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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6/11/08 16:26:39
Name SummiT[RevivaL]
Subject [유머] '두 남자의 회상록' 매직 & 버드
'두 남자의 회상록' 매직 & 버드

[작성자:heltant79 / 2006-11-06 15:29]



남자 1의 회상

그 녀석에 대해 알려달라고? 잘 찾아왔군. 누군가 단 한사람이 그 녀석을 평가해야 한다면, 그건 나 이외에는 없을 테니까.... 일단 내 소개부터 하지.

나는 1959년 8월 14일 미시건주 랜싱에서 9남매중 한 명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받았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농구를 하며 어울렸고, 나 역시 하루종일 농구를 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무튼 매일 아침 7시 반이면 어김없이 코트에 나갔고 잘 때도 농구공을 베고 잘 정도였으니까, 우리 동네에서 ‘농구 잘하는 주니어’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를 먹고 키가 크면서 농구 실력도 쑥쑥 자랐다. 나는 고등학교 때 2미터를 넘었지만, 내 볼 핸들링을 눈여겨 본 감독님은 내게 포지션에 구애받지 말고 마음대로 플레이하라고 말씀하셨다. 감독님 덕분에 나는 나만의 농구 스타일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나는 피트 마라비치의 패싱과 쇼맨쉽이 마음에 들었고 그의 화려한 패스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우리 주의 유망주로 떠오른 나는 15살이던 어느 날 36점 16리바운드 16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그 경기를 취재하던 한 지역 신문 기자가 내게 ‘매직’이란 별명을 지어줬다.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독실한 크리스찬이셨던 우리 어머니는 이 별명이 불경스럽다며 싫어하셨지만.... 고등학교 졸업반 때 우리 학교는 27승 1패를 기록하며 주 챔피언을 차지했고 나는 평균 28.8득점과 16.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수많은 대학들이 내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직 우리 가족과 떨어지기 싫었던 나는 같은 미시건주의의 이스트 랜싱에 있는 명문 미시건 주립대에 입학했다. 첫해부터 평균 17득점 7.9리바운드 7.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기자들을 놀래킨 나는, 2학년 때 올 어메리칸 팀에 선정되며 드디어 NCAA 파이널을 경험하게 되었다.

바로 거기서 그 녀석을 만난 것이다..... 파이널 상대는 인디애나 주립대라는 이름 없는 컨퍼런스의 이름 없는 학교였는데, 그 시즌 전승을 거뒀다고 했다. 하지만 소속 컨퍼런스가 별 볼일 없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는데, 한경기 한경기 이겨나가더니 결국 파이널까지 와버렸다. 상대팀의 에이스는 나와 키가 같은 백인이었는데, 전 해에 NBA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었는데도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고 싶다며 입단을 미룬 괴상한 녀석이었다. 그녀석을 뺀 나머지는 다 그저 그랬지만, 그 녀석은 팀원의 능력을 120% 발휘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심지어 녀석은 나와 백넘버도 같았다.

우리는 녀석을 잡기로 했다. 강력한 더블팀, 트리플팀을 통해 녀석만 잡으면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는데, 그게 적중했다. 녀석은 턴오버 6개를 저지르며 자멸했고, 나는 24득점 7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 리그마저 평정했다. 하지만 나를 그렇게까지 불타오르게 한 것은 그 녀석이 처음이었고, 나는 어쩐지 우리의 대결이 이것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1979년 드래프트에 참가한 나는 1순위로 명문 레이커스에 지명되었다. 당시 팀은 슈퍼스타 카림 압둘-자바를 중심으로 새롭게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시즌 새로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은 7명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데뷔전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에어볼을 날리고 트레블링을 범하는 등 허둥대다가, 나중에는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서있는가 하면 나한테 오는 패스를 멍하니 보다가 놓치기도 했다. 경기는 간신히 이겼지만, 나는 카림에게 엄청나게 혼나야 했다.

