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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09 16:03
여담인데, 나무위키의 삼국지 관련 글이나, 삼국지 갤러리 같은데서 보면 아무리 봐도 촉한, 그 중에서 특히 제갈량에 대한 재평가가 참 많은거 같습니다. 재평가는 좀 점잖게 말한 것이고, 솔직히 저는 폄하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게 진짜로 오랜 시간동안 신화와 전설에 쌓여 감춰진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단지 역사의 슈퍼스타를 삐뚤어진 관점으로 폄훼하려고 애쓰는건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러니까 "제갈량이 북벌에 실패했으니까 망정이지, 성공했으면 마음을 뒤집어 찬탈했을지 그 누가 아는가?" 라는 뜻인데, 솔직히 역사에 if는 없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서브컬쳐에서 다루는 if 로서는 재미있을지 모르겠네요. (공명전의 마왕 공명 같은)
25/06/09 16:09
최근 촉에 대해서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지 않는 학자들의 연구에 대응한다면 기존의 관념에 대응하는 촉한에 긍정성에 대한 최근 연구를 가져오면 되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역사연구라는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25/06/09 16:40
그냥 저는 사실왜곡으로만 밖에 안 보여서... 선제의 명을 받들어 위를 정벌하려고 한 건 황제가 되려는 야욕에 가득찬 행보이고, 황제에게 충신을 추천하는 건 주변에 자신의 인재를 배치하려는 야욕이며, 출사표에서 선제를 반복적으로 언급한 건 황제를 권위로 겁박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수준이면 그냥 무슨 소릴 해도 왜곡해서 해석햇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25/06/09 16:52
그래서 그냥 딱 이런 내용을 반박하는 학자들의 내용이 있으면 된다는 것이겠죠. 아무래도 학자의 분석을 가장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는건 같은 학계의 반박이니까요.
25/06/09 16:12
딱히 중요한건 아니지만 역사 계교수가 아니라 역사계 교수입니다.
여기서 계는 한국에서 말하는 학부같은 겁니다. 역사학부 교수 아무개 이런거죠.
25/06/09 16:25
(수정됨) 역사적 인물의 내면에 대한 판단은 결국 여러가지 정황 증거를 주관을 개입시켜 해석한 다음에 간접적으로 유추해낼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보니까, 본인의 생각을 명확하게 서술한 글 같은게 갑자기 어디선가 툭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은 그냥 믿고 싶은대로 믿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근현대사의 영역으로 가면 남아 있는 자료가 많아 의도, 사상을 확정하는게 매우 쉬운데, 삼국지는 우리에게 다소 익숙하다뿐이지 실제로는 사료가 태부족한 머나먼 고대의 일인지라...
25/06/09 16:29
학자의 해석들 중에서도 이런 해석이 있다고 가져 온 것이니까요. 국내 중문학과 교수분의 출사표 분석글에서도 이건 충성을 다루는 글이 아니라 제갈량의 권력을 증명하는 글이라는 논문이 있었기도 했죠.
25/06/09 16:53
저는 제갈량에게 한신의 풍모가 있다고 봅니다만 반대로 한신은 역적의 상인가 아니면 공이 너무크고 지략이 웅대해서 황제가 쳐내지 못하는걸 황후가 투기와 계략으로 처형하고 과거 날조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가 필요하다 봅니다
즉 제갈량도 보기에 따라서는 한신보다도 더 꿈이 웅대하다 할수 있겠죠 창업주 공신들과도 한세대 이상 차이나니 집권 시에는 이미 공신 무리들이 다 죽은 후라서 동시대에서 떨어져 나간 한신보다도 강력한 권력이 있었을것이구요 다만 위략 등 어딜 찾아보더라도 찬탈이나 독자 세력 구축의 흔적은 찾기 어렵습니다 물론 북벌이 성공하지 못하고 일찍 죽은것도 크긴 합니다만 사실 그럴 요량였으면 장완 비위등 승상부를 성도에 남겨두지 않았겠죠 오히려 그의 충성심은 스스로 가정전투 이후 삭탈한 부분과 그의 사후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 목숨을 버림으로서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25/06/09 17:11
제 생각이지만 제갈량은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 유씨 황실을 위해 목숨 버린것 덕분에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사마의도 정변 이후 구석은 물론이요 승상직이고 뭐고 다 거절했지만 아들, 손자가 찬위하니 역심이 있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 감이 있죠.
