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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16 19:35:00
Name 성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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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펨코
Link #2 https://www.fmkorea.com/3263780100
Subject [기타] 한 달 동안 7번의 전투를 치르며 3만여 명의 백성을 구해낸 용장


양규(楊規)는 10세기 말~11세기 초에 살았던 고려의 관리였다. 2차 고려-거란 전쟁 중에 적군의 후방이 된 서북면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수많은 포로를 구출했으나, 마지막 전투에서 안타깝게 전사하였다. 전쟁 이전의 양규의 삶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선왕 목종(穆宗) 시대에 관직 생활을 하면서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고려와 거란의 2차 전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서, 그 중에서 특히 양규가 활약했던 서북면 지역의 유격전 양상에 대해 설명하겠다.

한반도와 중국 대륙, 북방 초원 지역은 모두 10세기에 큰 변화를 겪었다. 7세기 후반 신라가 통일을 이루었던 한반도에서는 후삼국의 분열을 거쳐 10세기 전반에 고려에 의한 재통일이 일어났다. 세계 제국이었던 당이 무너지면서 중국 대륙은 긴 ‘5대 10국 시대’를 겪었고, 10세기 후반에 송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북방 초원에서는 10세기 초에 거란족이 무서운 기세로 대두하여 국가를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키고 강자로 입지를 다졌다. 이렇게 거란과 송, 고려가 정립하면서 세 나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전쟁이 연이어 벌어졌다. 고려와 거란은 993년(성종 12)부터 1019년(현종19)까지 30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거란이 공격하고 고려가 방어하는 형세였다.

994년(성종 13)에 고려와 거란은 1차 전쟁을 끝내고 강화를 맺었다. 고려는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하며, 양국은 압록강을 경계로 영역을 나누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고려와 송의 연계를 차단하려는 거란의 목적과 북방 영토를 확보하려는 고려의 목적이 접점을 찾은 결과였다. 고려는 압록강 남쪽에 여러 개의 방어 거점을 새로 지으며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른바 ‘강동 6주’ 설치였다. 강화 이후 1009년(현종 즉위년)까지 양국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010년(현종 1),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공했다. 2차 전쟁의 시작이었다. 더구나 거란의 황제인 성종(聖宗)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을 단행하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전쟁의 원인으로 기록에 명시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려에서 터진 ‘강조(康兆)의 정변’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와 여진족 간의 갈등이다. 우선 후자에 대해 살펴보자. 당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일대에 걸쳐 여진족들이 널리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부족 단위로 살았으며, 예전 발해의 주요 구성원이기도 하였다. 발해 당시에 말갈족으로 불렸던 이들이 이 시기에는 여진족으로 불렸던 것이다. 당시 여진 부족들은 거란과 고려 사이에서 각자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향배를 달리 하고 있었다.

이 때는 철책으로 막힌 국경선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고려의 북방 지역은 자연히 여진 부족들의 거주지와 인접하고 있었다. 고려가 영역을 북쪽으로 확장한다는 것은 곧 그 지역에 살던 여진 부족들을 몰아내거나 흡수하는 것을 뜻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부족들도 있었으나,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여진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고려인들도 있었다. 하공진(河拱辰)과 유종(柳宗)이라는 관리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하공진이 북방 지역에 배치되었을 때 임의로 병사를 징발하여 동여진(東女眞) 부락을 침범하였다가 패했다고 한다. 그와 친분이 있었는지,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郞中)으로 근무하던 유종은 고려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자신의 부임지인 화주로 온 여진인 95인을 살해해 버렸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사태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여서 전말을 알기는 어려우나, 원한을 품은 여진족은 거란으로 가 호소하였다.

거란에서 이 사태를 들었다고 해서, 굳이 고려에 전쟁을 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함께 보고된 소식이 거란 성종의 관심을 끌었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국왕 목종을 시해하고 새로 현종(顯宗)을 세웠다는 소식이었다. 고려의 선왕이 승하하고 새 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이미 거란에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변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성종은 이런 대역 행위에 대해 군대를 일으켜 죄를 묻겠다고 하였다. 고려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입장은 강경했고, 결국 1010년(현종 1) 11월에 그가 이끄는 대군이 고려를 침공했다. 40만이라 기록된 대규모 원정군이었다. 역적 강조를 토벌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었기에,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는 기치를 걸고 있었다. 물론 구실일 따름이기는 했지만.

