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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8/11 17:25:09
Name 돈보스꼬
Subject 실현되지 않은 혁명: 왜 한국에서는 ‘인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최근 어느 수업에서 작성해 본 글입니다. 자료를 조사해보고 쓰려고 해 봤는데, 제 전공이 역사 쪽이 아니어서 조금 자신없는 부분도 있네요. 만약 본문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역사 전공자 내지는 해당 주제에 관해 알고 계신 분들의 지적/수정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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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1999년에 <타임>지는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 즉 ‘the Man of Millennium’을 발표한다. 이 인물은 뉴튼이나 아인슈타인같은 천재도, 징기스 칸이나 나폴레옹같은 정복자도 아니었다. 이는 15세기 독일의 마인츠에 살았던 인쇄공, 구텐베르크였다. 그는 처음으로 유럽에서 금속활자 인쇄기를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가 ‘밀레니엄의 인물’로 뽑힌 것은 한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금속활자가 한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이다. 실망스럽게도,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국인을 제외한다면,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데, 한국의 금속활자 발명이 가졌던 역사적 영향력이란 구텐베르크의 발명에 비교하면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5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열린 정보기술 컨퍼런스에서, 당시 미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는 개막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한국은 이 기술을 국가 전반에 지식을 퍼뜨리는데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왜 이러한 ‘실패’가 생겨났는지를 몇 가지 요인들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한국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몇 가지 환경들을 정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내가 제시하려는 요소는 세 가지이다. 기술적 후진성, 언어적 장벽, 그리고 사회적 상황.

2. 기술적 결함

한국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발명품에 비해 지녔던 기술적 후진성을 미미했던 역사적 영향력의 첫 번째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금속활자가 처음으로 개발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속활자가 곧바로 목판인쇄술에 비해 우위를 점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금속활자술은 (우리가 흔히 ‘금속활자’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떠올리는) 대량인쇄와는 거리가 멀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술은 인쇄 과정을 조금도 더 간단하거나 빠르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목판인쇄와 비교하면 필요한 노동력은 거의 같거나 그 이상이었다. 목판활자술이든 금속활자술이든, 기술자들은 철저한 수공업적 과정을 통해 인쇄를 진행했다. 그들은 활자 블록에 잉크를 묻히고, 여기에 종이를 일일이 펴 바른 뒤 눌러서 인쇄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금속활자술은 상당히 번거로운 작업을 필요로 했는데, 왜냐하면 각 활자 블록들을 조립하는 과정도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쇄 속도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금속활자는 목판활자에 비해 그리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오히려 금속활자 인쇄술의 속도는 답답할 정도였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왕조에서 처음 만들어진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사용할 때, 숙련된 인쇄공이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양은 고작 몇 페이지에 불과했다. 세종대왕 때 몇 가지 기술적 개선이 이루어진 뒤에도,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최대치는 40페이지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국의 금속활자는 책의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목판인쇄에 비해 금속활자 인쇄가 가졌던 우위는 다품종 소량생산이었다. 중국에서 다양한 서적들이 수입될 때, 이에 대해 일일이 목판을 제작하기보다는 금속활자를 조립하여 만드는 것이 더 유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인쇄의 주류 위치를 차지했던 것은 목판인쇄술이었다.
  이러한 기술적 결함은, 우리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술에 주목해 본다면 더욱 명확해진다. 1436년에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 인쇄기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인쇄기에서 흥미로운 특징은 집에서 사용되던 포도주 압착기(press)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이는 우리가 프린터를 ‘프레스’라고 부르는 것의 어원이다) 이 간단한 적용은 인쇄 절차를 반half-기계화함으로써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기계화야말로 구텐베르크의 발명품을 동아시아의 금속활자 발명품들과 구분지어주는 한 가지 특징이었다. 그의 인쇄기가 얼마나 빨랐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대략적인 추정은 가능하다. 그는 5년 동안 200권 가량의 성서를 인쇄했는데, 이들 각각은 1286 페이지 가량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술자들이 일주일에 6일을 작업했다고 가정한다면, 대충 하루에 163페이지 정도가 인쇄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거친 연산을 통해 비교해 볼 때,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금속활자보다 대략 4배 가량 빠른 인쇄속도를 자랑했다. 이 효율성은 구텐베르크의 발명이 인쇄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요소 중 하나였다.
  물론 이러한 기술적 결함이 한국의 금속활자의 역사적 영향력을 설명하는 가장 큰 그리고 유일한 요소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한국의 금속활자술이 기술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고 해도, 계속해서 기술적인 개량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유럽의 경우 1880년에 이르면 시간당 480페이지가 인쇄될 만큼 기술이 발전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반면 한국의 인쇄술은 그 정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에 이르게 된다. 한국에는 인쇄기술의 발전을 잠재적으로 저해하는 어떤 요소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3. 언어적 장벽

