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이 좋습니다. 그 속에 담긴 온갖 가능성,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와 진지하고 섬세한 감정의 결이 좋습니다. 그동안 본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가 어느새 수백 편을 넘어갔고, 일부 장르에서는 안 본 작품이 본 작품보다 드뭅니다. 그래서 대단한 공신력은 없어도 적어도 제가 그 작품들을 통해 느낀 어떤 황홀감, 대단한 몰입감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고 있는 편이라고 자부합니다. 그걸 기반으로 이 글에서는 가장 주관적인 감상을 기반으로 한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순위를 정하고자 합니다.
제가 본 작품을 기준으로, 제 감상을 기준으로 한 글이니 부담없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포일러 有)
10. 페이트/제로 (Fate/Zero)
1화가 가져온 임팩트는 최고 수준입니다. 저는 이미 1화만 보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이 근사한 인물들이 얼마나 나를 기쁘게 만들고 감동시킬까. 그 두근거림은 작품이 늘어지는 중반부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목적과 감정, 사상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모습에, 사소하고 일상적인 장면조차도 매우 흥미진진하게 느껴졌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초반 몇화에서 느낀 속도감과 빨려듦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중반부에 가서 다소 늘어졌으나, 후반부에 가서는 늘어진 텐션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강합니다. 매우 어둡고 잔혹한 방식으로 이야기의 질을 높인 것이죠. 쌓아온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둘 정교하게 무너뜨리는 후반부를 보며 저는 그리스 비극과 같은 장엄함을 연상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작습니다. 소규모 저예산으로 단시간에 제작되기 때문입니다. 연출도, 배경도 소소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화면이 나오려 해도 결국 보는 이를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광경은 만들어내기 힘듭니다. <쥬라기공원>이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영화와 비교할 때 일본 애니메이션이 스케일 면에서 꿇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만한 화면을 지브리 정도를 제외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본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하물며 그만한 광경을 지속시킨 애니메이션은 있었는가? 저는 그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페이트 제로는 그것에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이것이 제게 그야말로 블록버스터라는 파급력으로 느껴졌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하늘은 이렇게 푸르고 아무런 슬픔도 모르는 것 같이 언제나 주저 없이 내일로 무너져 내리는 걸까
-엔딩곡 가사 중
9. 시로바코
현존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 가장 잘 만든 애니입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만한 애니메이션은 없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정보량이 매화 폭발적으로 쏟아지고, 그 안에는 애니메이션 업계에 바치는 찬사와 오마주가 수두룩합니다. 넓은 화면과 질감도, 특별한 연출도, 대단한 드라마도 없었지만 저는 시로바코를 보는 내내 그저 경도될 뿐이었습니다. 그 안에 묘사된 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이었습니다.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한 온갖 노력과 땀의 질과 양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었고, 이는 정말 자신들이 해봤던 일이 아니고서야, 또 그 일에 강한 진정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은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을 만든 스태프 수십 명 제각기의 드라마가 이 한 편에 농밀하게 들어있으며, 그러므로 이만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애니메이션은 앞으로도 도무지 없을 것입니다. 이정도로 다룰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없다면 또한 그 드라마의 크기 역시 감히 따라올 애니메이션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12화에서 안노(모티브의 캐릭터)가 등장하고, 그 경력 오래된 직원과 함께 사건의 해결에 근접하는 순간 저는 이런 작품의 이런 순간에 함께하는 지금이 너무나 기쁨에 차서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습니다. 한 화 한 화가 지나가는 것이 아까웠고, 꿈과 열정이 타올랐습니다. 오프닝 곡만 들으면 마음이 벅찹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이 작은 작품 안에 있었습니다. 인생의 희노애락이 말입니다.
