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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5/23 11:03:05
Name Lord Be Go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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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기타] 스포,공홈에 올라온 니어 레플리칸트의 후일담 (수정됨)




작년에 니어시리즈의 최종작인
니어-리인카네이션이 -완- 료가 되었는데요

올해 4월에 리인카네이션의 마지막장인 3부 OST의 발매에 맞춰
웹페이지에 올라온 공식소설이 있습니다

내용은 리인카네이션이나 오토마타보다는 주로 레플리칸트의 뒷 이야기군요



당연히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기존에  다른소설에 없던 내용들이라 나무위키에 상상으로 채워졌던 오토마타이전 수천년의 내용들과는 꽤 상이한데요
리인카처럼 반쯤페러럴인가? 공식이 이걸로 변경되는건지?? 스러운 애매한수준은 아니고 정사가 맞는듯합니다
추측으로 채운내용과는 상이하나 기존 소설과는 그다지 충돌이 없거든요.


원출처 : 스퀘아에닉스 공홈
https://www.jp.square-enix.com/nier-anniversary/15th-novel/e99787/wakeup/


출처: 니어 리인카네이션갤러리의 주딱인 ppp님이 챗지피티를 이용해 번역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ierric&no=15442&search_head=30&page=1


내용이 너무 길어져서 오토마타 후일담과 리인카 후일담은 붙여넣지 않았습니다

파스칼의 뒷이야기: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ierric&no=15443

리인카네이션 후일담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ierric&no=15451


1. -무(無)의 감옥-


물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거품처럼, '나'의 의식이 살짝 떠올랐다.
어둠의 세계.
끝없이 깊고 조용한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나는 누워 있는 것 같다. 팔에 힘을 주어 상반신을 일으킨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여기는, 어디일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누구지?


기억이 없다.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 있는 이유도 알 수 없다.
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 걸음 내디뎌본다.
차갑고 서늘한 흙 같은 감촉이 발바닥을 감싸며, 약간의 저항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발을 내딛는다. 앞으로, 앞으로.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간다. 걷고 싶어서가 아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으니까.


……얼마나 걸었을까.


앞쪽에 어렴풋한 흰 그림자가 보였다.
그 그림자는 주저 없이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온다.
어둠 속, 빛 하나 없는 이곳에서, 왜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걸까.


우리는 서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혹시 거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 가지가 납득이 갔다.
가까워질수록, 그 모습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눈을 덮을 듯 긴 흰 머리카락.
곧은 콧날. 날카로운 눈매. 얇은 입술.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은, '소년'의 모습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언제 깨어난 거야?"


소년은 갑자기 말했다.
거울에 비친 나......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나와는 다른 존재인 '소년'이었다.
소년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우리는 어색한 악수처럼 연결되었다.


"저기……너는 누구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질문에, 소년은 어깨를 떨어뜨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잊어버렸구나."


잊어버렸다고?
그 말은, 너와 나는 알고 지냈던 사이라는 뜻인가?
새로운 의문이 끝없이 떠올랐다.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흰 머리카락의 소년은 활짝 웃으며 내 양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좋아. 그럼 우선, 네 기억을 되찾으러 가자!"


기억을 찾는 걸 도와준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이런 어둠 속 세계에서 친절한 사람을 만나다니, 나는 어쩌면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


"빨리 기억을 되찾지 않으면, 네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릴 테니까."


──존재가, 사라진다?
왜. 어떻게. 대체 무슨 뜻이지.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던 것 같다.
소년은 그런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하하…… 음, 이런 어두운 곳은 서서 이야기하기엔 적합하지 않지."


소년은 뒤돌아보며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탁!


빛이다.
갑자기 밝아진 세상에 눈이 부셔, 나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캄캄했던 공간이, 소년의 손가락 소리 하나에 맞춰 빛으로 가득 찼다.


"괜찮아. 자, 천천히 눈을 떠봐."


소년의 말에 따라, 나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태양빛……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린다.
조금씩 밝기에 익숙해진 내 눈은, 이제껏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른 광경을 담아냈다.


그곳은, 꽃이 만발한 광대한 정원.
벽돌로 포장된 산책로 위에 우리는 서 있었다.
나는 흰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는 잘 몰랐다.
소년을 보니,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반투명한 천을 겹겹이 덧댄 듯한, 착각을 일으킬 듯한 옷이었다.
우리 양 옆으로는 색색의 꽃들이 경쟁하듯 만발해 있었다.
장미, 백합, 거베라, 달리아, 데이지, 하르지온, 아네모네, 마가렛, 자카스클로버……
소년은 하나씩 꽃을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주었다.


손질이 잘 되어 높이가 고른 화단.
시원한 물소리를 들려주는 분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뺨을 스치는 산들바람.
조금 전까지의 공허한 세계가 거짓말 같았다.


"너……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무심코 나온 내 어리석은 질문에,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원래 내 힘은 아니지만, '계약'을 통해 얻은 마법이야……"


이 이상한 대답에, 의문은 더 커져만 갔다.


"조금 걸을까?"


소년이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고, 나는 그 옆에 섰다.


정원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웠다.
꽃 종류마다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화단.
거기 피어 있는 꽃들은 하나같이 비뚤어진 것도, 시든 것도 없었다.
어디를 봐도 완벽해서, 그림처럼 감탄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어딘가 그리운 듯하면서도, 이런 세계는 전혀 모르는 듯한 기분.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어떤 곳에 있었던 걸까……


"보여? 저기에 있는 거."


소년이 불쑥 입을 열어, 키 큰 꽃들이 만발한 화단을 가리켰다.


소년이 가리킨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금속 기계가 흙 속에 파묻혀 있는 걸 알아챘다.
어른이 한아름 안을 만큼 큰 원반.
접시 같은 원반과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


"나는 그걸 '안테나'라고 불러."


소년이 말했다.
'안테나'라 불린 그 기계는 녹슬어 덩굴식물에 휘감겨 있었다.
나는 비슷한 것들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 걸 알아차렸다.
꽃뿌리와 하나가 된 것도 있었고, 거의 흙에 묻혀 있는 것도 있었다.
꽃밭 속에 숨어사는 무기질의 딱정벌레처럼.
나는 왠지 모를 불쾌한 인상을 받았다.


"어느 거든 좋아. 네가 좋아하는 걸 만져봐."
소년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면, 네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무슨 뜻이지……


하지만 더 캐물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깨어난 뒤로, 이해할 수 있었던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덩굴에 뒤덮인 안테나는 쉽게 손댈 수 없어 보였다.
나는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확 퍼지는 흙 냄새.
단단한 줄기를 살며시 손으로 헤쳐 나간다.
흙에 반쯤 묻힌 녹슨 안테나가 드러났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손을 뻗었다.
이걸 만지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고……?


"우왓……!"


손끝이 금속에 닿는 순간, 안테나에서 빛처럼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빛──아니다. 이건 흐르는 글자 덩어리다.


글자들은 내 몸과 생각을 가르며,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잘 다녀와. 네 기억의 단서를 찾아……"


내 의식은......
안테나에서 넘쳐난, 글자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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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 파스칼의 이야기)



3. -꽃의 정원-


푸르고 맑게 개어 있는 하늘.
졸졸 흐르는 분수의 소리. 작은 새들이 지저귀고, 기분 좋은 산들바람은 꽃들의 향기를 실어온다.
놀랄 만큼 평화로운 정원.

