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3/03/27 13:20:02
Name 젤리롤
Subject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전국을 돌아다니고 주위에는 사기꾼과 동네 건달들만 있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술을 자주 드셨고 지인들에게 돈을 자주 빌려주셨고, 보증 및 각종 부탁은 다 들어주셨죠. 주위에 날파리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돈을 돌려받지도 않았고 그러려니 하며 사시는 모습을 보고 화가 많이 났습니다.

몇년동안 연락이 되질 않았고 계속 따로 살았죠. 당연히 제 생활환경은 거기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삶이 무거워졌습니다.



근데 제가 어릴때 가끔 시장에서 통닭을 사줬던 기억과 저한테 단한번도 화내시지 않았던 것들이 제 감정을 미묘하게 만들어내서 그런가

인연을 끊질 못했습니다. 돌아가시면 많이 후회한다는 글들을 보고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나름 최선을 다해보자고 했습니다.

제가 취업을 하고 돈을 벌때 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지셨습니다. 몸도 예전같지 않았겠죠. 나이가 드시고 핏줄이 땡기니

자주 연락 오셨어요. 전화 올때마다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억지로 밝은척하고 좋은 얘기나누고 그랬던거 같아요. 가끔 등산복 하나 보내줄

수 있냐고 부탁하시면 그 소리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어요. 그거 하나 살 돈도 없어 왜 자식에게 부담을 줄까 생각했죠. 술이 취해 연락오면

극도로 환멸감을 느꼈습니다. 또 그 놈의 술..



그 후 각종 병치레를 하며 늙어가는 걸 보며 제 분노는 점점 커졌습니다. 아버지는 형제도 없고 믿을만한 지인도 없고 결국 오롯이

저 혼자 다 감당했거든요. 근데 더 잘해 드릴려고 했어요.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 돌아가시고 내가 미칠듯이 후회할까봐, 난 똑바른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컴플렉스가 있었고 나중에 너무 보고 싶을때 많이 힘들까봐 그래서 제 맘이 편할려고 열심히 했어요. 웃기죠.

그리고 치매판정을 받으셨어요. 이젠 영원히 예전의 삶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거죠. 극도의 절망스런 엔딩이 제 곁에 왔던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헤쳐나갔는가 싶어요. 아버지가 벌여놓은 수많은 것들을 나 혼자서만 수습해야

하는데 지치기도 하고 참 많이 울었던 거 같아요. 결국 아버지는 불쌍한 치매환자가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몇년이 지나 편안히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루고 한동안 계속 잊었습니다. 잊혀지드라구요.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하네요. 과거에 아버지가 전화올 때마다 화가났던 건 왜 다른 평범한 부모처럼 못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더 능력이 있었다면 아버지 집이라도 하나 해드리고 편안히 지내시도록 할건데 그걸 못하는 제 자신에 대한 분노였더라구요.

병수발 들때도 왜 내인생에 이런 고통을 안겨주는가 했던것도 제 착각이었어요. 내가 더 잘 살았으면 아니 좀 더 착실하게 살았으면 치매도

안오지 않았을까.. 아빠한테 저라는 자식은 가면을 쓰고 있었네요. 난 효자이어야 한다. 왜? 그래야 나중에 내가 덜 아플거니까..



아버지라는 존재가 돌아가시니 어느정도 후회가 되냐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습니다.

난 효자처럼 행동했으니까요. 최선을 다하는 척을 했으니까요. 영상과 통화녹음과 사진도 다 남겨 놓았으니까요. 평생 울거 당신을 위해

다 울었으니까요. 다음생에 다시 태어나면 그래도 당신의 자식으로 태어 나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내가 스스로 쌓아놓은 그 무게를 완전히

다 내려 놓았으니까요. 이제 제 인생은 매우 편합니다.



해외여행 한번 못 보내드리고, 내가 좀 더 잘했으면 10년은 더 사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후회는 조금 남아있습니다.