하지만 실수는 한 번 뿐이었다. 놈 닉슨과 번갈아가며 게임을 리딩한 나는 첫 해부터 당당히 주전으로 자리잡으며 팀을 파이널로 이끌었고, 카림이 빠진 파이널 6차전에서는 센터를 보며 종횡무진 활약, 파이널 MVP에 뽑혔다. 하지만, 그 시즌의 신인왕은 내가 아니었다. 보스턴에 입단한 그 녀석이 평균 20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신인왕 타이틀을 차지한 것이다! 녀석은 팀을 전년도 25승에서 자그마치 61승으로 끌어올렸다. 나는 백투백으로 대학/프로를 우승한 4번째 선수가 됐지만, 녀석의 신인왕 수상은 ‘내 시즌’을 망쳐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이듬해 부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녀석의 보스턴은 우리를 누른 휴스턴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 무렵 우리 팀은 갈등을 겪었다. 폴 웨스트헤드 감독이 내 볼 소유 시간을 줄이고 카림의 비중을 높이려 하자 내가 반발했고, 내가 웨스트헤드 밑에서는 뛰지 않겠다고 말한 바로 다음날 그가 해임된 것이다. 내 플레이에 환호를 보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홈 경기에서도 야유를 들어야 했다. ‘모두가 박수를 보내는 경기’를 추구하던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그럴 때일수록 나는 내 자신을 믿었다. 우리 팀은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했고, 나는 또다시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결국 우리는 입단 후 3년 동안 우승 트로피를 번갈아 나눠가진 셈이다. 비록 4년째에 모제스 말론과 닥터 J의 필라델피아에게 우승을 허용했지만, 우리는 리그의 양대 산맥으로 떠올랐다. 언론에서는 나와 녀석의 라이벌 구도를 부각시켜 신문을 팔아댔고, 우리의 팀들 역시 1960~70년대 라이벌 시대를 되돌리려는 듯 연달아 뛰어난 선수를 영입해나갔다. 이제 우리의 맞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매년 리그 일정이 발표되면, 나는 우리 팀 선수들과 함께 보스턴 전이 언제인지부터 체크했다. 우리에게 한 시즌 82경기란 보스턴 전 두 경기와 나머지 80경기였던 것이다.

우리 팀과 보스턴은 여러 모로 차이를 보였다. 우리가 흑인 중심이었던 데 반해 보스턴은 백인 중심이었고, 우리가 ‘쇼타임(이 이름이 마음에 든단 말야...)’ 속공을 즐겼던 데 반해 보스턴은 하프코트 포스트업 공격을 즐겼다. 아무튼 언론이 기사 쓸 거리는 많았던 셈이다.

녀석은 신체 능력 면에서는 약점 투성이였지만, 그 모든 약점을 농구 센스와 '프라이드'로 극복해버린 황당한 녀석이었다. 녀석과 보스턴은 경기를 무지무지 쉽게 했다. 패스패스패스패스패스 이지슛.... 이게 다였다. 녀석과 보스턴은 농구에서 드리블의 비중을 극소화시켜버렸다. 기본적으로 그렇게 엘리트들이 우글거리는 팀에서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를 모두 리드한다는 것 자체가 엽기 아닌가!