어린 시절 알고 있던 마음이 춤추는 것 같은 두근두근 거리는 감동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오프닝곡 가사 중
8. 무한의 리바이어스
처음에는 참 종잡기 어려운 설정과 인물들이었습니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장르는 SF인가 했는데 SF로 보면 흥미가 떨어지는 이야기만 나오고, 설정은 설명도 없이 흘러가고, 또 인물들은 갑자기 등장해서 갑자기 자신들 나름대로의 행동을 하는데 도저히 행적을 따라갈 수도 없어 시청자를 두고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작품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아주 재미없는 것도 아니라 관성에 휘말려 보던 중, 어느새 빠져드는 저를, 어느새 거대한 주제의식에 만세를 부르고, 매화매화 뒤가 기대돼서 못 참고 금세 다음화를 봐버리고, 후반부에서는 <무한의 리바이어스> 속에 흠뻑 녹아 우울한 감성에 축 늘어진 저를 발견했습니다. 엔딩을 보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소년소녀들의 군상극은 사회 그 자체를 담았습니다. 각 사건과 상황이 발생하고, 그 와중에 악역도 없이 무언가를 주도하려는 인물과 그에 감정적, 윤리적 이유, 혹은 자신만의 이상을 가지고 반대하는 이들, 또 이끌리기 바쁜 소시민들이 있을 뿐입니다. 모두가 제각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와중 질서가 세워지고, 그 질서가 무너지는가 하면 전혀 다른 질서가 세워지는 등 권력구조와 사회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이 안에 과두제, 군부 정권, 민주주의, 폭력적 일당독재 등이 묘사되며 극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모습이 직접적 묘사를 피하는 선에서 끝장나게 묘사됩니다(사이비 종교, 집단 성폭행..). 후반부에 들어가면 희망 없는 상황에 무너지는 (초반의) 유능한 인물들, 폭주해 온갖 막장짓을 도맡는 (초반의) 선한 인물들이 작품의 축을 이루며 기회주의적으로 권력의 끈을 잘 붙잡은 이들은 끝까지 무위도식합니다. 질서 내에서 사소하게 시작한 도덕적 해이가 어떤 과정으로 조직 전체를 붕괴시키는지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고, 온갖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휴머니즘적인 묘사 또한 곳곳에 산재합니다. 참 즐겁고 심각한 작품이고, 또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입니다.
걸으려면 여기가 괜찮아 외로움을 가끔은 참을 수 없겠지만 상처주고 말 일도 상처받고 속마음을 보일 일도 없으니까
-오프닝곡 가사 중
7. 리즈와 파랑새
저는 사이코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사춘기 소녀 특유의 예민한 감정의 결이 충돌하는 그런 묘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인가, 이 이야기는 목록에 있는 작품 중 가장 많이 본 작품입니다. 짧기도 하고, 아마 대여섯번은 족히 봤습니다.
<리즈와 파랑새>는 <울려라 유포니엄>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인 극장판이지만 기존 이야기와의 관련성이 그리 크지 않고, 사실 스핀오프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리즈와 파랑새'는 작품 속 등장하는 동화책이기도, 또 인물들이 연주하는 악보의 이름이기도 하며 주인공격 두 소녀의 관계에 '리즈'와 '파랑새'의 관계가 대입되어 설명됩니다. 제3자의 시점으로 보면 관계가 복잡합니다. 노조미라는 소녀는 소위 말하는 인싸에, 미조레라는 소녀는 소위 말하는 아싸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볼 것만은 아닙니다. 미조레는 음악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데, 처음 생긴 친구였던 노조미의 이끌림에 끌려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던 인물로 노조미와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 외에 음악에 대한 목적의식이 없습니다. 노조미는 훨씬 사교성 좋은 소녀로, 다소 예민하면서도 무심한 부분이 있고 미조레와 함께 음악을 함께하며 훨씬 음악에 진심인 편인데 음악을 못 한다는 묘사는 없어도 미조레 수준의 천부적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두 인물의 관계가 귀를 간지럽히는 선율과 함께 차근차근 제시가 됩니다. 동화 내용이 반복되며, 두 인물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오해 역시 묘사됩니다. 절친이었던 노조미와 미조레 모두 자신을 리즈로, 상대를 파랑새로 생각하며 그 동화를 읽었던 것이죠. 파랑새가 날아가버릴까 두려워하며 말이죠. 노조미에게 그것은 미조레가 음대로 가고 자신은 떨어지는 일이고, 미조레에게 그것은 친구가 많은 노조미가 더 이상 자신과 어울리지 않게 되는 일입니다. 두 사람의 균열점은 후반부에 들어서야 폭발합니다. 후반부에 나오는 5분이 채 안 되는 오케스트라 연주신은 음악 애니메이션의 걸작이라 할 만합니다. 그 장면만이라도 찾아보는 걸 추천합니다. 교사의 조언을 통해 자기 길을 찾고 미조레의 미쳐날뛰는 재능이 모든 것을 압살하고, 그동안 미조레가 자신을 위해 재능을 숨긴 것을 알면서도 모른 채한 노조미가 울먹이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비로소 풀지만, 관계는 정리할 수 없습니다. 미조레는 노조미 없이 음대에 홀로 가 성공한다는 길을 알아버렸고, 노조미는 미조레에게 한풀이하면서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미조레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오해가 풀리자 관계는 너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두 사람은 대학 입학 후 다시 친구로 지내기로 했지만 노조미는 음대가 아닌 다른 곳을 지향하고, 미조레는 음대만 보고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자연스레 멀어질 것을 암시한 채,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결합'을 말하며 끝납니다.
