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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5/27 08:15:36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runch.co.kr/@wgmagazine/159
Subject [일반] 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9) - 뒤늦은 깨달음, 경시제 유현 (1)
更始韓夫人_(更始).png
경시제 유현.

복수 실패자, 유현

녹림을 한나라 부흥군으로 조직하고 신나라와 맞서 싸우게 한 인물은 광무제의 형 유연이었다. 그러나 녹림이 황제로 세운 인물은 그가 아니라 또 다른 용릉절후의 자손, 유현이었다. 그가 황제일 때 연호가 경시(更始)[1]였기 때문에 시호 없이 경시제라 부른다. 처음부터 나약하다는 이유로 평림병과 신시병 등 용릉병 외의 녹림 제장들에게 선택을 받은 그를 통해, 유연의 빈 자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자.


그는 피동적인 사람이기에 기대를 받았다. 꼭두각시로,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평림·신시병 출신 대장들의 이권을 보장해 줄 인형으로. 그러나, 그의 삶은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용릉절후 가문의 계보도. 유현은 유수 형제와 팔촌 관계다.

경시제 유현, 자 성공(聖公)은 광무제의 족형으로, 그의 집안은 초대 용릉절후 유매에게서 갈려나온 광무제 집안의 다음 대, 2대 용릉대후 유웅거에게서 갈려나왔다. 용릉효후 유인의 동생 창오태수 유리가 바로 유현의 할아버지다. 광무제의 증조부 유리가 울림태수를 지낸 것처럼 유리도 교지자사부에 속한 군의 태수를 지냈으니, 형주에서도 거의 최남단에 봉해진 용릉후 가문은 형주보다 더 남쪽에 있는 교지자사부의 지방관을 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광무제의 할아버지 유회는 북쪽으로 올라와 거록군의 도위를 지냈는데, 유리는 창오태수였다는 점에서 형 유인이 남양군으로 이주한 기원전 45년 이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유리는 이때 창오태수로 남았을 수도 있지만, 그 전에 죽어서 같이 이주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유리의 아들이자 유현의 아버지 유자장(劉子張)은 신나라 때에도 생존했으나, 신나라 전 한나라 때에 따로 무슨 관직을 지냈다는 기록은 없다. 유자장은 남양군의 동쪽에 있는 평림(平林) 사람 하씨와 혼인해 유현을 낳았고, 모계를 통해 유현은 평림 땅과 인연을 맺었다. 유리의 자손들은 이 유자장 때에 큰 풍파를 겪게 된다.


신나라가 들어서면서 신나라의 관리들은 옛 한나라의 종실들을 침해하는 일이 잦았다. 유자장도 용릉 땅이 속한 채양(蔡陽)국의 다른 마을인 부정(父亭)의 정장에게 모욕을 당했다. 유자장은 이에 정장을 죽여 복수를 했다.

의외로 유자장은 이때 바로 변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10여 년이 지난 후, 정장의 아들은 보복으로 유현의 동생 유건(劉騫)을 살해했다. 이로써 유리의 자손과 부정장 가문 사이에 복수극이 시작된다.


유현 역시 아버지를 모욕하고 동생을 죽인 부정장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객을 모았는데, 뜻밖의 사건을 만나 인생이 꼬이게 된다. 후한서 유현전 주석으로 인용된 《속한서》에 따르면 이렇게 묘사된다.

하루는 유현이 모은 객들과 함께 당시의 지방 순찰관에 해당하는 유요(游徼) 직책을 맡은 사람을 불러서 술을 같이 마셨다. 술을 마시고 흥취가 돋아오르는데, 유현의 한 빈객이 유요에게 실언을 하고 말았다.


“아침에는 두 도위를 대접하고, 나중에 유요가 왔으니, 국 간이나 맞추게 해라.”


이 말을 들은 유요는 분노해 그를 사로잡아 수백 대를 때렸다.


유현전에서는 이 사건의 내용을 따로 서술하지 않은 채 ‘객이 범법했다’라고만 썼다. 당시 유요를 모욕한 것이 위법 사항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요의 분노가 풀리지 않았는지, 유현은 관리를 피해 외가가 있는 평림으로 도주했다. 관리는 유현을 잡지 못하자 대신 유자장을 체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현은 거짓으로 죽은 체하고, 사람을 시켜 상여를 고향인 용릉으로 보냈다. 관리가 유자장을 석방하자, 유현은 이 틈을 타 숨어버렸다.


