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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8/29 13:25:51
Name meson
Link #1 https://cafe.naver.com/booheong/234424
Subject [일반] [역사] 세계사 구조론 - 서세동점은 필연이었는가?
※스크롤 압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외계문명을 설명하듯이 말한다면, 인류사의 두 가지 변곡점은 신석기 혁명(Neolithic Revolution)과 산업 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었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 혁명이 근대와 전근대를 가른다면 신석기 혁명은 전근대를 다시 농경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물론 농경과 산업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고, 전 지구상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모든 인간집단에서 빠짐없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혁명’들을 얼마나 빨리 겪었느냐가 각 인간집단의 역량과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흔히 관습적인 편견을 강화시키지만, 일찍이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아프리카·아메리카·오세아니아의 신석기 혁명이 유라시아보다 늦었던 이유를 규명한 이후로 예의 세 권역에 대한 부당한 폄하는 분명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3년 뒤에는 모리스(Ian Morris)가 왜 유라시아의 동쪽 끝이 아니라 서쪽 끝에서 산업 혁명이 발생했는지를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논의를 수용한다면 세계사에 관한 실용적인 인식을 얻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행히도 『총, 균, 쇠』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이제 세계사의 얼개를 훑어보기 위해서는 모리스의 이론을 알아보기만 하면 충분할 것이다.

이 글에서 『문명과 전쟁』의 도움을 받아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사관을 소개하려는 까닭은 단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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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시작

인간집단의 팽창은 대개 종사단을 거느린 유력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무장한 종사단이 단지 수십 명만 있더라도 거기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종사단뿐이기에, 일단 유력자의 권력이 한 번 세워지고 나면 피호민의 규모는 계속 확대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가 충분히 순조로울 경우 부족 사회는 계층이 분화되었고, 유력자들은 귀족이나 족장 또는 왕으로 대표되는 영구적인 지위를 획득했으며, 더 많은 피호민을 거느리고 더 많은 종사들을 부렸다. 그리고 이처럼 대규모의 무력과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면 권력자들은 으레 방어시설을 건립했다.

이러한 과정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측면구릉지대(Hilly Flanks)에서는 기원전 9500년경부터, 동아시아의 황하와 장강 사이에서는 기원전 75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 2000여 년의 차이 ]는 작물화와 가축화에 유리한 동식물이 동아시아보다는 메소포타미아에 훨씬 더 많이 자생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다만 이 간극에도 불구하고, 작물화·가축화·농경사회·대규모 마을·방어시설·읍성과 큰 건축물·원시문자·인신공양·정교한 도자기 등의 주요한 문화 요소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등장한 뒤 약 2000년 뒤에는 동아시아에서도 여지없이 등장했다.

모리스는 이 점에서 착안하여, 측면구릉지대에서 유래한 모든 사회를 서양(The West)으로 정의한다. 유사하게 동양(The East)은 황하와 장강 사이에서 유래한 모든 사회로 정의된다. 측면구릉지대는 최초의 서양 핵심부이고, 황하와 장강 사이는 최초의 동양 핵심부인 셈이다. 반면에 이들과는 독립적으로 농경을 시작한 뉴기니 지역의 동남부 핵심부·인더스강 일대의 남아시아 핵심부·사하라 사막 동부의 아프리카 핵심부·북미의 멕시코 핵심부·남미의 페루 핵심부에서 유래한 사회들은 서양 또는 동양에서 제외된다. 신석기 혁명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도시국가 현상

거대한 성벽을 지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수장들이 등장하자, 각 인간집단은 갈수록 도시 안에 모여 살게 되었다. 도시 주민들 중에는 종교인·상인·장인도 분명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매일 농지로 통근하는 농부였다. 적대적인 세력의 침공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상당수의 인구가 성벽 안쪽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어의 필요성은 상호적이었고, 따라서 수메르·고대 그리스·나이지리아 요루바족·중세 북이탈리아·멕시코 계곡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례에서 도시국가는 항상 무리지어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이들 도시국가 사이에서는 실제로 전쟁이 빈번했다.

잦은 전쟁은 도시국가의 환경과 결합하여 사회의 권력구조를 변화시켰다. 모여살게 된 민중은 시골에 흩어져 있을 때보다 훨씬 쉽게 조직화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종사단의 위협에 보다 잘 저항하게 되었으며, 더 많은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자 정치적 이해관계가 생긴 민중들은 전쟁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도시국가는 대규모 보병대를 손쉽게 동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종사단이 아니라 민병대가 전투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민병대는 직업군인이 아니었지만 밀집대형을 갖추고 싸울 경우 개인의 무술 실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밀집보병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물론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들·중세 플랑드르와 북이탈리아의 코뮨·스위스 용병·나이지리아 서부의 요루바족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일단 시민들을 결속력 있는 밀집대형으로 배치할 수 있다면, 예의 집단들이 보여주었듯이 보병대로 기병대를 격파하는 것도 가능했다. 군사작전 거리가 짧고 전쟁의 결과가 시민들의 이익과 직결되는 한 이 방식은 매우 위력적이었다. 다만 이러한 조건은 대부분의 경우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도시국가들이 전쟁을 하면 할수록 도시국가 현상이 퇴조했기 때문이다.

도시국가들의 전쟁은 보통 더 크고 강한 쪽이 나머지를 굴복시키고 패권을 잡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수메르·인더스·마야·아즈텍·아테네·로마·시라쿠사·카르타고 등이 좋은 예시다. 이렇게 해서 일단 패권적 제국이 탄생하면, 주변의 도시국가들 역시 패권국에게 정복당하거나 혹은 정복을 피하기 위해 서로 연합하여 저항하는 과정에서 더 큰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스위스·플랑드르·네덜란드 등은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다. 대형 국가에서는 군사작전의 거리와 기간이 모두 늘어났고, 이에 따라 시민군의 활용이 힘들어지자 민회는 약화되고 전제정이 등장했다.


저가 권력

기원전 2200년경에 이르자, 서양 핵심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 양분되어 있었고 각각 이집트 고왕국과 아카드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물론 이러한 대형 국가들은 머지않아 발생한 건조화로 인해 몰려온 이주민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 결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모두 군벌시대를 겪었다. 다만 붕괴는 제한적이었다. 기원전 2100년경에 이집트는 아직도 혼란스러웠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우르가 다시 제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우르 제국이 무너졌지만 대신에 이집트가 재통일되었다. 서양 핵심부는 꾸준히 발전했고 성장했다.

기원전 제2천년기에는 동양 핵심부도 발전하고 있었다. 동양은 서양이 겪은 발명 대부분을 독자적으로 달성했고, 청동 야금술과 전차는 스텝 지대를 통해 전파받았다. 한때 2000년이었던 동서양의 격차는 이 시점에 [ 1000년 ]으로 줄어들었다. 상나라가 등장해 여러 도시국가들을 굴복시키고 패권국을 자처했으며, 신앙과 제례를 통해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권력을 신성화했다. 그러나 상나라 왕들은 휘하 소국들에게서 직접 세금을 걷어 군대를 양성하는 대신, 복속국의 자치를 허용하고 병력 충원을 그들에게 의존했다. 이런 ‘저가’ 전략은 간편한 만큼 단점도 컸다.

실제로 기원전 11세기에 주나라가 상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상나라의 제후들 중 일부는 배반을 선택했다. 주나라는 이들에 힘입어 새로이 동양 핵심부의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주나라의 권력은 상나라처럼 신앙과 의례에 기반했고, 일족들을 대거 제후로 삼기는 했으나 저가 전략을 채택한 것은 똑같았다. 그렇지만 주나라의 권위는 한동안 굳건했고, 새로 정복할 땅과 제후들에게 하사할 전리품들이 존재하는 이상 동양은 주변부로 팽창하며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적어도 주나라가 계속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후들의 충성을 유지하는 한은 그랬다.

한편 서양에서는 이미 기원전 13세기에 이란부터 크레타까지 핵심부의 문명이 확산되어 있었다. 주변부는 핵심부의 성취를 받아들여 변용하면서 새로운 이점을 발견했고, 핵심부의 범위는 점점 확대되었다.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의 왕들은 관료제를 통해 귀족 군사력에 대한 의존을 줄였고,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들은 더욱 막강한 통제력을 자랑했다. 심지어 동지중해의 소국들도 관료제와 과세 수입을 이용해 중앙 집권을 꾀했다. 이러한 새로운 전략은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지는 사회를 관리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변이 발생한 것은 공교롭게도 그때였다.


첫 번째 붕괴

기원전 1220년대부터, 서양 핵심부의 강대국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변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주민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고 이들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다시 피란민들이 발생해 약탈과 혼란을 증폭시켰다. 미케네, 히타이트, 시리아가 붕괴되었으며 레반트의 이집트 세력도 퇴조했다. 그리스에서는 인구·수공업 기술 수준·기대 수명이 모두 감소했다. 기원전 1100년이 되자 이집트 본토마저 몇 조각으로 와해되었고, 확장 정책을 펴던 아시리아도 아람인의 이주로 인해 지방 통제력을 잃었다. 서양 핵심부는 축소되었다.

기원전 1000년에 이르자, 서양인들은 기원전 1250년에 비해 더 적은 양의 에너지를 획득했고 더 작은 도시에 살았으며 더 약한 군대를 전장에 내보냈고 문자도 덜 사용했다. 이 모든 쇠퇴의 원인으로 유명한 것은 흔히 바다 민족(Sea Peoples)으로 통칭되는 이주민 무리이지만, 때마침 닥친 기근도 한 몫을 했고 국가실패 역시 사태를 키웠다. 이 시기의 기근은 아마도 기후변화 탓으로 추정되며 대이주 역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서양은 이미 기원전 2200년경에도 이런 악재를 겪었었지만, 기원전 1220년에는 상황이 달랐고 결과도 더 나빴다.

기원전 1220년의 서양 핵심부는 기원전 2200년보다 훨씬 더 컸고, 더 잘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더 큰 붕괴를 야기했다. 기원전 12세기에 일어난 대이주는 곧 이란부터 이탈리아까지 확산되었고, 서로 긴밀히 교류하고 있던 핵심부 국가들은 독자적으로 버티거나 무너지는 대신 연쇄적으로 재난을 당했다. 핵심부의 성장은 역량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붕괴의 위험도 증가시켰던 것이다. 동양보다 1000년가량 앞서 있었던 서양은 결국 기원전 1220년대에 이르러 위험 관리에 실패했고, 서양의 퇴보로 동서양 간 격차는 겨우 [ 수백 년 ]으로 줄어들었다.


고가 권력

서양 핵심부는 기원전 10세기부터 서서히 회복되었다. 대붕괴 당시 주석 무역이 끊어진 뒤로 서양인들은 청동 대신 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새롭고 저렴한 금속 덕분에 기원전 제1천년기에는 제2천년기보다 금속 무기와 금속 도구가 훨씬 흔해졌다. 그러나 이렇게 되살아난 서양 국가들은 대부분 저가 전략을 채택했다. 가장 막강했던 아시리아의 왕조차 병력 충원은 세습 봉신들 및 항복한 왕들에게 의존했고 중앙의 관료제는 주로 병참을 담당했다. 이런 방식의 제국 경영은 같은 시기 동양에서 주나라가 하던 것보다 규모는 더 컸지만, 구조적으로는 유사했다.

