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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0/08/18 12:10:36
Name   한니발
Subject   재액(災厄), 정명훈


  거대한 판타지를 건설했던 4대 천왕의 낭만시대 이후 수많은 게이머들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그 선수 개개인의 플레이, 혹은 게임 외적 배경을 근거로 하여 선수 각자에게 독특한 닉네임과 스토리를 부여했다. 황제, 폭풍, 영웅, 천재, 투신, 몽상가, 사신…. 그 외 수많은 이름들이 지어졌고 선수들을 각자의 개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스타크래프트의 역사가 길어짐에 따라 이러한 아이덴티티 부여, 소위 ‘포장’은 점차 콘텐츠 고갈이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극소수의 선수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포장 자체가 되지 않거나, 과거 올드 게이머들이 가지고 있었던 아이덴티티를 그대로 이어받는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정명훈은 자신만의 컬러를 가진 그 ‘극소수’에 꼽히는 몇 안 되는 선수다. 팬들은 과거 존재했던 다양한 틀을 가져와 정명훈에게 끼워 맞추려 했으나 정명훈 본인이 그것을 번번이 박차고 벗어났다. 물론 그것은 정명훈 본인에게 좋은 일이었을 수도 있고 나쁜 일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게임 내적 플레이에 있어서도, 그 게임 외적 포지션에 있어서도, 아마 정명훈과 같은 게이머는 스타크래프트 10년사에 있어서 처음일 것이란 사실 뿐이다.




리그 테러리스트와 국본의 양자택일

  처음에 사람들이 정명훈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역할은 ‘국본(國本)’이었다. 그것은 T1의 테란을 잇는다는 의미이다. ‘황제’ 임요환의 손에서 만들어졌고 이후 항상 스타판을 압도해온 T1의 아이덴티티는 바로 ‘제국’이다. 임요환-최연성-전상욱-고인규, 프로리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4테란의 계보를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정명훈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T1 테란의 영광을 재현하라. 달리 말하자면, 임요환괴 최연성의 영광을 재현하라. 그렇다. ‘재현’이다. 사람들은 정명훈이 임요환과 최연성의 아이덴티티를 이어받길 바랐다. 제국의 패자, 임요환과 최연성의 모습을 정명훈을 통해 보길 바랐다. 인크루트 4강은 그러한 경향을 더욱 부채질했다. 경기는 정명훈이 했는데 어째 이 경기를 평가한 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최연성을 칭찬했다. ‘죽은 이중이가 산 대인배를 잡았다’는 유명한 글이 보여주듯이, 정명훈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명훈은 커리어는 연달은 준우승에 그쳤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정명훈이 불완전한 탓으로 돌리며 정명훈을 ‘최연성의 마리오네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이 정명훈에게 부여하고 한 역할은 ‘리그 브레이커’, 곧 흥행 파괴범이었다. 지금은 정명훈 자신조차 즐겨 부르는 이름인 ‘테러리스트’의 본래 의미는 바로 이 리그 브레이커에서 왔다. 리그의 흥행을 테러하는 자, 리그의 흥행을 망치는 자. 곧 이름값 높은 선수들을 탈락시키는 뜬금없는 선수. 하지만 임요환과 최연성, 그리고 티원의 테란이라는 든든한 뒷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정명훈이다. 잘만 포장해보면 뜬금없이 등장했다 해도 리그 브레이커까지 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인크루트의 파란에 이어, 바투에서 정명훈이 추락시킨 것은 김택용이었다.
  김택용 또한 자신만의 컬러를 가진 극소수에 꼽힐만한 선수다. 아니, 김택용은 마땅히 그 정점에 설만한 선수다. 그 등장인 3.3은 가히 스타크래프트 10년사 첫손에 꼽힐만한 드라마틱한 ‘강림’이었고, 이후의 행보에서 보인 그 모습은 여태껏 한 번도 패권을 쥐어본 적이 없는 프로토스에게 사상 처음으로 스타판 전체의 패권을 쥐어줄만한 재목이었다. 이전 ‘프로토스의 혼’ 박정석은 이미 ‘저항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나, ‘혁명가’ 김택용은 그 반역의 농밀도가 달랐다. 이제 온게임넷 우승만 한다면, 당대를 휩쓸었던 본좌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찰나였다.
  그리고 그것이 정명훈에게 좌절되었다. 압도적인 스코어 3:0.
  화려한 테러의 시작이었다.




