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4/10/28 21:03:09
Name ZolaChobo
Subject 서태지가 대장이고 신해철이 마왕이던 때가 있었겠지
...정말 오랜만에 pgr 에 글을 쓰네요. 개인적인 페이지에 끄적였던 글인데, 더 많은 분들과 기억을 나누고 싶어 올려봅니다.

욕설과 다소 거친 언사들이 있습니다만, 원문 그대로 옮겨봅니다.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


군대를 다녀와서도 서태지를 대장이라 칭하고, 신해철을 마왕이라 부른다면 열외 없이 병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의한다. 모두가 중2를 보냈었고 기형도와 하루키를 빨던 시절을 가졌듯, 서태지가 대장이고 신해철이 마왕이던 때가 있었겠지.

소년에겐 영웅이 필요한 법. 지금 돌아보면, 그는 내게 삼촌쯤이 아니었을까. 많은 이들에게 그랬을 것이다. ‘좀 놀아본’데다 똑똑한, 꽉 막힌 나의 아버지와는 달리 젊고 멋진 어른. 분명 어른인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던 놀라운 사람. 그렇게 한때 나의 영웅이고 마왕이던 자는 좀 더 머리가 큰 내겐 유치한 어린 시절의 흑역사가 됐다. 마치 유년기의 영웅이던 아버지가 무너져 내리듯. 그럼에도 내 소년기의 영웅은 평생을 흔드는 법.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신해철의 비판적 지지자다. 그런데 비판적 지지라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 그인 것 같다.'

천재 뮤지션이냐고? 주저 없이 아니라고 답하겠다. 이 사람은 노력으로 음악을 했으며, 평생을 천재 컴플렉스에 시달렸다. 그의 재기는 20대 초중반에 모두 소진됐으며, N.EX.T 4집 이후의 신보는 자극이 되지 못했다. 그의 삶에서 음악이 지워지고 언설만 남았던 것이 그때 즈음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지금 신해철의 부고에 이리도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이유다. 이 사람은, 하늘 위의 고고한 천재가 아니라 라디오에서 욕설을 섞어가며 반말로 사연을 읽어주고 만화와 게임 이야길 나누던 동네 삼촌이었다. 동시에 단순한 뮤지션이 아닌 아티스트의 삶을 살았다. 난 ‘대학가요제가 낳은 최후의 스타’ 라는 수식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한국 대중가요 씬 최후의 락스타’

태도의 문제다. ‘맘대로 살아. 하고 싶은 걸 해’를 외치고 그대로 살던 그 태도. 재능이 말라붙었을 때조차 끊임없이 사운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이를 실험하던 음악에 대한 열정. 장관직을 제의해도 ‘내가 고작 장관 따위 하러 음악을 하는 줄 아는가’ 라며 역정을 내는 자부심. ‘나는 NL도 PD도 아니었다. 굳이 얘기하자면 IS쪽’ 이라 말할 수 있는 곤조 같은 것 말이다. 그는 20대 초반에 이미 음악으로 일가를 이뤘다. 초기작에서 빛나는 미디의 활용은 대중음악의 방법론을 갈아 엎었고(째즈 카페를 들어보라.) N.EX.T의 볼륨감 넘치는 메탈 사운드는 다신 메인 스트림에서 시도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해철이 나 같은 평범한 리스너에게 남겨준 건 이런 ‘음학’적인 것들이 아니라, 그가 말하고 쓰고 노래하던 섹시한 삶의 태도와 가치관 같은 것이었다. 구라 좀 보태서, 나와 당신의 중2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신해철이다.

다른 386들이 그렇듯 그 또한 낡았고, 때론 틀리기도 했다. 그래, 까놓고 유치했다. 하지만 ‘유치하다고 말하는 건 더 이상의 꿈이 없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상과 필통 안에 붙은 머리 긴 락스타’중 하나가 내겐 신해철이었다. 그렇게 불멸을 노래하고 스스로 불멸이 되어도 인간은 죽는다. 다만 그 죽음의 때와 방식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의료사고에 인한 황망한 죽음 따위는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는다. 이게 이 나라 최후의 락스타가 세상을 떠나는 법이란 말인가.