저가 전략을 망가뜨린 것은 기후변화였다. 기원전 800년과 기원전 500년 사이에 기후가 바뀌면서 겨울바람이 강해졌고, 서양에서는 추위와 비가 심해졌다. 북유럽과 서유럽은 추위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졌겠지만 지중해 일대에서는 강수량 증가 덕분에 인구가 늘어났다. 한편 동양은 겨울바람이 거세지자 더 춥고 건조해졌다. 동양 핵심부에서는 강수량 감소가 홍수를 완화시키는 호재였지만, 황하 이북의 건조한 고원에서는 살기가 더 힘들어졌다. 그 결과 동서양 핵심부에서는 생산력 증가와 이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증가했고 그에 따라 혼란도 더 많아졌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자 왕들은 지방 통제력을 상실했다. 기원전 770년대에 이르자 이집트는 10여 개로 쪼개졌고, 아시리아도 군벌시대로 접어들었다. 동양에서도 이 시기에 주나라가 견융족의 침공으로 패권을 잃으며 춘추시대가 시작되었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동양 핵심부의 문화를 초나라로 대표되는 주변부로 확산시켰고, 따라서 동양 핵심부는 더욱 팽창했다.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식민지들이 새로운 변경에 핵심부의 문화를 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핵심부의 확대와 여러 갈등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달리 붕괴는 없었다.

서양은 기원전 8세기부터 좀 더 복잡하고 수고스러운 ‘고가’ 전략을 통치에 적용했다. 아시리아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관료제를 확대했고 정기적인 세금을 제도화했으며, 상비군을 창설해 직접 보수를 지급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귀족 세력을 와해시키고 반항적인 피후견 국왕들을 총독으로 교체했다. 그 결과 혼란은 통제되기 시작했고 국가는 오히려 더 큰 힘을 얻었다. 기원전 12세기에는 이런 고가 전략을 시도한 국가들도 결국 붕괴되었지만, 기원전 8세기의 서양은 같은 종류의 도전에 두 번 당하는 대신 더 확실한 중앙집권화로 문제를 해결해냈다.

일단 아시리아가 중앙집권에 성공하자 다른 국가들은 고가 전략을 채택해 저항하거나 아시리아에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리아 제국은 기원전 7세기 전반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제패했지만 기원전 7세기 후반에는 사방에서 후퇴했다. 물론 제국을 해체하며 일어선 메디아·리디아·바빌로니아·이집트 같은 국가들도 아시리아식 고가 전략을 채택한 것은 똑같았다. 이들은 곧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기원전 6세기 후반에는 페르시아가 다시금 모두를 정복했다. 그 와중에도 서양에서는 농업과 상업이 발전했고 도시가 성장했으며 문해율도 높아졌다.

기원전 5세기가 되자 비슷한 일이 동양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춘추시대가 끝날 무렵 주나라의 제후국은 단 14개로 줄어들었고 그들 모두가 중앙집권을 꾀하는 중이었다. 제후들은 새로 정복한 영토를 직할령으로 삼고 거기서 세입을 얻어 관료제와 중앙군을 강화했으며, 이를 통해 귀족의 지방 장악도 견제했다. 동양은 서양보다 2000년 늦게 출발한 덕분에 기원전 12세기의 붕괴를 겪지 않았으며, 그래서 저가 국가가 고가 국가로 전환되는 속도도 더 빨랐다. 전국시대가 되자 고가 국가만이 살아남았고 그 뒤에는 진나라가 페르시아처럼 모두를 정복했다.


축의 사상

기원전 500년을 전후하여, 동서양 지식인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핵심부의 통치자들은 이제 신앙과 의례를 이용해 질서를 유지하는 대신 제도와 관료를 동원해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런 고가 국가들의 세계는 예전처럼 신화와 마법을 통해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보였고,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점점 필요해졌다. 그 결과 서양에서는 탈레스(기원전 626/623~548/545)를 위시한 그리스 철학자들이 등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양에서도 공자(기원전 551~479)로 대표되는 제자백가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물론 이 철학자들은 핵심부의 강대국이 아니라 주변부 공동체 출신이었고, 고가 국가의 발흥에 꼭 우호적인 입장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사실 이 시기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이상적인 삶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구체적인 구상과 실천 방략 역시 제각기 다양했다. 그중 일부는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정치적 유용성을 인정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생전에 출세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최초의 철학자들은 모두 오랫동안 회자되며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상의 이정표가 되었고 수많은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력의 비결은 개척에 있었다. 최초의 철학자들은 무엇보다 선구자들이었고 저마다의 고유한 논리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자 온갖 관점과 해석이 범람하며 논쟁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지적 지형의 외연은 계속 넓어졌으며, 결국 나올 수 있는 생각은 거의 전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축의 시대(Axial Age)에 나타난 사상들이 보여준 다양성의 폭이 동서양은 물론 남아시아에서도 유사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예의 ‘축의 사상’이 이후 나타난 모든 사상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필요가 발명을 불렀던 것이다.


핵심부 통일

페르시아와 진나라 이후, 동서양 핵심부에는 계속 거대한 제국들이 출현했다. 서양에서는 우선 알렉산드로스 3세가 그리스에서 이란까지 동진하며 제국을 세웠고, 그 다음에는 서지중해 일대를 장악한 로마인들이 동진을 시작해 그리스·이집트·시리아 등을 정복했다. 한편 동양에서는 진나라가 페르시아보다 훨씬 짧게 유지된 뒤 빠르게 해체되었고, 그 다음에는 한고조 유방이 한중에서부터 동진을 시작해 관중과 중원을 정복했다. 공교롭게도 두 경우 모두에서, 동서양 핵심부의 풍요롭고 유서 깊은 지역들은 서방에서 온 정복자들에 대해 군사적으로 열세를 보였다.

물론 로마와 한나라가 정확히 동시대에 통일을 완수한 것은 아니다. 서양은 주요 지방들이 바다와 산맥으로 격절되어 있던 탓에 대제국 건설이 동양보다 어려웠다. 한나라가 기원전 206년에 정복을 시작해 202년에 동양 핵심부를 재통일한 반면, 로마는 그 기원전 202년에야 서지중해를 제패했고 그로부터 거의 140년이 흘러서야 시리아를, 다시 30년쯤 뒤에야 이집트를 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대제국이 들어서자 동서양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공통점이 많아졌다. 두 제국은 모두 관료제를 확대하고 도시를 육성했으며 변경을 개척하고 경제성장을 촉진했다.

로마와 한나라의 시대에 축의 사상들은 고전으로 대우받으며 교양의 원천이 되었고, 그중 일부는 권력자들에 의해 통치 수단으로도 변용되어 제국 전역에 장려되었다. 축의 사상으로 교육받은 제국의 지배층들은 주로 생산적인 농민들과 정교한 상업망으로 지탱되는 대도시에서 생활했다. 동서양 모두에서 물레방아와 풀무가 생겨났고 동양에서는 석탄과 천연가스도 이용되었다. 지중해의 난파선으로 확인되는 무역량은 기원전 1세기에 정점을 찍을 때까지 상승했다. 지중해가 없었던 한나라에서도 [ 로마의 절반 정도만큼은 ] 화폐가 유통되었고 교역이 성행했다.

상업의 발달은 농업과 공업을 한층 전문화시켰고 생산량 증가는 다시 교역을 활성화했다. 풍요로운 지방의 부가 재분배 체계를 통해 군 주둔지와 관청 소재지로도 옮겨졌고 제국 전역이 개발되었다. 기원전 200년부터 시작된 로마 온난기로 겨울바람이 약해지자 지중해는 강수량 감소로 타격을 받았고 황하와 장강 일대에서는 홍수 피해가 커졌지만, 프랑스·루마니아·잉글랜드나 만주·한국·중앙아시아 같은 지역은 기온 상승으로 생산성이 증가했다. 따라서 두 제국은 재분배 체계와 교역망을 통해 핵심부의 손해를 주변부의 이익으로 상쇄하며 위기를 돌파했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 동서양에서는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은 인구가 생활했고, 도시들은 더 커졌으며, 사람들은 더 오래 살고 더 잘 먹고 더 많은 것을 가졌다. 에너지 획득(1일 섭취 칼로리 및 비식량 에너지원 사용량)·도시성(가장 큰 도시의 인구수)·정보 기술·전쟁 수행 능력을 종합하여 판단할 경우, 서양 핵심부가 기원후 1세기 로마의 수준에 다시금 도달하는 것은 18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이다. 동양은 서양보다 약 2000년 늦게 출발한데다 수운도 불리했던 탓에 이때도 [ 로마의 8할 정도만 ] 번영을 누렸지만, 기원후 1세기 한나라의 번영 역시 향후 500년간은 재현되지 못했다.


제국의 적수

제국들은 많은 면에서 유능했고 특히 전성기에는 신민들에게 부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는 종종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주변부에서 몰려드는 이주민들은 이미 기원전 22세기와 기원전 12세기에 서양 핵심부의 강대국들을 형해화시켰던 바 있다. 기원전 8세기부터는 왕들이 점점 고가 전략에 능숙해졌고 웬만한 이주민들은 이제 국가의 통제력을 무너뜨릴 수 없었지만, 사실 그 즈음이면 우크라이나에서는 승용마가 광범위하게 사육되었고 완전한 이동형 유목 경제가 출현해 있었다. 이들의 이주는 결코 웬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마 유목민들은 일상적으로 사냥을 했고 전쟁에 익숙했으며, 뛰어난 기동성 덕분에 정주민들이 추격하기도 쉽지 않았다. 일정한 근거지가 있는 목축민과 달리 유목민은 머나먼 초원으로 도망칠 수 있었으므로 초토화 협박도 효과가 적었다. 결국 정주민 사회는 유목민의 습격과 약탈을 차단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유목민들은 정주민 정복자들과 달리 토지와 인구를 온전히 남겨두어야 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했고, 따라서 학살과 파괴를 일삼았으며 이러한 모습 때문에 더욱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유목세력은 역사의 주요 변수로 자리매김했다.

다행히 유라시아 스텝 지대에서 서양 핵심부로 진입하는 경로는 캅카스와 이란뿐이었고, 캅카스 산맥을 통과해 들어온 유목민들은 목초지가 부족한 메소포타미아에서 생활양식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이란 방면으로는 유목민이 드나들기가 더 용이했지만, 이란에는 목축민도 많았으며 사람들이 기마술에 익숙했고 그래서 유목민들에게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었다. 예컨대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에 스키타이를 우크리아나까지 쫓아낸 바 있다. 물론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이란에는 다시 유목민이 유입되었고 이번에는 정복이 성공하여 파르티아가 세워졌다.

동양 핵심부도 이런 상황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유목생활양식이 우크라이나에서 막북까지 전파되는 데는 약 500년이 걸렸지만, 동양의 유목민들은 서양보다 더욱 순수한 유목생활을 영위했다. 스텝 지대는 동쪽으로 갈수록 더 건조하고 척박해졌고 서양에서는 일부 가능했던 반농반목 생활이 동양에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막북의 유목민들은 더 혹독하고 빈곤한 삶을 살았고 그만큼 더 사납고 강력해졌다. 화북은 스텝 지대에 매우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을 쌓아 침공 경로를 한정시켰다. 하지만 습격을 근절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서양에서 파르티아는 로마의 적수가 되었고, 동양에서는 막북을 통일한 흉노족이 한나라의 적수가 되었다. 로마는 서양 핵심부에서 파르티아를 밀어내기 위해 싸웠고 실제로 5번이나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지만 번번이 다시 후퇴했다. 한나라는 막북으로 여러 번 대군을 파견하는 손해를 감수한 끝에 흉노족을 약화시켰고 일부는 복속시켰으나, 흉노족이 형해화된 막북에서는 다시금 선비족이 유목제국을 세웠다. 로마와 한나라는 분명 국력에서 우위였지만 끝내 모든 적수를 정복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는 거리 탓도 있었지만 환경적 요인도 일부 작용했다.

