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하나의 히트곡만 세상에 알리고 사라진 수많은 스타들이 있다. 한 1년 세상에 없던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이들을 우리는 한참 후에나 가끔 기억할 뿐이다. 반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슈퍼스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데뷔 때부터 빛나기 시작해, 그 빛이 오랜 시간 꺼지지 않는 이들이 정의해 가는 온갖 문화 현상 속에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반짝 스타도 아니고 슈퍼스타도 아닌 스타들이 있다.
이런 중간 지대 가수들을 여러 종류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내 플레이리스트에 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데뷔곡 임팩트가 지나치게 강했던 사람들이라는 걸 최근 깨달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그 데뷔곡 ‘임팩트’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말한다. 또, 이들의 후속곡 중 들을만한 게 없었다는 뜻도 아니다. 후속곡도 좋아서 들어보지만, 한참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첫 데뷔곡을 찾아 재생시키고 있다는 것에 가깝다.
1번은 서문탁 씨다. ‘사랑, 결코 시들지 않는’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잊을 수가 없다. 그때 한창 부활과 본조비에 빠져, 록에 꽂혀 있을 때여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첫 소절을 듣자마자 난 이 가수의 팬이 될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었고,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그 예감이 반쯤만 맞았다는 걸 알게 됐다. 왜냐면 난 지금도 그 노래만 듣고 있기 때문이다. 서문탁 씨의 후속곡들도 다 접해봤지만,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도 꽤 있었지만, 난 연어처럼 ‘사랑, 결코 시들지 않는’으로 회귀한다. 서문탁 씨 특유의 폭발력이 그 곡과 유독 잘 어울리는 걸까? 난 모르겠다. 하지만 그 첫 청취의 충격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
그리고 유독 이 곡을 틀 때만 나는 어쩐지 나도 오늘은 고음의 장벽을 뚫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내가 아는 모든 발성의 이론을 동원해 단전에서부터 힘을 줘 정수리로 소리의 기운을 승천시키려 한다. 목은 그저 소리의 통로로만 써야 한다는데, 애쓰는 내 모습을 보면 목에 힘줄이 굵직굵직하다. 흉하다. 외관도, 소리도. 그래서 나는 이 곡을 혼자 차 운전 할 때 주로 듣는다. 집에서 듣기에는 이 소리와 흉함이 과하기 때문이다. 유독 이 곡만 날 발성하게 만드는 건 20대 초반 암울한 시기가 올 것을 모르고 음악 그 자체를 즐기던 치기가 겹쳐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번은 박효신 씨다. 한국을 대표하는 목소리이고, 수많은 명곡의 주인공이지만, 나는 뭘 들어도 ‘해줄 수 없는 일’로 되돌아간다. 그의 ‘바보’도 좋고, ‘피아니스트’도 좋고, ‘좋은 사람’도 좋고, 특히 그 ‘야생화’는 야심한 밤 혼자 앉아 있을 때 자주 찾아 듣는 곡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해줄 수 없는 일’을 듣고 감상을 마무리한다. 그의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인생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집도 없어 부산 사촌 집에 얹혀살고 있었고, 꿈도 희망도, 잘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어느 날 동생이 틀어 놓은 TV 속에 이상한 노랫소리가 났다. 멜로디도 귀에 딱 꽂혔는데, 그 굵은 목소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완숙한 창법도 뭔가 완성형 느낌이 났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신인 가수라는데, 심지어 나보다 어리다는 소리에 충격이 컸다. 이미 나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돌들이 나와 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그들 때문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었다. 그냥 그런 인생도 있는갑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유독 박효신 씨가 나보다 어리다는 것에 나는 왜 두통을 느꼈을까. 그 어린 나이에도 돋보이는 실력 때문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춘기 때나, 이제 자녀가 사춘기를 바라보는 나이대에나, 개인적으로 가장 부러운 게 노래 잘하는 건데(그다음은 키 큰 거), 아마 그것과 관련이 있지 싶다.
3번은 성시경 씨다.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켰고, 난 그의 앨범이 나올 때마다 구해서 듣곤 했을 정도로 성시경 광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첫 곡 임팩트’ 가수로 꼽는 건 ‘내게 오는 길’이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다른 곡들도 목록에 있지만, 내 손가락은 어느새 ‘다음 곡’과 ‘이전 곡’ 버튼을 눌러서 ‘내게 오는 길’을 찾곤 한다. 솔직히 이 곡 이후 성시경 씨의 보컬 실력이 계속해서 늘어왔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이 곡이 성시경이라는 가수의 모든 것을 담아내지는 못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 곡을 고향처럼 그리워하는 건 첫 청취의 충격 때문이다.
박효신 씨와 마찬가지로 성시경 씨도 TV를 통해 처음 접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왔지만 여전히 집이 없어 아버지 친구 집 구석방에 이불 하나 상 하나 펴놓고 살던 때였다. 아버지 친구분 안방에만 TV가 있었고, 구석방에 하루 종일 있던 나는 심심할 때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몰래 TV를 보곤 했었다. 그때 음악프로에서 처음 성시경 씨의 ‘내게 오는 길’이 나왔는데, 첫 귀에 반했다. 그때는 성시경 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곡 자체에 마음을 뺏겼다.