입단 4년 만에, 우리는 드디어 처음으로 파이널에서 만나게 되었다. 정규 시즌 MVP를 녀석이 가져갔기 때문에, 나는 파이널에서만큼은 녀석의 매부리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강했다. 우리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고, 녀석은 파이널 MVP마저 가져가며 내 자존심을 구겼다. 아니, 그것은 우리 팀의 굴욕이기도 했다. 레이커스는 그때까지 보스턴과 7번 파이널에서 만나 모두 졌던 것이다. 농구를 시작한 이래 패배를 모르던 내가 누군가에게 ‘졌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 우리는 칼을 갈았다. 정규 시즌 MVP는 또다시 녀석에게 내줬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는 보스턴을 박살내고 우승하고 싶었던 것이다. 딴 팀이 아니라 오로지 보스턴 말이다! 보스턴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다시 한 번 파이널에 올라와 주었고, 우리는 6경기 만에 보스턴 가든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두 번 연속으로 진다는 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이듬해 녀석은 정규 시즌 MVP를 3연패했고, 우리가 휴스턴의 트윈타워에 밀려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사이 녀석과 보스턴은 최고의 플레이를 보이며 우승을 가져갔다. 이제 우리 팀의 중심은 카림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와 있었고, 나는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내가 리더로써 팀을 이끈 1986~87 시즌, 우리는 속공 농구의 극한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우리 팀에는 평균 득점 두 자릿수를 기록한 선수가 7명이나 됐고, 매 경기 상대방을 초토화시켰다. 나는 처음으로 팀 내 득점 1위에 오르며 생애 처음으로 정규 시즌 MVP를 차지했다. 아니, 녀석의 MVP 4연패를 저지했다. 그 무렵 나는 카림에게서 주장 완장과 함께 스카이 훅슛이라는 무기도 함께 받았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녀석과의 파이널 4차전에서 스카이 훅 위닝샷을 터뜨리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우리의 파이널 맞대결은 나의 2-1 승리로 끝났다.

이후 나는 한 번의 우승과 두 번의 시즌 MVP를 더 차지했지만, 녀석이 잦은 부상으로 신음하면서 동부의 새로운 팀들이 치고 올라왔다. 우리 팀은 1989년 파이널에서 배드보이즈에게 스윕당했고, 1991년 파이널에서는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에게 4-1로 졌다. 그리고 녀석은 더 이상 파이널에 오르지 못했다.

1991~92 시즌이 시작하던 무렵, 나는 충격적인 발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HIV 양성 반응 사실을 밝힌 것이다. 사실 경기를 뛰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당시 상황이 나에게 유리하지 못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은퇴를 해야 했다. 하지만 팬들은 나를 올스타전에 초대했고, 나는 마지막 올스타전에서 MVP에 뽑혔다. 녀석은 등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그 해 여름, 나와 녀석은 드림팀 1에 선발되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다. 우리는 많이 뛰지는 않았지만, 공동 주장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NCAA 파이널에서 처음 만난 후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만 뛰었던 우리가 처음으로 한 팀에서 뛰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은퇴를 발표한 녀석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 해 여름, 나는 오랜 라이벌이자 친구의 은퇴식에 초대받았다. 우리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보스턴 가든에 들어가면서, 나는 녀석과 보스턴 팬들을 놀래줄 계획을 세웠다. 녹색 보스턴 저지를 입고 간 것이다. 팬들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녀석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녀석은 나와는 달리 농구만 생각했다. 녀석이 우승한 다음날에도 연습하러 갔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가끔 광고를 같이 찍을 때마다 '이녀석은 갈데없는 촌뜨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녀석은 농구만을 위해서 태어난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게 경기한 상대를 고르라면, 나는 녀석의 보스턴을 고를 것이다. 가장 상대하기 싫은 상대를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녀석의 보스턴을 고를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대단한 삶을 살았다. 나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상상 할 수 없었던 삶이다. 그 삶의 가장 빛났던 시간, 그 시간 속에 녀석이 있었음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녀석 또한 그럴 것이다.

남자 2의 회상

그 녀석? 더 이상 말해 무엇 하겠는가. 녀석은 다른 모든 선수들 보다 머리 하나에서 어깨 하나는 위에 있었다. 난 녀석만큼 잘하는 다른 누구를 본적이 없다. 우리의 차이점은 뭘까.... 아무튼 우리는 시작부터 달랐다.

나는 1956년 12월 7일 인디애나주의 작은 마을 웨스트 바든에서 태어났다. 내가 작은 마을이라고 한 건, 그 동네가 정말로 작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구가 일 단위까지 모두 세더라도 2,059명에 불과했으니까.... 아마 우리 가족은 그 2,059명 중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혼 후 자살해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극빈 가정의 삶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증명하며 살아야 했다. 동갑내기들이 대학 2학년일 때 나는 아직 고교 2년생이었다면 실감이 가려나?