의식을 되찾았을 때, 나는 안테나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래, 소년의 말대로, 안테나에 손을 댄 것이다.
바로 곁에는 흰 머리의 소년이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이 정원에서, 기억을 되찾기 위해 그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서 와」


소년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떠오른 게 있어?」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머릿속 깊숙한 곳을 더듬듯 눈을 감았다.
화단의 꽃들에 파묻혀 있던 안테나에 손을 댔을 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기억.
황폐해진 낯선 세계의 이야기였다.
작은 로봇들을 지키려 했던 오래된 로봇. 그가 선택한 비뚤어진 방법은, 어쩌면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도 그런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해 지키고 싶었던 존재... 그건......


「……여동생」


불쑥 튀어나온 그 말에, 나 자신이 놀랐다.
여동생.


「나는, 지켜야 할 여동생……이 있었던 것 같아」


작은 소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형상을 이뤘다.
오빠, 오빠 하며 나를 따르던 그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흐릿한 기억의 조각들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감는다.
그래,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나에게 있어,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
어리고… 병약한……

그 이름은, 요나.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신이 생긴 것이 있다.
나는, 요나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응」

소년은 내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듯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더 많은 기억을 되찾아보자」


나는 반드시 기억해내야만 한다.
요나의 위치를. 요나는 무사할까? 어째서 나만 이곳에 있는 걸까?
어설프게 되살아난 기억은 나를 무작정 불안하게 만들었다.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를 살피던 내 발은, 다른 안테나를 찾기 위해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잠깐만!」


내 뒤편에서, 소년의 어딘가 미안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조금 반항심 어린 기분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년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멀리 있는 분수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그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나는 빨리 안테나를 찾아야 하는데.


「미안. 먼저 옷을 입혀줬어야 했나, 싶어서」
「……엣?」


소년의 말에,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몸을 감싸고 있던 흰 천이 사라지고, 나는 알몸이 되어 있었다.


「우왓」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팔로 감쌌다.
그 옷은 언제 사라졌던 걸까.
아니, 애초에 옷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이후로, 줄곧 옷을 입지 않고 있었잖아.

그런데 여기 와서, 갑자기 ‘부끄럽다’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마치, 기억과 함께 감정도 되찾은 것처럼.

소년을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하얗고 모호한 형태의 옷을 입고 있었다.


「준비해줄게. 자, 어떤 게 마음에 들까?」


탁!

소년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다음 순간, 나는 이상한 옷을 입게 되었다.
화려한 칼라가 달린, 원색 그대로의 빨간색과 노란색 옷. 바지는 너무 헐렁해 걷기도 힘들다.
정성스럽게 빨간색 가발까지 쓰고, 코에는 빨간 공까지 달려 있다.


「피에로 복장은 어때?」
「이건 좀……」


옷이 급한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는 싫다고 말해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이건 어때?」


탁!


이번에는 온몸을 덮는, 하얗고 거칠거칠한 옷.
얼굴 주변은 돔 형태의 덮개로 감싸져 있다.
무엇보다 굉장히 무겁다. 너무 무거워서 결국 나는 두 손과 무릎을 땅에 짚고 말았다.


「우주에 가기 위한 옷이야. 엄청 비싸고, 귀한 거지」
「우주……? 거긴 안 갈 것 같아…… 아마도」


탁!


「그럼, 이건 어때?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들이 입는 옷이야」


소년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내 앞이 또다시 깜깜해졌다.


「우와아!」
「눈을 가리고 있는 건 검은 고글이야. 이걸 쓰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앞이 안 보여서 싫어!」


그만, 나는 소리를 질러버렸다.
어둠은,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소년은 내 반응을 즐기는 듯 보였다.


「……이제 그만 장난 좀 쳐」


내가 어이없어 하며 말하자, 소년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럼, 너다운 옷으로 하자」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탁!


얇은 회색 상의에, 상반신부터 허리 아래까지를 덮는 검은 덧천.
여유 있는 짧은 바지. 롱부츠. 마무리로, 팔꿈치 위까지 덮는 긴 장갑.


「응…… 괜찮은 것 같아」


이 옷을 입자, 마치 내 윤곽이 또렷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나’라는 존재가 확립된 듯한 느낌.


「응, 잘 어울려」


소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인사를 건넸다.
꽤 놀림을 당한 것 같긴 하지만, 이쯤에서 잊기로 했다.


「자, 준비가 된 김에」
소년은 연극이라도 하듯 양팔을 벌렸다.
「다음 기억으로 가보자」


다시금 정원을 바라본다.
광활한 정원. 언뜻 보기에 평범해 보이지만, 그 존재를 인식하고 나면 곳곳에 이질적인 기운을 뿜는 안테나가 숨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식물의 덩굴과 하나가 되어 있거나, 화단의 흙 속에 묻혀 있거나, 키 큰 초목 뒤에 숨어 있거나. 그리고…… 나무의 뿌리 근처에도.

나는, 연보랏빛 꽃이 늘어진 근사한 나무 아래에 묻혀 있는 안테나에 시선이 멈췄다.
왠지, 그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무 뿌리에 묻힌 안테나에 다가갔다.


손끝이 안테나에 닿는 순간──
쏟아져 나오는 문자들의 덩어리가 다시 나를 감쌌다.
의식과 몸이 분리되는 듯한 감각.

나는 또다시, 문자들의 세계로 잠겨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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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니어 리인카네이션)

5. -재앙의 바람-


눈부신 빛과 함께, 내 의식은 마치 떠오르듯 되돌아왔다. 나는 다시 원래 있던 장소로 끌려 돌아오고 있었다.


연보라색 꽃들이 커튼처럼 드리운 나무 아래.
여기는 조금 전과 다름없는 꽃의 정원──잃어버린 내 기억을 되찾기 위해 소년과 함께 여행하고 있는 장소.


나는 나무 뿌리에 묻힌 안테나에 손을 댄 순간 흘러들어온 광경을 되새긴다.
떨어져버린 친구와의 재회를 바라고 여행을 떠나는 소녀들.
그녀들이 찾고자 했던 세계처럼, 나도 요나와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요나 외에도──


「나도, 소중한 동료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되찾아가고 있는 동료들의 기억.
얼굴과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동료들과의 기억은 마음 어딘가에 걸려 있고, 그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처럼 느껴졌다.
절벽 벽면에 달라붙듯 늘어선 집들이 있는 마을 외곽의 오두막.
근사하지만, 불길한 인상을 주는 서양식 대저택.
그곳에서 만난 그녀들과 함께 걸었던 길. 별것 아닌 이야기들.
동시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도 느껴졌다.
싸움과 이별. 고통과 상실이, 마음 깊은 곳에서 기어오르는 것만 같다.


정말 좋아해. 그런데 무서워.
아파. 싫어.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무서워.
자신의 기억에 가까워질수록, 되찾고 싶은 듯하면서도 되찾고 싶지 않은 듯한 모순된 감정이 앞을 가로막고,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불현듯 격렬히 고동치는 심장을 달래듯,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슴팍을 누르고 있었다.


「그래. 너는 너무 많은 걸 짊어지고 있었어」
하얀 머리카락의 소년이 내 뒤에 서 있었다.


사아아아아……


거센 바람이 나무들과 꽃들을 흔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의 소리가, 멀리 멀리 빠져나간다.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 다음을 말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말하면, 무언가를 떠올릴 것 같아서, 그것을 떠올리는 것이 무서웠다.
떠올리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어버릴까.
이대로 있어선 안 되는 걸까.