금속활자의 발달 및 그것의 보급을 저해했던 가장 커다란 요소 중 하나는 중세-근세 한국인들이 사용했던 문자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이 창시되기 전까지, 한국인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자를 갖지 못했다. 당연히 그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문자는 한자였다. 고립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한자는, 각각의 문자가 독립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한자에는 원리상 무한한 수의 알파벳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응하는 인쇄 블록 역시 이론적으로는 무한한 수가 필요했다. 물론 우리는 상용한자로 그 범위를 좁힐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글자 수는 5만 개에 달했다. 더욱이 인쇄에 필요한 활자는 단지 이 5만 개만 필요한 것이 아닌데, 한 페이지에 같은 글자가 여러 번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1795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의 경우 인쇄 블록의 개수가 약 30만 개에 달했다. 한자와 비교한다면, 로마 알파벳은 훨씬 주조하기가 간단했다. 영어에는 오직 26개의 자모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 페이지에 같은 알파벳이 여러 번 등장하므로 26개만 주조하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자와 비교하면 훨씬 주조할 블록의 수는 적었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의 주된 인쇄방식이 금속활자의 발명 이후에도 여전히 목판인쇄술이었던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십만 개의 한자 블록을 주조하는 것보다는, 목판을 파내는 작업이 훨씬 싸고 간단했던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장벽의 유무 차이는 금속활자의 보급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한자 활자를 주조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자원(특히 동)이 필요했다. 개인 사업장에서 물기에는, 이는 너무 엄청난 비용이었다. 때문에 조선왕조 시대에 금속활자는 민간 영역의 사업장으로 전혀 보급되지 않았다. 금속활자가 사용된 인쇄소는 오직 철저하게 국가 소유의 인쇄소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에서 인쇄된 책/문서의 양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구텐베르크의 발명 이후 유럽에는 우후죽순처럼 인쇄소가 생겨났다. 구텐베르크의 발명 이후 50년 안에 대략 1000개의 인쇄소가 생겨났으며 이탈리아 내에서만 70개의 인쇄소가 등장한다. 이처럼 유럽에서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간 금속활자 인쇄술은 전례없는 책/출판물의 증가를 가능케 했다.
  이처럼 언어적 장벽은 분명 한국에서 인쇄술이 가지고 있었던 혁명적 잠재력을 가로막았던 한 가지 커다란 요소였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만약 한자가 궁극적인 장애물이었다면, 한글의 창제가 상황을 극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로만 알파벳과 달리 한글은 문자 특성상 상당히 많은 조합(최소 약 1만 개 가량)을 필요로 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한자보다 더 적은 개수의 블록만을 요구한다. 따라서 한글이 인쇄술에 적용되었다면 한자보다 훨씬 적은 인쇄비용 & 더 간단한 인쇄과정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사실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4. 사회적 조건들