25/06/09 17:53
네 조조가 두려워한것이 자기대에서 찬탈하지 않아도 아들(조비)가 해서 결국 본인도 후세에 역적이 되는거였죠
제갈량 아들 손자가 목숨버리고 지킨것도 충절의 표상이 될만합니다
+ 25/06/09 18:57
사마의의 정변은 조상의 횡포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거병했던 것이고 조정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관구검이 사마사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을때조차 사마의를 두고선 '사마의는 충신인데 아들은 역신이다. 사마사 대신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로 임금을 받드는 신하를 교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으니까요. 본격적으로 사마의의 자손들이 찬위 가도를 달리기 전까지 사마의는 공식적으로 '대위의 충신'이었습니다.
+ 25/06/09 19:05
관구검의 상소를 삼국지에 주석으로 올린건 사마씨가 아니라 사마씨를 부정하고 찬위한 유송의 학자인 배송지입니다. 배송지가 굳이 사마씨에 대한 당대 인식을 두고서 사마의도 같이 역적이라고 칠려고 했으면 이 상소를 삼국지에 주석으로 안 달면 그만이지 사마의에 긍정적인 기사를 굳이 실어줄 이유가 없죠.
+ 25/06/09 19:01
글쎄요 이미 조조가 그런 명분으로 한실을 서서히 뒤엎은 시점에서 그냥 황조가 바뀌든 말든 유리해 보이는 쪽으로 줄 갈아타기라는 냉소적인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관구검의 명분대기도 과연 그가 실제로 정권 뒤집으면 같은 사마씨인 사마부에게 권역을 실제로 줬을지도 의문이고
제갈량의 충심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반대로 위진의 문벌귀족의 충성심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애초에 훗날 남북조의 패부 체제에 실질적인 영향을 준 건 촉이 아닌 위진이고
+ 25/06/09 19:08
봉건 강상윤리와 정통관이 이미 부정된 오늘날, 권신의 "찬위"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대의 유식자들도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덕 있는 자가 거둔다"고 했고, "예로부터 백성의 해악을 제거하고 백성의 귀의를 받은 자가 곧 민주(民主)다"(《위서·무제기》 주석 《위씨춘추》 인용)고 보았다. 따라서 왕망, 조조, 사마소 등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할 때 그들이 찬위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제갈량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
밑에서도 썼지만 교수님이 직접 말하고 싶었던건 이 부분인거 같습니다, 논설 첫 부분부터 사마의와 제갈량이 당대에 '낭고'라고 불린거 얘기하는것 말씀하시는거 보면 동위로 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요.
25/06/09 17:02
(수정됨) 뭐 속마음이야 어쨌든 결국 안했으니 후대사람이 충신의 대명사처럼 쓴것도 못할것도 아니긴하죠 위진남북조시대 즈음에보면 그정도 위치된 놈들 가문치고 찬탈 안한 친구들이...
25/06/09 17:06
(수정됨) '백거이가 《방언오수병서》에서 말했듯이 "주공이 유언을 두려워했던 날, 왕망이 겸손히 참았던 때, 만약 당시에 죽었다면 진실과 거짓을 누가 알았으랴"라고 한 것처럼이다.'
그래서 저 교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시죠. 또 구석을 받으라는걸 거절하지 않고 큰공을 세우면 구석은 물론이요 구석 이상도 받겠다는건 봉건시대 신하로써 매우 불궤한 말이고 이미 비슷한 사례가 여럿 있다는게 저 교수님의 논설이라...