사아아아아아아……


강한 바람이 다시 불어, 나와 소년 사이를 지나쳐 갔다.
왠지 모르게, 외로움을 더욱 자극하는 소리.
흩날리는 꽃잎.
구름이 태양을 가린 것처럼, 우리가 서 있는 장소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바람에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을 때, 정원의 모습이 변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햇살을 받아 만개해 있던 꽃들이 시들어 고개를 떨구고 있다.
나무들의 잎은 시들어 떨어졌고, 모든 식물의 줄기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돌출해 있다.
머리 위에 드리운 연보라색 꽃은 바싹 말라, 내 머리 위에서 으스스한 위압감을 뿜고 있었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고, 멀리서부터 천둥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지저분하게 시든 꽃잎들이 마구잡이로 내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왜 이런……」


나는 뒤돌아 소년과 마주한다.
나와 똑같은 시선을 가진 그.


「왜 너는,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내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깨어나, 어둠 속에서 소년과 마주쳤을 때, 그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라 착각했던 건, 내 모습을 기억 저편에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 틀림없다.
이 하얀 머리 소년은, 나와 완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는, 도대체……?」


나의 물음에,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쪽이야」


소년은 내 질문에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생기를 잃은 음울한 정원 속을, 소년은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다.
나는 뒤처지지 않으려, 그 뒤를 조심스레 따라간다.
지금까지의 경치와는 달리, 보기도 괴로운 처참한 장소를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소년은 시든 꽃으로 가득 찬 넓은 원형 화단에 망설임 없이 발을 들여놓고, 꽃을 밟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유독 큰 이 화단에 핀 꽃의 이름을 나는 알고 있다.
월광초.
말라 있어서 색은 알 수 없다.
큼직한 월광초는 모두 아래를 향하고, 마치 풀이 죽은 아기들의 무리처럼 보여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되도록 꽃을 밟지 않으려 따라가려고 했지만, 어떻게 해도 안 밟을 수는 없어서,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뀨, 뀨……


밟힌 월광초가 비명처럼 소리를 냈다.


소년은 원형 화단의 중앙에서 멈춰 섰다.
그곳에는 갈색으로 변색된 월광초들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 안테나를 가리려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월광초들에 의지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안테나에 손을 대면, 모든 걸 알 수 있어」


소년은 무표정이었지만, 그 태도에는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분노일까. 슬픔일까. 둘 중 하나로도 보이고, 둘 다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문득 도망치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다. 기억을 되찾지 않는 이상, '나'라는 존재는 사라져버리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요나를 만나러 가야 한다.
명확한 형상을 가지지 않은 기억만이, 나를 움직였다.


나는 겹겹이 쌓인 월광초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는다.
꽃잎과 줄기들을 헤치며, 익숙한 금속의 감촉을 더듬는다.


손끝이 안테나에 닿은 순간──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처럼 분출하는 문자들의 덩어리에, 나는 휩싸여 간다.


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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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Nier Replicant 「유전의 기록」


“생일 축하해, 요나.”


오빠 니어와 여동생 요나. 두 사람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책상 위에는 소박하지만 예쁜 과일로 장식된 케이크가 놓여 있다.
오늘은 요나의 15번째 생일이다. 남매는 조그마한 집 구석에서, 그 특별한 날을 함께 축하하고 있다.


특별한 날. 그래, 정말 특별한 날이다.

요나는 몸이 약하고, 불치병을 앓고 있다. 불안한 나날 속에서, 이 작은 마을에서 둘이서 손을 맞잡고 살아남기 위해 애써온 15년이었다.


요나는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이며 케이크를 입에 넣는다.
15살에 비하면 아직도 천진난만하지만, 그게 바로 요나의 매력이다.


“예쁜 머리장식을 하고 케이크를 먹다니, 요나 공주님이 된 것 같아. 꿈에서 본 게, 정말로 이루어진 걸지도 몰라.”
“꿈에서 본 거라니?”
“큰 성에서 오빠랑 같이 사는 꿈을 꿨어. 작은 새들이 있는 신기한 정원도 있었고…… 그치? 요나, 공주님 같지 않아?”


니어는 케이크를 찌르던 포크를 잠시 멈춘다.
요나는 ‘마왕의 성’에 대한 꿈을 꾼 것이겠지.
잊고 있던 일을, 무의식 중에 떠올리려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앞에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진실이 기다리고 있는데……


“요나, 이제 슬슬 쉬자.”


니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요나는 포크를 입에 문 채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너무 신난 것 같아서. 몸 상태 나빠지면 큰일이잖아.”
“괜찮아, 오빠. 요나, 요즘은 몸 상태도 좋아.”
“오늘은 베개도 말렸어. 푹신푹신해서, 잘 자게 될 거야.”


니어는 상냥하게 요나의 손을 잡고, 일어나도록 이끌었다.
요나의 손에서 포크가 빠졌다.
달그락, 하고 차가운 소리가 나며, 먹다 남은 케이크 위로 흘러들었다.


── 과거, 요나는 ‘마왕’에게 납치되었었다.
니어는 요나가 그 사실을 떠올릴 기미가 보일 때마다, 이렇게 얼버무리며 모면해왔다.


요나를 납치한 마왕을, 니어는 온몸이 타들어갈 만큼 증오했다.
그래서 니어는 카이네와 에밀, 그리고 말을 하는 신비한 책── 백의 서와 함께 협력해, 기어코 마왕을 쓰러뜨리고 요나를 구출해낸 것이다.


그때 함께했던 동료들과는, 마왕과의 전투를 끝으로 모두 헤어지게 되었다.
그 외로움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요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이 세상에 치르게 한 대가를 생각하면, 지금 이 행복은 무서울 정도다.


── 그러니 요나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니어는 요나를 침대에 눕힌 뒤 한참 동안,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창문 너머로 마을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요나가 깰 정도의 소란이었다.
창밖을 내다보자, 흥분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둘은 함께, 마을 상황을 보러 가기로 했다.


“데볼 씨랑 포폴 씨가, 도서관에 돌아왔대요.”


집 문을 나선 곳에서, 니어와 요나는 마을 청년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


“에에엣!”


요나는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목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데볼과 포폴은 마을의 사제를 맡고 있는 쌍둥이다.
그녀들은 사실상 마을의 지도자였지만, 3년 전부터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컸지만──
사제인 그녀들이 없으면, 부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데볼과 포폴의 불가사의한 실종에 당황하고, 앞날을 알 수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들이 오늘, 갑자기 돌아왔다고 한다.


요나는 니어의 손을 꼭 잡고, 얼른 데볼 씨와 포폴 씨를 만나고 싶다며 언덕 위의 도서관으로 가려 했다.
요나에게 있어서 데볼과 포폴은, 의지할 곳 없는 자신들의 삶을 뒷받침해준 은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요나는, 니어의 눈빛이 어두워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


“왜 그래, 오빠?”


니어가 무언가 대답하려던 그 순간──
그는 언덕 위에서 무언가 굴러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발밑에 멈춰 선 그것은── 미소를 띤 채 잘려나간 사람의 머리였다.


“……어?”


멍한 목소리를 낸 요나를, 니어는 감싸듯 가슴에 껴안았다.
화들짝 뒤를 돌아보자, 방금 전까지 이야기하던 청년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단숨에 죽어버린 것이다.


죽었다──살해당했다.


그의 옆에는, 어느새 붉은 머리칼을 지닌 쌍둥이가 서 있었다.
데볼과 포폴. 3년 만에 마을에 나타난 사제.
그녀들의 몸은, 머리칼보다도 더 짙은 붉은색으로 젖어 있었다.


“니어. 너라면 알고 있겠지?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를.”


데볼의 말대로였다.
니어는 이 참혹한 광경에 동요하면서도, 모든 이치와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요나 앞에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 자들은, 요나가 아는 데볼 씨와 포폴 씨가 아니야.”


