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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8/30 13:48:26
Name 초모완
Subject [일반] 수건 돌리기


납득이 안 됐다.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 수건을 누군가의 뒤에 놓고 가서 다시 한 바퀴 원을 돌아올 동안 내 뒤에 수건이 있는지 모른다는 게. 아니, 어떻게 내 뒤에 수건이 있는 걸 모를 수가 있지?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이 목에 담 와서 고개가 안 돌아갈 일 없을 것이고, 행여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해도 손을 뒤로 휘휘 저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해가 안 갔다. 난 내 뒤에 수건이 오면 술래를 쫓아가서 꼭 잡아야지. 다짐했다.

국민학교 일 학년 때 한 이 생각은 사 학년이 될 때까지 이뤄질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내 뒤에 수건을 놓아야만 시도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때쯤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누군가의 뒤에 수건을 놓는 건 무작정 던지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는 사람 뒤에 놓는다는 걸. 이걸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순 없어도 대충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고개를 돌리지도, 손을 뒤로해 뒤적거리는 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나에겐 그 행동이 무의미했고 오히려 우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누가 나에게 수건을 준다고.


미정이는 갈색 머리의 피부가 뽀얀 아이였다. 발그레한 뺨은 그 아이의 하얀 피부에 대비되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 아이와는 일 학년 삼 학년 오 학년 같은 반이었다. 삼 년이나 같은 반이었지만 안녕하고 인사 한번 해본 적도 없었다.

오 학년 가을 소풍 때였다. 이번에도 그 재미 없는 수건돌리기를 한다고 풀밭에 오십 명이 넘는 학생들이 똥그랗게 앉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오류겐을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왼손으로 나뭇가지를 쥐고 승룡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반 아이들이 날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봤는데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모든 아이들이 날 지켜보고 있었다. 나뭇가지로 오류겐 쓰는 거 들켰나? 싶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잡았다."

고개를 돌려 올려보자 갈색 단발머리 미정이가 날 잡기 위해 전력 질주한 것처럼 숨을 쌕쌕거리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뒤를 보자 정말 수건이 있었다.

왜?

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왜 나에게 줬지? 세게 달리다 보니까 자신의 속도를 계산하지 못해서 내 옆 아이에게 줄 걸 나에게 잘못 떨군 건가? 엉덩이로 이름을 쓰는 벌칙을 하면서도, 오락장에서 켄을 골라 오류겐을 쓰면서도 왜 나에게 준건가 라는 의문이 내 머릿속을 뒤덮었다.


우연히 미정이랑은 중학교도 같은 곳으로 왔다. 중학교 이 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물론 그때까지도 그 아이와 인사해 본 적은 없었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이 미정이를 보고 너 머리 염색하고 다니냐며 발랑 까졌다며 뭐라고 한 적 있었다. 난 어려서부터 봐왔기에

"선생님. 걔 원래 갈색 머리예요. 옛날부터 그랬어요."

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날 째려봤다. 내가 인기는 없었어도 그래도 공부는 좀 했었어인지 선생님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 학년 겨울 방학이 끝나고 삼 학년 올라가기 직전, 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이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 왔다. 몇몇 활발한 아이들은 초콜릿을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주곤했다.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날이었기에 오늘은 기어코 용호권 초필살기를 쓰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왼손에 샤프를 쥐고 커맨드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내 책상 위로 초콜릿이 날아들어 왔다. 미정이가 지나가던 개에게 소시지 던져주는 듯한 표정과 함께 말을 건넸다.

"초콜릿을 너무 많이 가지고 와서 남았어. 너 먹어."