귀도 정화되고, 마음도 순수해지면서 관계의 씁쓸한 맛이 제대로 살아있습니다. 봐도 봐도 새로운 게 보이고, 작품의 편집이 세련되고 음악과 잘 어우러집니다. 감정적인 파도타기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참 좋은 작품. 두고두고 봐도 좋을 작품입니다.
6. 유리쿠마 아라시 (백합곰 폭풍)
이게 뭔가 싶습니다. 전개도, 설정도, 작화도, 아니 그냥 모든 것이 아스트랄함의 경지를 넘어 아득히 먼 안드로메다로 여행을 떠나던 중 우주선이 고장나 아무데나 체류했더니 다시 지구로 돌아온 것 같았는데 사실 시간축이 바뀌고 혼자 멀찍이 미래로 온 느낌의 작품입니다. 곰은 뭐고, 주인공은 왜 곰만 보면 저러고, 애초에 학교는 뭐고, 이 세상은 뭐고, 인물들은 왜 이러고,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네타성 짙은 연출과 대사, 온갖 성애적 묘사에 뇌가 놀아나는 것 같습니다. 한 3화까지는 내가 뭔 작품을 보는 거지? 이런 걸 맨정신으로 본 것 자체가 내게 있어서 대단한 일이고, 하나의 신기한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도 봤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작품이다-라고 생각하며 봤던 것 같습니다. 매화 하차를 생각하며 봤습니다.
인식이 바뀐 것은 3,4화 전후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 보니 목에 칼날이 스며드는 듯한 날카로움에 눈이 번쩍 떴습니다. 노련한 암살자가 저를 마약에 취하게 만든 뒤 그 사이 칼날을 목에 갖다댄 것 같은 그 예리함과 공포.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어디에 놀랐는지를 몰라서 더 놀랐습니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돌이켜봤습니다. 이 작품의 뭐가 나를 이 정도의 두려움에 떨게 하는 걸까. 무서움에 대한 표현은 하나도 없고, 스릴러스러운 연출이 살짝 사용되긴 했지만 온갖 스릴러로 단련된 저를 놀래키기에는 너무 미미한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투명한 폭풍'이라는 설정으로 대표되는 집단무의식과 개인에 대한 억압, 핍박, 또 소수에 대한 악의에 작품 전체가 고스란히 녹아든 것을요. 스토리텔링의 수준은 뒤로 갈수록 높아지고 이 인물들에게 정이 쌓이게 되자 점차 '이상한 연출'로 꽁꽁 싸둔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놀랍게도 정교한 기술로 모든 인물과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었고, 드러난 그곳에 있는 것은 가장 폭력적인 집단주의와 결부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매화 시점을 바꿔가며 주인공은 '다수자의 입장', '권력자의 입장', '핍박자의 입장'에 선 이들에게 현혹당하고 이를 이겨냅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사랑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고, 집단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대응하며 소수자를 핍박하려 들고, 그 집단의 지도자는 계속 곰에게 습격당해 죽지만 갈수록 강경한 인물로 바뀌고 이들이 제각기 드러내는 욕망들은 주인공 일행이 가진 욕망과 직접적으로 충돌합니다. 주인공과 곰들의 행동이 '죄'냐고 끊임없이 직설적으로 묻는 연출은 마지막화에야 가장 큰 사랑의 형태와 함께 결착을 맺습니다. 우리는 존재감 없고 집단이라는 곳에 안주하고 쫓겨나는 두려움에 생각 없이 따르기 바쁜 투명한 사람일까요? 모두가 투명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작품은 묻습니다.