요나는 숨을 토하듯, 간신히 “응” 하고 대답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새하얘져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데볼 씨와 포폴 씨는 상냥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니어는 요나를 안아올리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도망치려는 곳마다, 데볼과 포폴을 마주쳤다.

그녀들은 마치 쥐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마을 곳곳에 나타났다.
아니──실제로 그녀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데볼과 포폴은, 신기루처럼 증식하고 있었다.
같은 얼굴을 한 여자들이, 마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살육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왜……」라고 요나는 울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왜, 그렇게 다정했던 데볼 씨와 포폴 씨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걸까.
왜, 데볼 씨와 포폴 씨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걸까.


요나를 안은 채 달리는 니어는, 그저 “괜찮아”라고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맑은 시냇물은 붉고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비명조차 없이, 미소를 띤 채 숨을 거둔 사람들의 시신을 닭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쪼아대고 있다.
이제는, 마을 누구도 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어떻게든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마을의 문을 빠져나왔다.

그곳에 펼쳐져 있던 것은, 수평선 너머까지 사람의 피로 물든 초원.

이 세상의 끝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니어와 요나는 조용히 숨어 다니며 이동을 반복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숲과 지하를 떠도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마을을 떠난 이후 오늘까지, 그들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학살된 사람들의 시체는 여러 번 목격했다. 여기, '신화의 숲'이라 불리는 마을에서도 그랬다. 아마도 전 세계에 많은 데볼과 포폴이 나타나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을 것이다.


요나가 기침을 하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최근에는 안정되었던 요나의 건강이 다시 나빠지고 있었다.


"요나, 잠깐 쉬자."


근처의 민가에 들어가자, 니어는 요나를 의자에 앉혔다. 기침이 심한 것 같으니, 눕는 것보다는 이렇게 앉아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괜찮아, 요나. 오빠 여기 있어."


요나의 체온이 내려가고 있었다. 니어는 그녀를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그녀를 안고 이마를 맞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다.


"오빠, 저기 봐."


갑자기 요나가 시야의 끝에서 빛을 포착했다. 바닥의 틈새에서 불규칙하게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니어가 바닥을 뜯어보니, 아래로 이어지는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지하 공간에는 불빛이 켜져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사다리를 내려가 보기로 했다. 만약 자신들 외에 다른 생존자가 있다면, 만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차가운 사다리를 손에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서, 니어와 요나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벽에 붙어 있는 촛대들이 간격을 맞춰 배열되어 있고, 깊이가 있는 하얀 돌로 만들어진 공간은 저녁 노을처럼 불빛에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천사를 형상화한 수많은 조각상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투명한 용기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 안에는 투명한 액체와 함께──사람의 아기가 담겨 있었다. 그 아기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보다 더욱 작은 모습이었다.


"뭐야, 이게......"


요나는 두려운 마음을 쥐어짜듯이, 두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아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깨끗했지만, 피부 위로 비치는 혈관의 색깔은 흐릿해 보였다.


왜 이렇게 많은 아기들이 여기에?
왜? 무엇을 위한 것인가?


"여기는… '레플리칸트의 공장'"


갈라진 요나의 목구멍을 넘어, 그녀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말이었다.
머리가 아프다. 아픈데,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이었다.
고통 속에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요나를 니어의 팔이 받쳐주었다.


"게슈탈트 계획, 마왕, 안드로이드… 레플리칸트"


요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반쯤 열린 입술로 뜻이 분명하지 않은 말을 중얼거렸다.
요나, 요나, 요나. 니어는 그녀를 다시 불러들이듯, 그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니어는 요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있었다.


요나는 기억을 되찾았다.
그것은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라는 오빠의 말에 의해 깨진 기억이었다.
──마왕과 함께 살았던 시절.
자신의 몸에 "다른 요나"가 들어있었던 때의 일. 그렇게, 그들의 지식이 요나의 안에 되살아났다.


멀고 먼 옛날,
천 년도 전의 일이었다.


인류는 병으로 인해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것이 '게슈탈트 계획'이었다.
인간의 몸에서 '게슈탈트', 즉 "영혼"을 꺼내어 보관하고, 언젠가 안전한 시기가 오면 그 영혼이 들어갈 인간 형태의 몸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레플리칸트'라고 불렀다.


"우리들은, 인간…이 아니야. 여기서 만들어졌을 뿐이야…"


요나는 두려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사의 상들이 안고 있는 병 속에 들어 있는 아기──"인간 모양의 것들".
니어와 요나,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여기서 만들어진 그릇들이었다.


"…괜찮아, 요나. 우리는 인간이야."


니어는 말했다.
확실히 자신들이 레플리칸트는, 그릇으로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레플리칸트들은 게슈탈트와의 융합을 거부하게 되었다. 빈 몸에도 영혼은 깃든다.


그리고, 돌아갈 곳을 잃은 게슈탈트들.
그들의 왕──마왕.
그는 여동생의 몸을 되찾으려 했다.
여동생의 이름은 요나.
맞다. 마왕이 요나를 데려간 이유는, 그녀의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지만 니어에게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다.


"우리는 우리야. 피가 흐르는, 한 사람의 인간이야."


비록 자신이 마왕의 그릇에 불과하다 해도.


"요나를… 되찾고 싶었어."


그래서 니어는 마왕을 처치했다.
마왕이 없으면, 다른 게슈탈트들도 살 수 없다. 인류가 부활할 방법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 이 세계에는 멸망의 길밖에 남아있지 않다.
무언가 남을 수 있다면, 이 계획을 관리하던 데볼과 포폴을 비롯한 안드로이드들만 남을 것이다.


"이제, 레플리칸트가 있어도 어쩔 수 없겠지. 그래서 데볼 씨와 포폴 씨는 전 세계 사람들을…"


요나는 그렇게 말한 후, 천천히 니어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오빠, 전부, 알고 있었어?"


니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알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3년 전. 요나를 구하기 위해 마왕의 성으로 향했을 때, 데볼과 포폴을 만나 모든 것을 들었다.
마왕을 처치하면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를 지키고 싶었다.


"전부, 요나 때문이겠지."


요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후회와 죄책감, 오빠의 사랑에 짓눌려서.


"아니야."
"요나가 없었다면, 오빠는 이런 일 안 했을 거야."


니어는 요나를 꼭 안았다. 그런 말을 하게 만들기 위해 그녀를 도운 것이 아니었다.


"요나. 네가 없는 세상은…"


그의 목소리는 거기서 끊어졌다. 니어에게는 더 이상, 요나를 상처주지 않을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오빠."
요나는 팔을 뻗어, 고개 숙인 오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요나는 오빠가 있으면, 아무것도 슬프지 않아."


니어는 그 말을 하는 요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그것을 진심으로 말하는지, 아니면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니어는 침묵 속에서, 그저 요나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


어떤 진실을 알게 되었더라도, 앞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니어와 요나는 누군가 살아있는 사람이 없는지 지하를 헤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지하 공간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하며.
그곳은 완전히 비어 있는 장소였다. 천사의 상도, 여기에는 없다.
끝자락의 벽은 유리판으로 되어 있다. 그 너머는 절벽이며,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내려다보였다.


어두운 구멍 안에는 잡동사니들이 가득 차 있었다.
머리, 팔, 다리. 여성의 몸통. 그리고 붉은 머리. 데볼과 포폴. 쌍둥이 안드로이드들이 대량으로 버려져 있었다.
니어와 요나는 어리둥절하며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팔처럼 생긴 로봇이 위에서 내려와 그녀들의 잔해를 압살하듯 부수었다. 파편, 먼지, 그리고 과거 안드로이드였던 것들이 희미한 빛을 반사하며, 어둠 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이게, 죄를 지은 안드로이드들의 최후야."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니어와 요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포폴이 홀로 서 있었다.


