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te |
2011/12/06 21:51:33 |
Name |
PoeticWolf |
Subject |
Scars into Stars |
사랑은 코로 느낀다고 했던가.
새로 이사온 집은 오래된 아파트다. 30년도 넘은 곳이라 온갖 냄새를 머금고 있다. 아내가 조산으로 병원에 있을 때 혼자서도 집을 보러 와보고, 사위 혼자 집을 본 것이 못 미더우신 장모님을 모시고도 와보고, 나중에 아이를 잃고 퇴원한 아내를 데리고도 가는 등 참 여러 번 왔었지만 이 퀴퀴함을 몰랐던 건 먼저 살던 네 식구의 온갖 음식 냄새 때문이었다. 그 음식 냄새도 지금 이 퀴퀴한 냄새 속의 일부이겠지. 하지만 처형에게 돈을 빌려 계약금을 치른 시점에서 이미 이 집은 우리 집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 코는 헤프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냄새에 감각이란 걸 내어주고 자신은 숨을 폐에 불어 넣는 것만으로 만족해한다. 그래서 난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코가 예민하다. 오래되어 아귀가 딱 들어맞지 않는 문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냄새에도 향수를 뿌리고, 다이소를 가면 꼭 방향제 코너를 먼저 들린다. 유한락스와 뚫어뻥 두 통을 들이부어도 그때뿐, 냄새는 모락모락 살아났고, 부엌 싱크대 수도관과 수채통을 다 새 것으로 교체하고 나서야 조금 힘을 잃기 시작했다.
난 눈 역시 헤프다. 모든 것에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 그건 사실 게으름을 위장하기 위한 가짜 포용이기 때문이다. 난 벌써 내 집이라며 살고 있는데 아내는 문지방이며 창틀이며 문이며 칠이 벗겨진 곳이 거슬리나보다. 흰 페인트를 사러 방향제 많은 동네 다이소 옆 페인트 가게로 갔다. 유쾌한 주인 아저씨는 묻지도 않은 사포 종이를 봉투에 넣어주며 ‘페인트 칠 하기 전에 꼭 한 번 긁어 내고 칠을 시작하라’라고 당부를 하셨다. 먼저 있던 칠을 다 긁어 낼 필요는 없지만 스크래치를 입히고 칠을 하면 페인트를 더 잘 먹는단다.
집에 와서 과연 상처를 낸 부분에 페인트가 마치 옷처럼 입혀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사포 종이가 지나 갈 때마다 여기 살던 아이들이 붙여 놓았던 것 같은 오래된 투명 테이프가 떨어지고, 한창 전성기의 연예인들 이름도 지워졌다. 낙서란 형태로 머물렀던 이전 가족들의 모든 흔적이 말 그대로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쩐지 누군가의 시간을 지우는 거 같아 괜히 엄숙해졌다. 스스로를 면책하듯 페인트 롤러를 집어 들었다.
문득 가슴 한 쪽에 아이를 묻어 놓은 아내의 마음이 떠올랐다. 지지난 달 커다란 사포질을 당해야 했던 아내의 마음은 이제 어떤 것으로 덧입혀져야 할까. 어떤 것을 지금 이 상처 난 문지방이 페인트를 꼭꼭 눌러 삼키듯 그 마음에 담을까. 답을 낼 수도 알 수도 없었다. 난 롤러가 되고 싶고, 흰 페인트가 되고 싶은데 그건 불가능하다. 부부 관계에서 한 사람의 방식으로 한 사람의 색을 입히는 건 페인트 칠이 아니라 더 거친 사포로 딱지 앉은 곳을 다시 벗겨내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한숨을 쉬었다. 코 끝에 뭉쳐있던 페인트 냄새가 순간 없어지고 방안을 계속 머무르던 퀴퀴한 집 냄새가 들이 닥쳤다가 다시 페인트 냄새로 덮였다. 문득 손에 들린 롤러가 보였다. 생각해봐야 뭐하나 싶어 다시 스스로를 면책하며 롤러질을 시작했다. 전 세입자의 흔적이 점점 사라졌다. 페인트를 다 칠하면 이제 냄새만 남게 된다. 남는 건 일도 아닌데, 지우는 건 너무나 고되다. 팔이 아프고, 허리가 쑤시고, 손이 더러워지고, 마음이 아프다. 한숨을 들었는지 아내가 다가왔다. 시어머니를 통해 집안 일이라곤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걸 들었는데, 그런 내가 추운 초겨울 밤에 땀까지 흘리며 페인트를 칠하는 게 안쓰러웠나보다.
“오빠, 땀 냄새 나. 근데 되게 좋아.” 그러면서 살짝 안아준다. 아내의 손에 있던 붓이 등 뒤로 돌아가자 아내 이마에서 아내의 냄새가 났다.
“넌 왜 땀이 안나? 더 열심히 안 해?” 아내가 싫지 않은 눈을 흘기며 돌아선다.
과체중이기 때문에 땀이 많은 날 그대로 안아주고, 땀 냄새까지 좋다해 주는 아내가 든든하다 싶더니 갑자기 냄새에 대한 내 고민이 답을 찾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온갖 냄새들로 벽벽이 숨어 있는 시간을 물들이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아내의 이마 냄새와 아내가 좋아하는 내 땀 냄새로 이 공간을 채우면 된다. 그것으로 모자란다면 아끼는 이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초대하고, 부모님들이 아직 덜 영근 부부를 위한 김치를 담가주시면, 그것으로도 이미 더없는 사랑의 증거이고 방향제다. 삶으로, 살아감으로, 아직 타인의 냄새가 나는 이 공간을 진득하게 사랑하면 된다.
그리고 가장 좋은 냄새는 아마 우리에게 문득 찾아올 또 다른 생명의 냄새일 것이다. 갓난아기가 쉴 새 없이 내뿜는 울음소리와 진한 아이 냄새가 이 좁은 집안에 들어서면 아내의 사포 자국 역시 그제야 제 색을 새것처럼 찾으리라, 희망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멈췄던 ‘가족’의 시간이 비로소 새로 시작하리라, 기도할 수 있었다.
사랑은 코가 알아본다고 했던가, 코를 멀게 한다고 했던가.
그 놀라운 문장이 이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2-08 13:08)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