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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04 09:52
노벨상은 후보에도 못올랐던걸로 알고있고요.
천재라고 말은 많았는데 실질적으로 이뤄낸 '유명한' 업적이 없어서 잘모르겠네요;(물론 논문은 무쟈게 많이 쓰셨습니다. 다만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음 ex> 프린키피아,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관하여) 저는 관심이 없는지라 자세한건 밑에분이 ~
07/01/04 10:32
많은 부분에서 엄청난 천재다 라고 합니다만...
(예전에 <그것이 알고싶다>에도 집중조명되었던가... 당시 방송기억에서는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확실히 일반인에게, 당시에 주변인이 아니었던 사람에게 인식될만큼의 업적을 남기지 못해서 뭐라 할 수 없겠군요. 아인슈타인보다 대단하다라고는 못해도 대단하기는 했을 것 같아요.
07/01/04 13:21
최근에 이휘소 박사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소설이 아닌..)
굉장히 똑똑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발표한 논문들은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한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이휘소 박사가 돌아가신 후에 노벨상을 수상한 어떤 과학자는.. "벤리(벤자민 리=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어서 부끄럽다." 라고 수상소감을 말했다는군요. 책이 지금 저한테 있으면 자세히 인용해서 올리겠는데.. 저도 빌려 본 책이라서..
07/01/04 14:15
1935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기고 2학년(1952년)때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 서울대 화공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서울대 화학과에 진학했으며 2학년때 노벨상을 받은 파인만의 논문에서 수학적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 서울대학교 화공과에 재학 중 1954년 도미,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 196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입자물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1962년 프린스턴고급과학연구소 연구 후, 1963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수가 되고, 1966년부터 미국 스토니브룩의 뉴욕주립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72년부터 페르미가속기연구소의 이론물리학 연구부장이 되고 시카고대학교 교수를 겸하였다. 1960년대부터 입자의 복합모형이 제창되어 수학의 리군이론이 많이 사용될 때 그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7년 이후에 와인버그와 A.살람이 입자물리학의 네 힘 중에서 특히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일하여 만든 전기약작용을 재규격화할 수 있다는 이론적 증명을 함으로써 입자물리학 발전에 획기적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70년대에는 네번째 쿼크인 참쿼크의 존재가 예견되었을 때 이와 관련된 이론적 연구업적은 잘 알려져 있다. 1974년에는 서울대학교에 대한 국제개발처(AID) 교육차관 타당성 조사단의 일원으로 일시 귀국하여 한국 물리학계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1977년 6월 16일 콜로라도주(州) 국립과학연구소의 초청강사로 가는 도중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42세로 죽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도 그의 능력은 빛을 발했는데요, 3학년때는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참여하는 수학 수업이 있었는데 너무 어려운과목이어서 박사과정의 학생들도 줄줄히 포기하는 수업에서 이휘소 박사는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 수업을 마쳤다고 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휘소 박사는 이당시 중국음식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세계적인 수학자인 대학교수는 "나는 이휘소 당신을 가르치기 위해 사력을 다해서 밤새워 공부했다" 이휘소 박사는 어려운 수학이든 물리학이든 한번본것은 두번보지 않아도 되는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이휘소 박사는 박사시험을 미국 최고의 점수인 평균 93점으로 받았다고 하는데요 역시 미국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점수였고 차점은 71점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직 석사 과정인데도 노벨상 수상자 들을 초청하는 세미나에 미국대표로 초청되어 논문을 발표해서 여러 우수한 물리학자들에게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24살이라고 하네요... 석사를 마친후 박사과정에서는 여기저기서 같이 연구하자는 사람이 많았는데요 노벨상을 받은 중국인 양진녕과 이정도등이 러브콜을 보냈고, 노벨상을 받은 겔만은 자기와 같이 연구 할때 자기가 한참 나이가 많지만 오히려 내가 배웠다고 말했답니다. 또 페르미 연구소소장이며 최초의 핵폭탄 제조자인 오펜하이머 소장은 자기 밑에 아인슈타인과 이휘소 둘다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고 했습니다. 양진녕은 이휘소가 이미 60년대 중반에 이휘소에게 노벨상을 주었어야 한다고 한탄했답니다. 당대 핵물리학의 최고 이론가로 인정받았다.
07/01/04 14:39
흠.. 근데 42세라면 뭔가 이룰만한 나이이긴 한데요. 아 물론 상을 받는 것 말고 어떠한 논문을 발표하는 것. 20대에 죽은 천재들도 많고 아인슈타인도 30세 이전에 광전효과, 특수상대성이론, 브라운운동 논문 쓴 걸로 아는데..
07/01/04 16:47
노벨상 후보로 오른 것은 아니고 '죽지 않고 살아서 지금까지 연구를 했다면 아마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김성호 교수님이었나, 그 분이 했었는데 그게 와전된 겁니다. 여러 에피소드(달 착륙 관련 방정식을 눈으로 쓱 보고 '부호 틀렸어 계산 다시해요'라고 말해서 계산해봤더니 실제로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라든가...)가 있지만 과학자로 많은 업적을 남기시고 돌아가신 건 아닙니다.
07/01/04 23:34
이휘소 박사가 죽기 전까지 남긴 논문 140여편 중에.. 전산화가 이루어져 등록이 된 논문이 60여편인데.. 다른 논문에 인용된 횟수가 1만회가 넘는다고 합니다.
노벨상은.. '죽지 않고 살아서 지금까지 연구를 했다면 아마도'가 아니고.. '죽지않고 살아만 계셨다면' 받았을 거라더군요. 노벨상 시상자 선정 기준에.. 살아있는 사람에 한한다는 규정이 있답니다. 다음은 이휘소 박사의 제자인 고려대 강주상 박사가 쓴 <이휘소 평전>의 내용을 부분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휘소 평전>을 제외한 나머지 이휘소 박사님에 관한 책들은..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유족들이 출판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적이 있었죠. 그러나 't Hooft와 그의 지도교수였던 Veltman이 금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임을 볼 때 선생께서 생존하셨더라면 이들과 함께 수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는다. 노벨상 위원회는 "물리학에서 전자기-약작용에 관한 양자구조를 밝힌" 공로로 시상한다 했는데 B. W. Lee, 't Hooft, Veltman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상자가 될 것이다. 비록 그 동안 생존만 하시고 더 이상 아무 학문업적이 없으셔도 금년도 수상자 대열에 끼는 것은 재규격화 이론에 관한 그의 업적으로 볼 때 상당한 객관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휘소는 가장 노벨상에 접근한 한국인이라기보다 이휘소는 생존했더라면 1999년 노벨상을 확실히 수상했을 한국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생존하셨을 경우 과거 22년 동안 그 이전에 이미 이루신 이상의 학문업적을 성취하셨을 것도 틀림없을 것이다. 이부분은 이휘소 박사에 대한 평입니다.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의 능력은 이미 그 위에 있었다. - 오펜하이머(전 프린스턴연구 소장) 이휘소에게는 60년대 중반에 이미 노벨상을 주었어야했다. - 양진녕(1957년 노벨상 수상자) 그와 같이 6개월간 생활하면서 나는 도리어 이휘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 겔만(1969년 노벨상 수상자) 이휘소는 현대물리학을 10여년 앞당긴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 - 살람(1979년 노벨상수상소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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