"우리는 게슈탈트 계획의 관리자였어. 하지만 알잖아──니어. 너와 싸우는 중에, 어느 데볼과 포폴이 폭주 사고를 일으켰지.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없었어."


니어가 동료들과 함께 마왕의 성에 침입하려 할 때, 그들 앞에 서 있던 것은 마을의 사제이자 여러 번 돌봐줬던 데볼과 포폴이었다.
그리고 전투 중 데볼이 목숨을 잃었을 때, 남은 포폴은 분노하며 폭주했다.


그래서 데볼·포폴 모델의 안드로이드는 모두 처리 되었다.


"우리의 마지막 임무는, 남은 레플리칸트를 모두 처치하는 거야."


니어는 등에 짊어진 검을 손에 쥐었다. 시선으로 요나에게, 도망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미안해, 포폴 씨. 하지만 나는, 당신들과는 달라."


니어는 뒤로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순간, 두 사람은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는 칼날.
포폴이 휘두른 무기의 지팡이가 차가운 소리를 내며, 공격을 막아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니어는 생각했다.


자신들은 게슈탈트의 그릇이라는 도구가 아니다. 마음이 통하는 인간이다.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인형이 될 수 없다. 그런,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결과가, 마을 사람들의 시체 더미였다. 그럼에도──죄를 짓지 않는 것이 요나를 잃는 것과 같다면, 나는 어떤 죄를 지어도 후회하지 않는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포폴은 춤추듯이 니어의 공격을 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아니, 마법의 주문이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가시가 땅에서 튀어나온다. 위험하다고, 니어는 생각했다. 지금의 포폴도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요나를 지키며 싸우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요나!"


요나를 데리고 도망가야 한다. 그리고 니어는 요나의 모습을 찾으려고 시선을 한 바퀴 돌리던──그때. 마력의 창이, 바로 앞에 다가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시야가, 진홍색으로 막혔다.
그러나, 고통은 없었다.


니어의 가슴 속에, 심장에 찔린 요나의 몸이 서서히 쓰러져 내려왔다. 그녀는 붉게 물든 눈을 좁히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미안해. 오빠... 사랑해..."


요나, 요나, 요나.
니어는 여러 번 그 이름을 부르며, 크게 외쳤다.
그러나 이제, 요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니어는 피로 물든 그녀를 어깨에 안고, 몸을 떨며, 그러나 눈물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자신 속에서 휘몰아치는 수많은 감정. 그 안에서, 분명히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증오뿐이었다.
니어는 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진홍으로 물든 눈의 깊은 곳에서 포폴을 노려보았다.


니어는 한 팔로 요나를 안고, 검의 끝을 포폴에게 향했다.


"모르진 않겠지, 니어. 요나가 죽은 건, 너를 지키려다 죽은 게 아니야."


조용히 하라고, 니어는 외쳤다. 그런 말은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러니 말하지 마라. 그러나 포폴은 냉정하게 그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 아이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거야."


──모두, 요나 탓이겠지.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때, 두려워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은 요나가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숨을 거둔 요나는 그 고통에서 풀려난 듯 미소 지으며 잠들고 있다.


…내가 잘못했다. 요나를 죽인 건 나다.
나는 요나를, 죄책감의 무게로 죽여버렸다.


그렇게 생각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포폴이 쏜 마력의 탄환이 니어의 전신에 내리쬔다.
그럼에도 니어는, 피부가 짓이겨지는 것도 상관없이 땅을 박차며, 직선으로 포폴과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빛처럼 내뻗어진 긴 검 끝. 포폴의 가슴이, 직선으로 관통되었다.


"…진정한 마왕은 당신일지도 모르겠네."


포폴의 말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직후, 니어는 그녀를 꿰뚫은 채로의 검을 유리벽에 내리쳤다. 부서진 투명한 파편과 함께, 포폴은 큰 구멍의 바닥으로 떨어져 갔다. 거기에는 잠들어 있는 수많은 데볼과 포폴의 잔해. 그녀도 또한, 그 일부분이 된다.
기기긱... 기계 소리가 들린다. 위에서 팔처럼 생긴 로봇이 내려와, 그녀를 눌러서 부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두 사람만의 시간.
니어는 떠날 수 없는 요나의 시신을 품에 안았다. 아직 따뜻한 그 몸에서, 여러 가지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오빠, 오빠"라 부르던 부드러운 목소리. 웃는 얼굴. 기침이 심해서 잠을 못 자던 밤, 손을 잡고 잤던 일. 그 온기. 조금 서툰 요리, 그래도 좋았다.


요나는 이제 없다.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세상이 멸망하는 의미조차, 여긴 남아 있지 않았다.


   *


──마왕의 성.
두툼한 커튼이 나부끼는, 고요한 방. 창가 옆에는 작은 침대가 놓여 있다.
여기는, 한때 마왕이 여동생과 함께 지냈던 장소였다.


니어는 요나의 시신을 안은 채, 혼자 그곳에 서 있었다.
혼자. 이제 진짜로 혼자였다.

사람들의 그림자도, 안드로이드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데볼과 포폴은, 이 멸망한 세계를──죄의 증거를,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나를 끝까지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니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느릿하게 발을 내딛어, 니어는 요나를 침대 위에 눕혔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다.
흔들리는 커튼을 움켜잡자, 어두운 방 안으로 눈부신 빛이 비쳐 들었다.
밖에서는, 재처럼 생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억이 떠오른다.
마왕의 여동생이, 이곳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
마왕의 눈앞에서 커튼을 열고, 빛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힘을 원했던 평범한 소년.
그렇게 천년이 넘는 시간을 외롭게 싸우며, 마침내 마왕이 된 사내.
그는 단지, 여동생을 구할 방법을 찾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의 그릇을──니어에게서 요나를 빼앗고, 그녀의 몸을 여동생에게 주었다.
하지만 여동생은, 이미 충분했다고 했다.
누군가의 몸을 빼앗으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바랐다. 그리고──


──미안해. 오빠…… 사랑해……


마왕의 여동생은. 요나는. 내 여동생은.
상냥했던 그녀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살아가는 걸 원치 않았던 걸까.
나는 그저 요나를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잘못이었을까.


결국 나는, 마왕과 똑같았던 건지도 모른다.
한때 그렇게나 증오했던, 그와.


니어는 눈을 감았다.
요나가 없는 세상에 빛이 스며드는 것이 성가시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꺼풀 뒤에 남아 있던 희미한 빛도 이윽고 사라지고──


빛은, 꺼졌다.



[INFO] : 회상 탐색 장치 비활성화.
[ERROR] : U.R.L. 시스템 오류—"빛"이 사라짐.
[JUDGEMENT] : 때가 왔다...


내가…… 내가 눈을 뜨자, 눈앞에 한 소년이 있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년──마왕이.

「기억났구나」

소년이 말했다.
그래, 나는 기억해냈다. 안테나 속에서, 나 자신의 기억을.

내 이름은 니어다.

그리고 이 어둠 속에서 깨어나, 기억을 잃은 나를 이끌어준 상냥한 소년──
그가 바로, 내가 마왕이라 불렀던 존재였다.

한때 나는 마왕을 증오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용서한다거나, 미워한다거나, 아마 우리는 이제 그런 관계조차 아니게 된 거다.

게슈탈트와 레플리칸트──
우리는 마치,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니까.