25/06/09 17:41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북벌이 성공했다면 지금 이미지와는 다른 면모가 나왔을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제갈량의 행보는 충신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25/06/09 17:49
제갈량이 충신으로 남고
쓰마이가 역적이 된건 서로 수명이 차이나서다 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결국 제갈량은 역사든 소설이든 충신의 대표로 남아있을뿐 뭐 그외는 전부 상상일 뿐이죠
25/06/09 17:57
그리고 비교적 근대인 이순신 장군도 역사에 남을 충신이지만 만약에 노량 전사 없이 삼남을 전부 통치했다면 민심이 급격히 쏠려 또다른 이씨 왕조가 안되었으리라는 보장이 어딧겠습니까
역사라는것은 if를 붙이기도 재밌겠지만 과정보단 결과로 평가하는게 맞다고 보는 편이라 어쨋튼 제갈량도 이순신도 만고의 충신입니다
+ 25/06/09 18:16
유비에 대한 충성심은 진짜라고 보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역심은 품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갈량이 유비를 따라나선 것이 유비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유비의 대업에 헌신할 각오를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보통 완력을 쓰는 사람들은 인물 그 자체의 매력에 충성을 하는 편이고 지모를 쓰는 사람은 자기와 뜻이 일치할 때 따릅니다. 관우, 장비와 제갈량 충심이 미묘하게 달랐을 걸로 짐작합니다. 순욱이 조조에 반대하다 죽은 것도 그런 연장선이고요. 그래서 제갈량은 역성혁명을 염두해 두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유선이 대업을 이루는데 방해가 됐다면 갈아치웠을 것 같기는 합니다. 유비의 다른 자식을 내세우든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게 자신이 됐든 말입니다.
+ 25/06/09 18:46
"조씨가 한을 대체하고 사마씨가 위를 대체한 것처럼 정상적인 왕조 교체에 속한다고 본다."
고작 이 한 줄을 객관적 논리라는 방패에 감추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에 자아의탁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 25/06/09 19:01
'봉건 강상윤리와 정통관이 이미 부정된 오늘날, 권신의 "찬위"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대의 유식자들도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덕 있는 자가 거둔다"고 했고, "예로부터 백성의 해악을 제거하고 백성의 귀의를 받은 자가 곧 민주(民主)다"(《위서·무제기》 주석 《위씨춘추》 인용)고 보았다. 따라서 왕망, 조조, 사마소 등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할 때 그들이 찬위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제갈량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
교수님이 직접 말하고 싶었던건 이 부분인거 같습니다,
+ 25/06/09 19:09
네 그래서 저 셋을 평가할떄도 찬위 뿐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행보, 그들의 자손들의 행보까지 보고 사관들이 기록을 적은 거고 평가를 한 거잖아요?? 제갈량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솔직히 저 해석도 나온지 20년 넘어간 해석인 데다 학계 주류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그거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 25/06/09 19:12
예, 그래서 이런 의견도 있다고 말씀드린거고 혹시나 이게 마음에 안 든다면 반박할만한 근거가 있는 연구 내용을 같이 들고오면 좋겠다는 거죠.
'제갈량의 <출사표>는 겉으로 드러난 언어 수사적인 측면만을 살펴보면, 승상인 제갈량이 “한실부흥(興復漢室)”을 위하여 촉한의 마지막 황제인 후주 유선에게 온 맘을 다하여 충성과 충언을 바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그러나 <출사표>를 바치기 전에 제갈량은 이미 촉한의 주요 핵심 국가 권력을 죄다 자기의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었다. 제갈량은 군대 출동을 빌미로, 국가권력을 오로지 하면서 허수아비 황제인 유선을 감시 통제하여 무력화하였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재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출사표> 그 어느 곳에서도 황제 유선을 최고통치자로서 인정하는 부분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출사표>는 황제를 억압하고 제갈량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재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용으로만 조직되어 있을 뿐이다.' - <출사표>에 나타나는 제갈량의 독재 정치 (2017)/ 홍윤기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https://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564829 국내에서도 이런 논문이 있습니다. 이건 아직 10년도 안 되긴 했네요.