금속활자의 활용에 있어 그 운명을 결정한 것은 조선과 유럽의 사회적 상황들이었다. 한편으로, 한국과 중국에서는 매우 일찍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도가 자리잡는다. 이 제도는 지배계급에 의해 지식과 정보가 확고하게 독점되는 상황을 야기했다. 반면, 이러한 중앙집권적 제도가 자리잡지 못했던 유럽에서는 시장경제의 등장 및 그것의 확장이 구텐베르크의 기술을 보급함에 있어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한글 창제 및 보급이 인쇄술의 발달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 이유에는 이러한 굳건한 관료제도의 존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이 보급된 이후에도, 주지하듯이 이는 전격적으로 한자를 대체했던 것이 아니었다. 한글은 어디까지나 한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한 보조적 문자에 불과했으며 지식사회의 주된 논의는 여전히 한자로 이루어졌다. 이는 관료제가 자리잡은 이후 조선사회에서 신분 간에 생겨난 괴리에서 기인한다. 상류계급은 한글을 통해 지식을 평민들과 공유하기를 원치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상류층이 한글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두 가지 경우에 제한되었다. 하나는 편지를 쓰는 경우. 다른 하나는 국가의 지시/지령을 일반 백성들에게 알려야 할 경우였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유 자체가 후자에 있기도 했다. 이처럼 신분제/관료제가 굳건한 조선사회에서 책과 지식은 상류계급의 소유물로 남았다. 따라서 인쇄술의 발전 또한 제한적으로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초 책에 대한 수요 자체가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다. 인쇄의 범위는 상류계급 스스로의 보존을 위협하는 데에까지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러한 신분제적 사회에서, 금속 활자술의 ‘혁명적 잠재력’은 완전하게 실현될 수가 없었다.
  15세기 유럽에서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술 발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시장경제의 형성이었다. 물론 교회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었으나, 근대 사회를 이루는 몇 가지 단초들이 이 무렵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고 선원들이 일확천금을 노리며 닻을 올렸던 것처럼, 구텐베르크 역시 경제적인 동기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이런 이유에서 구텐베르크는 자신의 인쇄술이 오직 자신의 인쇄소에 독점된 상태로 머무르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제자들 및 동료들에 의해 인쇄술은 급속히 퍼져나간다. 이처럼 그의 기대가 완전히 배반된 덕분에 인류는 가장 커다란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구텐베르크의 바람대로 자신의 인쇄소에 기술이 독점된 채였다면, 그의 발명은 한국에서와 금속활자술이 맞았던 것과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당시 책은 거의 수작업으로 필사되거나 혹은 그리 높지 않은 수준의 목판인쇄를 통해 제작되었는데, 여기에는 엄청난 노동력과 시간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책은 매우 비싼 상품들 중 하나였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만들어낸 뒤 가장 먼저 인쇄했던 책들은 성경이었는데, 성경 한 권의 가격은 당시 노동자의 3년 봉급에 달하는 30 플로린이었다.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그 효율성 및 속도로 말미암아 수작업/목판인쇄를 완전히 대체했으며, 도서 시장을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책들의 수가 늘어나고 책의 가격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책을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독자의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러한 선순환에 의해 시장이 증대되면서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유럽 사회, 아니 전세계에 말 그대로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5. 결론

맥루한의 주장대로 인쇄술이 그저 기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를 결정한다면, 한국에서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지각변동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지식/책의 확장에 금속활자가 기여하지 못하도록 했던 세 가지 요소들은,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다시 말해 하나의 물질적 발달이 그 자체로 사회적 변화/진보의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하는데, 사회적 변화는 매우 복잡한 상황 내지 조건들의 결합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에서 본 바와 같이, 금속활자는 외부적 조건들로 인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채 남는다. 물론 이는 반대의 통찰을 던져주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사건의 역사적 영향력을 평가할 때, 대응되는 단일한 사건들을 일대일로 단순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교에서는 해당 사건이 위치한 복잡한 사회적 맥락 또는 의미를 삭제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고찰은, 한국의 금속활자술이 비록 구텐베르크의 발명만큼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진 못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그 나름의 역할 및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더욱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참고문헌