어릴때 사주셨던 그 통닭이 참 맛있었는데 그거때문에 여기까지 왔네요. 이제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젠 어머니를 위해 또 다른 효자의 가면을 써야겠죠. 진짜 효자가 될 그릇은 못되니까..그래도 좀 더 잘 할거 같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봄이 되고 날이 따뜻해지니 오늘따라 너무너무 보고 싶네요. 편히 쉬세요 아빠.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10-08 11:2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3/03/27 13:3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전화 드리러 가겠습니다.
나른한오후
23/03/27 13:34
수정 아이콘
요몇달간 돈문제로 아버지와 크게 싸운터라 글에서 공감이 많이 가네요..(비슷하게 남믿고 공사하다가 호구처럼 돈을 못받으십니다 그래서 사기꾼이 늘 꼬이는)
저도 곧 겪게됄일을 미리보기 하는 느낌이라 한숨만..
상한우유
23/03/27 13:34
수정 아이콘
착하신 분...
스팅어
23/03/27 13:35
수정 아이콘
아버지와 10년 가까이 의절하다시피 지내다가
나이먹고 조금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행복한 가정이란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버지를 위해
가족해외여행을 준비했고, 신나서 여권사진을 찍으러 갔다오셨단
이야기를 전해들었는데….
한달 후 코로나가 찾아왔고, 다섯 달 후에는 간에서 시작된 암이
온몸에 퍼졌단 진단을 받으시고 1년 조금 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저런 후회도 많지만 가족사진 한번 찍으러 가지 못한게
가장 후회되더라구요.
리얼포스
23/03/27 13:36
수정 아이콘
의학적으로 아버님이 편찮으셨던 건 젤리롤님 잘못이 아닙니다. 아들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셨던 거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젤리롤님 같은 아들이 있어서 아버님 말년에 마음만이라도 행복하게 지내다 가셨을 거예요.
무한도전의삶
23/03/27 13:36
수정 아이콘
인간에게 인간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계실 때 최선을 다했고 정성껏 보내드렸으면 집착 없이 잊고 살아도 됩니다.
감자크로켓
23/03/27 13:36
수정 아이콘
글쓴이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충분히 최선을 다하셨기에 스스로를 너무 밀어붙이지 않으시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행복한 일만 더 많으시기를 기원합니다.
cHocoBbanG
23/03/27 13:37
수정 아이콘
https://youtu.be/pGqZVBL84iU
얼마전 이것과 비슷한 문제에 관한 유튜브를봐서 추천드립니다.
성인이된 이후에도 부모와의 과한 애착은 건강하지못한 걸수도 있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부모의 불쌍함을 모른척하고 안면몰수하란 얘기가 당연히 아닙니다.
부디 너무 아파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23/03/27 13:42
수정 아이콘
여운과 뭔가 울림있는 글이네요.. 평화를 빕니다..
루크레티아
23/03/27 13:44
수정 아이콘
그래도 효자시네요.
충분히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제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세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발이시려워
23/03/27 13:52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런 아들을 둔 아버님도 좋은 DNA를 물려 받은 젤리롤님도 모두 행운이 가득하신 것 같습니다.
DeglacerLesSucs
23/03/27 13:54
수정 아이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좀더 행복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루체시
23/03/27 14:18
수정 아이콘
저는 마음보다 행동이 우선한다고 생각해요. 효자 맞으십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고 좋은일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고오스
23/03/27 14:20
수정 아이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좋은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23/03/27 14:26
수정 아이콘
앞으로의 인생이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마그네틱코디놀이
23/03/27 14:59
수정 아이콘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앨마봄미뽕와
23/03/27 15:02
수정 아이콘
보통 사람은 그런 가면조차 쓰지 못합니다. 충분히 착하신 분일 것 같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일각여삼추
23/03/27 15:24
수정 아이콘
최선을 다하셨으면 마음의 짐은 내려놓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아스날
23/03/27 15:31
수정 아이콘
아버지가 되니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가 가더라구요..
충분히 효자라고 생각합니다.
기와선생
23/03/27 15:36
수정 아이콘
너무 효자이셔서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신건 본인의 뜻대로 행동하다 그러신거고 젤리롤님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세요.
죄책감은 버리시고 연락종종 하시고 밝은모습 보이시려 했다하셨자나요. 그런 기억들을 가지고 살아가세요.
소이밀크러버
23/03/27 15:59
수정 아이콘
그래도 멋지십니다.
Just do it
23/03/27 16:05
수정 아이콘
저도 같이 울적하네요.
가까운 날에 어머니랑 꽃놀이라도 다녀오세요.
러시아
23/03/27 17:35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려웠던 순간의 고통과 분노와 지나고 나서의 회한 모두 사람으로서 살기때문에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합니다. 측은지심이 있는 분들은 향기가 나더라구요.
23/03/27 18:19
수정 아이콘
충분히 효자시고 충분히 슬퍼하셨고 충분히 이해 받으실 수 있는 분 같습니다.
고생하셨고 앞으로 인생이 평탄하시길 기원합니다.
마신_이천상
23/03/27 18:26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ItTakesTwo
23/03/27 18:50
수정 아이콘
저와는 많이 다르신 분 같아서 어떤 면에서는 부럽기도 합니다. 전 아버지에 대한 그 어떤 좋은 기억도 남지 않았기에 .. 글쓴 분께선 참 좋으신 그리고 선한 분 같습니다. 그 선함이 앞날을 살아가시는 데 커다란 등불이 되어 줄 거라 생각합니다.
젤리롤
23/03/27 19:01
수정 아이콘
위로해주신 글들이 정말 큰 힘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조과장
23/03/27 19:19
수정 아이콘
저도 곧 격을 일인것 같아 남의 일 같이 않네요.