로마가 통치한 지중해 일대와는 달리, 레반트 동쪽으로는 상대적으로 개활지가 흔했다. 로마군은 회전에서 막강했지만 내륙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경기병에게 보급로를 위협받았고, 파르티아는 언제나 로마보다 경기병이 많았다. 결국 로마는 시리아까지로 국경을 유지했고 동부 속주에서는 점점 더 기병을 우세한 병과로 채택했다. 마찬가지로 한나라도 막북 정벌을 위해서는 엄청난 경기병이 필요했고,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막북에 정착할 수는 없었으므로 보급 문제로 철수해야 했다. 재정 부담이 커지자 한나라는 원정보다는 변경 방어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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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계 교환

기원후 1세기가 되자 로마와 한나라는 외부의 적수들과 공존하면서도 그럭저럭 주도권을 쥐었다. 대제국들의 경제적·군사적 우위는 명백했고 로마 함대는 홍해까지, 한나라 군대는 타림분지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두 제국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고 간접적인 무역을 이어갔으며 166년에는 직접 접촉도 한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비단 거래를 위해 개척되었던 동서양 사이의 첫 교통로는 타림분지에서 출발할 경우 쿠샨 제국에서 갈라졌는데, 파르티아를 통하는 길은 육로만으로 로마에 닿았고 북인도를 통하는 길은 인도양 해로를 거쳐 홍해로 연결되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동서양은 서로 접촉하기 이전의 수천 년 동안 대규모 집단생활을 통해 서로 상이한 병원균을 진화시킨 상태였다. 이 병원균들은 인간의 면역체계와 함께 진화했기 때문에 원산지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항체가 없는 타지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매우 치명적이었다. 동서양의 교류가 활성화되자 의도치 않게 병원균들 역시 교환되기 시작했고 기원후 2세기 중반에는 파괴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161~162년에는 한나라의 서북부 변방 군영에서, 165년에는 로마의 시리아 변경 군영에서 역병이 발생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인도 문헌은 이 시기에 역병을 언급하지 않으므로 병원균은 육로를 통해 퍼졌을 것이다. 한나라에서 서북부를 통해 들어온 역병은 171년과 185년 사이에 5차례나 유행했다. 로마 역시 이 기간 동안 한나라만큼이나 자주 역병에 시달렸고 특히 이집트에서는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했다. 역병은 이후 150년 동안 한 세대에 한 번씩은 되돌아왔고 서양에서는 251~266년에, 동양에서는 310~322년에 정점에 달했다. 그 결과 도시는 축소되고 교역은 줄어들었으며 세수가 감소했고 많은 땅이 버려졌다. 구세계끼리의 병원균 교환은 제국들을 쇠퇴시킬 만큼 강력했다.


두 번째 붕괴

기원후 3세기가 되자, 심지어 기후도 제국들에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로마 온난기가 끝나면서 기원후 200년과 500년 사이에 평균기온이 섭씨 1.1도나 떨어졌다. 여름이 더 서늘해졌고 계절풍이 약해지며 강수량도 감소했다. 다른 기후변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태도 어떤 지역에는 이익이었지만 다른 지역에는 손해였으며, 이에 따라 기근대이주가 예고되고 있었다. 물론 로마와 한나라는 로마 온난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기후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구세계 교환으로 인한 역병까지 유행 중이었고 제국들의 힘은 더 약해진 참이었다.

사실 제국들은 재난 이전에도 이미 내부 평화화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었다. 관료제는 그 특성상 자가증식했고 관료들은 부패했으며 군주들은 사치스러워졌다. 따라서 세금은 갈수록 증가했고 파산 위기에 처한 자영농들은 흔히 귀족의 경제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가난한 민중은 군역에 강제 동원하더라도 군사적 가치가 적었고, 관료제가 충분히 굳건한 경우에는 지방 귀족들도 군사력을 잃고 정치에 무관심해졌다. 그 결과 제국들은 어느 시점부터는 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해야 했다. 일단 이런 과정이 진행되면 제국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국외인으로 채워졌다.

국외인 모병제국인의 평화화는 서로를 강화하는 기제였다. 제국이 커질수록 국경에서 먼 지방들도 많아졌고 이런 지역 사람들은 보통 전쟁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입대를 기피했다. 모병은 제국의 변경에서나 가능했고 그 너머에서 부족생활을 하는 전사들도 어쩔 수 없이 주요 병력자원이 되었다. 국외인들은 종종 부족 단위로 제국군에 채용됐고 제국의 장점을 배워 돌아갔다가 적대 세력으로 재등장했다. 돌아가지 않고 제국인이 되는 경우에도 부족장 출신 장군들은 보통 부하들을 사병화했고, 실은 내국인 장군들도 오래 복무할수록 자기 군단을 사병화했다.

로마와 한나라는 이런 악순환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악재가 몰아닥친 2세기 후반에 로마군은 이미 변방에서 황제를 옹립할 수 있었고, 한나라는 다종족 군단을 사유화한 장군이나 화친중인 유목민을 고용해 변경을 수비했다. 다행히 로마 변방에서 추대된 황제들은 충분히 유능할 경우 이주민과 반란자들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정식 황제로도 인정받았다. 반면에 한나라의 장군 또는 지방관들은 자기 지역의 혼란을 수습하더라도 황제로 추대될 수 없었고 추대되더라도 타지에서는 그런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나라는 2세기 말에 10여 개로 쪼개졌다.

3세기가 되자 동양에서는 마침내 한나라 황제가 폐위되었고 군벌들도 일부 통합되어 3개의 고가 국가가 새로 생겨났다. 반대로 로마에서는 변방에서 즉위하는 황제들이 제국 전역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점점 길고 어려워졌고 급기야 270년에는 제국이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로마는 274년이면 재통일되었고 동양도 280년 서진에 의해 다시 합쳐졌지만 쇠퇴는 반전되지 않았다. 경제침체는 만성적이었고 지중해의 난파선 수, 퇴적물 오염도, 가축 뼈의 크기가 모두 줄어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4세기가 되자 이 모든 것에 결정타를 날릴 거대한 이주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원후 1세기에 흉노가 해체된 이래로 남흉노는 한나라에 고용되어 변경에 살게 되었고, 북흉노는 선비족에게 밀려나 서쪽으로 이동했다. 4세기 초에 기후가 악화되자 남흉노를 필두로 한 유목민과 목축민들은 동양 핵심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4세기 말에는 서쪽으로 이동한 북흉노가 동유럽에 도달했고, 막북의 거친 환경에서 단련된 흉노족은 현지 유목민들을 제압하여 훈족을 구성한 뒤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공포를 느낀 게르만족은 대대적으로 이주에 나섰고 로마로 향하는 이민자도 순식간에 늘어났다. 제국들은 이제 붕괴의 시간을 맞이했다.

평화화된 제국민들은 이런 와중에도 입대를 기피했고, 제국군은 이번에도 국외인을 채용해 다른 이민자들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주민의 규모가 너무 컸고 중앙의 야심가들은 권력 투쟁을 벌이며 제국의 빈틈을 더 키웠다. 통제불능의 이주민 무리는 결국 주요 지방을 장악했고 세수가 줄어든 제국은 국외인 병사들조차 충분히 고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실권을 쥔 이민자들이 호의를 거둘 경우 제국은 그대로 공중분해될 터였다. 실제로 남흉노는 316년에 서진을 멸망시켰고, 게르만족은 476년에 서로마를 멸망시켰다. 고대 세계는 이렇게 저물었다.


구원의 사상

평화화된 제국인들은 이주민 출신의 지배자들이 국토를 장악할 때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수동적이었고,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제국의 존속을 바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고대 세계의 쇠락은 중국에서는 약 150년에 걸쳐서, 로마에서는 거의 200년에 걸쳐서 일어났고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제국인들은 국세의 위축과 늘어만 가는 혼란을 바라보며 크나큰 절망감을 느꼈다. 제국이 건재할 때 삶의 지침이 되어주었던 축의 사상들은 더이상 불행을 타개할 해법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기존의 믿음과 방법은 너무 오만했던 것처럼 보였다.

2세기 후반부터 한나라의 쇠퇴가 명확해지자, 동양 각지에서 민간치유신앙이 등장했다. 야심찬 술법가들은 미신과 축의 사상을 뒤섞어 신비주의적인 교리를 창안했고,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고 선전하며 구원을 약속했다. 의지할 곳이 없던 민중들은 새로운 희망에 쉽게 빠져들었다. 훗날 도교로 분류되는 이러한 종파들은 흔히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조직했는데, 그중에서도 태평도는 세력이 엄청나서 국가 전복까지 모의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한나라를 반쯤 무너뜨리고 말았다. 태평도는 반란 실패 이후로 소멸했지만 다른 종파들은 계속해서 민간에 유행했다.

동양의 지식인들 또한 구체제를 의심하고 있었다. 3세기가 되자 젊은 주석가들은 고전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당대의 명사들은 현실을 개탄하며 전통 예절을 비웃고 심지어 마약에 빠져들었다. 물론 이런 풍조는 쇠퇴를 반전시키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316년 서진이 멸망하며 북중국이 전쟁터가 되자 지식인들은 다시금 충격에 허덕였고, 3세기에 파다했던 고담준론들은 점차 입지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대는 여전히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마침내 4세기부터는 서방에서 온 ‘으뜸가는 가르침[宗敎]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대승불교는 1세기에도 중국에 전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의 신자는 겨우 수백 명이었다. 동양이 혼란에 빠지고 기존 질서가 도마에 오른 3세기까지도 사람들은 도교 또는 그 배후로 지목되는 축의 사상—도가—을 대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3세기의 그 모든 분투가 낳은 결실인 서진 제국이 4세기 초 공중분해되자, 동양인들은 이제 외국 출신인데다 번역도 온전하지 않은 대승불교조차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불교 신자는 연평균 2.3%씩 증가해 400년경에 100만 명을 넘었고 6세기에는 약 30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 대부분이 불교도였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중국에 대승불교가 있었다면 로마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기독교는 제국의 변방인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되었고 한동안 그 주변에서만 신봉되었지만, 3세기에 로마가 혼란에 빠지면서 급격히 성장했고 250년에는 이미 100만 명이 기독교도였다. 기독교는 로마의 전통신앙이나 이시스 숭배, 미트라교 등과는 달리 배타적 일신론을 주장했으며 생활 전반에서도 기존 질서와 긴장을 형성했으나, 그 덕분에 로마 사회가 암울해질수록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로마의 기독교 신자는 연평균 3.4%씩 증가하여 391년에는 3000만에 달했다.

대승불교든 기독교든 처음에는 권력자들과 친밀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 문화와 이질적이었고, 구원을 약속해 민심을 모았으며, 관청을 대신해 사회 조직의 구심점이 되었던데다 민병대까지 가졌다. 따라서 두 종교의 신자가 100만 명을 넘어서자 국가는 관리감독을 시작했고 때로는 탄압을 일삼았다. 하지만 종교에서 위안을 구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졌고, 두 종교의 신자가 1000만 명에 도달하자 황제들은 결국 타협책으로 선회해 교단에 기부와 면세를 제공했다. 구원의 사상들은 이때부터 사회 질서의 일부로 인정받았고 권력자들과도 협력하게 되었다.