+ 25/06/09 19:17
이게 통설이 아니라면 통설이 왜 아닌지 반박하는 논문을 들고 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쪽에서 논문을 제시한다면 마찬가지로 이게 통설이 아니라는걸 논문으로 증명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 25/06/09 19:22
오히려 반대 아닌가요 이게 왜 통설인지부터 주장을 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이 논문이 왜 현재 학계의 해석과 맞아떨어지며 주류해석이라는 근거가 있습니까??
+ 25/06/09 19:33
https://arca.live/b/histor25385328036y/67246336
정권을 확립하고 정비한 제갈량은 동시에 정치권력을 승상부에 집중함으로써 안정적인 안정적인 지배를 수립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는 남정・북벌을 통해 자신의 출정지인 한중에 있는 승상부와, 부재 중인 성도에 설치된 승상부라는 두 개의 강력한 군부 위에 군림하며 권력의 안정화를 이루었다. 촉한에 있어서 「패부(覇府)」의 존재와 재상으로의 권력 집중은 왕조 교체의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며, 황제의 지위나 목숨을 위태롭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재상의 권력이 몹시 강대하고, 개인적 지도력에만 근거한 정치체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제갈량・장완・비의로 재상의 교대를 거듭할 때마다 정치적 공백이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중략) 이러한 권한의 분산과 절대적인 지도자의 부재는 정치적 혼란기로 이어졌으며, 이로써 그들은 위의 군사력에 대응하는 저항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 촉한정권 권력구조의 재검토 (2010) https://spc.jst.go.jp/cad/literatures/83 가져오려면 이런 얘기들에 반박하는 논문들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제갈량이 찬위의 마음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후한말 패부를 계승하는 쪽으로 보면 제갈량이나 조조가 패부체제를 구축하고 기존 조정 이상의 권력을 누리고 황권 이상의 권력을 누린 권신이다는건 꽤 많이 나오는 얘기일 텐데요.
+ 25/06/09 19:37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실행하지 않은 행위가 안정적인 정권 찬탈을 위한 몸사리기였다는 주장이 나오는 글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순신이 왜구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니 역심이 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급 급전개 아닌가요? 오히려 자오곡 쓰로잉을 했으면 역심 인정하겠습니다
+ 25/06/09 19:39
논거가 있지요. 함부로 기책을 썼다가 권력의 핵심이 되는 군사력을 상실하거나 피해를 입으면 그만큼 촉 내부에서 권위가 추락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굳이 제갈량만이 아니라 위에서 환온이나 유유의 사례도 기실 다를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고요.
그래서 이순신이 제갈량급의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전 이순신이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낭고호시'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이순신과 제갈량은 존경받고 추앙받는 위인이지만 두 사람이 가진 위치와 권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죠.
+ 25/06/09 18:57
최소한 본인이 직접 난을 일으키지 않은 이상 역심이 있었느냐 아니냐는 탁상공론이죠
그리고 제갈량은 유선 생전에도 스스로 작위를 낮추거나 유선이 이엄 말 듣고 소환했을 때 일단 명령 따랐다는 점에서 충성심은 있다 보는게 맞다 봅니다 후대에 환온 유유도 그렇고 찬탈할 때 제갈량의 고사를 댄 거 자체가 위의 조조, 진의 사마의, 오의 손준 손침 등과 달리 진짜 찬탈을 시도한 적이 없으니 찬탈하려는 거 아니다 시늉 낼 때 들이댈 수 있는 게 제갈량말고 없으니까요
+ 25/06/09 19:10
후대에 탁고지신으로써 찬위를 할때 곽광, 주공의 예를 들어서 찬위를 한거랑 비슷한 상황이겠죠. 이 교수님은 그건 그거고 제갈량이 왕도나 주공의 예처럼 '제갈량에게 찬위의 마음이 정말로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근거가 있다'는 주장이시니까요.