무리지어 우는 그림자에 등을 돌리고 피에 젖은 자아를 외쳤어 이 투명한 폭풍 속에서 (...) 네가 바람에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내 안의 맹수가 순진함을 물어죽였어
-엔딩곡 가사 중
5. 우주보다 먼 곳
규모로 따지면 여기 소개된 작품 중 가장 작은 축에 속합니다. 사실 이야기도 그리 대단한 건 없습니다. 우주보다 먼 남극이라는 곳에 여고생 넷이 가자고 하더니, 진짜로 갔다오는 이야기죠. 그런데 왜 5위냐고요? 저는 이 작품을 5위로 선정하며 고민을 좀 했습니다. 더 순위를 높여야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죠. 제가 이 작품의 장면 하나하나에 느낀 설렘과 감동의 크기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현재에 별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의 크기는 크고, 거기에 대한 지향점이 지금은 분명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을 볼 당시는 아니었습니다. <우주보다 먼 곳>은 어딘가 부족함을 느끼고 뭐라도 해보고 싶지만, 용기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인물들이 나옵니다. 한 명 한 명이 미소녀 애니메이션답지 않게 결함점이 수두룩하고, 그게 감춰지거나 포장되어 표현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드러납니다. 1화에서 시청자가 처음 만나는 인물들은 솔직히 말해 비호감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이들 4명은 어느새 서로 마음의 연결됨을 느끼기 시작하고 진심으로 남극에 가고 그걸 통해 자신을 바꿔보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하지만 꿈 가득한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그 과정이 곧 여행의 의미이자 과정이고, 또 사실 삶의 지향점과 활력이란 것의 본질도 그런 것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요? 적어도 전 그렇게 생각하고, 또 당시 이 작품이 보여준 꿈과 희망에 환상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감화되었습니다. 여고생 4명은 진심으로 남극에 가기 위해 탐험대에 지원하고, 이 애니메이션 전체가 남극에 가기까지의 여정입니다. 그 과정 자체가 이들에게는 성장이자 변화의 과정이었고, 진정한 우정을 처음 경험하며 서로를 아끼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남극에 도착한 뒤에야 이들은 그때까지의 모순된 관계는 바꾸고, 잘못된 관계는 떨쳐버립니다. 거기에는 서로의 도움이 필수불가결했고, 계속해서 감정이 폭발하는 사건을 겪으며 남극에서 돌아왔을 때 이들은 자신들이 어마어마한 체험을 했고, 이전의 자신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하지만 한편으로 전혀 다른 자신을 발견합니다.
저는 감성을 직격당했고, 진심으로 그 여정에 함께했고 이들과 함께 꿈꿨습니다.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 진짜 원하는 소중한 것들을 그 안에서 찾아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거리를 달리거나 언덕을 등정하는 일련의 빛나는 순간이, 오프닝 도입부 침대에 누워있다 한바퀴 뒤집으니 남극의 풍경이 나오는 모습이, 크레파스로 눈부시게 낙서하는 모습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야말로 청춘이란 말이 가지는 간질거리고 설레는 그 느낌.. 그 자체입니다. 나도 이렇게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습니다. 이 힘차게 꿈을 향해 곧바로 전진하는 눈부시고 발랄한 이야기를 저는 사랑해 마지않습니다. 제 인생에서 어떤 어두운 부분도 마음 나눌 사람과 솔직하고 순수한 꿈을 통해 바꾸어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그때보다 나이 먹은 지금도 마음에 품고 있는 원동력 중 하나라고 자신합니다.
교실에서 노트를 펴 새하얀 페이지를 바라보며 연필로 휘갈겨썼어 "날 바꾸고 싶어"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오프닝곡 가사 중
4. 신세계에서
우리는 그동안 독립무장투쟁을 피지배국 입장에서만 다루었고, 지배국 입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채 그들을 피상적으로 나쁜 이들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일본 말이죠. 나빴다는 말이 틀리지 않지만, 그들이 당시 처한 상황과 그 순간 내린 선택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 또한 언제든지 '나쁜 이들'이 될 수 있음에도 말이죠.