중세의 분기

3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로마와 중국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다른 지역들에게도 격변의 시기였다. 파르티아가 저가 전략으로 통치하던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은 3세기 초 내전을 거쳐 페르시아로 전환되며 고가 국가가 되었다. 중국이 혼란에 빠진 4세기에는 동양 주변부도 제국의 간섭을 벗어났고, 남만주부터 일본까지 고가 국가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기근·역병·대이주가 국가실패를 유발하던 시기였지만, 페르시아는 막 체제를 일신했기에 이주민을 격퇴할 힘이 있었고 통제력을 유지했다. 동양 주변부는 대이주를 비껴간 덕에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와 동양 주변부처럼, 동로마 제국과 남중국 역시 붕괴에서 살아남았다. 물론 로마의 전성기에 잠시 이탈리아로 중심이 옮겨졌던 서양 핵심부는 이제 서쪽 절반을 잃고 동지중해 일대로 축소되었다. 동양 핵심부 역시 북쪽 절반을 잃었고, 서진의 망명 인사들이 세운 동진 정권은 장강 일대와 그 이남의 미개발 지역만을 통치했다. 그렇지만 동로마와 동진은 모두 고가 국가였고 붕괴의 물결이 전파되는 것을 차단했으며, 그 결과 점차 중흥하기 시작했다. 붕괴 이후 반세기가 지나자 이 반쪽 제국들은 옛 제국들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서지중해와 화북은 반쪽 제국들이 재정복 전쟁을 시작할 무렵에도 여전히 여러 개의 왕국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 왕국들은 서로 싸웠을 뿐 아니라 왕국 내부적으로도 갈등했다. 왕들은 제국의 관료제를 계속 활용했지만 제국만큼 잘 해낼 수는 없었고, 지방 귀족들은 종종 중앙의 통제를 벗어났다. 각 왕국의 규모는 반쪽 제국들에 비해 작았고 인구의 대다수인 토착민들은 여전히 옛 제국을 그리워했으므로, 이들이 반쪽 제국들에게 각개격파되리라고 예상하기는 쉬웠다. 동진은 347년부터, 동로마는 533년부터 재정복을 시작했고 원정은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두 반쪽 제국은 옛 수도를 포함한 고토의 과반 이상을 탈환했다.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동진의 진격은 418년까지, 동로마의 진격은 554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재정복은 사실 그 시점에서 한계를 맞았다. 반쪽 제국들은 고토보다 부유했으므로 재정복은 단기적으로 적자였고, 고토에서 재정을 벌충하려는 시도는 민심 이반을 불러왔다. 제국은 어느 정도까지는 적자를 감수할 수 있었지만, 군사적 오판과 전염병 같은 변수로 재정복이 지연될 때마다 여력이 줄어들었고 끝내는 바닥났다. 결국 원정은 중단되었으며 탈환한 영토 역시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채산성에 있었다. 제국들이 고토를 수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는 고토의 왕국들이 제국을 정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훨씬 컸다. 산맥과 바다로 격절된 유럽의 왕국들은 서로 싸우느라 제국을 정복할 수 없었지만, 개활지가 많은 화북은 통일이 더 쉬웠고 북중국은 통일될 때마다 남중국 정복의 이점을 알아챘다. 북중국의 황제들은 정복을 위해 고가 전략과 거기에 딸려오는 토착 문화까지 수용해냈고, 이를 기반으로 589년 동양 핵심부를 통일했다. 중앙집권화되어 있던 남중국은 한 번의 원정만으로 무너지며 막대한 부를 헌납했다.

그 즈음에는 서양 핵심부도 통일을 시도하고 있었다. 다만 서양의 통일 전쟁은 서유럽이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는 602년부터 20년 동안 동로마를 공격해 이집트와 시리아를 정복했고, 아바르족을 끌어들여 크림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동로마는 다음 6년 동안 역습을 가해 빼앗긴 영토를 모두 되찾았고, 서돌궐을 끌어들여 이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전쟁은 쑥대밭만 넓혔을 뿐 통일을 낳지 못했지만, 그 뒤에는 아랍인들이 돌연 정복을 시작했고 쇠약해진 페르시아는 물론 이집트와 시리아의 동로마군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동서양 핵심부에는 다시 통일 제국이 등장했다. 하지만 동양의 당나라가 옛 핵심부 전체를 장악한 반면에 서양의 이슬람 제국은 지중해 북안을 거의 정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분열기 동안 북중국이 회복되고 남중국의 미개발 지역들도 개간되며 동양 핵심부가 확대된 것과 달리, 서유럽은 점차 저가 전략이 우세해졌고 기술과 상업이 후퇴했으며 주변부로 남았다. 그 결과 7세기의 서양 핵심부는 붕괴 이전보다 작았고 그마저도 분열되어 있었지만, 동양 핵심부는 붕괴 이전보다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되어 있었다. 이것이 동서양의 첫 분기점이었다.


봉건제 현상

8세기가 되자, 서유럽은 뒤늦게나마 동양을 따라잡을 기회를 얻었다. 7세기 당나라의 주변부 침공이 한국의 통일을 촉발시킨 것처럼, 8세기 이슬람 제국의 주변부 침공은 카롤루스 왕조가 서유럽을 석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롤루스는 800년에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고, 5세기 북중국 황제들처럼 고가 전략을 추진했다. 세수가 커졌고 학자들이 모여들었으며 화폐 발행도 늘어났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서유럽은 결국 화북과 달라졌다. 카롤루스는 동로마와 통일하기는커녕 자기 나라를 유지할 고가 제도도 충분히 만들지 못했고, 제국은 843년에 분할상속되었다.

카롤루스 이후 서유럽의 분열은 점차 만성화되었다. 잠깐의 재통일은 서유럽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조금 후에는 이 번영에 이끌린 바이킹과 마자르족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각 지방의 중간 관리자들은 동시다발적인 침공에 대응해 점점 자율적으로 군대를 운용했고, 신속한 작전을 위해 기병을 주력으로 삼았다. 이 군대는 관료제의 미비로 급료 대신 토지를 보수로 받았던 탓에 본래 중앙통제가 어려웠는데, 약탈로 인한 사회 혼란은 이 어려움을 더 키웠다. 그 결과 중간 관리자들은 흔히 담당지역의 병력을 장악해 자립했고 관직을 사유화해 물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종종 봉건제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물론 지방분권화 자체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었고 저가 국가에서는 자주 발생하는 일이었다. 봉건제의 특징은 지방을 장악한 영주뿐 아니라 그 휘하의 지주 전사들까지 특권계급이 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 지주 전사들은 서유럽에서는 중기병이었고 일본에서는 궁기병이었으며 춘추시대 중국에서는 전차병이었는데, 모두 말을 키워야 했기에 보병보다 몇 배는 넓은 토지를 지급받았다. 그 덕분에 지주 전사들은 경제적·사회적으로 지역을 지배했고 세습권을 얻어냈으며 대개 전사 윤리와 서약으로만 통제되었다.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유럽에서도 봉건제를 유발한 조건들이 퇴조한 뒤에는 봉건제가 약해졌다. 종종 바이킹 출신이었던 지방 귀족들은 연안 방어를 강화해 바이킹을 격퇴했고, 개활지가 작은 서유럽은 마자르족의 유목생활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궁기병의 군사적 우위도 약화시켰다. 그 결과 마자르족은 10세기 이후 정주를 시작했고 바이킹도 11세기 이후 점점 습격을 그만두었다. 기동군의 필요는 이로써 줄어들었고, 1세기 뒤에는 조세·관료 체계가 발달하며 군역의 대가로 토지를 지급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러자 봉건제는 점차 사라졌다.


온난기 고속도로

6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유라시아 전역에서는 기온이 섭씨 0.56~1.11도 올랐고 강수량은 약 10% 감소했다. 춥고 비가 잦은 서유럽에는 둘 모두 호재였다. 10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인구는 거의 2배로 늘어났고 산림은 절반 정도 사라졌다. 동유럽까지 농업 지대로 개척되었고 전 유럽에 물레방아가 도입되었으며, 도시와 대학이 늘어나고 상업도 활성화되었다. 기원전 8세기 서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변화는 우선 지방 영주들의 부를 증가시켰지만, 조세 자원과 관료 후보군 역시 증가시켰다. 서유럽의 야심찬 군주들은 점차 관료제와 직할령을 확대했다.

이란에서 이베리아까지 펼쳐져 있던 서양 핵심부 역시 한동안 호황을 누렸다. 이슬람 제국은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의 옛 장벽을 지우고 남부와 동부 지중해를 지배함으로써 상업을 부흥시켰고, 상업은 다시 공업과 농업 생산성을 높였다. 정치적 안정 속에 관개농업이 확대되었고 인도양 무역도 큰 이익을 안겼다. 그러나 이런 핵심부의 성장은 지중해 북안과의 정치적 단절 때문에 제약되었다. 중국에서와 달리 유럽의 개척 지대들은 이슬람 핵심부의 도시들과 교역하기도, 기술을 전파받기도 어려웠다. 그 결과 서양 핵심부는 로마 전성기의 번영에 이르지는 못했다.

장벽으로 변한 지중해로 인해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가운데, 강수량 감소와 기온 상승은 이슬람 제국을 더 덥고 건조하게 만들었다. 900년 이후 제국은 여러 조각으로 분열되었고 총인구는 약 10%가 줄었다. 이로 인해 유목민의 유입이 통제되지 못하자, 11세기에는 셀주크 튀르크가 옛 파르티아처럼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등지를 정복했다. 물론 셀주크 제국도 곧 분권화되어 내전을 벌였고 경제침체는 반전되지 않았다. 전쟁과 건조화가 관개농업을 파괴했고 도시는 축소됐으며 많은 농부가 튀르크화되어 떠돌았다. 오직 이집트만이 나일강에 힘입어 부를 누렸다.

온난기는 동양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건조한 북중국에는 더 많은 비가, 습한 남중국에는 더 적은 비가 선사되었다. 기후변화 덕택에 인구가 폭발했고 7세기에 건설된 대운하는 옛 지중해에 비견되는 수운을 가능케 했으며, 경제는 9세기까지 전반적으로 성장했다. 이슬람 제국처럼 당나라도 말기가 되자 내전이 심해졌지만, 농업에 어두운 튀르크족 군벌들은 주로 북부에서 활동했고 남쪽으로 갈수록 대부분의 싸움이 논과 운하를 피해서 벌어졌다. 경제침체는 제한적이었고, 10세기에 송나라가 대운하를 재가동하자 남중국의 부가 다시금 제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1100년이 되자 중국 인구는 1억에 달했다. 남중국의 농부들은 1년 3작으로 쌀과 밀을 대량생산해 내다팔았고 일부는 환금작물을 재배했다. 1000명의 선원이 탈 수 있는 정크선이 개발되었고 강과 바다에서 대규모 무역이 성행했다. 동전 공급은 983년 3억 개에서 1007년 18억 3000만 개로 증가했으며, 1024년부터는 아예 지폐가 발행되었다. 인도양 무역망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수입품이 전국의 도시로 유통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수출품은 흔히 공장제로 생산되었다. 시골에까지 시장이 생겨 목판본 책이 보급되었으며 문해율은 로마시대 이탈리아와 대등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제철업이었다. 중국의 연간 철 생산량은 800~1078년 사이에 6배 증가해 12만 5000톤에 달했고 1700년대 유럽 전체 생산량에 근접했다. 대장간들이 목재를 탕진하자 제철업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도 새로운 연료인 석탄으로 땔감을 대체했으며, 1102년과 1106년 사이에 개봉부에만 20개의 석탄 시장이 열렸다. 그 결과 개봉부의 주조소들은 석탄 연기를 뿜어냈고 시내는 석탄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시기 동양은 [ 로마 전성기에 맞먹을 만큼 ] 번영했고, 동시대 유럽은 물론 이슬람 핵심부에 비해서도 한참 앞서 있었다.


칭기스의 교환

송나라의 경제는 11세기까지 건재했다. 심지어 정강의 변도 붕괴를 촉발시키지 못했고, 개봉부는 여진족의 약탈을 겪고도 회복해 금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강남으로 축소된 송나라는 임안부를 새로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더 싸고 불순물 많은 석탄을 제철에 이용하는 방법도 알아냈고, 제철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에서 구리를 추출하는 기술까지 개발했다. 남중국과 북중국 간 교역의 단절로 경제 성장이 정체되었지만 침체되지는 않았고, 무역과 지폐·화석연료·상품 생산은 계속 늘어났다. 금나라와의 적대관계도 전쟁 수행 능력 측면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변수는 몽골이었다. 13세기의 몽골족은 특별한 기후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휩쓸었다. 동양에서는 금나라·서하·고려·남송이 모두 격파되었고 서양에서도 서요·호라즘·러시아·아바스·셀주크가 정복당했다. 몽골의 비상은 6세기 전 이슬람의 발흥과 일견 유사했지만, 몽골인은 아랍인보다 더 유목적이었고 따라서 더 멀리까지 정복했으며 파괴도 더 많이 일삼았다. 중국의 사회기반시설은 붕괴했고, 원래도 쇠퇴 중이던 이란·이라크·시리아는 아예 서양 핵심부에서 밀려났다. 살아남은 이집트에 이탈리아가 합류해 새 핵심부를 구성했다.