드넓은 옥수수 농장 덕분에 옥수수 하나는 남부럽지 않게 먹던 우리 동네 사람들이 유일하게 입에서 옥수수를 튀겨가며 소리를 지를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유일한 고등학교인 우리 스프링스 밸리 고등학교의 농구 경기가 벌어질 때였다. 2,000여 명 중 1,600여 명이 조그만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나는 우리 학교의 슈퍼 에이스였다. 아무튼 동기들보다 한참이나 나이를 더 먹었으니까.... 불공평하다는 소릴 듣지 않기 위해 나는 다섯 명 모두가 참여하는 공격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경기를 이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내가 경기를 승리로 이끈 날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를 무등태우고 동네를 돌곤 했다. 카퍼레이드는 안했냐고? 아쉽지만 우리 동네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우리 학교는 주 챔피언에 올랐고, 내 고등학교 마지막 경기에는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4,000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렸다.

자랑할 것 하나 없는 우리 동네의 유일한 자랑거리이던 나는 명문 인디애나대에 농구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하지만 도시 녀석들은 잘난 놈들 투성이라 촌뜨기인 내가 감당할 수 없었고, 나는 곧바로 중하위권 대학인 인디애나 주립대로 전학해버렸다. 말이 좋아 NCAA지 솔직히 2부리그나 마찬가지인 팀에 들어간 나는 순식간에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렸고, 사람들은 또다시 내 경기를 보러 몰려들었다. 우리 경기 입장료는 3배로 뛰었고, 우리 학교 친구들은 수업을 빼먹어가며 그 티켓을 사러 달려가곤 했다. 그리고 지역 TV 방송국은 광고 대신 내 플레이 믹스를 틀기 시작했다. 나는 1978년 NBA 드래프트 6순위로 보스턴에 지명되었다. 하지만 인디애나폴리스 정도의 도시에도 적응하지 못한 내가 보스턴 같은 대도시에 적응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게다가 그 무렵 나에게는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우리 팀을 NCAA 우승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나는 한 시즌 더 대학에서 뛰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우리를 막을 팀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시즌 전승을 거두며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했고, 토너먼트를 이겨나간 끝에 마침내 파이널에 진출했다. 그리고 녀석을 만난 것이다.

우리의 선전이 글자 그대로 ‘선전’에 불과했던 데 반해, 녀석의 미시건 주립대가 파이널에 오른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이미 전국구 스타였다. 나는 계속해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에 고개를 돌렸지만,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녀석은 오히려 기자들에게 다가가 농담을 걸곤 했다.

마지막 고비를 넘기 위해, 나는 팀원들에게 주눅들지 말고 우리 플레이를 하자고 격려했다. 하지만 자기 플레이를 하지 못한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24.1%의 시청률을 기록한 파이널에서 상대팀은 나를 완전히 봉쇄했으며, 시즌 평균 28.6득점과 준결승 35점을 기록한 나는 19득점 6턴오버로 무너졌다. 그리고 내가 경기를 지배하지 못하자 동료들은 그만 본 실력이 드러나고 말았다.

결국 우리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녀석은 나중에 ‘매직 스마일’이라 불리게 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악수했고, 나와 동료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냥 농구가 좋아서 경기하던 내가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투지를 지닌 선수가 된 게 말이다.

나와 녀석은 1979~80 시즌 NBA에 입단했다. 당시 명문팀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던 보스턴의 팬들은 NCAA의 영웅인 나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나는 팀을 이기게 하는 나의 능력을 NBA에서도 십분 발휘했다. 첫 시즌, 나는 20-10을 기록하며 신인왕과 퍼스트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우리 팀은 전년 대비 무려 32승이 향상된 61승을 기록하며 평균 득점 1위, 평균 실점 5위의 강팀이 되었다. 비록 플레이오프에서 필라델피아에게 탈락했고 파이널에서 녀석의 레이커스가 우승했으며, 녀석은 믿을 수 없는 활약으로 파이널 MVP가 됐지만, 그것 빼고는 성공적인 데뷔 시즌이었다. 나는 내 플레이가 NBA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이듬해, 그런 믿음은 ‘프라이드’가 됐다. 로버트 패리쉬와 케빈 맥헤일을 얻은 우리 팀은 승승장구했으며,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작년의 패배를 설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파이널 상대팀은 휴스턴이었지만 나는 레이커스라 생각하고 싸워 이겼다.