그렇게,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한 유현의 협객 활동은 빈객의 뜻밖의 돌출 행동으로 말미암아 실패했고, 유현은 고향을 떠나 외가가 있는 평림에서 숨어 사는 신세가 되었다. 유현이 실패한 복수는 유현의 사촌 형제인 유현(劉顯)·유사(劉賜) 형제와 오촌 조카로 유현(劉顯)의 아들인 유신(劉信)이 이어받는데, 그 이야기는 유사 편에서 다루겠다.


유현의 청년기는 유연과 유수 형제와는 확연한 차이가 보인다. 유연과 유수 형제는 아버지를 일찍 잃었으나 숙부 유량에게 키워져 장안으로 유학해 유가적 소양을 쌓았다. 유연은 젊어서 호걸들과 교류하며 협객으로 활동했고, 유수는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 유현은 아버지가 있었으나 어떻게 양육되었는지는 기록이 없고, 대신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위한 활동에 치중이 되어 있다.

유현의 아버지 유자장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도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 일찍 죽었으나 남돈현령을 지냈다는 유연의 아버지 유흠과 견주어 보면 그는 관직을 지내지 않은 인물로 보인다.

그렇게 유현은 유연이나 유수와는 달리 이렇다 할 지도자의 소양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가문의 복수를 위해 세상에 던져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책임이 아닌 문제로 말미암아 실패했다.


특이한 점은, 정장을 죽여서도 처벌을 받지 않고 넘어간 유자장이 아들의 빈객이 유요를 모욕한 일 때문에 관에 사로잡혀갔다는 것이다.

정장의 아들 역시 신나라의 법에 호소하지 못하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자기 아버지의 원수 본인도 아닌 아들을 노려서 죽였다.

이렇게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고무줄처럼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장이나 유리의 집안이나 모두 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자력구제에 나서야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자장 본인이 처벌받지 않은 것은 단순한 개인의 범죄였고, 유현이 빈객이 지은 모욕죄에 연루된 것은 그가 이미 빈객을 모은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기 때문에 더 위험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유현은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힘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힘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는 유현의 인생을 보면서, 그가 배운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평림병 대장 진목

녹림군22년.png21 - 22년 무렵 녹림군의 동향. 유현이 있던 평림도 녹림의 거병지다.

서기 21년, 신나라의 정치가 혼란해지자 형주 강하군의 녹림산을 근거로 하는 도적인 녹림이 나타났다. 유현이 숨어 살던 평림도 이 바람의 영향을 받아, 22년 녹림이 둘로 나뉘고 그 한 갈래인 신시병이 남양군으로 들어오자 평림 사람 진목(陳牧)과 요담(廖湛) 등이 무리를 모아 또 다른 도적을 일으켰다. 이들도 녹림의 일원이 되어, 평림병(平林兵)이라고 한다.


후한서집해왕상전스크린샷.png후한서집해 왕상전에서 한서를 인용하면서 양목 대신 진목으로 쓴 부분.

이는 후한서 유현전에서 녹림의 기원을 설명한 것인데, 《한서》 왕망전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이에 따르면, 20년, 남군 사람 장패(張霸), 강하 사람 양목(羊牧)·왕광(王匡) 등이 강하군 운두현의 녹림에서 거병해 이들을 하강병(下江兵)이라고 한다. 그리고 22년에 하강병이 성하자 신시 사람 주유(朱鮪)와 평림 사람 진목 등이 무리를 다시 모아 여러 마을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한서집해에서 왕선겸은 혜동의 견해를 인용해 위의 한서를 인용할 때, 양목 대신 진목이라고 썼다. 이는 평림 사람 진목과 동일한 것이다. 비록 두 사람이 출신은 다르게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동일인물일 수도 있다. 양목이라는 이름이 이후에는 사라져버리는 것까지 고려하면, 이 양목은 진목의 오기일 수 있다.