다만 아버님께서도 글쓰신 분이 애달파 하시는 것 보다
본인을 마음속에서 기억해 주시기를 바랄겁니다.
고생하셨어요
이찌미찌
23/03/27 19:45
수정 아이콘
어머니와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래요.
그 순간들이 젤리롤님의 행복이길 바래요..
한 여름의 봄
23/03/27 20:15
수정 아이콘
아휴... 남 얘기 같지가 않네요...
스스즈
23/03/27 20:18
수정 아이콘
나이 들고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부모님이 대단한 분이라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자식이 노력한다고 되는게 아니에요.
대부분 평범하신 분들은 자식과 형식 이상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해요. 그게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젤리 좋아하는 사람은 역시 선하네요.
데몬헌터
23/03/27 20:20
수정 아이콘
보통 사람은 그런 가면조차 쓰지 못합니다(2)
보기만해도 숨이 턱턱막히는 글인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2)
서낙도
23/03/27 21:23
수정 아이콘
효자 가면을 쓴게 효자입니다.
저도 부모님 두분 다 치매 앓고 돌아가셨습니다.
저포함 5남매 모두 보통 사람 이상은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효자 가면을 안 썼습니다.
모두 원망스럽습니다. 다시 살아계실 때로 돌아가도 역시 효자 가면은 못 쓸 것 같아 제가 가장 원망스럽네요.
영소이
23/03/27 21:25
수정 아이콘
남일같지 않네요.. 잘 살고 계세요. 자책 너무 많이 하지 마시고, 앞으로도 잘 사실 거에요.
지니팅커벨여행
23/03/28 07:44
수정 아이콘
슬프도록 멋진 글이네요
RedDragon
23/03/28 08:34
수정 아이콘
위선을 평생 한다면 그것이 선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인의 명복을 빌고, 남은 인생은 정말 행복해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23/03/28 11:31
수정 아이콘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
꿈트리
23/03/28 13:32
수정 아이콘
훌륭히 사셨습니다.
평온한 냐옹이
24/10/09 11:49
수정 아이콘
효자 맞는데요. 다른 효자들도 내면에 다들 그런 갈등이 있는거죠. 결국 상응하는 행동이 있었다면 효자가 맞다고 봅니다.
24/10/09 21:16
수정 아이콘
진짜 효자인지, 가면을 쓴건지 누가 구별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본인조차 말입니다.
가면쓰고 실제로 행했으면 그게 효자 아닌가 싶네요.
율리우스 카이사르
24/10/10 16:45
수정 아이콘
화이팅입니다.