다른 정복자들이 그랬듯이, 몽골족도 제국을 세운 뒤에는 통치자로 변모했다. 사회 조직이 일부 재건되었으며, 비단길과 초원길은 정치적 통합 덕분에 더욱 활성화되었다. 동서양은 한층 전면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고 기술 전파의 속도도 더 빨라졌다. 이 교환의 최대 수혜자인 유럽은 1250년과 1380년 사이에 외바퀴 손수레·말 목사리·제지법·목판 인쇄술·무쇠 연장 등의 오래된 발명품을 흡수하며 동양과의 격차를 좁혔다. 신기술에 속하는 나침반은 발명 이후 60여 년 만에, 화포는 약 30년 만에 중국에서 유럽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교환의 끝은 아니었다.


세 번째 붕괴

구세계 교환 당시처럼, 범대륙적 접촉의 확대는 전염병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몽골이 선사한 전면적인 교류와 평화[Pax Mongolica]를 뒤따라 흑사병이 등장했다. 역병은 1331년경 스텝 지대에서 시작된 듯하며, 동쪽으로 퍼져 1345년에는 중국 동해안을 휩쓸었다. 서쪽으로는 1346년 몽골군이 크림반도에 흑사병을 전했고, 1347년부터는 잉글랜드에서 이라크까지 선페스트가 창궐했다. 1351년까지 서양 인구의 3분의 1 또는 절반이 죽었다. 흑사병은 같은 해에 내륙아시아 출신의 용병들을 따라 다시 중국에 돌아왔고, 그때부터 1360년까지 매년 중국을 유린했다.

바로 이 시기에 기후변화 역시 시작되었다. 1303, 1306, 1307년에 발트해가 결빙했고 1309~1310년에는 템스강이 얼었다. 1340년대에는 노르웨이부터 중국까지 빙하가 성장했고, 1350년대가 되자 덴마크 해협도 주기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린란드는 버려졌으며 아이슬란드에는 북극곰이 출현했다. 몰아치는 소빙기는 작황을 악화시켰고 사람들은 흑사병에 더 쉽게 죽어나갔다. 바야흐로 말세가 다가온 듯하자 유라시아 전역에서 종교적 열정이 새로이 힘을 얻었다. 이슬람 율법이 엄격해졌고 채찍 고행자가 유럽을 행진했으며, 중국에서는 백련교가 득세했다.

전염병과 기후변화에 기근까지 더해지자 국가실패가 불거졌다. 14세기에 이르러 옛 이슬람 핵심부의 몽골족 통치자들은 마치 셀주크 통치자들처럼 지방 통제력을 상실했고, 군벌시대가 재개되었다. 중국의 몽골족 통치자들은 백련교 반란의 타도 대상이 되어 1368년 축출당했다. 표적으로 삼을 몽골족 통치자가 없었던 서유럽에서는 1303년에 프랑스 왕이 교황을 감금했고, 1378년부터는 2명의 교황이 서로 대립했으며 1409년부터는 대립교황이 3명이나 되었다. 유럽 국가들은 더욱 심하게 분열했고 전쟁은 더 길고 치열해졌다. 동서양 모두에서 번영이 퇴조했다.

이 모든 혼란은 일견 역사의 반복처럼 보였다. 12세기의 동양 핵심부는 1세기 로마에 필적했고 13세기의 서양 핵심부 역시 [ 1세기 한나라에 9할 정도 ] 근접했으며, 14세기의 쇠락은 4-5세기의 붕괴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전체적인 상사성에도 불구하고 14세기는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1천 년 전과 달랐다. 핵심부로의 대이주가 없었던 것이다. 몽골이 1세기 먼저 움직인 탓에 14세기에는 미처 새로운 이주민이 준비되지 못했고, 동서양 핵심부는 가장 취약한 순간에 결정타를 피했다. 이 절묘한 엇박자는 역사를 미답지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1450


재탄생 시대

15세기가 되자, 동서양 핵심부는 회복세로 전환되었다. 14세기의 붕괴는 4-5세기의 붕괴보다 제한적이었고 몽골의 통치를 피한 서양 핵심부와 흑사병조차 피한 일본에서는 반등이 비교적 쉬웠다. 피해가 컸던 동양 핵심부에서도 명나라가 등장해 사회기반시설을 재건했다. 중국은 반세기만에 재정비되었고 15세기 초에는 유목세력을 제압했으며, 인도양으로 함대를 출동시켜 30여 개국에게 새로이 조공을 받았다. 이 시기 명나라의 번영은 송나라를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 당나라와는 비견할 만했고, ] 심지어 주변부의 조선에서도 학문과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서유럽에서는 고가 제도가 부활하는 중이었다. 기원전의 히타이트와 이집트에서 그러했듯이, 관료와 병력원이 충분한 왕은 봉신을 압도할 수 있었다. 또 전국시대 중국에서 그러했듯이, 관료제가 고도화되어 평민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게 되면 지주 전사[士]들이 특권을 잃고 흔히 관료로 전환되었다. 서유럽 군주들도 14세기부터 이 과정을 본격화했다. 직할령과 도시에 기반해 관료제와 상비군이 강화되었으며, 이는 다시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여 세입을 확대했다. 그 결과 영주의 독립성은 약화되었고 지주 기병들은 군사적 기능을 잃은 뒤 귀족층에 편입되었다.

신분화된 지주 기병들은 군역을 세금으로 대체했고, 서유럽 군대는 옛 로마군처럼 급료를 받는 평민들로 채워졌다. 유럽에서는 비가 자주, 고르게 왔으므로 수직적 질서와 집약노동을 유발하는 관개농업보다는 건지농업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민중은 타지의 민중보다 사회적 발언권이 더 컸고 참전의 동기나 시간적 여유도 더 많았다. 이들은 대개 보병이었지만, 군사작전 범위가 작고 공성전이 자주 필요한 경우에는 기병보다 유용했다. 개활지가 적고 정치체는 촘촘하며 도처에 요새가 있는 서유럽은 바로 이런 경우였고 따라서 보병이 적극 사용되었다.

이 조건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강화했다. 지리적으로 격절된 서유럽에서는 전쟁은 쉽고 통일은 어려웠는데, 정치체가 작았으므로 대다수의 인구가 전쟁에 노출되며 평화화될 기회를 잃었다. 민중은 점점 전쟁에 익숙해졌으며, 그럴수록 더 활발히 고용되었고, 이것은 다시 사회적 권리로 연결되어 참전의 동기와 보상을 더 키웠다. 보병들은 밀집대형에 점차 능숙해졌고, 도시국가 민병대가 그랬듯이 기병을 격퇴할 수 있었다. 정치체의 크기와 지리적 격절에서 기인하는 짧은 군사작전 거리 역시 평민의 생활적·비용적·병참적 문제를 완화시켜 전쟁 참여율을 높였다.

전쟁 규모가 확대되자 군소 영지나 도시국가는 더이상 대형 국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기원전 8세기 서양이나 기원전 5세기 동양에서 그랬듯이 유럽의 정치체들은 계속해서 통폐합되었고, 군주들은 수입원을 확대하고 더 강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온갖 방안을 모색했다. 이런 노력은 같은 시기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와 이집트를, 명나라가 몽골족을 격파하기 위해 단행한 조치와 유사했으나 지리적 조건 때문에 더 길게 이어졌고 그만큼 심화되었다. 서양 핵심부는 14세기까지 지중해 동안에 있었지만, 그 뒤로는 서유럽의 번영이 [ 전통적인 핵심부 ]를 능가했다.


쇄신의 사상

1500년대가 되자, 명나라의 왕양명은 사람은 모두 직관적으로 이치를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실천한다면 지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장군, 행정가, 문헌학자, 시인으로 성공했고 유가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기 위해 새로운 학설을 도입했다. 양명학은 명나라 내내 발전했는데, 가장 급진적인 학자들은 거리가 현자로 가득하고 누구든 스스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성평등을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황제라면 누구나 경악할 만큼 도전적인 이런 사상들은 번창하는 사회와 역동적인 문화적 토양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 즈음에는 서양 핵심부에서도 이미 비슷한 조류가 뚜렷했다. 악재가 몰려오던 14세기는 마치 중세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고전에 담긴 지혜로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고대인을 본받으려는 시도는 발명과 열린 마음, 제한 없는 탐구를 촉진했고 15세기 후반에는 다빈치를 위시한 인문주의자 무리가 여러 분과를 넘나들며 성취를 이루고 문화를 선도했다. 르네상스는 양명학과 마찬가지로 고전을 근거로 교조화된 관학을 일신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고, 그 결과 고대는 물론 중세와도 구분되는 새 사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지성사적 변화는 분명 번영의 추세와 연관되어 있었다. 예컨대 11세기 송나라의 신유학이 보여준 사상적 경향은 양명학이나 르네상스의 지향과 유사했다. 당나라의 몰락은 마치 중세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고, 지식인들은 대승불교를 비판하며 고전 유학을 주목했다. 신유학 역시 한대의 유교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불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실제로 변혁되고 있었고 개봉부는 문학·예술·정치를 편안히 오가는 천재들로 넘쳐났다. 성공한 관료인 동시에 박물학자·수학자·발명가 등이기도 했던 심괄의 성취는 다빈치에 밀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모든 시대는 각자에게 필요한 사상을 얻었던 것이다. 똑똑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비슷한 쟁점에 비슷하게 대응했고, 남송대나 원대처럼 사회적 활력이 위축되던 시절에는 주자학처럼 보수적인 이념이 지지받은 반면 북송대나 명대처럼 성장세가 굳건하던 시기에는 보다 진취적인 학풍이 유행했다. 이 사상들은 중세를 풍미한 종교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고대의 철학을 재창조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조로 묶일 수 있었지만, 행동지침의 방향성은 시기마다 달랐고 시대에 조응했다. 이 견지에서 동서양의 사상은 아직 유사한 흐름을 따르는 중이었다.


근세의 분기

15세기 동서양 사이에는 놀랄 만한 상사성과 더불어 차이점 또한 존재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물론 국가의 개수였다. 서양 핵심부에서는 여러 고가 국가가 계속해서 서로 경쟁했지만, 동양 핵심부에는 중국이 경쟁 상대로 여길 만한 다른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중국보다 군비경쟁의 강도가 더 심했고 군주들은 군자금 마련에 더 적극적으로 임했다. 예컨대 15세기 전반 명나라가 외교적 과시를 위해 인도양에 함대를 보냈던 반면, 15세기 후반 이베리아의 왕들은 향신료 무역을 주관해 이윤을 얻고자 인도를 향해 함대를 파견했다.

동기의 차이는 결과의 차이로 이어졌다. 아메리카·남아시아·동남아시아에 등장한 서유럽 함대들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흔히 군사력으로 유리한 무역을 강제했고,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현지를 정복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의 무력은 정부의 후원에 기반했는데, 15-16세기에 유럽만큼 전쟁압이 심했던 지역은 남아시아 정도였으며 그 남아시아조차 바다에서는 원양항해로 단련된 서유럽의 상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대항해는 잦은 실패를 감안하더라도 수익을 냈고 후원자들은 갈수록 더 막강한 함대를 파견했다. 군사력과 해상무역이 서로를 강화했던 것이다.

