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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26 00:54
그들의 행복했던 시간
소설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주인공은 몇 되지 않는다. 소설의 이야기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이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진정성을 획득하지만, 이야기의 가속도를 붙여 독자를 등떠밀기 위해 주인공들은 사소한, 그러나 때로는 치명적인 결핍 속으로 내던져진다.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일들'에 둘러싸인 채 시작해야 하는 것이 주인공의 역할이며,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상투적인 건 싫다'고 소리치는 유정에게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행복한 소설 속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느 가난한 형제의 처절한 생존을 어린 시절부터 보여주는 블루노트와, 여유롭게 살아왔지만 세차례의 자살 실패로 시작하는 유정의 삶이 처음 교차하는 곳은 사형수 면회장이다. 판단되고 강제된 죽음과, 시도되었으나 실패한 죽음. 죽음을 향한 삶과 삶을 향한 죽음이 정면으로 십자가를 긋고 지나친다. 사형수 윤수는 블루노트에서 동생이 좋아한 애국가를 통해 이를 부른 적이 있는 유정을 만나게 된다. 유정은 윤수의 범죄 기사를 보고 그를 꺼리지만, 정신병원을 운영하는 사촌오빠와의 대화를 통해 결국은 둘다 비슷한 과거를 겪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죄를 지었거나, 자신에게 죄를 지은 어떤 것들이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영화처럼 아름다운 대화와 사랑과 관용과 용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페이지 너머에서 결말지을 수 없는 어떤 이야기들에 대한, 소설에 대한 주인공의 반란, 상투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정의 반란, 그러나 진압된 반란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제목대로, 그들의 '행복했던' 시간은 서로에게 저질러진 죄와 상처들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견고한 감옥과, 용서라는 디시플린, 혹은 독트린의 이름으로 모든 문제를 안고 사라져 간 윤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죽음은 원죄를 대신해 인간에게 결말을 선사한 예수의 십자가일 수는 없다. 차라리 옛날 동화의 'happily, ever after'를 위한 생략에 가깝다. 페이지 저편에서 윤수에게 무죄를 선고한들, 작가는 어쩔 수 없이 페이지 안에서 윤수에게 사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일어날 만한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현실이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윤수와 유정에게는 돌아갈 곳에 앞서, 돌아갈 문제들이 있다. 죄와 삶과 죽음을 넘어서, 현실의 문제는 그보다 무겁다는 것을 작가도 우리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애초에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 결국 그들의 '사랑'이란 것은 공간의 제약을 통해 확보된 안정적 무대와, 시간의 제한을 통해 예정된 결말이 보장되기에 안심하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소설에 불과하다. 사랑에도 어떤 방향성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면, 그들의 사랑은 퍽 일방적인 관계였다. 면회가 보장된 이성과, 안전이 담보되는 호기심의 객체. 사실 유정이 강간을 통해 윤수에게 굳이 관심을 한정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건 한정된 시공을 아껴쓰기 위한 카메라워크에 불과하다. 실제 세명을 살해한 사람은 아직 살아 있으며, 감옥에 있을 위치도 아니니 직접 찾아가 다시 시작한다면 어떨까? 윤수의 용서와 유정의 사랑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니라, 필연이 담보된 우연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소설에 의해 강제로 멎는 핀트는 사형을 위해 유보된 시간 중 목요일의 짧은 순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공지영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소설에 대해 "사형수를 미화한다고요? 그들을 만나보신 적이 있나요?” 라고 묻는다. 하지만 정작 이 소설에 진정한 의미의 사형수는 없다. 소설의 가정 하에 어설픈 수사로 억울한 누명을 쓴 수형자가 있을 뿐이다. 죄를 지은 자와 형을 받는 자가 제도를 통해 격리되어 있다. 그녀는 어떤 사형수를 만났던 것일까. 그녀는 사형 제도와의 가벼운 좌담회와, 죽음을 통한 격리의 피안에서 이루어지는 면회를 착각한 것은 아닐까. 이미 그녀에겐 절대가난을 두고 기형도가 던져준 눈빛의 부채, 80년대와 노동운동을 팔아넘기고 짊어진 부채가 채무초과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이 그녀에게 면죄부로 작용하기보다, 새로운 차용증 한 장 더 써내린 결과가 되지 않을까.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거대담론에서 사형이 실시되고, 행복한 시간이 남았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80년대의 담론을 송두리째 거세하고 가다듬어 보기좋게 포장한 뒤 팔아넘겼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이야기에 절제수술을 행한 뒤 캐릭터를 소비할 뿐이다. 이것이 미화의 본질이다. 이렇게 무시되고 왜곡되고 생략된 소설의 무리한 가정은, 사랑에 용서와 사형제 폐지를 같이 집어넣는 작가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사랑을 시켜야하니 만든 공통점이 자살과 살인인데, 사형은 폐지되야하니 결국 다른 사람을 시켜 죄를 억울하게 빌려오고, 감옥이란 무대가 아름다워야 하니 범죄자 둘은 용서받고 멀쩡히 돌아다닐 수 밖에 없다. 그들의 행복했던 시간은, 그 둘 사이에서만 끝나야 한다. 윤수가 용서한다고 살인자 친구가 어디서 사랑을 베풀고 있지는 않을 것이고, 유정이 혼자 상처를 곱씹고 있기로서니 사촌의 범죄자 성향이 사라지진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형제의 폐지는 '사랑과 용서'의 감정이 아니라, 소설 속에선 항상 없는 것처럼만 보여왔던 사회 제도가 대신 해결할 문제이다. 음... 저도 집에 와서 프로리그 재방 보면서 생각나는 대로 쓴 거라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저 책도 영화도 본 적이 없어서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지만, 공지영씨 소설인 듯 해서 그냥 써야 할 만큼만 썼어요. 마지막 문단은 결말인 만큼 제 3자인 제가 손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선택에 맡겨둡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09/05/26 01:58
판님// 세상에; 그냥 고기잡는 법 한두마디 조언해 주시면 됐는데, 상어 한마리 직접 낚아서 보여 주시는 감동이네요. 월요일 밤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려요. ^^ 기본기 차이란게 참 무섭단게 느껴지네요. 쓰신 글 보니까 제가 정말 책을 읽었었는지 의심스워져요.
혹시 다시 보신다면 아시겠지만, 여기 올려놓고도 두문단 정도 새로 쓰고 다듬느라 시간을 보내서 제출은 본문 수정한 글로 할 예정이에요. 이미 저를 알만큼 아시는 교수님이라 판님께서 써주신 거에 한문단만 빌려와도 구분하실 수 있겠어요. 평소 때라면 자유게시판에 감상문으로 올려보고 싶은데, 날이 날인지라 조용히 질게에 올린 걸 이렇게 정성스레 답해주실줄 몰랐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09/05/26 02:21
아닙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사실 제가 이 책도, 영화의 내용도 모르기 때문에 루나님의 글이 훨씬 더 정확할 겁니다. 그냥 공지영 씨의 책이란 데서 힌트를 얻어서 써내려간 것에 불과하니까, 굳이 말하자면 감상만을 읽고도 스토리텔링의 얼개를 짜맞출 수 있게 써주신 루나님의 능력인 겁니다. 좋은 성적 거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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