글쓴이분께 화를 내지 않으셨다는 것에서 먹먹함이 오네요..
리코타홀릭
24/10/11 12:45
수정 아이콘
충분히 효자이고 훌륭한 아들이셨어요

이제 맘편히 본인의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날지않는돼지
24/10/12 09:23
수정 아이콘
저는 선생님 같이 해보려 하는데 잘 안되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수타군
24/10/14 20:25
수정 아이콘
저도 비슷한 상황 이었는데..
글쓴분보다 훨씬 못했습니다.
변명이라면 더 어렸다고 생각 하고 싶습니다.

너무 보고 싶네 우리 아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공지 추천게시판을 재가동합니다. [6] 노틸러스 23/06/01 30338
3738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겪은 버튜버 걸그룹 "이세계 아이돌" 감상기 [47] 잠잘까13610 23/06/14 13610
3737 아이가 요즘 열이 자주 나요 (면역 부채와 열 관리 팁) [62] Timeless12788 23/06/10 12788
3736 태양이 우주 짱 아니었어? (에세이) [42] 두괴즐12773 23/06/09 12773
3735 케이팝의 시대에 서태지 신곡을 기다리는 팬심 (음악 에세이) [55] 두괴즐12625 23/06/02 12625
3734 [역사] 청주, 약주, 정종의 차이를 아시나요? / 청주의 역사 [32] Fig.112345 23/06/01 12345
3733 (장문의 넋두리) 헤어짐은 언제나 슬픕니다. [19] 다시마두장16047 23/05/30 16047
3732 팀켈러 목사님이 지난 5/19 소천하셨습니다 [61] Taima15321 23/05/29 15321
3731 건설현장의 안전관리 현실과 한계 [105] 퀘이샤15406 23/05/27 15406
3730 [LOL] DRX 스킨 공개기념 2022 DRX 롤드컵 서사 돌아보기 (약간스압) [25] 종말메이커14782 23/05/27 14782
3729 아기가 너무 이쁘네요 [113] 보리차15446 23/05/25 15446
3728 [PC] 가정의 달 기념 삼국지 조조전 모드 이야기 [46] 손금불산입13845 23/05/24 13845
3727 전기차 1달 타본 소감 [113] VictoryFood14463 23/05/21 14463
3726 나의 주식투자답사기, 손실로 점철된 짧은 기록 [59] 숨결13240 23/05/18 13240
3725 초등자녀를 둔 부모가 자기자식 수학과외하면서 느낀점 몇가지 [88] 오타니13586 23/05/17 13586
3724 [역사] 그 많던 아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떡볶이의 역사 [49] Fig.113278 23/05/17 13278
3723 [똥글] 사도세자 입장에서 바라보기 [50] TAEYEON15800 23/05/15 15800
3722 비혼주의의 이유 [75] 소이밀크러버16465 23/05/15 16465
3721 아주 소소한 취미.jpg [37] 아스라이15594 23/05/13 15594
3720 [PC] 정치적 올바름과 스카이림 [40] 이선화15197 23/05/09 15197
3719 사진40장.jpg [45] 이러다가는다죽어15436 23/04/18 15436
3718 버크셔 헤서웨이 주주총회 번역(의역) - 1부 [36] 김유라13971 23/05/08 13971
3717 요리는 아이템이다. [49] 캬라13504 23/05/06 1350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