아니, 줄려면 곱게 주든가 하지. 저따위 표정과 말투는 또 뭐람. 투덜대면서도 허겁지겁 초콜릿 까먹는 나였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흘러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교도 입학하고 군대도 가게 됐다. 첫 휴가 나오는 날 아직 군대 안 간 친구를 불러 술 한잔하러 가는데 이 친구가 날 보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시커먼 얼굴 더 쌔카메 져서 무장 공빈 줄 알았다며 하루 종일 놀려댔다. 아휴. 미필새퀴. 너같이 촐싹대는 놈은 군대 가면 죽는다. 임마. 서로 실랑이하며 술집 문을 열었다. 테이블 다섯 개 남짓한 작은 술집이었다. 문을 열고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예의 그 갈색 단발머리, 흰색 패딩을 누렇게 보이게 만들 정도로 하얀 얼굴, 발그레한 두 뺨. 미정이었다. 그 아이도 날 보더니 그 큰 눈 더 크게 뜨며 입으로는 어? 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이상의 인사는 없었고 서로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친구와 마주 앉아 서로의 치부를 들추며 술을 먹다 미정이 쪽으로 고개를 한 번 돌려 보았다. 어느샌간 미정이 일행은 자리를 떴는지 그곳은 비워져 있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안녕. 인사라도 해볼걸 그랬나.

적당히 술에 취해서 술집을 나왔다. 친구 녀석 먼저 보내고 걸어갈까 택시탈까 수중에 있는 돈을 계산하고 있을 때 누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미정이였다. 같이 있던 친구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녀 혼자 있었다.

"저… 혹시 나 기억해?"

가끔 내 행동을 나도 이해 못 할 때가 있는데 이때도 그러했다.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난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누구…더라? 를 시전했고 미정이의 웃는 얼굴이 실망하는 표정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곤 내 행동이 실수였음을 알게 됐다.

"아. 너 해님 국민학교 일 학년, 삼 학년, 오 학년 같은 반이었고 달님 중학교 이 학년 때 같이 반이었던 미정이 아니니?"

그러자 환하게 웃는 그녀였다. 술에 안 취했으면 한 잔 더 하잖다. 이미 화장실 가서 거울 보며 너 이 새퀴 술 겨우 이거 먹고 취할 거야? 라며 나 자신을 꾸짖은 후였지만 최대한 안 취한척하며 그녀를 따라나섰다.


안녕하고 인사 한번 해본 적 없었던 학창 시절 그 아이와 스무 살이 넘어 우연히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니 괜스레 웃음만 나왔다. 미정이도 나름 기분이 좋았는지 많이 웃어 주었다. 그런데 새벽 두 시가 되어도 그녀는 집에 갈 생각을 안 했다. 조심스레 집에 안 가도 돼? 라고 물었지만 늦는다고 얘기했으니 괜찮다고 대답하는 그녀였다. 세시를 지나 네 시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는 그녀를 내가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 그녀를 태우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지금껏 지었던 미소와는 조금 다른 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왜인지 모르게 허전했다. 아. 전화번호 안 받았네.





그 이후로 시간이 흐르고 흘러 강산이 두 번 변했다.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 집에 가기 전 쇼핑몰에 들렀다.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내 뒤에 따라 들어온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매가 조금 처지고 생기 넘치던 하얀 피부가 조금은 바래졌지만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왼손엔 그녀 어렸을 때 모습을 꼭 닮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도 내 눈을 봤지만 이내 눈길을 아래로 돌렸고, 그녀를 닮은 딸과 곰 같은 남자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는 무거운 침묵을 싣고 움직였고 잠시 후 어색한 공기를 토해내듯 문을 열었다.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나섰고 조그만 여자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한참 동안 날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한 번 뒤돌아 내 얼굴을 마주할까 싶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엄마 손을 꼬옥 잡은 소녀가 엄마를 툭툭 치며 뭐라고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갈색 머리의 그 엄마는 허리를 숙여 여자아이의 말을 경청하였고 이내 두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비록 옆모습이었지만 웃는 모습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 저 뒤에 아저씨 되게 못생겼어.'
'엄마도 알아.'

라고 말한 듯 싶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아내가 빨리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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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은준은찬아빠
25/08/30 16:58
수정 아이콘
카니발의 '그 땐 그랬지' 노래가 어울리는 글이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실제상황입니다
25/08/30 18:04
수정 아이콘
잘 쓰시네요. 모른 척했을 때는 진짜 욕할 뻔했습니다.
내일은주식왕
+ 25/08/30 21:22
수정 아이콘
그리고 이걸 보는 나는 웃으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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