‘눈을 뜨면 똑같은 내 방 또 하루가 시작이 되고, 숨을 쉴 뿐 별 의미도 없이 또 그렇게 지나가겠지’를 읊는 요즘이다. 창 밖에 돌아온 서태지는 예전과는 달라 보이고, 이젠 주저 없이 아이돌의 힘을 빌린다. 그리고 신해철은 죽었다. 20대 초반에 세상을 뒤엎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을 가졌던 이들이 결국 스스로의 대체재를 찾지 못한채 사라지고 있다. 직관으로, 한 세상이 끝나가는 것 같다. 그와 함께했던 누군가들의 유년기와 함께.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4-12-18 19:47)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4/10/28 21:17
수정 아이콘
하이버리 분이신가 보군요 반갑습니다. 흐흐
ZolaChobo
14/10/28 21:44
수정 아이콘
반갑습니다. 하이버리 - PGR 러들이 많은 것 같더라구요
14/10/28 21:36
수정 아이콘
진짜 부고를 듣고 나서는 제 어린시절이 날아가고 늙어버린 느낌?
8,90년대를 대표한 마지막 로맨티스트이자 락스타가 사라졌다는 말이 있던데... 공감되더군요.
오렌지샌드
14/10/28 23:22
수정 아이콘
서른이 훌쩍 넘은 제게 타협하지 않는 반골정신이 있다면, 그 팔할이 아니라 전부가 신해철에게서 왔습니다. 잃고나서야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게된다는게 정말이었네요.
王天君
14/10/28 23:34
수정 아이콘
신해철의 죽음에 울적하면서도 팬도 뭣도 아니어서 뭘 쓰기에는 좀 뭐했는데, 제가 느낀 바를 정말 고대로 써주셨네요.
카랑카
14/10/28 23:44
수정 아이콘
참 안타깝습니다.
엘케인
14/10/29 08:05
수정 아이콘
가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내 어린 시절의 전부였던 것을.
그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볼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오늘 저녁, 그의 안식을 빌러가봐야겠네요. 그냥은 못있겠어요.
로랑보두앵
14/10/29 09:08
수정 아이콘
정말 좋은글이네요
참새 방앗간
14/10/29 12:43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중2의 팔할, 공감합니다.
Thanatos.OIOF7I
14/10/29 13:38
수정 아이콘
저는 서른 넘은 지금도 대장, 마왕, 공장장.. 이러고 사는데요ㅠㅠㅠ 흙흙
14/10/29 15:14
수정 아이콘
제나이 중2때 안녕의 랩을 읊조리며 ~굿바이 그랬는데....
참...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네요.
시지프스
14/12/19 10:22
수정 아이콘
마흔이 된 지금도 그는 제게 마왕입니다..애써 답글을 달지 않으려 했는데 달게 되었네요. 중2때 들었던 우리앞에 생이 끝나갈때는 중2병의 극에 달해 있던
저와 제 친구들에게 바이블과도 같은 곡입니다. 넥스트4집을 내무반 왕고가 되었을때 행정반과 내무반 후임들은 질리도록 들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395 가볍게 쓰려다가 살짝 길어진 MCU 타임라인 풀어쓰기 [44] 은하관제4399 21/12/07 4399
3394 고인물들이 봉인구를 해제하면 무슨일이 벌어지는가? [66] 캬라10286 21/12/06 10286
3393 [역사] 북촌한옥마을은 100년도 안되었다?! / 한옥의 역사 [9] Fig.14285 21/12/06 4285
3392 굳건함. [9] 가브라멜렉3587 21/12/02 3587
3391 로마군의 아프가니스탄: 게르마니아 원정 [57] Farce4399 21/12/01 4399
3390 올해 국립공원 스탬프 마무리 [20] 영혼의공원4071 21/11/29 4071
3389 꽤 행복한 일요일 오후였다. [15] Red Key3797 21/11/23 3797
3388 [도시이야기] 경기도 수원시 - (3) [12] 라울리스타3310 21/11/16 3310
3387 신파영화로 보는 기성세대의 '한'과 젊은세대의 '자괴감' [23] 알콜프리4992 21/11/15 4992
3386 <1984 최동원> 감상 후기 [23] 일신5265 21/11/14 5265
3385 김밥 먹고 싶다는데 고구마 사온 남편 [69] 담담11322 21/11/11 11322
3384 [스포] "남부군" (1990), 당황스럽고 처절한 영화 [55] Farce4097 21/11/10 4097
3383 나의 면심(麵心) - 막국수 이야기 [24] singularian3356 21/11/05 3356
3382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1) [26] 글곰3979 21/11/03 3979
3381 일본 중의원 선거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들 [78] 이그나티우스6785 21/11/03 6785
3380 [NBA] 영광의 시대는? 난 지금입니다 [28] 라울리스타6561 21/10/22 6561
3379 [도로 여행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이 올라가는 도로, 만항재와 두문동재 [19] giants4766 21/10/30 4766
3378 [역사] 이게 티셔츠의 역사야? 속옷의 역사야? / 티셔츠의 역사 [15] Fig.13761 21/10/27 3761
3377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12] Farce3575 21/10/24 3575
3376 누리호 1차 발사에서 확인 된 기술적 성취 [29] 가라한7490 21/10/21 7490
3375 [도시이야기] 인천광역시 서구 [41] 라울리스타5899 21/10/19 5899
3374 [ADEX 기념] 혁신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는 헬리콥터 이야기 [22] 가라한5536 21/10/18 5536
3373 [역사]청바지가 500년이나 됐다구?! [15] Fig.16292 21/10/18 629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