+ 25/06/09 19:12
그래서 그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논증이겠죠?? 제가 아는 한 유선의 권력이 제갈량 시절 조씨 집권기 헌제나 사마씨 집권기 조씨 황가들마냥 무력화되었단 근거를 대진 못하더군요
+ 25/06/09 19:15
위에서 제가 새로 가져온 논문에서도 촉한 황권의 무력화를 말하기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공을 세우면 구석은 물론이요, 십명도 받겠노라'는 발언은 신하로써 불궤한 발언이 맞겠지요. 제갈량의 반례로 구석의 예를 한사코 사양하고 동진 원제 사마예에게 충성한 왕도의 예를 들고 있고요.
+ 25/06/09 19:19
반대로 내가 공을 세운 게 없으니 받을 수도 없다는 해석도 될 수도 있죠??
예전에 영조 시절 유엄이 건륭제가 쳐들어오면 그냥 우린 항복하면 된다 라는 실록 기록도 실제 의도는 그게 아니고 어쩌고저쩌고 라는 식의 해석이 나오는데 말이죠
+ 25/06/09 19:26
(수정됨) 유엄은 그래서 영조에게 무례하고 저질스러운 발언이라 족히 논할 가치가 없다고 타박받기도 했고...무엇보다 영조는 자신의 집권 명분과 왕권탈취에 대한 스캔들인 '게장 드립'은 결코 용서치 않았지요.
왕망은 구석을 받고 전한을 탈취했고 조조 역시 구석을 받고 후한을 탈취했다는건 온 천하가 알던 시절입니다. 한의 신하를 자처하는 인물로서 '공이 있으면 구석은 물론이요 그 이상도 받겠노라'라는 발언은 선을 넘은게 맞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발언을 하고도 제갈량은 오히려 이엄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제갈량이 죽은 다음에는 사마의를 수식하는 '낭고' 발언이 나오며 유선은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제갈량의 사당 짓는걸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제갈량'이라는 이름 석자를 때고 보면 '황권도 위협하는 권신'이라 볼 여지도 있겠지요.
+ 25/06/09 19:26
그냥 제갈량을 의심할 정도면, 어려운 나라에 순수 충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구나 합니다. 제갈량이 틀림없이 역심 있다고 까는 게 아니라, 망탁조의를 무조건 인간 이하쯤으로 보지 말자는 큰 맥락에서 던지는 글 같기도 한데, 제갈량빠라서가 아니라 이런 논법이 예컨대 친일논쟁에 써먹히는 걸 알기 때문에 기분은 좀 별로입니다.
곁들여, 이막 저 사람은 행적을 전부 보지 않더라도 저 글 하나만 읽어도 참.. [제갈량 사당 세워주고 이막 살려준 가상 유선]의 제갈량 호감도<<<넘사벽<<<실제 유선의 제갈량 호감도 이렇게 보입니다.
+ 25/06/09 19:29
그래서 지금 제가 제시하는 학자들이 무슨 친일파 수준의 논리를 가져서, 아니면 독재를 옹호하려고 이런글을 썼다는 주장이신거 같은데 위에서도 몇번 말씀드립니다만, 정 이 논설에 반박하고자 하신다면 이 논리에 학제적으로 반박하는 논문을 들고 오시면 될 거 같아요. 전 어디까지나 학자의 논설을 가지고 온 거지 '친일 토착왜구'짓 하려고 이런 논설을 들고 온 것은 아닙니다. 이런 프레임은 뭐랄까...딱히 할 말은 없으니 '상대의 본심은 타락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색깔론 페인트칠을 하자'는 거 같달까요?
+ 25/06/09 19:49
제 생각인데, 된장까스님이 자꾸 '논문' 방패를 들이미시는 거 같은데요,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중국사 논문 뒤져가면서 근거를 제시할 사람은 없을 거 같고 (삼까페나 삼갤 정도겠죠) 그 전제하에 말씀드리자면, 제갈량이 충신인가를 단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다들 제갈량의 삶의 행적을 보고 그럴거 같지 않다는 강한 심증을 가지고 있을 뿐이죠.