Luhmann, Niklas, <<사회의 사회>> 1권, 장춘익 옮김, 새물결, 2012.
McLuhan, Marshall, <<구텐베르크 은하계>>, 임상원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Park, Seong-Rae,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n History: Excursions, Innovations, and Issues, California: Jain Publishing Company, 2005.
Sohn, Pow-Key, "Early Korean Printing", in: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v. 79, no. 2, pp. 96-103, 1959.
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상상, 2014.
문중양, <<우리역사과학기행>>, 동아시아, 2006.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printing_in_East_Asia#Ceramic_movable_type_in_China
https://en.wikipedia.org/wiki/Gutenberg_Bible#Pages
https://en.wikipedia.org/wiki/Johannes_Gutenberg#Printed_books
http://www.gutenberg-bible.com/history, para. 6.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11-04 18:5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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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깽이
15/08/11 17:29
수정 아이콘
에서 이런 글 본적있느데 정리 하신건가요?
돈보스꼬
15/08/11 19:42
수정 아이콘
예전에 보신 글이 어떤 것이었나요? 제가 참고한 텍스트는 참고문헌 리스트에 있는 게 전부이고, 주로 참고한 책은 참고문헌 리스트 중 강명관 선생님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입니다. 페이퍼 형태로 제출할 땐 인용한 부분이나 기록의 출처 부분에 각주를 달았는데, 여기에 옮겨쓸 때는 각주다는 법을 몰라서 각주를 전부 지웠습니다.
도깽이
15/08/11 20:09
수정 아이콘
pgr21에서 봤어요. 기술의 진보가 반드시 대중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요. 기술은 그자체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환경역시 중요하다고요. 그예로 직지심체요절을 들었거든요. 왜 조선은 금속활자가 대중화돼지 못했는가? 다만 그게 글인지 댓글인지 글이면 제목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네요.
15/08/11 17:30
수정 아이콘
표음문자 표의문자의 차이가 결정적이군요
마스터충달
15/08/11 17:37
수정 아이콘
구구절절이 공감되네요.
활자의 사용은 둘째치고라도, 조선에서 한글의 사용이 제한적이었다는 점은 정말 아쉽습니다.
포켓토이
15/08/11 17:37
수정 아이콘
근데 에칭 기법을 활용한다면 페이지 단위로 만든다고 쳐도 목판인쇄보다 금속판인쇄가 훨씬 더 빨리 만들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옛날에는 에칭 기법이 없었을까요? 중세시대 검 같은거 만드는거 보면 에칭 기법으로 장식 문양을 만들고 뭐 그랬다는거 보니까
에칭 기술이 아예 없던건 아닌데.. 에칭으로 금속판 만들어서 인쇄하기엔 비용이 너무 비쌌던건가...
마스터충달
15/08/11 17:56
수정 아이콘
문자를 깎아낼 정도의 정교한 식각 기술은 당시로는 없었을 것 같아요.
포켓토이
15/08/11 17:39
수정 아이콘
그리고 전에 읽었던 글을 보면 중세 유럽쪽 사회적 조건 중에 금속활자 기술로 성경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일반인도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게 됨에 따라 경전을 직접 읽을 수 있고 맘대로 해석할 권한을 가지고 있던
성직자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고 교회의 세력 약화로 이어졌다는 내용도 기억이 나네요.
flowater
15/08/11 17:43
수정 아이콘
만약에 유럽쪽 언어가 한자고 중국쪽 언어가 알파벳이라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궁금해지네요.
히로카나카지마
15/08/11 17:51
수정 아이콘
삭제, 반말은 금지되어 있습니다.(벌점 4점)
돈보스꼬
15/08/11 19:45
수정 아이콘
결론에 적었듯이, [우리가 어떤 사건의 역사적 영향력을 평가할 때, 대응되는 단일한 사건들을 일대일로 단순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교에서는 해당 사건이 위치한 복잡한 사회적 맥락 또는 의미를 삭제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찰은, 한국의 금속활자술이 비록 구텐베르크의 발명만큼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진 못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그 나름의 역할 및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더욱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솔로10년차