천 년 뒤 미래의 어느 날, 초능력을 가진 채 작은 마을 단위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류의 지배층은 감추는 것이 많습니다. 거기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주인공 사키와 친구들은 베일 속에 숨겨진 충격적인 진상을 하나씩 알아갑니다. 자신들의 당연했던 평화가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 위에 성립한 것인지, 또 그 평화 유지를 위해 지배층인 '윤리위원회'가 얼마나 비윤리적인 일들을 감수하고 있는지를요. 사키의 부모님조차도 그 일에서 예외는 아니었고, 사키의 숨겨진 언니는 근시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그들에 의해 '초능력이 폭주할 수 있는 위험인자'로 분류되어 살해당했고, 그 기억까지 조작됐음이 은연중에 드러납니다. 그 와중 지배층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피하고 싶어하는 '초능력의 폭주'와 '질서의 붕괴'가 각각 주인공 일행과 괴물쥐라고 하는 노예 역할을 하는 말하는 동물들을 통해 닥쳐옵니다. 세계관의 비밀을 찾으려던 일탈행위를 통해 '초능력의 폭주'를 겪고 하나씩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가며 주인공 사키는 결국 지배층과 직접 교섭해 들어가 자신이 유력한 차기 최고 권력자로 여겨졌음을 알게 됩니다. 한편 괴물쥐 중 영리한 스퀴라라는 괴물쥐는 사키와 엮이며 생사를 가르는 투쟁을 통해 부족을 규합하고 점차 부족의 규모를 키워갑니다. 거기에는 사키의 도움이 필수불가결했지만, 이제는 지배층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키는 이들을 다시 만나고 '인간화'되어버려 갑옷을 입고 총을 제작해 쓰고 일본 전국시대 수준의 전술을 개발해 타 부족과의 전쟁에서 절대적 우위를 취하는 스퀴라와 그 부족을 보고 놀랍니다. 하지만 스퀴라의 목적에서 여기까진 제반조건에 불과했고, 스퀴라는 사키의 일탈행위에서 초래된 부산물을 통해 '초능력이 폭주한 인간'을 얻고 지배층인 인간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 전략을 짜고 조금씩 정치적 입장을 밝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초능력을 가진 인간 하나에게 괴물쥐 수백 수천이 달려든다 한들 별 의미가 없음에도, 스퀴라가 고안한 여러 교활한 수법들, 그리고 절대적 전력인 '초능력이 폭주한 인간'은 같은 인간 사이에는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유전자적 각인을 무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스퀴라는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우위를 점합니다. 마을의 핵심 지배층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죽고 괴물쥐는 승리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은 사키 일행과 그를 도운 괴물쥐에 의해 패배합니다. 마지막에 스퀴라를 극악의 형벌에 처한 뒤 사키는 괴물쥐 또한 고의로 유전자를 변형시켜 해괴하게 만든 인간이라는 진실을 접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인 것'임을 알았으니 유전자적 조작에 의해 사키는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추고 죽었어야 맞지만 죽지 않았으니 결국 진실을 안 그 순간까지도 괴물쥐를 인간으로 보지 못한 겁니다. 그는 마을의 실세가 되어 예전의 지배층이 통치했던 과민하고 조작적인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게 마을을 이끌어나갑니다.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 있었던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단일 작품 속에서 읽었고, 윤리관과 인간의 본질 같은 가장 철학적인 문제들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 문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이들이 피지배국을 바라보는 시점이 '교활'하고 '미개'한 것임 또한 작품의 괴물쥐를 바라보는 그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그렇게 보고 있는가의 문제에까지 접근해볼 수 있겠고, 그 특유의 후유증에 깊게 빠져 제 지금의 사고관까지 영향을 준 대단한 작품입니다.
운명에 순순히 익어가길 기다릴 것 같아?
