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의상 존대말은 생략했습니다.
:: 도덕에 대하여 ::
세상은 불확실하기에 이를 보는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다. 그 관점 중 하나는 종교와 법률보다도 도덕을 더 근본적으로 보는 것이다. 진선미를 생각해보자. 사실과 도덕과 아름다움이 있다. 종교는 도덕의 일종이고, 형법도 도덕의 일종이라 보는 관점이 가능하다.
만약 그렇다면, 과거에 스페인에서 종교박해로 인재들이 네덜란드로 떠난 것은 곧 도덕에 의해 쫓겨난 거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과거에 독일에서 파시즘에 의해 미국으로 인재들이 떠난 것도 곧 도덕에 의해 쫓겨난 거라 이해할 수 있다.
도덕이 인재를 추방한다.
비유적으로 도덕이 세포막에 있는 막단백질이라 해보자. 도덕은 어떤 사람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어떤 사람은 밖으로 내쫓는다. 또한 비유적으로 도덕이 세포내에 있는 효소라 해보자. 도덕은 사람의 마음을 특이적으로 활성시키거나 구조적으로 변형시킨다.
도덕이 인간을 변질시킨다.
오늘날 종교를 믿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지만, 도덕은 활발히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다. 도덕에 의해 법도 바뀐다. 그 도덕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을 때, 그게 도덕이 사라진 걸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신과 무관하게, 도덕의 활발한 활동을 의미할 수 있다.
도덕이 신에게서 비롯된게 아니라면, 도덕이 위대한 인물에서 비롯된게 아니라면, 과연 그 도덕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내용과 집행은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지 문제된다. 그리고 그 도덕이 잘못된 거라면, 대체 누가 책임질 것인지 문제된다.
빵 하나 훔쳤다고 무기징역은 적절한가? 도덕이 지나치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지 문제된다. 빵 하나 훔쳤을 뿐이고, 지갑은 훔치지 않았다고 자신을 변호하면, 괘씸죄로 가중처벌되는 건 적절한가? 도덕재판이 불공정하면, 누가 책임질 것이지 문제된다.
신 또는 위인의 권위에서 도덕이 비롯되는 게 아니라면, 결국 중요한 건 2가지다.
첫째는 공리주의이다.
둘째는 개인의 취향이다.
나는 이렇게 본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면, 도덕은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도덕은 미래를 밝게 만들어야 한다.
도덕은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고, 이를 위반한다면,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이를 도덕적이라 말할 수 없다.
또한 개인의 취향 관점에서 보면, 그 취향의 건강성이 문제된다.
건강하지 않은 취향에서 비롯된 '불편감'이 있고, 그 불편감을 통해 도덕을 만들거나 지지한다면, 그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문제된다.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정치적 극단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그들 집단은 각자 도덕관을 갖고 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도덕을 만들어다가 이를 정당화하고 집행하려는 것이며, 심지어 자기들도 지키지 않는 도덕을 외부를 향해 강요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기들 도덕에 따라, 교육과 예술도 바꿔 놓으려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이 있다.
이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아마 앞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여전히 인간 사회는 이 문제를 겪을 것이다. 도덕은 힘의 투쟁을 가리킨다. 힘과 힘이 맞붙는 것 자체를 없애버리기는 힘든 일일 것이다. 그 결과가 보다 긍정적이 될 확률을 높일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본다.
첫째로 상호주의가 돌아가야 한다. 특권주의의 반대이다. — 둘째로 미래를 중시하는 가치관이 돌아가야 한다. 향락주의의 반대이다. — 셋째로 나와 유사하거나, 나와 친밀한 사람에게만 유리하게 하려는 태도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인본주의가 필요하다. — 넷째로 인간 사이 소통이 더 잘 되도록, 사고력 ・ 표현력 ・ 정보력 등 실력을 키우도록 도움이 필요하다. 실력없이 조화는 없다. — 다섯째로 개인의 취향, 그 건강성에 주목해야 한다. 도덕보다 미덕이 중시되어야 한다. 건강 너머 인격적인 훌륭함을 추구해야 한다.
개인의 취향을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문제된다. 나는 이렇게 본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즉 미적인 것이 취향을 건강하게 만들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진선미에서 '미'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취향을 진화시키기 때문이다. 혐오는 회피감정으로서 창조력이 없고, 아름다움은 조화감정으로서 창조력이 있다. 인격을 발전시킨다. 취향을 발전시킨다.
도덕과 미덕의 차이는 이렇다.
도덕은 지키지 않으면 혐오스럽고, 지켜도 평범하다.
미덕은 지키면 아름답고, 지키지 않아도 평범하다.
그렇다면 강조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미덕 아닐까? — 그렇다고 세상이 미덕만으로 잘 굴러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도덕은 소금 같은 것이다. 너무 없어도 문제이고, 너무 많아도 문제이다. 반면에 미덕은 많을수록 좋다. 선은 절제되어야 하고, 미는 많을수록 좋다. 나는 유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어질 인은 미적인 것이다. 어진 마음, 인자한 마음, 이런 것은 미덕이다. 유교는 미덕에 기초한 거라 본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가르기 때문에 그것의 필수조건은 윗사람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위계가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래야 그 체계가 건강해질 수 있다.
유교에는 신이 없다.
유교에는 미가 있다.
어질 인이 사라지면, 그것은
사이비 유교다.
인은 사라지고, 충효만 강조할 때, 그것은 사이비 유교다. 이미 썩어버린 것이다. — 미를 정점에 놓고, 이를 기초로 여러 선들을 구축해놓은게 유교라 할 수 있다. 유교와 마찬가지로 신이 없는 도덕주의에도 같은 기준으로 비판할 수 있다.
미는 사라지고
선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이비다.
선을 주장하고 싶거든,
스스로 미덕을 보여야 한다.
유교는 '어진 마음'이란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이로써 선을 심을 수 있었다. 만약 어진 마음이 어떤 집단 내부에서만 머무른다고 해보자. 그러면 도덕을 집단 외부로 강요할 때, 이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보여준 사고방식을 빌리자면, 이는 전쟁 상태라 할 수 있다.
인본주의, 인간존중사상, 뿌리깊은 인류애. 이런 것들이 있는 가운데, 외부를 향해 뻗어가는 도덕은 말이 되는 도덕이다. 다만 '우리는 인간이고, 너희는 괴물이다.' 이러면서 외부를 향해 주장되는 도덕은 사이비 도덕일 뿐이다. 그것의 실질은 총칼일 뿐이다. 결국 찔러서 죽이거나, 혹은 협박해서 가축으로 길들이려는 것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