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의 마지막 글이네요. 모두 새해 복 많이받으세요.
GQ라던가 Arena라던가, 화장실에서 읽기 좋은 월간(패션)잡지들을 보면 항상 어떠한 주제 내에서 현시점에 가장 화두가 되는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새로운 출시된 옷이라던지, 음반이라던가, 책도 얘기하고, 인터뷰도 있고 뭐 그렇다. 그러한 다양한 시각에서의 분석이나 비교같은것을 즐겨 읽는 본인이기에 언젠가 한번 나도 저런걸 해보자라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스타리그에 진출한 네 명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이러한 미션을 수행하기에 흥미로운 주제다. 정말 오랜만에 올라온 테란의 최종병기에, 택뱅을 꺾은 최고의 토스전 킬러, 거기에 나머지 둘은 무려 로열로더 후보들이다. 2009년의 마지막 밤, 잠이 안와서 써내려본 스타리그 4강진출자들을 보는 네 개의 시선들.
이영호 - Here Comes The Real Flash
1999년부터 햇수로 11년, 어립잡아 다들 동의하는 '10년의 스타리그 역사' 그 10년이라는 세월동안 날고 긴다는 선수들, 전설이 된 선수들, 소위 말하는 본좌, 최강게이머들의 데뷔와 성장을 지켜왔지만 이영호처럼 비범한 탄생으로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이는 없었다. KTF에 드래프트 된 그 다음날 스타리그 예선을 뚫은것도 모잘라 듀얼토너먼트에서는 김택용-윤용태를 꺾더니, 별명만으로도 그 위엄을 느낄수 있는 '영웅' 박정석의 옆에 앉아 졸린 눈인지 아니면 엄청난 위압감에 공포를 떠는건지 모를 반쯤 쳐진 눈으로 조용히 16인의 한자리를 차지했었던 그 어리던 16세 소년 이영호 말이다.
그 날, 조지명식에서 테란의 역사를 새로 썼던 괴물 최연성은 이영호를 지목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었다. "오늘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날이다." 경기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최연성인지라 사람보는 눈도 뛰어났음에 분명하다. 16강에서 이재호-최연성을 꺾고, 8강에서 김택용을 2연날빌로 꺾고 당당하게 카메라를 향해 브이자를 날리는 그를 보며 난 탄성과 함께 생각했다. "이 놈은 리얼(Real)이구나."
이영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기대치는 어찌나 컸던지 개인리그 1회 우승, 세번의 4강진출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의 진면목을 발견해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누구나 다 씹어삼킬 기량과 센스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료게이머들에 비해 빈약한 팀의 라인업, 테란유저로서는 불운한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저그의 시대, 소위 많은 이들이 '양대리그에 테란이 딱 하나 남은것이 유일한 테란의 자존심이라니, 선조의 테란들이 통곡을 할 일이다' 라고 말할때 그것은 조용히 이영호에게도 책임을 묻는 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겠다.
그렇기에 지난 2008-2009 시즌은 이영호에게 있어서 악몽과도 같은 한해가 아니였을까 하다. 확대된 비중의 프로리그, 혹사를 유발하는 위너스리그의 도입에 가장 큰 피해자는 아직 스물도 채우지 못한 나이에 '소년가장'이라는, 영광보다는 아픔이 더 클뿐인 별명을 얻어버린 이영호가 아닐까. 그러한 와중에도 어쨌든 그는 프로리그 다승왕을 차지하며 테란의 최종병기로써의 자존심을 지켰다.
슬럼프 아닌 슬럼프를 겪었던 이영호가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자 다시 무서워 진 느낌이다. 약 30번 이상의 경기를 치뤘는데 단 4번밖에 지지 않았다는 통계만 봐도 그의 무서움을 입증한다. 누가 그를 막을수 있을까. 당신이 본좌론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러한 스탠스가 지금의 이영호를 평가하는 데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2009년의 끝자락에서 보여지고 있는 이영호의 무서움은 어떠한 기준으로, 어떻게 평가하여도 리얼이다.
데뷔 7년동안 마이클 조던이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소위 2인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 이후의 10여년간 그가 보여줬던 6개의 타이틀에 압도되어서 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영호는 몇 년이 지난 이후에는 망각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마이클 조던의 황금기가 그의 좌절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삭제 해버렸듯이, 지금부터 보여줄 진짜 이영호의 모습은 모두를 세뇌시키고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런 진짜 이영호를 생각하는것만으로도 필자는 즐겁다.