-엔딩곡 가사 중
3. 메이드 인 어비스 극장판 : 깊은 영혼의 여명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아니, 엔딩곡이 흘러나오는 그 순간의 느낌은 감히 언어로 묘사하기도 힘듭니다. 우울감? 아뇨, 너무 작습니다. 경악스러움? 아뇨, 제 감정을 모두 표현하지 못합니다. 과연 어떤 단어가 그 순간의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요제프 멩겔레라는 인물을 아시는지요? 저는 아무래도 그 인물에 대해 적힌 단어와 몇 가지 문장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인물과 닮은 본드르드라는 절대적 악역이 등장하는데, 매우 매력적으로 묘사됩니다. 푸르슈카라는 소녀가 애매한 입장으로 등장해, 자신이 사랑하는 두 축의 입장에 끝끝내 고민하다 가장 인간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그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하고 참담한 몇 가지 일들이 반복됩니다. 그 모든 과정이 끔찍할 만큼 아름답고, 경이롭게 묘사됩니다. 귓속으로 들려오는 신비로운 ost와 섬세하게 편집된 예술적인 화면은 비참한 분위기를 극대화합니다. 제가 이렇게 추상적으로밖에 적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생각하기조차 힘듭니다.
모험이라는 건 뭘까요. 진실에 대한 열정?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요. 무언가를 희생하고도 이룰 꿈이 있을까요? 저는 그 질문이 <메이드 인 어비스>라는 작품의 핵심을 꿰뚫는 질문이라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극장판은 그 주제를 무참히 완성했습니다. 무참히 완성한다는 표현이 좀 이상한 건 아는데, 당시 느낀 것에 대해 이보다 나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네요. 이야기의 종반, 저는 인간성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얻어맞고 너무나도 예민하고 울적한 상태에 빠져들었거든요. 어제까지 무심하게 만난 사람들이 그리웠습니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대화와, 거리낌 있게 여긴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 찬란하게 보였고, 그들의 존재 자체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아직 꿈을 가지고, 순수함을 가지고, 때묻지 않은 덜 잔혹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사실이 감사합니다. <호밀밭의 파수꾼> 속 구절이 생각나네요. 이 세상에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분명 푸르슈카와 같은 아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의어라고 생각합니다. 이토록 심장 깊숙이 파고들어오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어 왔고, 지금도 일어남을 알기에 저는 인간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걸며 진심으로 바랍니다. 부디 모두 행복하기를.
지금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전부 잃어도 좋아 (...) 나침반은 계속 어둠을 가리키고 있어 도망칠 곳도 없는 곳을
-tv판 오프닝 가사 중
2. 진격의 거인 Fianl Season
All Time Legend. 보는 내내 그 말만이 머릿속을 휘감았습니다. 이건 대박이다. 애니메이션 역사에 남을 걸작과 함께하고 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나이를 먹고 봤으니 예전보다는 까다롭고 폭넓은 기준으로 이야기의 가치를 산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대박입니다.
가비라는 인물이 가진 적극성과 진취성, 또 그 이면에 감추어진 세상의 비밀에 의해 겪게 될 비참한 나락. 그 부분을 알고 있기에 마냥 동정하면서도 방법이 없는 일부 전사대. 결국 제각기의 방법을 택해 그 제각기의 감정이 어쨌든 서로에 대한 진심어린 정으로 통한다는 휴머니즘. 지금까지 모인 모든 이야기가 결집하듯이 드러나는 곳곳의 묘사(어린 시절의 애니가 발로 벌레들을 밟아죽이는 묘사는 보고 온몸에 소름이 쫙...). 여전히 끔찍한 전쟁에 대한 묘사와 주조연 안 가리고 휙휙 죽어나가는 인물들. 복수와 복수가 연속되는 굴레와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몇 가지 선택들. 용서와 관용.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락사. 옐레나가 이성적으로 지크의 계획을 설명하는 부분, 피크가 가비에게 변절을 설득하는 부분, 지크의 쿠사바와의 과거가 밝혀지며 그 모든 비밀스런 행보가 설명되는 부분, 예거파가 과격한 행보를 보이는 와중 지킬 게 많은 군부정권은 손가락만 물고 아무것도 못하는 부분, 살기 위해 수십 년간 싸워온 조사병단이 훨씬 편안한 환경에서 싸워온 마레를 압살하는 부분. 그냥 이 이야기의 모든 부분을 좋아합니다. 사샤의 아버지가 가비를 용서하는 장면은 사랑합니다. 전퇴 거인과 진격 거인의 충돌은 ost에 힘입어 신화적인 싸움의 느낌을 주었고, 마레 고위층 인물들이 짊어진 책임감과 중압감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이 거대한 이야기는 사실 뭐라 설명할 방법도 없고, 주제의식을 함축하기에는 만화쪽 뒷이야기가 좀 애매합니다. 1,2,3기 다 재밌게 봤지만 final 시즌의 그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final 시즌의 2쿨이 나오면 원작의 그 대책없이 커지는 스토리를 어떻게 수습할지 모르겠기 때문에 지금의 이 시즌은 아마 이 <진격의 거인> 내에서도 최고 수준의 이야기이자 제게도 언제 어느 순간에도 거리낌없이 볼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이고 웰메이드의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1위는....