동양 상인들은 그 시점까지도 인도양으로 항해할 능력이 있었고 동양의 군사력 역시 여전히 강력했다. 하지만 경쟁자가 없었던 중국 정부에게는 군자금 마련보다 내부 통제가 더 중요했다. 이로 인해 명나라는 해상무역을 후원하기는커녕 사무역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정부의 협조가 없었으므로 민간 상인들의 무력과 활동 범위도 제한되었다. 그렇게 16세기가 되자 명나라는 제국들의 고질병인 내부 평화화와 부패를 피하지 못했다. 서양 핵심부에서는 군비경쟁이 과세 능력을 계속 증가시켰지만, 같은 시기 명나라에서는 중앙집권이 이완되고 있었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군비경쟁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명나라의 패권이 약해졌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 오스만 제국이 빈을 포위한 1529년에 카를 5세는 서양 핵심부의 과반을 상속받은 상태였고, 서양은 오스만에 의해 통일되지 않으면 합스부르크에 의해 통일될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합스부르크는 1598년에 펠리페 2세가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네덜란드, 잉글랜드, 오스만 등과 싸웠다. 한편 동양에서는 주변부에서 핵심부로의 도전이 이어졌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는 일본이, 1618년부터는 만주족이 명나라 및 조선과 격돌했다.

이 전쟁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는 변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동서양의 두 번째 분기를 심화시켰다. 만주족은 1645년 남경을 함락하며 중국을 석권했고, 다음 50년 안에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전역을 제패했다. 반면 합스부르크는 1618년부터 다시 전쟁에 뛰어들고도 1648년에는 네덜란드와 독일 제후국들의 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오스만을 막아내는 동시에 서유럽까지 정복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했고, 오스만 역시 페르시아를 막아내는 동시에 합스부르크까지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17세기 서양에서는 분열이, 동양에서는 통일이 공고해졌다.


붕괴를 위기로

17세기에 동서양을 괴롭힌 것이 전쟁만은 아니었다. 1450년과 1600년 사이 동서양 인구는 대략 2배로 늘었다. 갈등이 증폭되었고 노동이 늘었으며 몇몇 농부들은 핵심부를 떠나 변경으로 이주했다. 인구 증가에 기여했을 아메리카 작물조차 늘어난 인구 모두를 먹여살릴 수는 없었다. 전쟁과 중앙집권화는 이 혼란의 시기에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국가의 반응이었지만, 세금 부담을 늘려 납세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몰아붙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1645부터 1715년까지는 소빙기마저 찾아왔다. 런던부터 광동성까지 눈과 얼음이 늘었고 여름이 서늘해졌다.

결국 17세기 초중반에는 스페인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영국과 오스만 제국에서는 극심한 내전으로 군주들이 살해당했다. 각국 정부는 지출을 줄이면 관리와 병사들에게, 세입을 늘리면 상인과 농부들에게 반발을 받으며 국가실패로 다가갔다. 실패가 가장 심각했던 명나라에서는 반란군의 창궐이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기근과 전쟁으로 중국과 중부 유럽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했고 심지어 1642년에는 장강 하류에, 1665년에는 런던에 역병이 창궐했다. 붕괴의 조건들이 다시금 갖추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17세기는 4세기는 물론 14세기와도 달랐다. 동서양은 모두 위기를 겪었지만 붕괴에 이르지는 않았고 사회는 큰 틀에서 성장세를 유지했다. 만주족은 유목민이 아니었던데다 중국을 정복하기 전부터 이미 몽골족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동양 핵심부는 몽골이 휩쓸었을 때보다 훨신 적은 피해만을 입었다. 서양 핵심부로의 이주는 더욱 미미했고 국가의 통제력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이 시기에도 핵심부로 진입하려는 유목민들은 있었지만, 이들만큼 경기병이 많고 대포는 더 많았던 청나라와 러시아는 유목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대양의 사상

청나라와 러시아가 스텝 지대의 대이동을 영구적으로 차단하는 동안, 유럽 서북부에서는 붕괴를 피한 해양국가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1700년이 되자 동서양은 모두 로마와 송나라 시절의 번영에 도달했지만 [ 서양의 성장이 동양의 성장보다 훨씬 빨랐다. ]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한 상공업자들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서는 아예 정치권력까지 장악했고, 주식·보험·은행을 비롯한 금융제도를 발달시켰을 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상업을 장려하도록 만들었다. 무역의 활성화는 대륙 간 분업을 촉진했고 유럽은 원자재를 수입해 완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경제규모를 키우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제조업의 확대는 임노동자를 비롯한 도시 인구를 증가시켰고, 이들은 다시 소비자로 기능하며 더 많은 공장이 지어질 유인을 제공했다. 생산력이 늘어나자 규모의 경제가 작동해 상품 가격이 더 저렴해졌고, 그럴수록 더 많은 인구가 소비자층에 편입됐다. 설탕, 차, 커피 같은 수입품에 대해서도 무역 규모가 커질수록 대체로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그 결과 1750년경에는 북대서양 연안의 수백만 명이 세계 최초의 소비자 문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 서북부 유럽은 서양 핵심부가 되었고 ] 높은 임금 수준을 유지했다.

이 모든 변화는 서양인들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졌다. 대양항해가 선사한 세계관의 확장과 상업혁명으로 촉발된 사회적 변동은 축의 사상 또는 종교에 비추어 세상을 이해하는 일을 점점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자 지식인들은 다시금 시대적 필요에 응답했다. 베이컨은 이미 17세기에 관찰을 통해 자연의 원리를 귀납적으로 규명하자고 주장했으며, 조금 뒤에는 데카르트가 이성을 강조하며 연역적인 진리 획득 방법을 제안했다. 이로부터 새로운 철학이 유행했고, 유럽 지성계는 마치 축의 시대처럼 다양한 사상가들이 활발하게 논쟁하는 곳으로 변모했다.

그 즈음에는 동양의 학자들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학문에 종종 실망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번영은 [ 송나라를 능가하기 시작했고 ]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방법을 요청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사실에 근거한 검증이 중요해졌고, 증거를 평가하는 규칙이 발전했다. 그러나 청대의 고증학은 동시대 유럽 철학과는 방향성이 크게 달랐다. 주로 인문학에서만 실증이 강조되어 새로운 학설이 제한되었으며, 자연 탐구는 매우 저조했던 것이다. 반면 유럽 근대철학은 자연 탐구에 실증을 강조하면서 시작되었고, 탐구 성과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할 때는 창의성이 장려되었다.

이 차이는 물론 동서양이 직면한 과제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대서양은 새로운 변경이었고, 유럽인들은 대양을 활용하기 위해 경쟁하며 공간·시간·돈을 표준화되고 정밀한 방법으로 측정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기계적 자연관을 떠올리기에 유리했으며 자연을 실증적으로 탐구할 철학적·경제적 유인도 제공했다. 반대로 청나라는 더 익숙한 종류의 변경만을 가졌다. 게다가 황제들의 목표는 전통 질서로 통일 제국을 안정시키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를 방해할 수 있는 새로운 학설이 자유롭게 발전하기는 힘들었다. 동서양은 각자 필요한 사상을 얻었던 것이다.


천장 깨뜨리기

서북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한 새로운 사상들은 곧 사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자연철학이 고대 학자들의 권위가 자의적임을 폭로할 수 있었던 것처럼, 도덕철학은 국왕과 교회를 겨냥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 18세기에 기존 질서 전반을 이성을 사용해 재검토하려는 일군의 지식인들이 나타나자 대다수의 국왕들은 계몽군주를 자처하며 타협을 시도했다. 17세기부터 의회가 실권을 쥔 영국을 제외한 다른 유럽 강대국들에서는 여전히 부르주아가 권력에서 소외되었지만, 전통적 정치구조는 견고해 보였고 개혁은 계몽군주 치하에서 조금씩만 이뤄질 듯했다.

상황을 바꾼 것은 전쟁이었다. 합스부르크 이후 새로운 최강국으로 떠오른 프랑스는 1689년부터 1815년까지의 기간 중 절반 동안이나 누군가와 전쟁 중이었다. 이 전쟁들은 대개 영국과의 대결이기도 했지만, 영국은 의회를 통해 과세하는 덕분에 세율이 더 높았고 채무를 잘 이행해 군자금을 쉽게 융자받았으며 전쟁을 통해 대체로 수입원을 늘렸다. 반면에 프랑스는 채무 불이행으로 유명했고 세율도 영국보다 낮았으며 부분적으로는 이 때문에 전쟁도 패해 여러 수입원까지 잃었다. 결국 1789년이 되자 프랑스 왕은 세금 인상을 위해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계몽사상으로 축적된 부르주아들의 불만은 1789년의 삼부회라는 기회를 만나 폭발했다. 프랑스 혁명은 근대적 민족을 탄생시켰고 민중의 소속감과 발언권이 최고로 강해지자 과세와 징집 역시 더 수월해졌다. 프랑스에 공화정이 자리잡으려면 몇 번의 부침이 더 필요했지만 혁명의 영향은 막대했고, 19세기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의회의 유용성을 인정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서양의 경제와 재정, 전쟁 수행 능력은 세계 최강이 되었다. 실제로 19세기 중반에 아메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호주의 대부분은 서양에 속하거나 서유럽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진정한 혁신은 전쟁과 혁명에서 다시 한 발짝을 나아간 곳에 있었다. 유사 이래로 인류의 동력원은 근력이었고 수력이나 풍력은 제한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모든 사회발전은 근력이 자라날 수 있는 토지에 기반했고 땅이 한정되어 있는 이상 문명의 성장은 한계를 가졌다. 하지만 근대에는 끝내 이 법칙이 깨지기 시작했다. 18세기 영국에는 높은 임금, 풍부한 석탄, 상공업을 장려하는 풍토와 야심찬 기술자들이 모두 있었고 일단 이들이 모이자 증기력을 이용해 인건비를 줄이려는 시도가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뉴커먼과 와트를 거쳐 상용화된 증기기관은 작업장으로 휴대가 가능한 동력이었고, 날씨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숲이나 토지를 소모하지도 않았다. 새로 개척한 땅에 기반했던 북서유럽의 높은 실질임금은 1750년대를 기점으로 결국 하락하고 있었지만, 바로 그 시기에 증기기관 또한 확산되었다. 증기력은 노동자 1명이 생산할 수 있는 제품의 양을 폭증시켰고, 공급 혁신은 가격 하락으로 이어져 수요를 확대했다. 수요 확대는 무한히 가능해 보였으므로 자본가들은 더 많은 기계를 사고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했으며, 실질임금은 큰 틀에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 선순환은 산업혁명의 유인을 제공한 이전 세기의 소비문화보다 훨씬 더 큰 소비문화를 창출했다. 증기기관은 영국 전체 밀 생산량의 세 배를 먹어치워야 생성되는 근력과 동등한 일을 해냈고, 영국 인구는 1780년과 1830년 사이에 대략 2배 늘었으며 그중 600만 명이 도시에서 취직했다. 1860년에는 영국만이 유일하게 철저한 산업 경제였지만 곧 벨기에, 북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에도 증기와 석탄의 시대가 열렸다. 1910년이 되자 독일과 미국은 기술교육과 경영학을 발전시키며 2차 산업혁명을 주도했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석유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산업화 우등생

서양 핵심부의 함대는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9세기 중반에 동양에도 들이닥쳤다. 중국은 16세기의 포르투갈이나 17세기의 네덜란드를 상대로는 해안을 방어할 수 있었지만, 19세기의 영국까지 격퇴할 수는 없었다. 영국은 무력으로 청나라를 개항시켰고 조금 뒤에는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켰다. 동양은 세계의 다른 지역들처럼 완전히 정복당하는 최악은 면했지만 그럼에도 패배와 굴욕, 착취를 당했다. 서양인들은 내정 간섭을 하고 자원을 채굴했으며 동양 정부에 고문관을 넣었고, 관세 부과를 억제하는 한편 필요한 상품은 싸게 사갔다. 서세동점의 시기였다.