이글 본문만 봐도 논리에 적절치 않은 부분은 다 짤라먹은게 보입니다. 이엄이 구석을 권한 것을 강력한 권신의 행세로 의심하고 있는데, 제갈량의 답변은 매우 강한 부정이었죠. 저 빌미가 된 [여러 신하와 함께 승진할 때 십명(十命)도 받을 수 있거늘, 하물며 구석(九錫)이겠는가!] 는 위를 정벌하면 신하로서 더 할 나위없다는 표현이지, 구석을 내놔라는 이야기가 아니죠. 이막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막이 제갈량을 헐뜯는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당한건, 그냥 담백하게 이막의 상소가 후주에게 마음에 안 들어서였겠죠. 그런데 이막이 헐뜯는 건 '일리가 있다' 면서 그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구요. 동윤을 기용해 궁 내 기강을 바로잡아서 후주가 두려워했다는 걸 마치 동윤이 후주를 억압했다는 식으로 왜곡하는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입니다. 다 이런 식이죠. 출사표를 왜곡해서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결정적으로, 제갈량이 황권을 위협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당대에 살던 인물들이 아무도 그런 소리 안했구요. (후주 본인조차) 정말로 제갈량이 후주의 권한을 다 뺏어가 독차지하는 재상이었다면, 제갈량 사후에 위상을 격하하던가, 아니면 제갈량 파의 세력을 축출할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제갈량의 사후 장완-비의 라인을 그대로 가동했죠. 제갈량의 자손도 아주 어여삐 여기면서 키웠구요.
+ 25/06/09 19:57
(수정됨)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학자들의 논문 방패를 들이밀었다고 한다면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의 논문들을 창으로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드린것 뿐입니다. '그 전제하에 말씀드리자면, 제갈량이 충신인가를 단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다들 제갈량의 삶의 행적을 보고 그럴거 같지 않다는 강한 심증을 가지고 있을 뿐이죠.'라고 하시는데...
본문의 교수님을 비롯해서 지금 제가 들고온 학자분들은 여러 전거를 들어 제갈량의 권신됨과 석연치 않음을 말하고 있는데 반박하는 논리들은 그저 제갈량은 역신이나 권신이 아니라는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 개인의 심증'이라는 얘기밖에 되질 않는다며 스스로 인정하시는 꼴이 아니신지요? 거기다가...오에서는 사사로이 손준이 손침에게 보정의 권한을 물려줬다고 다른 보정대신들이 그게 말이 되느냐고 손침을 공격했는데 제갈량은 장완-비의 라인을 사사로이 후계자로 삼아 재상의 권력을 물려줬으며 유선은 이를 사후승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선은 성인이 되어 나이 30이 가까워 성인으로써 통치가 가능했는데도 말이죠. 유선이 겨우 친정권을 좀 행사하기 시작한게 본문에서 나오듯이 비의 시절에서야 간신히 가능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40세에 육박하고서야 가능했던 겁니다. 이렇게 봉건사회에서 신하가 자신이 가신 권력을 사사로이 후계자로 지명하는 사례를 우리는 보통 권신 세도가의 정치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리고 본문의 교수님이 지적하는건 인신으로써 더 할나위 없다는 표현을 써도 빌미가 된 [여러 신하와 함께 승진할 때 십명(十命)도 받을 수 있거늘, 하물며 구석(九錫)이겠는가!] 는 쓰면 안된다는 겁니다. [정말로 큰 공이 있다고 구석 이상을 받고] 한실을 찬탈한 왕망, 조조의 사례가 있는데 구석은 물론이요 십명도 받겠다는건 굉장히 오만하고 위험한 발언이라는 지적이고 굳이 한실의 충신을 자처하는 자가 그 말을 써야 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의문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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