김윤환 - Insanely Calm
굴욕.
EVER 스타리그 16강의 첫경기에서 정명훈에게 손하나 써보지도 완패를 당했을때 김윤환이, 그리고 김윤환의 팬들이 느꼈을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단어가 아니였을까.
리그의 권위가 어떻니, 맵이 어떻니를 다 차치하고도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프로게이머를 가리는 경쟁의 장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1인, 그러한 김윤환의 스타리그16강 데뷔전은 '김윤환 거품론' 이 당장에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정도로 처참했다. 거기에 그 다음날 곧바로 이어진 디펜딩 챔피언의 32강 탈락이라니. 빠르기로 소문난 게임계의 여론이 바뀌는것은 시간문제도 아니였다. 그 즉시 일어났으니까.
사실 이 바닥에서 빠른것은 여론만이 아니다. 무한경쟁과 혹독한 스케쥴속에 정말로 종이 한장으로 비유될수 있는 선수들의 기량차이를 감안한다면 김윤환의 부진이 이해불능의 미스터리는 아니였다. 실제로 그러한 게이머들은 많이 보아왔고 김윤환이 걔 중 하나가 된다고 해봤자 이상한건 없었으니까.
우승 트로피에 입맞춤 하던 영광이 채 가시기 전에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진하게 다가왔을 법한 부진의 독, 그러나 김윤환은 몸속으로 퍼질것만 같은 그 맹독을 아이디 그대로 침착하게 잘 뱉어냈다. 그리고 이겨냈다.
단순히 1패 후 2승을 거뒀기에 침착했다는것이 아니다. '속도싸움' 저저전에서 케스파 랭킹 2위의 김정우와 가장 공격적인 저그 이영한을 상대로 거둔 경기 내용또한 저저전을 치루는 게이머 답지 않은 명석함과 침착함이 돋보였다. 예상하지도 못한 전진캐논에 터져버린 해처리를 지켜보면서도, 한번도 체험해봤을것 같지 않은 만원사례의 관중앞에서도 그는 익숙하다는 마냥 침착하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냈다.
그가 로열로더의 꿈을 이루기 위해 넘어야 하는 벽, 그 벽의 두께는 마치 아발론 MSL에서 깨부셨던 4강 상대와 흡사해보인다. 예상이 한쪽으로 몰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호와의 4강전이 기대되는 이유, 그것은 어떠한 상황이나 위기에도 침착하게 극복해낼 것만 같은 김윤환이 주는 안정된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진영화 - Movie Must Go On
길바닥에는 얼음이 꽁꽁얼고 하늘에서는 언제 눈이 떨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계절, 달력의 날짜는 분명 12월에서 1월로 넘어감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 바뀌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바로 이번 스타리그 시즌은 '가을 시즌' 이라는 것. 너무 이상하게 들릴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타리그를 지탱해오던 가장 오래되고 확실했던 이야기, '2009년 가을의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게 내 지론이다.
가을, 김동수로부터 시작되어 박정석으로, 강민/박용욱으로, 오영종으로, 그리고 송병구로 이어진 프로토스의 계절. 가을과 프로토스가 어떠한 과학적 연관은 없을것 같지만 어쨌든 항상 약소 종족, 소수 정예로만 구성되던 영화같은 프로토스들의 활약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진영화의 손에 의해서라면 말이다.
36강에서 김택용을 시작으로 많은 프로토스들이 무너졌을때를 기억하는가? 역뮤탈, 심시티등으로 인해 프로토스가 저그를 꺾는다는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느껴질 정도의 체감 밸런스가 도래했었다. 그러나 암울한 시대에는 새로운 영웅을 낳는다고 했던가,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토스전 스페셜리스트 조일장을 꺾고 올라온 진영화의 플레이를 봤을때, 나는 어쩌면 진영화야 말로 가을의 전설을 이어나갈 적자의 자격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마치 '오늘 저녁엔 뭘 먹을까'와 같은, 단기적인 생각이였기에, 그저 하나의 망상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리그를 지켜봤다.