하지만 자본은 동양에게도 기회를 제공했다. 서양인은 가능할 때마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손을 썼지만 동양인이 서양 문물을 수입하고 학습하는 큰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19세기 동양은 전근대 기준에서는 선진적인 농업과 대도시, 높은 문해율, 잘 조직된 군대가 있는 세계였고 그래서 서양의 방법들을 배경에 맞게 조정할 길을 유독 빨리 찾아냈다. 식민지가 되지 않은 일본은 1870년대부터, 부분적으로 식민지가 되었던 중국은 1950년대부터 근대화되었다. 이는 인도가 1990년대부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2000년대부터 근대화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동양 중에서도 가장 기민했던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서양의 힘이 기술이나 무기 자체가 아니라, 탄탄한 부르주아층과 국가의 긴밀한 연결에서 나온다는 것을 간파했다. 메이지 정부는 신속히 자본가 육성에 돌입했으며 1890년에는 제한적으로나마 의회를 설립해 대중 동원의 열쇠를 마련했다. 변신의 위력은 엄청났고, 일본은 중국은 물론 러시아까지 격파하여 20세기 초에 열강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양 핵심부는 1900년부터 일본으로 확장되었다. 서양인들이 동양에서 식민지를 넓히지 못한 것은 일본이 류큐·대만·조선을 선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대륙 제국

산업혁명 이후 세계의 지배자가 된 서양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이 유럽 대륙에 제국을 수립할 것인지를 결정하려고 전쟁을 벌였고, 약 20년 뒤에도 같은 문제로 전쟁을 벌였다. 전간기에 터진 대공황은 서유럽의 정부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으며 1930년대에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을 자처하고 나섰다. 공산주의는 자본의 통치를 끝내기 위한 생산 수단의 국유화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반면 파시즘은 민족 공동체를 창출해 국민들에게 형제의식과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위해 자본주의를 유지하되 적절히 규제하고자 했다.

소련의 산업 생산량은 1928년과 1937년 사이에 4배로 증가했다. 독일의 히틀러 역시 1930년대에 산업 생산량을 2배로 늘렸고, 군국주의로 진입한 일본도 1930년대에 72%나 경제가 성장했으며 특히 철강 생산량은 18배 증가했다. 이런 적수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결국 살아남았던 것은 첫째로는 세계대전에서 소련과 연합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그들 중에 서양 핵심부—미국—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시즘 국가들은 무자비한 사회적 동원으로 내재적 비효율을 상쇄할 수 있었지만, 결국 미국과 소련의 협공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중국은 일본에 의해, 일본은 미국에 의해 파괴되었으므로 세계는 여전히 서양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후에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산업 핵심부와 방대한 농업 배후지를 함께 보유한 이 거대한 제국들은 1947년부터 1991년까지 세계 각지에서 대립했다. 상호확증파괴는 대리전의 시대를 열었고 미국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수세에 몰리는 듯했다. 하지만 1980년대가 되자 미국은 정보화를 주도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소련의 경직된 시스템은 새로운 경쟁에 적응할 수 없었다. 미국은 민간의 혁신을 통해 승리했다.


동양의 굴기

20세기는 서양의 시대의 정점이자 그 끝의 시작이었다. 1970년대 초반에 미국 노동자는 중국 노동자보다 약 20배나 생산성이 높았고 중국이 세계 상품의 5%를 생산할 때 미국은 22%를 생산했다. 30년 뒤에 생산성은 7배 차이로, 생산 비중은 14% 대 21%로 좁혀졌다. 중국은 이를 위해 내륙 농촌의 교육과 의료를 축소했고 새로운 동양 핵심부로 떠오른 중국 동해안으로 1억 5천만 명이 이주했다. 이 저가 노동력 덕분에 중국은 미국을 이어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1992년과 2007년 사이에 중국의 수출량은 12배 증가했고, 대미 무역흑자도 약 13배 늘었다.

1950년대에 동양은 소련권과 미국권으로 분리되어 전적으로 서양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소련권은 사라졌고 중국이 미국의 새로운 호적수로 떠올랐다. 일본, 한국, 대만 같은 동양의 미국권은 21세기에도 미국권으로 남았지만 각종 산업에서는 종종 미국의 경쟁자가 되었다. 전반적으로 보아, 동양인은 19세기 서양인에게 후진성의 증거로 여겨진 거대한 인구와 학식 있는 엘리트들을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전환하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자신들의 목표에 부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결국 인종이나 문화 이전에 지리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이 현재까지의 상황이다. 만일 2010년에 모리스가 예측한 대로 동서양이 발전을 계속한다면, 에너지 획득(1일 섭취 칼로리 및 비식량 에너지원 사용량)·도시성(가장 큰 도시의 인구수)·정보 기술·전쟁 수행 능력을 종합해 도출되는 동양의 번영은 2103년경에 서양을 추월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보수적인 추정이며 추월은 2050년 이후 언제든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 시점에 걸맞는 어마어마한 번영은 지역적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 공산이 크다. 결국 21세기는 동양이 부상하는 시기인 동시에, 동서양의 개념이 유효할 마지막 시기인 셈이다.

image

(https://pzacad.pitzer.edu/~lyamane/ianmorri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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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가루인형
25/08/29 13:28
수정 아이콘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네요. 우선 추천 누르고, 퇴근해서 정독해 보겠습니다
25/08/29 14:12
수정 아이콘
선추천 후감상 하겠습니다. 초반 부만 읽었는데도 빠져드네요.
다크드래곤
25/08/29 14:1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5/08/29 15:23
수정 아이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짭뇨띠
25/08/29 14:22
수정 아이콘
천천히 읽겠습니다 good!
율리우스 카이사르
25/08/29 14:43
수정 아이콘
명청이 멍청하게 자기들 중앙집권만 노리면서 대양으로 나가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과 반대로 서양은 지형의 이슈 등으로 전쟁압이 세지면서 대양으로 나가는 노력을 했고 그것이 신대륙의 발견과 맞물려가며 격차가 빵 커져서.. 결국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까지 서양의 우위를 만들었다.. 뭐 이런 한줄 요약이 되는거 맞죠?
25/08/29 15:38
수정 아이콘
비슷합니다. 서양이 군비경쟁 때문에 해상무역을, 해상무역 때문에 지배구조를 혁신했고 군사력-상인-국가가 계속 서로를 강화했다는 것이죠. 다만 저는 명청도 특별히 멍청했다기보다는 지리적 환경에 알맞는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25/08/29 16:06
수정 아이콘
글쵸.. 현재의 합리가 미래의 불합리가 되는건 역사의 굴레같은거니.. ( 명청이 멍청은 제나름대로 유머를 한번 쿨럭.. ) 금요일 오후 월도 재밌게 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25/08/29 16:06
수정 아이콘
이런 양질의...
다 소화를 못하는게 아쉽네요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25/08/29 16:07
수정 아이콘
측면구릉지대에서 유래한 모든 사회를 서양(The West)으로 정의. 전통적으로 오리엔트는 서구로 정의되지 않았었죠. 요 근래 서구학계에선 오리엔트도 서구로 정의하나요? 이 학자만의 독특한 정의인지 아니면 학계의일반적인 정의인지 궁금하군요
아빠는외계인
25/08/2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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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왜 서양이 앞서가는가' 책에서 보면 서양과 동양의 정의를 어떻게 할것인지에 대해 꽤 많은 페이지를 할당해놓았니다. 기본적으로는 그 책 안에서만 그렇게 정의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책에서 논의하는 주제에 알맞게 설정한 정의인거고, 다른 주제를 다룰 때는 다른 정의가 더 적절할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놨던걸로 기억해요
25/08/29 17:20
수정 아이콘
서구 문명이 오리엔트에서 전파되었다는 사관과는 별개로 오리엔트를 서양에 포함시키는 건 학계의 일반적인 정의가 아니긴 합니다. 모리스는 기독교만 서양이라는 관념을 저서 내에서 여러 차례 비판했지만, 오히려 오리엔트를 서양에 넣어서 서양을 버프(!)시켰다는 불평을 받기도 한 것 같더군요.
폰독수리
25/08/29 16:24
수정 아이콘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깜짝 놀랐네요 잘 읽었습니다
25/08/29 17:20
수정 아이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5/08/29 16:55
수정 아이콘
교양서적 한권 압축해놓은 듯한 밀도네요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25/08/29 17:20
수정 아이콘
호평에 감사드립니다.
깃털달린뱀
25/08/29 17:2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결국 서양은 대서양과 신대륙이라는 자연환경에 의해 자연과학, 제도가 발전했고 동양은 사회안정을 위해 전통사상에 집중했다는 차이로 읽히네요.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긴 합니다. 중국도 청나라 시기쯤 되면 양쯔강 유역은 꽤나 발전 됐고 중국대륙 단위로 분업이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는데 자체적인 산업혁명이 불가능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고요. 단순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분위기가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확산을 막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5/08/29 17:33
수정 아이콘
우스게로는 그냥 사람 더 쓰는게 쌌다라는...이야기가 크크
25/08/29 18:21
수정 아이콘
실제로 아편전쟁이후 자유무역 시대가 열렸어도 기계로 뽑아낸 직물보다 청나라 직물이 더 쌋습니다...사람이 워낙 많으니 필요성을 못느꼈겠죠
어느한나라
25/08/29 19:53
수정 아이콘
세계 최대 경쟁력을 갖춘 인도 면직물이 가격경쟁력에서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중국 면직물이 경쟁력에서 상대가 될 수 있을리가요. 중국에서 충분히 팔리지 않앗다는 걸 단순히 중국이 더 저렴하였다는 논리로 발전시켜버려 퍼진 소리에 불과합니다..
애당초 세계 최대 면직물 생산기지는 원래 인도였고 18세기 후반 이후론 이 지위가 영국으로 넘어갔지요.
25/08/29 21:11
수정 아이콘
가격경쟁력이 상대도 안될정도였다면 아편전쟁이 두번이나 일어날 이유가요
제가 위에 말을 쓴 이유는 왜 동방이 왜 산업혁명을 못 일으켰냐에 대한 답입니다. 청나라의 특수성이 있었다는 의미로 쓴겁니다. 당연히 노동생산성 자체는 기계가 좋겠지요...

https://afe.easia.columbia.edu/special/china_1750_opium.htm?utm_source=chatgpt.com
어느한나라
25/08/29 21:21
수정 아이콘
청이 시장 개방자체를 거의 하질 않으니 애당초 판매 자체가 제대로 되질 않는데 그걸 노동력에 의해서 기계보다 더 저렴하다는 건 완전히 내용을 호도하는 거죠;; 가격 경쟁력에서 초기 산업혁명 시기에도 인도조차 버텨내지 못하는 판에 청의 면직물로는 영국과 경쟁이 될 수는 없었죠.
그리고 그건 당연히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청같은 엄청난 노동력을 갖춘 인도아대륙이 그 기계와의 경쟁에서 여지 없이 밀릴 수 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 마당에요..
사람들이 그 인구로 동아시아의 특수성을 말하면서 항상 인도는 망각하면서 말하죠;;
25/08/29 20:06
수정 아이콘
청나라는 경쟁국이 없어서 국가적으로 무역을 육성하지 않았고, 그래서 상공업자의 정치적·사회적 성장이 제한되었고, 그래서 상공업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미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민간에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큰 투자를 할 능력도 유인도 적을 수밖에 없죠. 다시 말해 사회적인 이유로 기술 발전과 확산이 막힌 것은 맞다고 봅니다. 다만 그 사회적인 분위기 내지는 환경도 더 근본적으로는 지리적 요인에서 파생됐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요.
아밀다
25/08/29 17:33
수정 아이콘
역사를 바꾼 환경전사 맹활약까지만 보고 일단 끊었습니다. 저때 몽골 통일이 안 됐다면 어땠을까... 문명과 전쟁 저도 보고 있는데 재미있어요.
다크드래곤
25/08/29 18:17
수정 아이콘
동서양의 발전의 굴기가 차이를 분석할 떄 있어, 여러요인들을 자주 분석되는데
역시 말씀주신대로 가장 중요한건 지형 및 기후라고 생각합니다.
사상이나 생각은 지리조건에 따라 선택압을 받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고요.