사람들은 언제나와 같이 내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보스턴 가든은 내가 플레이한 13년 동안 541경기에서 매진을 기록했다.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밀고나가며 종료 부저가 울릴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경기를 원했고, 팀원들은 나의 바램을 실현시켰다. 우리는 명실상부한 동부의 최강팀 중 하나였으며, 내가 가진 프라이드는 팀원들에게 자연스럽게 퍼져 ‘셀틱 프라이드(이 이름 멋있지 않은가!)’로 진화했다.

이후 2년 동안 우리가 파이널에 오르지 못하는 사이 녀석의 레이커스는 한 번 더 우승을 차지했다. 우리는 정규 시즌에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혈전을 펼쳤는데, 누가 이기든 다음 경기를 생각하지 않는 총력전을 펼쳤다. 우리의 경쟁의식은 올스타전까지 이어져, 나머지 선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터프한 경기를 펼쳤다.

위에서 녀석이 나와 우리 팀에 대해 멋대로 지껄인 것 같은데, 나도 나름대로 할 말이 많다. 프라이드의 화신이었던 나조차도 녀석이 나만큼이나 잘한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녀석이 나를 의식했다고? 매일 아침 내가 일어나자마자 한 일은 레이커스의 박스스코어를 보고 녀석이 얼마나 잘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다른 건 신경쓰지 않았다. 녀석이 슛 연습을 하루에 300개씩 한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연습량을 400개로 올렸다. 그러자 녀석이 다시 500개씩 슛을 쏴대기 시작했고, 나는 또다시 연습량을 늘렸다. 결국 이 경쟁은 양 팀 관계자들이 우리를 뜯어말릴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애송이였던 마이클 조던이 우연히 내가 연습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지만, 그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녀석이 우리 팀이 농구를 쉽게 쉽게 한다고 했다고?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도대체 다섯 명이 모두 하프라인을 넘어가기도 전에 거의 모든 공격을 성공시키는 농구가 세상에 어디 있나? 녀석은 엄청난 속공 농구를 구사했다. 아무리 못하는 선수라도 그저 달리기만 하면 20득점을 할 수 있었다. 그 녀석의 패싱 감각은.... 이런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녀석의 패싱 감각은 천재적이었다. 패스패스패스패스패스 이지슛? 우리가 한 골을 성공시키기 위해 하는 그 수많은 패스를 녀석은 단 한 번의 패스로 해치워버렸다. 녀석은 농구를 5대5에서 3대3으로, 3대3에서 2대2로 간소화해버렸다. 기본적으로 나랑 똑같은 키에 포인트가드를 본다는 것 자체가 엽기 아닌가!

1984년 파이널, 나는 녀석과 처음으로 파이널에서 맞붙었다. 나는 처음으로 시즌 MVP를 차지했지만, 파이널에서 녀석의 실실 웃는 얼굴을 뭉개줄 수 있다면 MVP를 반납할 수도 있다는 심정이었다. 최종전에서 우리는 레이커스를 누를 수 있었고, 나는 처음으로 파이널 MVP를 차지했다. 녀석을 이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다시 파이널에서 녀석과 레이커스를 만나야 했고, 내가 손가락 부상으로 제 컨디션을 발휘 못했던 우리 팀은 6경기만에 보스턴 가든에서 레이커스의 축배를 바라봐야 했다. 우리는 카림을 막을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아워백 단장은 곧바로 빌 월튼을 데려왔고, 1985~86 시즌에 우리는 각기 50%이상의 야투를 기록한 나, 맥헤일, 패리쉬, 월튼의 초강력 프론트라인을 앞세워 리그를 초토화시켰다. 레이커스는 휴스턴에게 밀려 파이널에 오지 못했고, 우리는 손쉬운 승리를 거뒀다. 나는 시즌 MVP 3연패와 파이널 MVP를 획득했다.