몇 개월 후 진영화가 김명운을 꺾고 4강에 진출하고 나서야 두가지 생각이 머리를 엄습한다. 하나는 정말 이제껏 가을의 전설을 써내려간 선배 토스들의 많은것들을 닮았다라는 것. 무뚝뚝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역경을 이겨내며 프로토스의 한방러쉬로 저그의 강력한 자원력을 물리치는 것은 박정석을 떠오르게 하고, 가을시즌에 시작된 스타리그에서 강력한 저그들을 물리치고 로열로더와 가을의 전설을 동시에 계승해나가는 모습에서 오영종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렇기에 다시 떠올랐던 것이 36강때 떠올랐던 '진영화 가을의 전설 적자론'이였고, 망상은 어느새 현실에 가까워져 있었다.
결승행을 놓고 다툴 상대는 말이 신예지 이미 프로토스의 두 수장 택/뱅을 한꺼번에 꺾은 선수이다. 프로토스 유저로서 상대할수 있는 가장 껄끄러운 저그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다롭다라는 생각보다 진영화의 결승제물로 이정도는 되야지 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누군가의 말처럼 100만 프로토스의 염원을 담은 최후의 프로토스, 새로운 가을의 전설을 써내려 갈 그 영화의 끝은 해피엔딩일려나?
이영한 - Time To Shine
질문 하나, 이영한의 별명은?
대답을 요구한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태풍', 혹은 '뽕본좌'라고 대답할것이다. 하지만 저러한 별명 이전에 이영한을 지칭하던 대중적인 별명은 이미 존재했다. 밑그림은 좋아도 심각한 뒷심부족으로 항상 밀리던 '1분 본좌,' 이영한.
본격적으로 데뷔한 지는 채 1년이 안된다고 하였지만 이영한도 그러한 부류중에 하나였다. 이 바닥은 승률 80%대는 본좌고, 70%대는 본좌후보고, 60%대는 거품이고, 50%대는 양산형이고, 그 이하는 이도 저도 아닌 조롱거리일 뿐이다. 하위권의 로테이션을 오가는 저그에게 해 줄수 있는 찬사는 그닥 많지 않았다. 왠만하면 지고, 이기는 경기도 소위 '올인'을 통해 거두는 승리였기에 해설자들이 포장해줄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 선수 정말 스타일있네요!" 솔직히 별 분석없이 '스타일' 이라는 단어 하나에 모든것을 맡겨버리는 부연 설명이 그닥 마음에 닿진 않았다.
그렇게 특색은 있을지 언정 프로리그나 하부리그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게이머의 매력이라는 것은 부족하기에 짝이 없었기에 이영한의 진출을 내심 기대하지 않았던 이들이 많았을것이다. 김택용이나 송병구를 상대했을때 압도되던 팬들의 외침 "김택용 화이팅!", "송병구 화이팅!" 그래, 이영한은 마치 슬램덩크에서 산왕을 상대하던 북산이라고 할까. 그렇게 누구도 바라지 않던 승리들을 따낸 이영한은 그제서야 대중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같은 저그유저로서 이영한의 플레이는 진심으로 이제동의 플레이를 볼때와 비슷한 경외심을 같게 한다. 이제동의 저그는 "어떻게 저것을 다 할수 있지" 라는 생각에 나오는 존경심이라면, 이영한은 프로토스의 체재를 파악하고 그 약점을 너무나도 기가 막히게, 그리고 집요할 정도로 파고 든다. "어떻게 저걸 저렇게 뚫을 생각을 하지?" 라는 무지막지한 뚝심, 전성기의 박성준만이 보여줬다는 그것이 있었기에 이영한의 플레이는 벌써 필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이제껏 이영한처럼 깜짝스러운 4강을 찍은 이들은 많았다. 전 대회들만 보더라도 조일장, 문성진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그들에게 아쉬웠던 점은 그러한 이변의 시작과 함께 끝도 너무 허무했다는 점이다. 8강을 넘어 4강에 진출해서야 그들의 이름이 더더욱 빛나는 법인데, 이전의 신예/로열로더들은 정작 자신의 명성을 키울수 있는 자리에서 긴장하여 무너졌었다. 스타리그 8강까지의 여정이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공개 오디션이였더라면, 4강전, 그리고 그것을 넘은 결승이야 말로 자신의 재능과 끼를 마음껏 발휘 할수 있는 주 무대이다. 그 첫 시험대에 선 당찬 신예, 이영한의 스타리그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18 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