15/08/11 17:54
수정 아이콘
문자차이가 결정적이었을 것 같아요. 기술적차이도 컸지만, 필요가 기술을 낳는다고 효용이 더 컸다면 기술도 빠르게 따라갔겠죠.
그럼 쿠텐베르크의 인쇄술보다 나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서양의 활자술과 나란히하는 동양의 활자술로서 자리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되면 지식이 전파되는 속도와 범위, 양이 모두 증가했을테고, 이는 충분히 세계역사를 바꿀 수 있었을 것 같네요.
아름다운저그
15/08/11 17:56
수정 아이콘
한글을 사랑합시다 ㅠㅠ
Arya Stark
15/08/11 17:5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이 글을 보니 기술이 독점적으로 발전한 것과 경쟁적으로 발전한 것에 대한 차이에서 오는 발전의 양상을 비교해 보고 싶어지네요.
15/08/11 18:02
수정 아이콘
내러티브, 사상과 종교에 대한 욕구는 인류 보편적 욕구입니다. 동, 서양에서 형태는 다를지라도(ex 드라마 -판소리, 성경 - 사서삼경) 결국 본질은 '진리의 추구'와 '정보의 습득' 이라는 것에서 같지요. 다만 조선의 궁궐에서는 인쇄술 테크 찍을 타이밍이 아니라고 - 바꿔말하면 [수요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은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 '정보의 습득'에 대한 수요가 어마어마하게 커진 반면 중국에서 일어나는 비단의 시세변동이나 일본 은채굴량에 대한 정보가 조선 국정에서 가장 중차대한 정보였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돈보스꼬
15/08/11 20:00
수정 아이콘
정보 습득 욕구 자체의 증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못해보고 있었네요. 다른 분들이 댓글에서 언급해주신 것처럼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연관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인데, 다른 한편 대항해시대와 도서시장의 연관도 파헤쳐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만 무슨 책을 봐야 할 지...)
공허진
15/08/11 18:03
수정 아이콘
과거나 현재나 지식과 정보의 독점과 권력화, 그를 이용한 권력층의 통제가 유독 심한 나라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원한초보
15/08/11 18:07
수정 아이콘
다음 문명 시리즈에는 언어시너지 효과도 추가하는 거로
조선은 초창기 한글 개발을 앞당기면 더 많은 시너지를
15/08/11 18:08
수정 아이콘
얼마 전에 '책의 문화사'라는 책을 읽고 알게 된 점은....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15세기 후반의 유럽에는 '서적산업'이 어느 정도 자리잡혀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피렌체 같은 곳에서는 개인도서관에 장서를 모으는 일이 빈번해서 필사공장을 만들어서 책을 파는 서점들이 있었고 유럽의 필사가들과 필사화가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네요. 제지공장과 양피지공장이 어느 정도 판매를 예상할 수 있었고, 장사수완이 좋았던 모 서적상은 유럽 각국에 책을 공급하고 교황청 도서관 건립사업을 하며 도시의 엘리트 취급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구텐베르크도 돈까지 빌려서 사업을 할 생각을 했겠구나 하고 납득이 가더군요.
돈보스꼬
15/08/11 19:51
수정 아이콘
오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저도 시장의 활성화 유무가 인쇄술의 활용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책도 한번 찾아보고 싶네요.
유유히
15/08/11 19:53
수정 아이콘
그렇게는 생각 못해봤는데... 잘 배우고 갑니다.
15/08/11 20:56
수정 아이콘
제가 쓴 내용에 살짝 오류가 있는데 그 서적상이 교황청 도서관 건립사업을 한게 아니라 '교황청에도 책을 공급하고, '메디치' 가문의 도서관건립사업에 참여'한 걸 제가 헷갈렸네요. ^^;
人在江湖
15/08/11 18:0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aurelius
15/08/11 18:22
수정 아이콘
조선에서는 출판산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고, 책을 생산해서 사고 파는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가장 큰 한계였던 거 같아요. 일단 초보적인 시장경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제약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통되는 서적은 모두 국가가 독점적으로 생산한 것이었고, 이마저도 구입하기 힘들어 사람들이 필사해야 했죠. 이른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책이 필사가 아닌 <출판>된 것도 조선시대가 아니라, 구한말/일제강점기 때였으니...