무대 뒤에서

  임요환과 최연성의 영광을 재현하는 ‘국본’이 되어주길 바랐더니 두 번 결승에서 두 번 다 3:2로 지면서 오히려 콩라인에 들어버렸다.
  그렇게 될 거라면 차라리 이도 저도 아니고 코치의 덕과 천운으로 올라온 ‘리그 브레이커’가 되어주길 바랐더니, 다른 이도 아니고 김택용을 3:0으로 꺾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그 애매한 위치를 결정적으로 깬 것이 2009년의 광안리였다.
  정명훈과 이제동의 싸움으로 시작했다.
  이제동과 정명훈의 싸움으로 끝났다.
  이제동이 없었다면 화승은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결승전에서의 3패는 변명하기 어려운 대실패였다. 이제동은 자신의 커리어에 상처를 입었다. 이제동의 마지막 투혼을 불사를 기회조차 주지 않고 좌절시킨 것은 변칙성 센터 BBS였다. 정명훈은 만장일치로 결승전 MVP가 되었다. 물론 이후 이제동은 박카스 4강에서 정명훈을 멋들어지게 제압하면서 골든마우스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이 소위 광삼패를 잊게 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택뱅리쌍의 시대에 있어 정명훈은 일종의 재액, 천재지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정명훈 본인은 결국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뱅’ 송병구와 ‘동’ 이제동에게 우승을 헌납한 결과만 낳았다. 택뱅리쌍의 구도를 파괴할 새로운 강호는 결코 아니었으며, 하다못해 택뱅리쌍에 합류할만한 성적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정명훈의 등장은 분명히 택뱅리쌍의 구도에 균열을 일으켰다. 김택용을 3:0으로 완파했으며, 이제동을 광삼패로 훼손시켰고, 그로써 그때껏 대항마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이영호의 테란 원톱 지위를 위협했다.
  이 시점에서, 그리고 지금도, 정명훈은 택뱅리쌍이란 무대의 주연 배우 - 아니 조연 배우로조차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대의 뒤편, 배역조차 받지 못한 한 나레이터가 어스름 속에 모습을 감춘 채 큰 목소리로 종막을 경고했다.
  관객들의 심장은 크게 요동친다. 긴장감을 높이는 음악과 함께, 붉게, 노랗게, 파랗게, 색색의 조명이 네 명의 배우들을 비추며 어지러이 깜박인다.
  그리고 잠시 어둠이 찾아온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사그라져 들어가는 불안한 숨소리만 어둠 속에서 들린다. 다시 커튼이 걷히고 빛이 밝으면 누가 무대 위에 싸늘하게 쓰러져 있을지 알 수 없다.




호명(呼名)

  시대의 지배자들에게 통렬한 일격을 가하지만, 정작 자신은 시대의 지배자가 되지 못한다. 어쩌면 정명훈의 이미지는 의외로 우스꽝스러운 광대일지도 모르겠다.
  이 괴짜 게이머는 특히 저그를 상대할 때 온갖 기행을 벌인다. 바이오닉을 쓰면 오히려 변칙이 되고,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곧바로 날빌을 지른다. 희대의 두뇌싸움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된 게임을 보면서 사람들은 연신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그 우스꽝스러운 저그전의 최근 20전 전적은 승률 75%. 8강에서는 3김 김윤환이, 어제의 선발전에는 김명운이 꺾였다. 웃고 떠들며 그 행보를 지켜보는 사이 그 사정권에 남은 저그는 저그의 맹주 이제동 뿐이다.
  그렇다. 결과적으로, 정명훈이 저그전에서 보여준 기행은 정명훈이 보여준 다른 그 어떤 모습보다 T1 테란스러운 것이다. 임요환에서 최연성으로, 그리고 전상욱과 고인규가 준수한 계율. 그것은 ‘승리한 자가 강한 자다’라는 한 문장뿐이다. 승리에 이르는 과정이 설령 우스꽝스럽다고 해도. 혹은 충격적이라고 해도, 고루하다고 해도, 누군가가 악랄하고 비열하다 말한다 해도.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 하나의 계율을 자신의 오리지널로 구현할 때, 티원 테란의 맹주로서 자신의 시대를 열 자격을 갖는다.
   물론 정명훈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 인크루트와 바투를 연달아 치를 때 정명훈은 첫 번째 기회를 이미 놓쳤다. 랭킹 재배치, 리그의 변수를 제거하는 시스템 위에 MSL은 두 번의 결승을 연달아 리쌍록으로 치렀고 이제 세 번째의 가능성을 맞이한다. 바야흐로 지금은 리쌍의 시대이며 리쌍이 시대의 정점이다.  
  그러나 정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의 자리이다. 최고란 무엇인가. 가장 높은 곳이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올라갈 곳 없는 이들, 그 이상 없을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이들을, 정명훈은 이미 몇 번이고 추락시켜 왔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내일의 승부에서 모두가 예상하듯 이영호가 정명훈을 제압한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명훈이 이영호를 제압한다면 무언가가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압도적인 커리어의 차이는 한 번으로 메워질 수 없으리라. 다만 부동의 시대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가능하다. 그 균열을 앞에 두고서 끊임없는 질문이 던져질 것이다. 올 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 이어질 것인가. 이어지지 않을 것인가. 정명훈의 시대가. 리쌍의 시대가. 모든 것은 그 물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무대는 아주 작아도 좋다. 아주 초라해도 좋다.
  한 번이라도 이영호가 쓰러진다면. 한 장의 광대.(JOKER)
  한 번이라도 이제동이 쓰러진다면. 두 장의 광대.(JOKER)
  두 장의 조커는 혁명을 의미한다.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대 서사극의 막간에 불과할지라도, 택백리쌍의 무대 - 배우들이 아주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그 때 정명훈은 비로소 무대 뒤편에서 걸어 나온다. 새로운 무대를 열 수도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던지기 위하여. 그 때가 되면, 관객들은 비로소 ‘임요환’, 혹은 ‘최연성’이 아닌 정명훈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고하건대, 그즈음에야 뒤늦게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어떤 환성과 연호의 차원에서 정명훈의 이름을 외치는 자신이 아니라, 충격과 증오에 가득 차 정명훈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신일지도 모른다. 정정당당 공명정대와는 거리가 먼, 악랄한 노림수로서 정명훈은 자신의 첫 무대를 만들지도 모르니까.
  ‘테러’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던가?



















  물론 이 모든 것은, 내일의 정명훈이 이길 때의 이야기다.



* 메딕아빠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8-26 16:33)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2-01-1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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