범선이 발전하고 무역이 발전하게되는 계기가 되는 것도 대부분 유럽의 변방 국가에 해당하고,
해당 분야를 발전 시키는 것이 다른 선택지보다 유리하니 선택압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고요.

과거 기술의 전파의 측면으로 보면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에서 초창기 문명의 조건을 만들었다 생각하기 쉽지만, 최초의 청동기는 유럽 발칸반도 지역의 [빈차문명]이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죠.
빈차 문명 주변에 큰 주석과 구리 노천광산이 있었다는게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생각되고, 그 빈차 문화 역시 기후변화로 쇠퇴한 것으로 보이고요.

어디가 더 빠르게 선진화 및 발전하는데에 동력을 문화나 사회적 분위기에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인간의 조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등등
이런 기조에서 보면 산업혁명 및 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이미 승리한 사상으로 결론을 내고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 저는 조금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완벽히 어떤 사상이 우월하고, 어떤 방식이 유리한지에 대한 평가를 내릴 시점은 아닌게 아닐까 합니다.
민주주의만 하더라도 도입 초기에의 효과와 지금의 민주주의를 보면 기능적 펑션이 상당히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진보하고 있을 때의 민주주의는 시너지 효과를 가져오지만 쇠퇴하고 있을 때의 민주주의는 더 끝없이 추락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입니다.
자본주의 역시 도입 초기와 지금의 미래의 부를 가져오는 형태인 버블이 많이낀 자본주의는 수많은 경제학자가 우려하는 붕괴가 찾아올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고요.

산업혁명이후, 자본주의 및 식민주의의 첫번째 위기는 1차 세계대전으로 대공황으로 표현되는 두번째 위기는 2차 세계대전으로 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난 100년간 세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모습만 보여졌습니다.
현재 찾아오는 위기는 전세계 국가가 극우화 되고 있으며, 포퓰리즘 및 내셔널리즘이 부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한 생각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상대 정당이 더 극단적인 사상으로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면 반대쪽 역시 더 극단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승리한 사상으로 평가받는 현대사회가 어떤 형태로 극복할 것인지 아직 너무나 불분명한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쓰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주제이다보니 내용이 너무 장황하게 작성했네요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두서없이 작성한 댓글의 생각을 정리해서 읽기편하게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5/08/29 18:23
수정 아이콘
(수정됨) 뭐 청동기의 핵심 광물인 주석이 워낙 귀해서 구할 수 없으면 시작자체가 안될...크크
그래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통해 청동기를 이용해왔는데 그게 박살나면...바로...사용불가...
다크드래곤
25/08/29 19:00
수정 아이콘
댓글 주신거 덕분에 제가 왜 두이야기를 이었는지 까먹었다가 생각낫습니다 감사합니다

과거 청동기 문명이 우리 인식보다 광범위한 교류 네트워크를 이뤘고 큰 문명이 무너질 땐 최전성기에 유지해온 인프라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무너진다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로마가 멸망하고 중세시대가 그랬었고 바다민족이라 불리는 고대문명 공백기도 그랬었고
동양도 몽골이후 급속도로 망가져버린 상업 및 화폐가 그 예시를 이야기하고싶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현대 문명이 이룩한 네트워크도 무너지기 시작하면 이 네트워크 덕에 유지해온 수많은 나라들은 혼란을 겪게될 것이라는 주장이라, 지금의 사회제도를 완성형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입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5/08/29 19:07
수정 아이콘
어차피 살아남은 자가 강한거라 현재는 승리했다 볼 수 있죠...크크
완성형이라 단정하는건 당연히 무리겠지만 현재시점에서 그럼 뭐 다른게 있냐면 없잖아요...
Quantumwk
25/08/29 19:02
수정 아이콘
(수정됨) 거의 리뷰논문 수준의 길이와 깊이네요. 유럽의 분열이 오히려 발전을 가져왔다는 얘기는 요새 꽤 많이 나오네요.
사부작
25/08/29 20:13
수정 아이콘
재밌는게 저자는 로마 붕괴 이후 서양의 발전이 한 붕괴이후 동양보다 느린 게 또 분열 때문이라고 하거든요.

조건에 따라 분열이 마이너스가 되기도 플러스가 되기도 한다는 거죠
닉네임을바꾸다
25/08/2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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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경쟁을 통한 발전도 어느정도 각자 체급이 되야하는데 로마 붕괴 직후엔 그게 안된다던가 그런건가 크크
Quantumwk
25/08/29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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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는 너무 발전이 안되있어서 분열이 된 국가 사이즈 정도로는 발전같은 걸 제대로 하기 어려웠고 르네 상스시기에는 어느정도의 역량도 쌓여서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여러가지 외부 요인들도 있겠고....
사부작
25/08/2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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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흥미롭게 읽은 책이었는데 덕분에 다시 정리해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저는 책 읽으면서, 아메리카 대륙이 없었다면 산업혁명도 (적어도 수백년 스케일에서는 ) 없었을 것인가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저자 논리대로라면 아마 그랬을 것 같아요.
사회발전지수가 250점이었나, 그 정도 천장에서 붕괴압력을 받아 후퇴하는 상황이 몇 번 더 반복되었을 수도 있다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25/08/29 20:38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는 반반 정도로 봅니다. 책에서 등장하는 첫 번째 ‘천장’이 사회발전지수 24점 부근이고, 두 번째 ‘천장’이 43점 부근이죠. 첫 번째 천장은 고가 국가를 완성시키면 깨지고, 두 번째 천장은 산업혁명을 해야(즉, 근력 대신 증기력을 사용하게 되어야) 깨지고요. 여기서 산업혁명이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14세기부터 서유럽의 군비경쟁, 해양진출, 상업혁명, 소비혁명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생겨난 제도와 시장 덕분에 기술자와 사업가들이 증기기관 발명에 투자할 유인도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해양진출의 유인을 처음 제공한 것은 인도였지만 그 도중에 알려진 아메리카 역시 나중에는 대양항해를 추동하는 두 축 중에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만일 아메리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근세 서유럽의 성장은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많이 느려졌을 겁니다. 그러면 18세기에 때맞춰서 산업혁명이 시작되는 것은 확실히 무리겠고, 같은 추세로 발전이 계속되었다면 19세기나 20세기에 시작되었을 공산이 크지요.

관건은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서양의 성장 추세가 꺾였을지의 여부인데, 저는 사실 별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책에서 나오는 세 번의 문명 붕괴(기원전 12세기, 기원후 4-5세기, 기원후 14세기) 사례를 보면 피해는 점점 적어졌고 특히 17세기에는 위기만 있었지 사회발전지수의 하락은 없었기 때문이죠. 따지고 보면 붕괴가 일어나는 이유는 인구가 엄청나게 줄거나 사회기반시설이 파괴되기 때문인데, 18세기에는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지도 않았고 사회기반시설을 파괴할 만한 대이주가 일어날 가능성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저의 느낌일 뿐이고, 산업혁명이 없어지면 경제침체로 인해 알아서 사회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성은 역시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부작
25/08/29 21:27
수정 아이콘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동양은 경제가 커지는 와중에도 사실상 19세기까지도 독자적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 후 100년 200년이 지나도 일어났을 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저자 논지대로라면 아마 안 일어났겠죠?)

아메리카 없는 가상의 서양은 18세기가 아니더라도 19, 20세기에는 산업 혁명이 아마도 일어났을 거라고 볼만한 가장 큰 이유는 뭘까요?

과학이나 기타 근대적 학문의 발전이 일어나고 있어서?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이 많아서? 아메리카는 아니더라도 인도항로 쪽으로 작지만 비슷한 효과가 누적되고 있어서?
25/08/29 21:58
수정 아이콘
유럽은 분열경쟁이 지속되는 한 아메리카가 없더라도 아시아 진출을 통해 작지만 비슷한 효과를 누적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 산업혁명은 시작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과학이나 기타 근대적 학문의 발전은 이런 사회적 변화에 딸려 오는 것에 가깝죠. 저는 반대로 동양에서 유럽식 세력균형과 분열경쟁이 지속되었더라도 군비경쟁, 해양진출, 상업혁명, 소비혁명은 똑같이 일어났을 것이고 산업혁명도 일어났을 거라고 보거든요(물론 동양은 오대십국 시기를 지나면 분열경쟁의 형세가 고착화될 타이밍이 너무 없기는 합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5/08/29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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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위진남북조가 300년이나 간게 당시 통치자들이 다 막장인거라서 아닌가요
본문의 고가국가 완성 이후에 통합으로 안되기엔 중국이란 땅이 그리 여러 국가들이 안정적으로 나눠먹을 지형지물이 없으니 크크...
사부작
+ 25/08/30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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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와 의견 감사합니다
니드호그
25/08/29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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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경쟁으로 인한 기술, 제도를 포함한 사회의 변화가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경쟁으로 인해, 경쟁에 따라가지 못해 뒤처진 사람들의 현대의 희생 VS 안정을 추구하여 희생을 줄이되, 그로 인해 발전에 뒤처진 탓에 후손들이 치루어야 하는 미래의 희생
어느 쪽을 택할까 하는 문제도 되는 것 같군요.
닉네임을바꾸다
25/08/29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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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건 그냥 결과론일거 같은데...
과도한 경쟁으로 공멸한다는 엔딩도 날 수 있는거였을테니...
25/08/29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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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 전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을 읽었던 기억이 솔솔 나네요 크크크 초반부가 더럽게 재미없고 로마, 한나라가 나올때부터 진짜 눈을 뗄수 없을만큼 재미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위에 댓글처럼 유럽이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행운이 없었다면 과연 동양을 손쉽게 앞질렀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산업혁명도 만약 유럽에 특히나 영국에 석탄이 풍부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결국 유럽, 특히 서유럽과 영국이 지리적으로 너무 운이 좋아서 서세동점이 되지 않았나 싶었어여
+ 25/08/29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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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은 재산권 이야기가 재미 있었습니다. 재산권과 그에 연장된 상공업 보호제도가 곧 산업혁명이고
그 예로 넓은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과 스페인중 재산권보호가 잘된 영국은 계속 발전했고, 스페인은 한때 잘나가다 말았습니다. 심지어 과거 식민지배했던 지역들도 스페인이 점령했던 지역은 현재도 경제적으로 뒤쳐진 경우가 많다는게 재미있었죠.

스페인보다 심했던 청나라의 문화(왕이나 권력자가 강탈해감) 생각하면 발명 한두개정도는 더 나올수 있어도 혁명이라고 부를만큼 연쇄적인 발전은 힘들테니 많이 뒤쳐지긴 했을것 같습니다.
VictoryFood
+ 25/08/29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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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총균쇠를 보는 듯 한 대서사시네요.

전 산업혁명이 서양에서 나온 것은 기술적인 이유보다 자본적인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리스크 분산을 말하는 거죠.

대양으로 배를 띄우는 것은 대표적인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인데 동양은 그 리스크를 정부가 온전히 짊어져야 했기에 지속적인 투자가 어려웠던 것에 비해, 서양은 보험과 주식으로 리스크를 분산했기 때문에 계속 시도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런 리스크 분산 경험이 산업혁명이라는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도 가능하게 한 거였구요.

그래서 전 서양의 침공이 없이 시간이 더 흘렀어도 동양 스스로는 리스크를 분산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산업혁명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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