한서 왕망전에서 하강병으로 나오는 왕광은 후한서에서는 하강병이 아니라 신시병으로 나오며 주유와 함께 행동한다. 따라서 한서 왕망전에 나오는 양목 역시 나중에 등장하는 평림병 진목과 혼동해서 여기에 등장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어쩌면, 처음에 녹림이 일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진목이 모종의 이유로 녹림을 떠나 자기 고향 평림에서 다시 거병했을 수도 있다.


물론, 양목이 진목이 맞는다 하더라도, 하강병의 일원으로 언급된 강하 사람 양목(진목)과 평림병의 수령인 평림 사람 진목은 출신지가 다르니만큼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진목이 22년 갓 평림에서 거병했든, 20년부터 이미 녹림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22년에 평림에 왔든, 진목 등의 거병은 유현에게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유현은 드디어 은둔을 깨고 평림병에 가담해, 병사들을 안위하는 군사 직책인 안집연(安集掾)을 맡았다.


신나라가 세워진 것이 9년이고, 유자장이 신나라 정장을 죽이고 10여 년이 지나서 유건이 살해되었으므로, 유현이 평림으로 달아난 것은 못해도 서기 20년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유현은 평림으로 도망가서 숨어 지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림병에 가담했을 것이다.


다른 용릉후의 자손들이 22년 용릉에서 유연의 거병에 호응해 용릉병의 일원이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현은 평림 땅에 따로 있던 연고로 평림병의 일원이 되었다. 이것이 다른 용릉후의 자손들과 유현의 길을 결정적으로 갈라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용릉후의 자손들과 따로 지내던 유현은, 평림병이 유연에게 호응하면서 다시 일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유연 등이 진부와 양구사를 격파한 후, 유현은 ‘경시장군’(更始將軍)으로 불리게 된다.


경시장군

경시라는 단어는 전한 때에도 사용되었으며, ‘여민경시’(與民更始) 즉 백성과 함께 새롭게 한다는 등의 활용 예가 있다. 인명으로도 쓰여서, 여태후 일족 중에 제후의 반열에까지 오른 여경시(呂更始), 원제 때의 유학자 윤경시(尹更始) 등이 있었다.


신나라에서는 나라 이름부터가 새롭게 한다는 신(新)이라서 그런지 장군 중에도 경시장군(更始將軍)이 있었다. 신나라가 처음 세워졌을 때 위장군 진풍(甄豐)을 경시장군으로 삼았고, 경조 사람 왕흥(王興)을 대신 위장군으로 삼았다고 하므로 경시장군은 위장군 위에 세워진 장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경거장군(輕車將軍) 손건(孫建)을 입국장군(立國將軍), 경조 사람 왕성(王盛)을 전장군(前將軍)으로 세워, 이 넷을 묶어 사장군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나라가 세워지기 전에는 왕망의 측근으로 높은 관직에 있던 진풍은 신나라가 세워질 무렵 왕망과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왕망은 진풍을 대사공에서 내쫓고, 부명의 글을 핑계 삼아 떡장수 출신인 왕성과 같은 반열에 두었다. 진풍의 아들 진심(甄尋)이 부명을 이용해 자신을 왕망의 딸이자 전한 평제의 황후였던 황황실주의 새 남편감으로 선전하자, 왕망은 분노했고, 진심은 달아났으며 진풍은 자결했다.


진풍이 자결한 이래 경시장군은 꽤 오랫동안 폐지되어 있었고, 대신 영시장군(寧始將軍)을 두었다. 그러다가 15년(천봉 2년) 영시장군이 된 염단을 19년(천봉 6년)에 경시장군으로 도로 고쳐, 경시장군이 부활한다. 이는 당시 이미 신나라 전역에 도적이 들끓고 있자 왕망이 6년마다 원호를 고치는 제도를 만들고, 《역경》에서 “날마다 새로워짐을 일러 성덕이라 하고, 끊임없는 생성을 역이라 한다.”라고 하는 것에서 인용해 새롭게 한다는 뜻의 경시를 다시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백성들의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경시장군 염단은 이후 익주를 쳤으나 이기지 못했고, 22년(지황 3년)에는 동방에서 신나라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적미라는 농민 반란을 일으키자 태사 왕광(王匡 – 녹림의 왕광과는 동명이인)과 함께 진압하러 출정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끈 병사가 심히 방종한 나머지, 동방에서는 이런 말이 돌았다.


“차라리 적미를 만날지언정, 태사를 만나지 말라! 태사는 오히려 가하나, 경시는 우리를 죽인다!”