하지만 녀석은 어김없이 부활했다. 이듬해 최강 전력을 갖춘 녀석과 레이커스는 내게서 우승컵과 MVP를 빼앗아 가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치른 마지막 파이널 맞대결이었다.

내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나는 등과 발 부상으로 경기에 빠지는 일이 잦아졌고, 동부의 신흥 강호 배드보이즈를 막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배드보이즈에게 당하고 말았고, 녀석마저 당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1~92 시즌, 나는 그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기로 생각하고 녀석과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녀석이 HIV 감염으로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녀석이 나보다 먼저 은퇴하다니! 왠지 모르게 깊은 상실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팬들은 녀석을 버리지 않았다. 녀석은 팬투표로 올스타전에 출전해 MVP를 차지했다. 나는 그 경기에 꼭 함께 하고 싶었지만, 등 부상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우리가 드림팀 1에 나란히 선발되면서 풀릴 수 있었다.

평균 점수차 44점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승리를 거둔 1992년 올림픽에서, 우리는 공동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나는 등 부상이 심했고 녀석은 칠칠치 못하게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벤치에서 보냈다. 노인 지정석이랄까....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1993년 2월, 나는 보스턴 가든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가든을 가득 메운 녹색 물결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걸어나왔다. 녀석이 우리 팀 저지를 입고 참석한 것이다! 아무튼 녀석의 광대끼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우리는 플로어에 나란히 앉아서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당시 우리 팀의 팬들은 내 은퇴 후 셀틱 프라이드가 무너지지 않을까 많은 걱정을 했기 때문에, 나는 팬들을 안심시키려 ‘나는 떠나지만 곧 나같은 선수가 나올 것’이라 위로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녀석이 북받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거짓말, 너같은 선수는 앞으로 절대 나올 수 없어!’

사람 속도 모르는 녀석...... 하지만 나는 녀석의 얼굴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서로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했던 친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녀석은 나와는 달리 농구 외에도 여러 일을 벌였다. 제법 큰 사업체를 꾸렸고 엔터테인먼트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여자 관계에서도 적극적이었다. 그것이 나중에 녀석의 불행이 됐지만.... 아무튼 녀석은 '다재다능'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내 생애를 통틀어 나의 승리를 나눠 가질 만한 선수를 한 명 고르라면, 나는 녀석을 고를 것이다. 나의 승리를 절대로 나눠 가질 수 없는 선수를 한 명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녀석을 고를 것이다.
녀석 또한 그럴 것이다.

그들이 남긴 것들

우리는 1980년대라는, 리그 역사상 위대한 시기를 함께 했다. 우리는 위대한 올라운더이자 리더였으며 자신의 포지션을 재정의했다. 1970년대 잠시 주춤했던 NBA는 우리가 등장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사람들은 윌트 체임벌린-빌 러셀 이후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우리의 대결을 즐겼다. 같은 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 캐스터들에게 '스탁턴 & 말론' 만큼이나 자주 이어서 불리워진 건 우리 뿐일 정도니까. 우리의 첫 시즌인 1979~80 시즌부터 1988~89 시즌까지 우리 중 최소한 한 명은 파이널에서 뛰었고, 우리는 80년대에만 8번의 우승을 휩쓸었다. 1980년대는 우리의 시대였던 것이다.

우리는 절대 상대에게 승리를 내주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의 경기는 매경기가 사투였다. 경기의 모든 순간,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상대를 무너뜨리려 했다. 심지어 '비아냥의 대가'와 '킬러'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우리의 입마저 상대를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경기를 치를 때마다 승패에 관계없이 느껴야 했던 건 상대에 대한 한없는 경외감 뿐이었다.