일본 같은 경우 <출판시장>이 존재했고, 그 덕분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이 1867년에 이미 공식적으로는 15만부, 비공식적으로는 25만부 팔렸던 것이죠. 사실 지금도 책 25만부를 파는 게 쉽지 않은데...
유유히
15/08/11 18:29
수정 아이콘
조선시대의 활자는 아무리 혁신된 기술이라도 사회 여건이 맞지 않으면 사장된다는 법칙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에서 발굴된 파에스토스 원반이 대표적인 사례죠. 기원전 1700년대에 만들어진 파에스토스 원반은 세계 최초의 인쇄물이라는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이 그 가치를 알아차릴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에 그대로 사장되었죠.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인쇄매체의 한자사용이 일반적인 사회 분위기와 시너지를 내지 못했기에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발행하던 조보朝報라는 것이 있었는데, 조보는 왕의 칙령이나 조정의 중요 공지사항들을 적어서 반포하던 종이로 오늘날 신문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최초 등장하는 것이 중종 때이고 그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분발分發이 태종 때부터 있었으니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다고 추측이 됩니다. 민간에서는 이 조보를 필사하여 돌려 보며 과거시험이 언제고, 조정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논하던 기록이 전합니다. 그런데 이 조보라는 것은 선조 때 "누가 조정의 일을 밖에 전하는가. 이는 필시 이적利敵이다"라는 선조의 격노로 인해 관련자들이 귀양가고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지배층은 피지배층이 더 똑똑해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아마 금속활자가 한글사용과 시너지를 내서 민간에 보편화됐다면.. 어디서 적을 이롭게 하느냐며 조보의 사례처럼 지배층이 발끈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5/08/1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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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선조는 참 옹졸하네요....ㅠㅠ
돈보스꼬
15/08/1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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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사례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지배층은 언제나 피지배층이 지식과 정보를 더 갖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데, 유럽의 경우 그 제지를 시장경제의 힘(그리고 많은 분들이 추가로 지적해주셨듯이 종교개혁의 파급력)이 뚫어내버린 것이겠죠. 한국의 경우 중앙정부의 힘이 너무 강했던 것이 지식정보기술의 활용을 막았던 커다란 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기에 정부의 힘이 약해졌을 때 외세의 침입 없이 한두 세기 정도 더 시간이 흘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15/11/0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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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가 통제가 됐던 건 지배층이 피지배층이 더 똑똑해지는 걸 우려해서가 아니라, 조보로 인해 국가 기밀사항이나 군사기밀 등이 빈번히 누출됐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선조때는 그 시기가 임진왜란 직후이니 이런 사안에 대해 민감한 게 이상한 게 아니죠.