압록강을 건넌 거란군이 처음 마주한 상대가 바로 양규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전체적인 전쟁의 전개 양상을 먼저 간략히 살펴보자.

거란군의 침공에 강조는 병력 30만을 동원하여 맞섰다. 하지만 통주전투(通州戰鬪)에서 대패하여 사로잡혀 버렸고, 그가 끌고 왔던 고려군 병력도 흩어져 버렸다. 치명적인 패배였다. 통주성과 서경(西京)은 결사적인 항전 끝에 거란군의 공세를 버텨냈으나 거란군의 진격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거란군은 개경(開京)을 향해 진격했고, 국왕 현종은 멀리 남쪽으로 급히 피난을 떠나야 했다. 이듬해 1월, 수도 개경은 거란군에 의해 점령당하여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현종은 험난한 피난길에서 거란군에 사신을 파견하여 겨우 강화를 맺었다. 아마도 자신의 친조(親朝)를 조건 중 하나로 제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하여 2차 전쟁이 끝이 났다. 주력군이 대파당하고 수도마저 함락된 처참한 종결이었다.

하지만 거란군이 철군하는 길목인 서북면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가장 처절한 싸움이 이곳에서는 계속되고 있었다. 바로 양규 등의 유격전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잠시 거론하였지만, 사실 양규는 압록강을 건넌 거란군과 가장 먼저 마주쳤다. 강을 건넌 거란군은 고려군의 최전방 요새인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당시 양규는 도순검사(都巡檢使)로 부임해 있었고, 흥화진의 책임자인 정성(鄭成), 이수화(李守和), 장호(張顥) 등과 함께 성을 지켰다. 자신들이 내걸었던 구호 때문인지, 거란 성종은 압도적인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우선 회유책을 택했다. 통주성 인근에서 고려 백성들을 잡아 비단옷을 내려주고, 군사들로 호위하여 흥화진에 보내 자신의 편지를 전하게 한 것이다. 편지에는 거란을 섬기던 목종을 시해하고 새 왕을 세운 강조를 잡으러 온 것이니, 그를 체포하여 보내면 군대를 돌릴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 성문에 편지를 매단 화살을 쏘았는데, 이 편지에는 위의 이야기를 적은 뒤 강조의 협박이 두려워 따랐던 자들은 모두 용서해 주겠다고 하였다. 목종이 내렸던 은혜를 상기하고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전쟁에는 언제나 명분 싸움이 중요하다.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와 이수화 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차례 양측 간에 서신이 오고 갔다. 마지막으로 보낸 글에서 이수화는 “찬 서리와 눈보라를 견뎌내면서 더욱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것이며, 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길이 천년의 성스러운 〈왕업을 〉 받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거란 성종은 이 글을 보고 흥화진이 항복할 뜻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성종은 절반의 병력을 인근의 인주(麟州) 남쪽 무로대(無老代)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나머지 절반을 데리고 통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통주 인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대파하였다.

고려군을 격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은 거란군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흥화진에 보내 항복하도록 설득했다. 이것이 위조라는 것은 탄로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양규는 이렇게 말하며 거부했다.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국왕으로 받은 명령, 즉 이 지역을 지키라는 명령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당시 강조의 정변에 의해 즉위한 현종은 아직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을 확실히 잡고 있지는 못했다. 피난길에 현종은 갖은 수모와 위협을 받아야 했다. 양규의 저 말은 현종이라는 국왕 개인에 대한 충성의 의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북면의 모든 지역이 흥화진처럼 버텼던 것은 아니다. 곽주(郭州)를 지키던 조성유(趙成裕)는 도주하고, 신녕한(申寧漢) 등 여러 관리와 장수들은 곽주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거란군은 곽주에 6천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이동했다. 총 40만이라는 병력이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체 병력의 절반이 후방에 남아 있었으니 서북면에 남은 거란군의 전력은 막강했다. 주력군이 격파되어 구원군이 올 가능성도 없으니, 고려의 성들은 고립되어 각개격파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