7. Nier Replicant 「유전의 기록」 -분기점-


사랑하는 여동생을, 자신의 잘못으로 죽음에 몰아넣는 것.
그것이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멸망시키는 선택을 한 남자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안테나 안에 기록되어 있던 기억.


……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기억을 잃은 나를 이곳까지 이끌어준,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년──마왕이 말했다.


「사실 말이야, 세계는 무수한 가능성으로 갈라져 있어.
그 안테나에 기록된 건 그 갈래들 중 하나일 뿐. 끔찍한 삶이었지?」


분기 중 하나.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


「……그럼, 요나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는 분기도 있다는 거야?」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어떤 분기에서도 반드시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죄를 저지르고, 요나를 불행하게 만들어」


그럴 수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 목구멍이 시큼해졌다.
아직은 희미하던 절망의 감정이, 점차 실감으로 되살아온다.


나는, 요나의 시신에 손을 대었던 감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엔 부드러웠던 그녀가, 점점 굳고 차가운 인형처럼 변해가던 모습을.

나는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어져, 안테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단 하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소년이 내게 손을 내민다.

「한때 흑의 서와 계약한 나와, 백의 서와 계약한 너…… 우리에게는 특별한 마력이 있어.
그러니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새로운 분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로, 그런 게 가능해?」


그렇게 좋은 일이, 그냥 일어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가는 있어. 하지만 그렇게 나쁜 건 아니야」


내 속마음을 꿰뚫는 듯한 말투로, 소년은 말했다.

그 순간, 울림 소리가 났다.
이 공간 안의 수많은 안테나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대가는 하나. 여기 오기까지 네가 봐온 사람들의 기억…… 그 뒤를 잇는 시대가 사라지는 거야」


소년이 그렇게 말하자, 무수한 안테나에서 흘러나온 문자들의 파도가
나를 짓눌러오는 듯이 에워쌌다.


──보인다. 사람들의 기억이.


마치, 바다에 빠져 숨을 쉴 때 보이는 빛처럼.


저건…… 내 동료들이다.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설 자리를 잃었던 카이네.
원치 않았지만 사명을 짊어진 시로…… 백의 서.
홀로 남겨져 수천 년에 걸쳐 외롭게 싸워온 에밀.

그리고,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이 보낸 기계 생명체.
그들과 싸운 건, 인류가 남긴 안드로이드였다.

인간도 외계인도 이제 사라졌는데도, 그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싸우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그래서 진실을 숨기고, 적도 아군도 상관없이,
거짓투성이의 세계에서 서로를 죽였다.

멸망한 세계의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생명과 마음이, 부서져갔다.

도대체 누가 싸움을 바랐던 걸까.
도대체 누가 안식을 원했던 걸까.
사실은 누구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런 기억들을, 한 소녀와 괴물이 '감옥'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였다.


아무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미 멸망한, 그릇만이 남은 세계에서,
그럼에도 존재해버린 이유를.
그러니까, 손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손을──
곁에 있는 누군가의, 손을.


진실을 원했던 안드로이드 소년과, 그를 계속 죽여야만 했던 소녀.

평화를 사랑한 기계 생명체와, 복수에 사로잡힌 안드로이드.

계속해서 박해받았던 소녀와, 굶주린 괴물.

부모를 위해 모든 걸 바치고, 증오하고, 서로를 죽여야만 했던 제복의 남매.

시간을 반복하면서, 멸망해가는 인류를 지켜본 '그녀'와 '그'.


그리고, 우리들.
요나를 구하기 위해 함께 여행해준 시로, 카이네, 에밀.


모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내일 생명을 잃는다 해도, 마음만은 떨어지지 않도록.
세상에서 발버둥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문득, 나는 손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요나가 내 손을 잡고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넘실대는 기억의 파도를, 빛나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파멸시켜버린 세계에 남겨진, 뒤틀린 기억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요나의 눈동자에는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미소 짓고, 내 곁에서 사라져 갔다.

가지 마, 하고 손을 뻗는 것조차 나에겐 허락되지 않은 채로.


「너의 대답은 정해졌어?」


소년──마왕의 목소리에,
내 의식은 기억의 세계에서 끌려 나왔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고, 내가 답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세계를 멸망시켰다는 것.
그 죄를 받아들이면, 요나를 슬픈 결말에서 구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에 맞서 싸운다면, 요나만큼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단, 그 대가로,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의 시간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내 대답은──




7. Nier Replicant 「유전의 기록」 분기 A-1


앞만 보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어느새 몸에 밴 나의 삶의 방식이었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상처를 도려내고 피를 흘리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되뇌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운명에 맞서 계속 싸운다면, 요나가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가 열릴 거라 믿어왔다.


하지만 나는, 틀렸던 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걸까.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라지 않던 운명을 되풀이하게 된다면.
그럴 때마다 요나를 고통에 빠뜨리게 된다면.


「우리의 죄에…… 맞서자」


그 결과로 이후의 시대가 사라진다 해도.
그 뒤틀린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까지 함께 사라진다면,
그건 구원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내 말에, 소년──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였고, 나는 그였다.

거울처럼 마주한 우리 둘은, 단 하나의 바람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앞으로 나아가면, 우리들의 윤회를 끝낼 수 있는 분기점이 있어」


다시 어둠으로 변한 공간 속, 마왕이 가리킨 곳은
하늘도 땅도 없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고 검은 곳.


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끝에, 우리들의 원죄가 있을 것이다.
마왕과 나는 손을 맞잡고, 나란히 어둠의 저편으로 발을 내디뎠다.


너무 많은 걸 바라왔던 걸까.
분에 넘치는 소망이었을까.
나는 그저, 요나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에게 남겨진 삶을 불살라가듯이, 살아가겠다.
이걸로 괜찮았던 거야.
다시는 잘못되지 않도록, 지켜봐 줄 수 있을까.


이 어둠 너머에 있는 건, 내가 드디어 찾아낸 진실──
이걸로, 괜찮았던 거지…… 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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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Nier Replicant 「유전의 기록」 분기 A-2


──2053년, 여름.
신주쿠에는 소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빌딩 군을 뒤덮듯, 소리도 없이 하얗게 쌓여가는 눈.


신주쿠의 한 구석에 폐허가 된 슈퍼마켓이 있었다.
한때는 수많은 손님이 드나들었을 듯한, 넓은 출입구.


──콰직!


그곳에, 고깃덩어리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아… 하아……"


쇠파이프를 손에 든 소년이 어깨로 크게 숨을 몰아쉰다.
발밑에는 검은 생물──‘마물’이 피를 뿜으며 나뒹굴고 있었다.
어디선가 솟아나와 덤벼드는 놈들을, 소년은 그저 무심코, 필사적으로 죽였다.


"요나……"


소년은 슈퍼마켓 안쪽으로 황급히 달려간다.
‘사무실’이라고 적힌 문 앞에 도달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문을 연다.


"요나……?"


그 방의 어두운 구석에, 작은 소녀가 숨어 있었다.
소년의 여동생──요나다.


"오빠! 다행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요나는 격하게 기침을 터뜨린다.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소년은 급히 요나를 근처에 있던 접이식 의자에 앉히고, 그녀의 등을 두드려준다.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요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오빠를 올려다본다.


"미안해. 요나 기침 소리 들리면, 또 그 새까만 귀신이 오려나……?"


불안해하는 여동생을 안심시키려는 듯, 소년은 아까보다 더 강하게 등을 두드린다.


"걱정 마, 오빠는 귀신 따위에 지지 않아."


그래. 전부 다 죽여주겠어.
요나를 괴롭히는 것들은 모조리.