그리고 이해, 왕광의 무리한 용병술로 패배했을 때, 왕광은 도망쳤으나 염단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이렇게 신나라에서 상서로운 뜻을 담고 만든 장군인 경시장군은 비웃음이나 공포의 대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현은 그럼에도 경시장군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왕망이 옛 경전의 뜻을 가져와 만든 말이고, 또 말 자체도 ‘고쳐 시작한다’라는 뜻으로 끊어진 한 왕조를 복구한다는 의미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원래 왕망은 이 ‘고쳐 시작한다’라는 말을 원호를 고치는 일에 적용한 것이었겠지만.


《동관한기》에서는 유현이 경시장군을 일컬었다고 하고, 《후한서》에서는 유연 등 녹림의 수뇌부에서 유현에게 경시장군이란 칭호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현이 황제가 되는 과정은 후한서뿐만 아니라 동관한기에서도 유현이 전혀 주체적이지 않은 것으로 나오므로, 유현은 스스로 뚜렷한 자아가 있어서 자기 뜻대로 자신을 부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며, 그가 진목 휘하의 군관에 불과하다는 것도 이런 추론을 더 강화한다. 그는 녹림의 수뇌부 허락 없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청대의 학자 왕선겸은 유현이 경시장군이 되고, 나중에 경시를 연호로 쓰는 것을 왕망의 장군 칭호를 그대로 갖다 썼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경시라는 칭호는 고전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 표현으로, 왕망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폐기되지 않을 수 있었다.


유현에게 경시장군이라는 칭호를 준 까닭은, 그가 유일하게 유연 밑에 속하지 않은 용릉절후 가문의 후손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미 주천대장군을 일컫고 있는 유연을 더 높여주는 것은 평림병이나 신시병 출신들에게는 위협적이었다. 유연의 일족 중에 평림병과 연고가 있는 유일한 인물인 유현이 용릉병과 평림·신시병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갈등을 중재해 줄 것으로 주목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현은 경시장군이 된 것부터 본인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닌, 타인의 객체로 이용되는 신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각주

[1] 경시(更始)란 ‘고쳐 다시 시작한다’를 뜻하며, 국어사전에도 나온다. 更은 ‘고칠 경’, ‘다시 갱’ 두 가지 훈음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고칠 경’에 해당한다. 중국어로도 경시에 해당하는 “gēng shǐ”로 읽는다.


사진 출처

그림 1. File:更始韓夫人 (更始).png. 文選樓叢書+新刊古列女傳.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림 2, 3. 자작.

그림 4. archive.org 後漢書集解(十) 9페이지 (https://archive.org/details/02077631.cn/page/n7/mode/2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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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페인
25/05/27 10:14
수정 아이콘
이렇듯 끌려다니는 성정이 난세에 많은 이들에게 죽음과 고통을 안겨주었죠. 종국에는 본인도 쓸려나갔지만 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계층방정
25/05/27 14:35
수정 아이콘
비슷하게 옹립된 유분자에 비해서는 자아를 드러낼 수 있는 편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비극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몽키매직
25/05/27 13:11
수정 아이콘
경시제가 몰락하지 않는 선택지는 뭐였을지 궁금하긴 해요.
처음에 추대될때 손사래 치는 거? 적당한 시기에 선양하는 거?
상황이 어떻게 되든 권력을 넘겨주면 이후에 제거되었을까?
계층방정
25/05/27 14:36
수정 아이콘
https://www.pgr21.com/freedom/104207#5074327
이 댓글에도 나오는 의견인데, 유연을 포섭해서 자신의 근위세력으로 만들 수 있었다면 자신을 옹립한 평림·신시병 세력과 균형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Liberalist
25/05/27 15:30
수정 아이콘
위 링크의 댓글이 제가 쓴 댓글인데, 저는 유연 안 죽이는게 유일한 선택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유연 적당히 품고 갔었으면 신시, 평림병 세력 적당히 견제하면서 걍 그대로 황제 했어도 됐어요.
Liberalist
25/05/27 15:31
수정 아이콘
극히 드문 예외이기는 합니다만 떠밀리듯 등극한 인사가 뒤늦게 각성하는 케이스도 있는데, 불행히도 유현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고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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