바로 이 때, 양규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양규는 흥화진에서 군사 700여 명을 이끌고 출발하여 함락되지 않았던 인근 통주로 가 1,000명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밤에 곽주로 들어가 기습을 감행하여 6천 거란군을 모조리 목베었다. 거란군의 방심이 컸던 것 같지만, 엄청난 대승이었다. 1010년(현종 1) 12월 16일이었다. 이후로도 양규는 유격전을 치열하게 펼쳤다. 귀주(龜州)의 별장(別將)이었던 김숙흥(金叔興) 등도 역시 후방의 거란군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거두었다. 양규는 이듬해 1월에도 무로대(無老代)와 이수(梨樹), 석령(石嶺), 여리참(余里站), 애전(艾田) 등에서 거란군과 격전을 벌여 6,500여 명을 죽였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이들이 한 달 동안 일곱 번의 전투를 벌였다고 하였다. 이동과 정비 등을 감안하면 전혀 쉴 틈 없이 계속 싸웠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양규가 이끌고 있었던 병력의 수를 알 수는 없으나, 정황상 그가 많은 군사를 거느렸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압도적으로 많은 거란군이 주둔한 서북면 지역에서 은밀히 이동하며 큰 타격을 입힌 양규와 김숙흥 등의 유격전의 성과는 매우 컸다. 이 과정에서 노획한 낙타와 말, 병장기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고 한다. 거란의 주력군이 남하하여 개경을 점령하고, 이후 강화가 맺어져 철군 길에 오른 시점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때의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실 따로 있다. 양규에 관한 기록에는 거란군 몇 명을 죽였는지에 대한 기록과 함께, 포로가 되었던 고려 백성 몇 명을 구출했는지가 함께 적힌 경우가 많다. 양규가 구출한 백성의 수는 매우 많았다. 처음 곽주에서 7,000명, 무로대에서 3,000여 명, 이수와 석령에서 1,000여 명, 여리참에서 1,000여 명. 그 외에 다른 곳에서 구출한 인원을 합치면 3만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되찾은 수가 3만여 명이니, 아마도 그 이상의 고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당시 거란이 포로를 잡아가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양규 등이 필사적으로 유격전을 벌인 것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흥화진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국한시키지 않고 한 달 내내 험한 지형의 서북면 각지를 누비며 전투를 벌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들은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싸웠을까.

양규의 결사적인 싸움은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1011년(현종 2) 1월 28일, 양규가 애전에서 거란의 선봉대를 습격하여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얼마 뒤 거란 황제가 이끄는 본대가 양규의 부대를 덮쳤다. 양규와 김숙흥은 종일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전사하고 말았다. 훗날 문종이 두 사람의 초상을 공신각(功臣閣)에 걸게 하면서 내린 제서에서는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연달아 적을 격파하였으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함께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라고 하였다. 압도적으로 많은 거란군에게 포위된 채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이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전쟁이 끝난 후 현종은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김숙흥에게 장군(將軍)을 추증하였다. 양규가 무장이 아니라 문신이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현종은 또 그의 부인과 아들에게도 곡식과 벼슬을 내려주고, 양규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내리고 다시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봉하였다. 이후로도 양규의 후손들은 여러 번 왕실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양규는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공신으로 대대로 기려졌던 것이다.

양규 등의 치열한 전투는 이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인다. 2차 전쟁 당시 강화를 맺는 순간까지 고려는 완전한 패배를 당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전쟁의 마지막 장면은 “거란군은 여러 장수들의 초격(鈔擊)을 받았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쇠잔해졌으며,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려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였다. 양규와 함께 흥화진을 지켰던 정성(鄭成)이 그들을 추격하여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널 때 후미에서 공격하니, 거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심히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라고 묘사되었다. 양규의 모습에 분발했던 것일까. 철군하는 거란군에게 고려군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큰 피해를 입혔다.