얼마나 그 곡이 좋았는지, 그 후로 몰래 TV를 시청할 때마다 혹시 그 음악이 나올까 싶어 음악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시켰었다. 그리고 그 곡이 나오면 내가 아는 여자애들에게 집 전화로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이 노래 좀 들어보라고 TV 스피커 쪽으로 전화선을 한껏 늘이는 ‘찐따’ 짓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했었다. 그 노래가 끝나면 전화가 끊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좋은 노래 하나를 전파했다는 것 자체에 만족했었다. 아, 그 부끄러움이 24년을 돌아 이제 내게 오는 길을 찾는다.
4번은 나얼 씨다. 우리나라 대표 보컬로 자리 잡은 그를 ‘중간 지대 아티스트’로 분류하는 걸 악의적으로 받아들일까 봐 두렵지만, 난 그의 데뷔곡인 ‘벌써 1년’만큼 충격을 주는 곡을 그의 이후 곡들에서 찾아내지 못했다. 첫 곡이 나왔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영장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기가 지루해 나처럼 미래가 암울한 형들과 왕십리 지하 방을 하나 빌려 사무실을 차렸다. 각자 포토샵을 좀 할 줄 안다는 것에 착안해 웹디자인 회사를 시작한 건데, 8개월 동안 방세만 주야장천 감당하다가 망했다.
그때 우리는 없는 주문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그 방에서 영화 보고 음악만 들었는데(그러니 망하지), ‘벌써 1년’이 나온 후 계속 그것만 들었다. 그 곡이 나올 때마다 한국에 이런 보컬이 나올 수 있다는 게 기적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제 중년이 된 나는, 아직도 감탄을 금치 못하지만, 이 곡만큼은 혼자서라도 따라 하지는 않는다. 다시 사업을 해보려 시도도 해보지 않는다. 사업이나 나얼 창법이나 아무나 따라 하는 게 아니더라.
5번은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라는 강렬한 첫 곡을 남긴 테이 씨다. 난 이 곡을 군대에서 접했다. 생애 첫 사업을 말아먹는 등 인생에 길이 남을 허튼짓을 하느라 입영 시기를 있는 힘껏 연장한 끝에 입대한 뒤라 나이는 많고 계급은 낮았다. 무슨 뜻인가. 나이가 많은 만큼 감성이 줏대 없이 풍부했고, 계급이 낮은 만큼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다 이 곡을 좋아하는 선임이 내무반에서 음악을 크게 틀을 때 정도만 들을 수 있었다. 서너 살 어린 선임들과 기싸움하느라 문제 사병으로 분류됐던 나는, 단지 이 곡을 듣기 위해서 없던 친화력까지 발휘해 굽신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다른 내무반에서 음악 듣느라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군기도 잡지 않던 선임들을 알게 됐다. 그들은 일과를 빼고서는 온종일 이어폰을 꽂고 살았다. 어떤 노병 같은 신병이 왔는지, 누가 감히 누구한테 개겼는지, 어떤 놈이 군기 빠진 짓거리를 했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냥 음악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괜찮았고, 나는 테이 곡 찾다가 그런 선임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참이기만 했을 뿐 부대 내에서는 외톨이에 가까웠다. 문제 사병이라 외톨이처럼 있던 나는 더 외톨이 그룹으로 들어가게 됐다. 다행히 군번이 꼬여 상병 꺾일 때까지 내무반 걸레를 빠는 신세였기 때문에 저녁 청소 시간에는 수돗가에서 일이병들 사이 군계일학이 됐다. 매일 한 5분 정도. 그래도 그 5분이 쌓여 2년 6개월이 지나갔다.
그 후 난 새 음악을 찾아 듣지 않았다.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엉망진창이었던 삶이, 제대한다고 스스로 원복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상 궤도에 올라서려면 다른 것들에 좀 더 집중해야 했고, 음악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어쩌면 이 시대의 쟁쟁한 음악가들을 한낱 ‘데뷔곡만 히트시킨 아티스트’로 분류시키는 이 무지한 대담함은, 내가 청년 시절을 지나면서 더는 음악을 즐길 수 없었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벌써 n집을 낸 원로 가수 취급을 받을 때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정말 오래도 미뤄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슬슬 돌아가도 될까.
아마 음악적 발견에 전신이 아릴 정도로 충격을 받던 그때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생각 없이 음악만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스스로 살아 있는 캘린더 앱이 돼 몇 시에 어떤 일정이 예약돼 있는지 늘 상기하지 않으면 생활이 유지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도시인’의 압박감을, 그 어떤 음향기기의 볼륨도 이기지 못한다.(아, 그러고 보니 이 도시인의 삶에 대한 얘기도 넥스트 데뷔 앨범에 있었던 거 같은데.) 내 귀가 머는 게 먼저일까, 내 삶이 좀 더 여유를 찾는 게 먼저일까. 나는 이제 기대도 아니고 절망도 아닌 것들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재생시켜 놓고 내 삶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가는지 제삼자처럼 관망하고 있다. BGM은 박화요비의 데뷔곡, ‘그런 일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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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취미로 보컬트레이닝을 받고 있는데 이 노래라는게 들어가는 노력과 난이도가 정말 엄청나더라구요.
소위 가수가 된, 혹은 되려는 분들이 어느 정도로 시간을 쏟고 공을 들이는지 겉치레로나마 좀 알게 되니 가수라는 직업 자체가 참 수지타산이 안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년을 쏟아부어서 노력을 해도 히트를 치는 가수는 소수에 그나마도 빛을 받는 순간은 극히 짧아서 롱런하는 가수는 그 자체로 존중하고 싶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