1. 트루티어즈 (True Tears)
예전에 이 작품을 펼쳐보았을 때 1화만 보고 접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의 연속 같았고, 이야기 진행도 없었거든요. 그때는 많이 어렸죠.
명작의 요건을 뭐라고 해야할지는 모릅니다. 다만 이동진 평론가 같은 경우 만점을 주는 작품은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작품이 아닌 그 자신에게 특별히 울림이 되는 작품이고, 저도 같은 맥락에서 트루티어즈 외에 1번으로 선정할 수 있는 작품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근친상간이 담긴 아침드라마 같은 작품이고 히로인 간의 대결(?)과 이런 장르답지 않게 승패가 명확하게 떨어진다는 점이 길게 시사거리로 남고 있지만 그것들 모두 제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와는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길게 적을 말도 없고, 무슨 말을 적어도 마음에 차지가 않는데 트루티어즈라는 작품을 보고 느낀 것은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네요. 인간 영혼을 꿰뚫는 것 같아요. 그 사소한 장면장면의 미쟝센과 대사, 흐르는 ost가 대단히 잘 어우러지지만 앞서 소개한 <리즈와 파랑새> 같은 경우는 그 부분에서 이미 만점에 가까운 성취를 이루어냈기에 <트루티어즈>만의 것이라 하면 결국 그 모든 장면과 대사, 이야기성과 예술성 모두가 저라는 인물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겠죠. 주인공은 그렇게 마음에 드는 인물은 아닙니다. 매력적이지 못해요. 하지만 히로인 각각의 매력은 놀랍도록 철저합니다. 저는 특히 이스루기 노에라는 히로인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건 흔히 오타쿠가 그렇다고 여겨지며 많은 경우 그렇듯이 캐릭터성을 무조건 추종한다거나, 여자친구처럼 여긴다거나,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그런 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이 친구가 무섭게 화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노에 입밖으로 나오는 대사 하나하나가 저에게 많이 필요하고, 때로 놀라게 만드는 대사였던 것 같습니다. 닭을 통한 추상적 표현, '난다'는 것에 담긴 상징성, 이 캐릭터 자체가 상징하는 진보성 등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상상력 풍부한 당장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는 갖가지 깊은 대사들이요. 현실 관계를 돌아봤습니다. 많은 부분 이 작품을 통해 안심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 이 작품을 통해 깨달아나갈 수 있었고, 또 이 작품을 통해 마음의 따스함을 얻었습니다. 제 성장을 견인하는 것이 어떤 것이 되어야하는지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결국 좋아한다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런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히 적어낼 수 있는 것은 잊을 만 하면 주기적으로 볼 애니메이션이 있다면, 수 년 후에도 마음을 진정으로 울리고 수십 년 후까지 이 순간을 떠올리게 할 애니메이션이 있다면 그 역할은 다름아닌 트루티어즈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형태 없는 두 사람이기에 소중히 했었는데 (...) 지금 여기서 뭐든 말해버리면 변하는 걸까요?
-엔딩곡 가사 중
덧
Top 10에 들지 못했지만
다커 댄 블랙 (Darker than Black)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리틀 위치 아카데미아 (Little Witch Academia)
유력하게 고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