문득, 접이식 의자 옆에 굴러 떨어진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책.

검은 표지에 얼굴 같은 무늬가 그려져 있다.
기묘하고 기분 나쁜 인상을 주는, 오래된 책.
절대 만져서는 안 된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손을 댄다면……
‘또 무언가를 잘못하게 될 것 같은’ 느낌.


"요나랑 오빠는, 언제나 함께잖아"


요나의 말에 소년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 해야 할 일. 그것은 안전한 장소로 피하는 것이다.


"요나, 여기서 나가자. 마물이 계속 몰려오고 있어."
"응, 알았어. 오빠 따라갈게."


소리는 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사무실을 나섰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음침한 슈퍼마켓 내부.
입구 근처에는 마물──‘새까만 귀신’이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쪽으로 나가는 건 위험해 보였다.


기침을 하는 여동생의 몸을 부축하며, 소년은 다른 출구가 없는지 어두운 실내를 두리번거린다.


"오빠, 저기야."


요나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잔해 더미 한쪽을 가리킨다.
좁게 외부의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오빠만 믿어."


잔해를 치워보니, 건물에 난 구멍이 있었다. 밖과 이어진 듯했다.


"여기로 나갈 수 있겠어."


소년은 요나를 돌아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요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것은, 여기서 탈출할 수 있다는 기쁨보다는,
자신이 조금이나마 오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기쁨이었다.


"먼저 빠져나가. 대신 나간 곳에서 기다려야 해."
"응!"


요나는 구멍에 발을 디디고, 몸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빠, 괜찮아. 귀신, 없는 것 같아."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한 요나는, 최대한 작게 목소리를 내어 알려주었다.
소년도 밖으로 나가려던 그 순간──


"힘을 주겠다."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돌아보니, 아까 사무실에 떨어져 있던 그 검은 책이, 곁에 놓여 있었다.
──왜.


"너의……것과 맞바꾸어……지킬 수 있는 힘을……"


목소리는, 그 책에서 나오는 듯했다.


‘잘못해서는 안 된다.’
그래, ‘더는 잘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년은 중얼거렸다.


"힘 같은 건 필요 없어. 난, 내 힘으로 요나와 함께 살아갈 거야."


책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잔해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


「오빠, 우리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


슈퍼마켓 뒤편에는, 마물은 물론 사람 그림자조차 없었다.
신주쿠에 이제 사람은 살지 않는 걸까.
도쿄에 피난 지시가 내려진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나 있었다.


「글쎄……」


뾰족한 목적지는 없었다.
소년과 요나는 고아였다.


「……남쪽으로 가보고 싶어」
요나가 조용히 말했다.
「남쪽은, 따뜻하대」


활짝 웃는 요나를 보고, 소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쿄 안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간다고 기온이 오를 리는 없었다.
동화책에서 얻은 지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빛이 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남쪽을 향해 가기로 했다.
황폐해진 거리 속, 넓은 도로를 골라 걸었다.
그 편이 마물이 나타났을 때 금방 눈치챌 수 있고,
만약 누군가 있다면 도움을 청하기도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침을 하는 요나를 부축하며, 소금 눈을 밟고 걸어간다.


부디, 우리가 먹을 음식이 있기를.
어딘가 안전한 장소가 있기를.
부디 요나의 기침이, 나아지기를……

요나가 자신만을 의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요나를 지키기 위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소년에게 있어 답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진실이었다.


도로 위의 교통 표지판을 참고 삼아,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소년은 비스듬히 휘어진 도로 표지판을 소리 내어 읽는다.


「여기, 메이지 거리래」
「메이지 도오리를 따라가면, 갈 수 있을까? 음…… 하와이」
「하와이!?」


요나의 뜻밖의 말에, 그만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역시나 요나는 동화책에서 읽은 게 틀림없다.
고아인 소년들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구민센터의 쉘터.
거기에 그런 책이 있었던가, 하고 소년은 기억을 더듬는다.


「하와이에는 대왕이 있대. 어떤 사람일까, 오빠」


천진난만한 여동생의 말에,
팽팽하게 조여 있던 마음의 실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아이 같은 순수한 무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러게. 분명 눈도 없고, 따뜻한 곳이겠지」
「응. 요나는 말이야, 눈 별로 안 좋아해」


그렇게 말한 요나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남국의 섬을 떠오르게 하는, 경쾌한 멜로디였다.


3시간이 지났을까.
기침을 하는 요나를 쉬게 하며, 천천히 천천히 여기까지 걸어왔다.
쌓인 눈에 발이 묶여, 멀리까지는 못 갔을 것이다.

이미 해가 저물 무렵,
소년들이 도착한 곳은, 광활한 오거리 교차로였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네온.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디지털 간판.
낡은 패션 빌딩의 대형 광고.
가로등.
사람 하나 없는, 대규모 역사의 내부를 밝히는 형광등.


「불이 켜져 있어……」


빛이 있었다.
왠지 이 지역만큼은, 불안정하게나마 일부 전기가 통하고 있는 듯했다.
사람 없는 텅 빈 교차로의 중심에서, 두 사람은 멍하니 서 있었다.


밤에 불빛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추위에 얼어붙은 마음속에 따뜻한 빛이 비쳤다.
요나는 기침을 하면서도, 난잡한 불빛에 넋을 잃은 듯했다.


「오빠」


「응?」


「있잖아, 눈. 예쁘다」


요나가 하늘을 가리킨다.
변함없이 계속해서 내리는 눈.
하지만 밤의 전등에 비친 눈은 그 색이 달라져,
반짝반짝 빛나며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눈에, 소년도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게, 정말 예쁘네」
「요나, 눈이 조금은 좋아질지도 몰라」


그렇게 말한 요나는, 떨어지는 눈송이를 잡으려고
에잇, 에잇 하며 뛰어올랐다.
기침을 하면서도, 열심히.


──우리는, 어딘가에 닿을 수 있을까.
아니면 내일, 죽게 될까.


그래도 둘이서, 지금, 여기 있다.
지금, 여기 있는 이 행복이 마지막까지 이어지기를.
그 이상의 것을, 이제 더 바라지 않는다.


요나가 손바닥에 받아낸 반짝이는 눈송이는, 금세 녹아내려, 사라져버렸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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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Nier Replicant 「유전의 기록」 분기 B-1


「나는…… 내 죄를 받아들이고 있어」


나는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왜?」


소년──마왕도 조용히 대답했다.
그는 나였고, 나는 그였다. 거울처럼 마주 선 우리는, 단 하나의 바람을 공유하고 있었다.


내가 세계를 멸망시키는 선택을 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확신에 가까운 하나의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요나는 분명…… 잃고 싶지 않다고 바라고 있을 거야」
「무엇을?」


마왕은 조소를 머금은 눈으로 되묻는다.
내가 떠올리고 있던 건, 수많은 세계에서의 만남과 기억. 그 속에서 태어난 유대.
그리고 안테나를 통해 흘러들어온 수많은 세계, 수억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빛.


「……우리를 잇는 세계의 희망을, 빛을. 요나는 그것을 믿고 있어」


확실히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지금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빛은 있다. 아직,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는 사람들의 기억을 보고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왕은 나를 응시한다. 그 눈빛은, 나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는 듯이 강했다.
나 역시, 거의 노려보듯이 마왕을 바라보았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훗 하고 마왕의 눈빛에서 힘이 빠졌다.
목소리에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요나의 바람이라면, 어차피 따를 수밖에 없잖아」


이제 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떨군 마왕의 손을 이끌어 나아가도록 재촉했다.


