로, 그것은 '혁명정신' 과 같은 추상적인 면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 이에 프랑스 함대는 과거 미독립전쟁에서 보여주었던 성공들을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이 싸움으로 인해 '동양의 지배자' '알렉산드로스의 길' 을 걷겠다는 나폴레옹의 야망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은 북아프리카에 '감금' 되었으며, 설사 그들이 수차례 압도적인 승리와 성공을 거둔 다 할지라도 이는 공허한 싸움에 지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인도로 진격하여 서사시를 작성하겠다는 나폴레옹의 꿈은 아크레에서 활력을 잃고 멈추어버렸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시절에 대하여 "내 인생 최고로 이상적이었던 한때." (39) 라고 회고했다. '플루타코스적 인간' 이라는 평을 듣던 그로서는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와 같은 이상을 실현 할 수 있었던 시기였을 수 있지만, 그 꿈은 아부키르 만에서 꺾이고 말았다.


 영국은 '한번의 승리' 가 필요했다. 해군은 유례없는 위협을 받고 있었고, 영국의 동맹국들도 붕괴되었으며, 프랑스군은 저항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이처럼 끊임없이 숨통을 죄어오는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은 해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 뿐이었다. 스펜서는 저비스에게 이렇게 강조한 적이 있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단 한번의 승리라도 거둔다면, 그것은 이후에 스무 번의 승리를 거두는 것과 같을 것이오." (40) 



파일



 아부키르만의 승리를 들은 프랑스의 적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합스부르크가 가진 최고의 패 - 젊고 기민한 카를 대공이 움직였으며, 파벨 1세는 전설의 노장 수보로프를 다시 한번 불러들였다. 전 유럽이 다시 한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보나파르트는, 더 이상 이집트에서 머무를 수가 없었다.
 




글이 길게 쓰면 잘려서 인용 부분은 그냥 생략하겠습니다 -_-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9-30 18:05)
* 관리사유 :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설탕가루인형형
13/09/12 11:23
수정 아이콘
갑자기 유럽으로 넘어왔군요~
swordfish
13/09/12 11:33
수정 아이콘
그 후 넬슨은 시실리아에서 들려 어떤 여자랑 눈이 맞게 되는데...
13/09/12 12:51
수정 아이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Je ne sais quoi
13/09/12 13:3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3/09/12 13:39
수정 아이콘
전유럽이 잠에서 깨어나면 뭐하겠습니까, 나폴레옹은 당시 역대급 OP...

넬슨쨔응... 아부키르 만 해전은 정말ㅜ.ㅜ
설탕가루인형형
13/09/12 15:20
수정 아이콘
근데 시점이 문제지 영국해군은 언제든지 프랑스 해군을 박살낼 수 있었으니 애초에 계획 자체가 실현 가능성이 적었던게 아닐까요?
신불해
13/09/12 15:56
수정 아이콘
영국 해군이 숙련도 면에서 프랑스 해군보다 압도적인건 분명하나(사실 프랑스 혁명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해군도 굉장한 수준이지만), 소위 말하는 '스펙' 이라는 측면에서까지 압도했던건 아닙니다. 나일 해전 당시 넬슨의 부대는 세인트빈센트 백작 자비스가 탈탈 털어 도와주기도 한 부대였고, 앤드루 램버트는 '단 한번의 싸움으로 해상에서 완전한 우위를 굳혔다' 며 나일 해전이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나이트해머
13/09/12 16:10
수정 아이콘
절대왕정기까지 함선의 스펙은 프랑스가 영국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영국 함장들이 매의 눈으로 노리던 게 노획된 프랑스 배였지요.
선원들의 실력에서는 영국이 앞서는데, 이것도 루이 16세 전후로는 거의 대등한 수준에 도달합니다. 미국독립전쟁을 비롯한 여러 전역에서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과 맞먹는 실력을 과시하며 몇번이나 영국을 위기로 몰아넣었죠. 근데 대혁명이 터지고 나니까...
지금뭐하고있니
13/09/12 15:26
수정 아이콘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이다~~하하

긴 연재를 부탁드립니다^^
불굴의토스
13/10/02 11:22
수정 아이콘
저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어떻게 탈출했나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441 해외직구대행 1년차 잡설 [33] 이러다가는다죽어1894 22/02/14 1894
3440 [슬램덩크 이야기]내 마음속 최고의 디펜서 허태환!! [73] BK_Zju1626 22/02/13 1626
3439 관심사 연표를 공유합니다(문학, 영화, 철학, 음악, 미술, 건축 등) [23] Fig.11936 22/02/10 1936
3438 [잡담] 과학상자 3호 [25] 언뜻 유재석1800 22/02/08 1800
3437 술 먹고나서 쓰는 잡설 [35] 푸끆이1700 22/02/06 1700
3436 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 특별기획 - 배캠이 사랑한 음악 100(1) [18] 김치찌개1578 22/02/05 1578
3435 [성경이야기]모세의 죽음과 다음 지도자 [11] BK_Zju1273 22/01/17 1273
3434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작은 라팔을 만들어 봅니다 [28] 한국화약주식회사2348 22/02/04 2348
3433 어떻게 국내의 해양플랜트 업계는 망했는가? [30] antidote2584 22/02/04 2584
3432 [테크 히스토리] 22kg → 1kg 다이어트 성공기 / 노트북의 역사 [22] Fig.12086 22/02/04 2086
3431 기계공학과는 어쩌다 취업이 어려워졌는가? - 14학번 기계공학도의 관점에서 [68] 새강이2329 22/02/04 2329
3430 [성경이야기]솔직히 이집트 사람 입장에서 억울하지 않나? [25] BK_Zju7819 21/01/05 7819
3429 [스포]누가 좀 시원하게 까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우리 학교는 [53] ipa3557 22/02/02 3557
3428 남산에서 바라본 사계절 [38] 及時雨2060 22/02/01 2060
3427 글 잘 쓰는 법 [24] 구텐베르크3160 22/01/28 3160
3426 [끄적끄적] 3살 아이는 티라노를 좋아한다. [35] 구준표보다홍준표2895 22/01/28 2895
3425 [성경이야기]지도자 훈련을 받는 요셉 [9] BK_Zju4108 20/12/22 4108
3424 [역사] 붕어빵 꼬리에 팥이 있어야할까? / 붕어빵의 역사 [30] Fig.12010 22/01/17 2010
3423 2년 간의 방송대 졸업 분투기 및 약간의 가이드 [32] Dr. ShuRA2178 22/01/16 2178
3422 상나라의 인신공양을 알아봅시다 [44] 식별2441 22/01/16 2441
3421 실천해보니 좋았던 직장내 소소한 습관들 [42] visco2678 22/01/16 2678
3420 [성경이야기]야곱의 거짓말 [21] BK_Zju5386 20/12/10 5386
3419 난 뭘 벌어먹고 살 것인가 [77] 깃털달린뱀5082 22/01/15 508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