오히려 조보에 대한 통제를 가장 많이 했던 건 선조가 아니라 광해군이었습니다.
15/08/1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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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는 성서라는 매우 강력한 '텍스트'가 이미 존재했었다는 점도 요인일 것 같네요.
그게 '한 권'이라는 점도 중요했겠고요.
15/08/1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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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당시 두 지역의 문맹률에 대한 자료가 있으면 더 비교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드라고나
15/08/1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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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기술 자체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조선도 활자 가지고 그냥 논 건 아니고 교열방식이 인쇄방식은 꾸준히 계량을 했으니까요. 문제는 앞선 댓글들에도 말이 있지만 전체적인 상업 발달에 따른 시장 유무죠. 거기다 문자 차이에 따른 활자 제작의 난이도 차이가 더해지는 거고요.

조선은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활자를 만약 만들려고 하면 몇천자 몇만자 형틀을 만들어야 하는데다 그렇게 비용과 시간을 들인다 해도 뽕을 뽑을 데가 없습니다. 특히 저 제작 비용 때문에 조선 후기에 상업 출판 시장이 생긴 다음에도 민간에선 목판인쇄가 주류였지 활자인쇄는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일단 48개 형틀만 있으면 활자를 만들 수 있으니 제작 비용이 엄청나게 차이나죠. 거기다 기존 출판 시장만이 아니라 딱 때가 종교개혁으로 싸운다고 여기 저기서 성서 읽는다고 난리 났을 때니까, 금속활자 인쇄가 있더라->보니까 투자 좀 하면 나도 만들 수 있겠다->만들어서 성서만 팔아도 본전은 한참 뽑는다 식으로 돌아가니 너도 나도 활자 만들어 출판 시장에 뛰어드는 거죠. 거기다 성경 아니라도 라틴어 책 찍으면 유럽 단위로 팔아먹을 수 있으니.
돈보스꼬
15/08/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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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사실 초창기 금속활자 말고, 그 이후의 기술적 발달에 대해서는 상세히 읽어본 바가 없었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역시 이 주제에 있어서는 기술 자체보다는 기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좀 더 파헤쳐봐야겠군요.
15/08/1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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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라는 문자 자체의 결함도 충분히 치명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보다는 문자의 쓰임이 어떠하였는가, 인쇄술이 무엇을 위해 쓰였는가에 더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구텐베르크 이후 유럽에서는 무려 번역된 성경을 찍어낼 수 있었죠. 수도원 담장에 갇혀 있었던, 그래서 성직자의 입을 통할 수밖에 없던 것들이 수도원 바깥으로 빠져나와 신과 일반 사람들을 직접 매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총균쇠에서 유럽이 중국보다 앞서가기 시작한 이유를 중국보다 덜 조직화(? 정확히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진나라 이후로 거듭 통일되어오며 문자부터 온갖 것들이 하나로 묶여 있던 중국 사회와 달리 각 국가 안에서도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던 유럽 사회에서 오히려 기술발전이 요구되고 자극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명나라 때 정화의 원정이 결국 물거품이 된 것을 언급하는데, 조선도 세종 때를 지나서는 학풍이 (적어도 서양의 관점에서는) 퇴보하고 폐쇄적으로 되어버렸죠. 중국과 조선에서는 백성들에게 무언가를 굳이 배포하거나 알릴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겁니다. 국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상공인 계층이 성장하거나 종교개혁이 이뤄진다거나 하는 일 자체가 딱히 없었으니까요.
15/08/1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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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달고 보니까 막상 본문에 다 있는 내용인데 굳이 쓴 것 같기도 하네요...
일체유심조
15/08/11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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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15/08/1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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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큼의 필요성이 적음, 표의문자의 열등성이 그런 차이를...
15/08/12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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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일본은 어떻게 출판업이 발달했을까요. 한자를 하나하나 다 활자로 만드는 노가다를 한건가.
카롱카롱
15/08/12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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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가 중요한 요인일 겁니다. 돈이 생기면 그 다음 추구하는게 명예인데, 여기서 학문과 예술이 많이 발전하죠.
도언아빠
15/08/12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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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글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혼돈과카오스
15/08/12 11:18
수정 아이콘
이런 글 좋아요.
감사합니다.
카롱카롱
15/08/12 12:26
수정 아이콘
조선은 책에 대한 욕구에 비해서 경제력이 부족한거 같습니다. 사실 명청 가면 하는게 가진거 다 팔아서 책사오기였으니--;;
15/08/12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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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15/11/05 11:06
수정 아이콘
서양 출판산업이 저 시대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실용서, 기술서적의 유통이 활발했데요. 각지의 기행문, 본초서적 같은 것도 널리 유통되고..그런 상황이니 금속활자가 널리퍼질 수 있었겠죠..
마우스질럿
15/11/0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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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이 반포된 이유 자체가 후자에 있기도 했다. 이처럼 신분제/관료제가 굳건한 조선사회에서 책과 지식은 상류계급의 소유물로 남았다. 따라서 인쇄술의 발전 또한 제한적으로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초 책에 대한 수요 자체가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다. 인쇄의 범위는 상류계급 스스로의 보존을 위협하는 데에까지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러한 신분제적 사회에서, 금속 활자술의 ‘혁명적 잠재력’은 완전하게 실현될 수가 없었다.

>> 말씀하신중에 책에 대한 수요 자체가 에초에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다. 부분이 조금 추가설명해야 할듯 싶습니다.

유럽의 경우 성경이라는 한권의 책이 모든 사람이 필요한 책이고 인쇄술이전에는 아무나 가질수 없었던 반면

조선의 경우 불경이나 유가의 경전들은 그 종류의 다양성으로 인해 필사가 빈번하게 이루어 지고 있었으며 이미 누적된 서적의 양으로 인해

수요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웬만한 양반가에서는 4서3경을 비롯한 서적이 이미 즐비 하게 구비되어 있었고

몰락한 가문에서 조차 유가경전은 불쏘시개로 쓰일정도로 넘치고 넘쳤으니 이런 이유로 수요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할듯 싶습니다.

좀더 부가하자면,

탈라스 전투(751년)에서 제지법이 중동으로 건너간게 바로 유럽으로 간것은 아니겠지요

아마 유럽으로 확실하게 건너간것은 십자군의 영향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인쇄술이 발명된 15세기 까지 3~4백년 정도의 역사에 유럽에 서책이라는게 넉넉하게 있었을까요?

조선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서책이 남아 있는것으로 보아 천년 이상의 서책이 누적되어 있었고

유럽은 책이 충분하지 않은것이 조선과 유럽의 차이중 큰 부분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글8자
15/11/1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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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써주셔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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