우리의 경쟁심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우리 팀들마저 치열하게 경쟁하기 시작했다. 레이커스와 셀틱스는 우리로 인해 벌어들인 수입을 통해 다투어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했고, 리그는 우리 두 팀 외에 유명 선수의 씨가 마르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까지 보였다. 결국 NBA 사무국은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샐러리 캡 제도를 대폭 재정비해야 했다. 물론 우리의 대결로 인한 흥행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무국은 우리 중 한 명의 이름을 딴 예외 조항을 신설하기도 했지만....

우리의 시대가 지난 후, NBA는 조던이 혼자 지배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많은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지만, 결코 조던의 라이벌은 될 수 없었다. 그의 라이벌은 바로 그 자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던의 시대마저 지난 후, NBA는 우리의 뒤를 이을 새로운 라이벌 관계를 만들어내려 애를 쓰는 것 같다. 던컨과 가넷이 그랬고, 요즘의 르브론과 웨이드가 그렇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소리 높여 말하고 싶다. 발전하고 싶으면 라이벌을 가지라고 말이다.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라이벌의 존재는 강렬한 자극이다. 나태해지고 싶을 때나 포기하고 싶을 때, 라이벌이 열심히 뛰는 모습은 여러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게 해줄 것이다. 라이벌은 여러분을 가장 정확히 비춰주는 거울이며 여러분의 일생을 함께 할 친구이기도 하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여러분 발치의 가장 확실한 발판이며, 추락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러분 앞에 드리워진 가장 튼튼한 동아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최고의 라이벌을 가진 우리는 최고의 시절을 보낸 셈이다.



http://news.naver.com/nboard/read.php?board_id=sports_dis06&nid=19514
멋진글이네요...90년대 조던세대를 경험하면서 자란 저로써는 70~80년대의 슈퍼스타를 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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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미키
06/11/08 17:02
수정 아이콘
멋집니다 ^^
폐인28호
06/11/08 17:07
수정 아이콘
정말 사나이의 멋과 낭만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글이로군요
감동했습니다
06/11/08 17:12
수정 아이콘
마이클조던의 세대인 저도 이 둘의 경기는 많이 보질 못했습니다. 드림팀때 좀 봤지요. 허나 미국내에서 이 둘의 라이벌 구도는 정말 은퇴한 뒤에도 두고두고 회상을 하더군요. 가끔씩 버드의 지난 비디오를 봐도 정말 쉽게쉽게 게임을 하고 매직이랑 같은 코트에서 슬로우 비디오로 겹쳐지는 장면은 게임을 보지 않았음에도 멋있어 보이더라구요. 흑인 위주의 NBA에서 빛줄처럼 나타난 버드와 센타 포인트 가드인 매직, 이둘이 NBA의 흥행을 시작했고 마사장께서 완성했다고 봅니다. 허나 지금은...?
06/11/08 21:23
수정 아이콘
버드라고 해서 찰리파커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이직신
06/11/08 23:12
수정 아이콘
아 감동적입니다..
마사장은 흥행의완성정도가 아닐듯싶습니다.. 한 세기의 위대한 인물을 뽑을때도 꼽히는 마사장이니 말이죠-_-;
자리양보
06/11/08 23:56
수정 아이콘
혼자서, 단 한번의 패스로 득점찬스를 만들어냈던 매직존슨과

패스패스패스패스 어느순간 득점-으로 팀 레벨을 업시켰던 래리 버드 ㅠㅠb

저도 마이클조던 세대라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정말 두 사람이 서로를 표현한 그 말밖에는 없군요.
오늘도한껀했
06/11/09 00:04
수정 아이콘
멋지네요
06/11/09 00:17
수정 아이콘
전성기때의 카림 & 매직 , 핍 & 마사장님 , 말론 & 존수탉 , 샼 & 코비 의 매치업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재밌을까요.. 이렇게 된다면 NBA의 황금기가 아니라 NBA의 절대군림기가 될 것 같네요 .. 후덜덜...
06/11/09 03:30
수정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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