「같이 가자」


어디로 향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에 도달할지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어둠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가면 된다.
끝없는 암흑.
거기엔 아무것도 없을 터이지만, 분명히 나는, 걸어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익숙한 목소리가, 어둠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어서 돌아와! 이 자식……」


나는 마왕과 서로 얼굴을 마주 본다.
이쪽으로 가면 되는 거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불리고 있는 듯했다.
말버릇은 거칠지만, 누군지 벌써 기억났다.
내 소중한 동료였다.


「서두르는 게 좋겠네」


나는 중얼이고, 마왕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이 어둠의 끝에 있는 건,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세계.
그래, 내 소중한──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세계다.


7. Nier Replicant 「유전의 기록」 분기 B-2


그곳은 ‘신화의 숲’이라 불리는 장소──
전조도 없이, 산 속 나무들이 크게 흔들렸다.


갑작스레 땅울림이 메아리치고, 대지가 물결치듯 융기하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나무들이 삐걱이며 쓰러지고, 놀란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대지가 갈라지고, 그 틈새로부터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하얀 물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우뚝 솟은 하얀 탑──아니, 거대한 꽃봉오리였다.


대지의 흔들림이 잦아들고 숲이 다시 고요를 되찾자,
그 봉오리가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 섬세한 움직임은, 식물이 이어가듯 반복하는 자연의 순환 그 자체였다.

하얀 꽃잎이 조금씩 열리며, 아침 이슬 같은 빛을 머금고 펼쳐진다.
마치 태양의 축복을 받는 듯이. 아니면, 하늘에 용서를 구하는 듯이.


대지 위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꽃.
그 꽃의 중앙에서 우뚝 솟은 암술 끝자락에는 한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그 소년──니어는, 뒤에서 한 여성에게 안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뜬다.
누가 자신을 안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한때 함께 싸웠던 전우──쌍검의 사용자, 카이네.
그녀의 부름이 이정표가 되어, 이곳으로 이끌려온 것이다.


「……돌아가자」


그것은, 익숙한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마을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가난하지만 평온한 시골 마을.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열심히 이어가고 있었다.


마을 중앙을 흐르는 작은 강에 설치된 오래된 물레방아는, 오늘도 여전히 맑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돌아가고 있다.
돌로 지어진 상점가의 사람들은 단골이나 익숙한 얼굴들과 세상 이야기를 나누느라 분주하다.
작은 분수가 있는 광장에선 아이들이 해맑게 뛰놀고 있다.


완만한 언덕 중턱에 자리한, 낡은 석조의 집. 그곳이 니어의 집이다.


정원에 형형색색의 월광초가 만개해 있는 모습이, 기억 속의 집과는 조금 달랐다.
꽃잎을 흔드는 월광초는 잘 손질되어 있는 듯, 화단 안에서 지금이 한창이라 말하듯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 주황, 분홍, 그리고 하양.
꽃 주변을 춤추듯 날아다니는 나비들.


‘나를 봐 줘’라 외치는 듯한 형형색색의 월광초들 사이에서, 물을 주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치 꽃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애틋하게 물조리개로 물과 사랑을 함께 쏟고 있었다.
온화한 햇살이 소녀의 새하얗고 긴 머리카락과 물조리개에서 쏟아지는 물방울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였다.

자신의 아이를 보살피는 성모 마리아 같았다.
하나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 모습을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나는 선뜻 말을 걸 수 없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소녀는 물을 주던 손을 멈추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오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대로 멈춰 선다.
손에 들고 있던 물조리개의 물이 다 떨어졌는데도, 마치 잊고 있던 소중한 무언가를 방금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다.


튕기듯 소녀는 물조리개를 던지고, 니어에게 달려든다.


「오빠!」


달려오는 소녀의 기세에 놀란 나비들이 꽃밭에서 흩어지듯 날아올랐다.
니어는 요나를 꼭 껴안았다.


「오빠……! 진짜, 오빠 맞아?」


니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동생의 따뜻함을 두 팔 가득 느꼈다.
기억 속의 요나보다 훨씬 성숙해 보인다. 알고 있던 요나와는 다른 모습에, 살짝 당황한 마음이 든다.
서로 떨어져 지낸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 걸까.


「오빠, 어떻게 돌아온 거야?」
「카이네가 불러줬어. 그리고……」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가슴 깊은 곳에 분명한 따스함이 있었다.
떠올리려 했던 것. 떠올리게 해준 사람. 그건 무엇이었을까……


날아갔던 나비들이 다시 꽃밭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꽃에 앉아 날개를 쉬고 있었다.


「축하해야지! 그리고, 손님도 두 명이나 있으니까!」


니어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요나에게 있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요나는 니어의 팔에서 몸을 떼고, 그의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보냈다.


「대접 좀 해줘야겠지. 여기까지 이 녀석 끌고 오느라 꽤 고생했거든」
「와, 파티네요!? 너무 좋아요―!」


카이네와 에밀이었다.

니어를 이 세계로 인도해준 동료들.
눈을 뜨고 나서 함께 이곳까지 걸어온, 예전에 함께 싸웠던 전우들.


「응, 맡겨줘! 금방 뭐라도 만들게!」


요나는 곧바로 부엌에 들어갈 생각인가 보다.
들뜬 발걸음으로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앗……잠깐, 기다려, 그건──」


당황한 니어는 급히 제지하려고 외쳤다.
요나의 요리 실력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예전에 먹었던 ‘그것’이나…… ‘그것’ 같은 것들의 맛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요나는 빙그르 돌며, 손을 허리에 얹고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오빠가 알던 요나랑은 다른걸. 이 3년 동안, 계속 연습했다니까?」


3년.
요나를 되찾기 위해 마왕을 쓰러뜨리고 사라졌던 니어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이었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그 시간의 공백을 떠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니어를 지나쳐,
에밀이 요나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활짝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즐거운 목소리.
언제 저렇게 친해졌을까……

니어는, 나중에 이 3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요나에게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도.
그 정도의 시간은, 이제 충분히 있을 터였다.


툭, 하고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린다.
카이네였다.


「돌아왔구나」


니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이네와 함께, 오랜만에 돌아온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밀, 카이네, 그리고 소중한 동료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요나.
그건 꿈에서조차 바랐던 행복의 형태였다.


하지만 니어는,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기다리고 있을 것들도 알고 있다.
고난, 시련, 그리고 언젠가 도래할 세계의 종말……


「어서 와, 오빠!」


요나는 눈을 반짝이며, 방 안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니어는 요나를──그 빛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고통 없는 세상 따위는 없다.
그래도,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이곳에서 살아가고 싶다고.


「다녀왔어, 요나」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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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섬뜩한 데볼과 포폴의 최종역할도 그렇지만
레플리칸트는 흑문병으로 멸절하지 않았다는것
니어 (그리고 높은 확율로 e엔딩에서 인류최후의 백업 서버를 때려부셔서 리인카네이션의 시작을 제공한 카이네도)는 마왕의 정체를 알아챘지만 진행했다는것

그리고 그게 니어 레플리칸트의 주제



에도 맞겠죠

마왕도 니어도 백의서도 에밀도 카이네도 포폴도 왕자님도 인어공주도 모두 저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말 대주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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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 25/05/23 11:18
수정 아이콘
니어 시리즈의 세계관을 너무 좋아 하는 입장에서 오늘 집에가서 각잡고 읽어보겠습니다.
오랜만에 니어오토마타 소설책도 다시 꺼내서 읽어봐야겠네요.
플리트비체
+ 25/05/23 12:34
수정 아이콘
리인카네이션 종료되서 아쉽더라구요
못 해봤는데 이제 구입도 못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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