훗날 개경으로 돌아와 이 보고를 받은 현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후 현종은 거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아마도 강화할 때에 약속했던 것으로 보이는 친조(親朝)도 병을 핑계로 하지 않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것이면 강동6주 지역을 내놓으라는 압박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이 지역을 노린 수차례의 공격도 대부분 격퇴시켰다. 나아가 1018년(현종9)~1019년(현종 10)에 벌어진 3차 전쟁에서는 철저히 준비된 군사력으로 귀주대첩(龜州大捷)을 거두어 거란의 침공을 완전히 중단시켰다. 자신이 피난을 떠나고 강화를 맺던 순간, 그 뒤에 완전한 패배라 생각하며 개경으로 돌아오던 순간에도 치열하게 싸워 백성들을 구출하던 양규에 대한 보고가 현종에게, 또 당시의 조정 신하들과 군사들, 백성들의 마음에 진한 여운을 남겼던 것은 아닐까. 현종이 손수 지어 양규의 부인에게 내렸다는 교서의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그대의 남편은 재능이 장군으로서의 지략을 갖추었고, 겸하여 정치의 방법도 알고 있었다. 항상 송죽[松筠]과 같은 절개를 지키다가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고, 그 충정은 비길 데가 없을 정도로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지난번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며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로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하여 사로잡아 있는 힘을 다해 나라의 강역을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인이 다투어 도망가고, 6균(鈞)의 〈활〉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였으니, 이로써 성(城)과 진(鎭)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군사들의〉 마음은 더욱 굳건해져 여러 차례 승리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전사하였도다. 뛰어난 공을 항상 기억하여 이미 훈작과 관직을 올렸으나, 다시 전공에 보답할 생각이 간절하므로 더욱 넉넉히 베풀고자 한다. 해마다 그대에게 벼[稻穀] 100석을 하사하되, 평생토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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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
20/12/16 19:48
수정 아이콘
조선시대때 정1품 녹봉이 쌀 11석 이었으니 100석이면 넉넉하게 하사했군요
20/12/16 19:54
수정 아이콘
게다가 죽을때까지 연금
삭제됨
20/12/16 19:56
수정 아이콘
싸이버거놈들...
보라괭이
20/12/16 20:11
수정 아이콘
(수정됨) 개인적으로 고려, 조선 시절 유명한 장군들 중 문관 출신 장군들이 제일 신기합니다. 문관으로 등용되었음에도 무관으로써(전략이든 전투든 둘 다) 출중한 업적을 남긴다는게 말이야 쉽지......
그나저나 양규는 그 업적에 비해 정말 이름이 안 알려지긴 했네요. 과장이 아니라 고려로 치면 이순신급 명장인데......
양지원
20/12/16 20:29
수정 아이콘
여러분 "평화전쟁 1019" 보세요!!
아라온
20/12/16 21:14
수정 아이콘
궁금했던 인물인데, 많은 도움되었네요.
됍늅이
20/12/16 21:35
수정 아이콘
갠적으로 한국사에서 가장 저평가&안 알려진 전쟁영웅이라고 보네요. 고려 초기 거란과의 3연전이 진짜 한국사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데, 거란이 지금 흔적도 안 남은 집단이라서 그럴까요. 너무 부각이 안 되었어요. KBS가 제국의아침같은 거 만들지 말고 바로 거란과의 전쟁 3연전 사극 만들었으면 천추태후같은 똥작도 안 나왔을건데... 이 재미난 시기를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질로 날려버린..
프랑켄~~
20/12/16 21:55
수정 아이콘
그래서 거란도 2차전쟁도 항복에 가까운 화친을 했지만, 패배한거나 다름이 없다고 기록했었다네요.
사딸라
20/12/17 08:59
수정 아이콘
만일 조선이 청나라에 대해 이 정도의 끈기를 보여줬다면 청나라가 거란 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즉, 한반도의 국가 세력이 동아시아 세력판도를 기울이는 무게추 역할은 분명 할 수 있단 것.

조선이 19세기 말에도 제정신이었다면 청일전쟁은 일어나지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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